특별기획 | 경허를 다시 읽는다

1. 글을 시작하며

경허가 입적한 지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출가자로서 최고의 선사로 존경받으며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고, 환속한 이후 재가자로서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분이다. 많은 이들이 경허의 불교가사에 감동받았고, 많은 이들이 경허를 소재로 쓴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수행에서는 한 치의 게으름도 허락하지 않는 준엄한 자세로 임했고, 대중 속에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대자유인으로 살았던 분이다.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위에서 고뇌했던 구한말의 고독한 지식인이었다.
그동안 많은 글 속에서 경허가 등장하였다. 근대 불교를 다룬 역사, 철학, 문학에서 경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경허가 남긴 궤적을 연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따졌다. 또 그가 남긴 시구(詩句) 하나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철학적 의미와 문학적 수준을 음미하고자 하였다.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그 위대성을 본받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비판적 시각도 제시하여 경허를 흠모하는 이들과 갈등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는 경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경허를 이해해 온 글쓰기는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졌을까? 경허에 대한 연구는 어떤 분야에서 어느 수준까지 이른 것일까? 필자가 찾아본 바로는 경허 관련 박사논문이 2편, 석사논문이 9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40여 편에 이른다. 그 외에 일반 잡지에 기고된 글이나 저서들까지 합치면 연구 성과가 적다고 말할 수 없다. 여전히 그의 가르침이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그간의 연구 경향을 분석하여 새로운 방향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근대 불교 연구를 위한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이 글에서는 경허 관련 자료와 사실의 문제, 종교·철학과 역사와 문학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분석, 그리고 경허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에 대하여 논해 보고자 한다.

 

2. 자료와 사실

경허와 관련된 자료는 한암중원(1876~1951)의 〈행장〉과 한용운(1879~1944)의 〈약보〉 경허가 남긴 여러 시문(詩文)을 엮은 《경허집》 경허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선문촬요》 그리고 잡지 등에 실린 경허 관련 일화 등이다.
경허의 글을 모은 《경허집》은 세 차례에 걸쳐 편집되었다. 첫 번째는 한암이 1931년에 만공월면(1871~1946)의 부탁을 받아 〈선사경허화상행장〉을 짓고 경허의 시문을 필사하여 첨부한 것이다. 즉 한암 필사본이다. 두 번째는 1943년에 만해 한용운이 선학원에서 《경허집》을 활자로 간행하고 그 뒤에 〈약보〉를 첨부한 것이다. 즉 선학원본이다. 세 번째는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가 1981년에 번역본 《경허법어》를 간행하면서 한암의 〈행장〉을 수록하고 경허의 법어, 시, 일화 등을 추가한 것이다. 근래의 경허 연구는 대부분 《경허집》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자료들 가운데는 경허의 출생년이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시문은 경허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서 이들 자료가 모두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먼저 출생년과 관련하여 한암은 1857년(철종 8) 4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고, 만해는 1849년(헌종 15) 8월 24일에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김지견 박사는 경허가 찬술한 〈서암화상행장〉의 글을 토대로 1846년생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1846년 혹은 1849년 설을 따르면서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자료의 한계 때문이다.
또 《경허집》에 수록된 글 가운데 경허의 창작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령 〈행장〉에서 경허의 열반송은 경허의 창작이 아니라 당나라 반산보적의 게송에서 발췌한 것이다. 즉 경허의 열반송 “心月孤圓 光呑萬象 光境俱亡 復是何物”은 반산보적의 게송 “心月孤圓 光呑萬象 光非照境 境亦非存 光境俱亡 復是何物”에서 두 군데를 뺀 것이다. 한암은 만공이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함경도 갑산 웅이방에 가서 다비하고 임종게를 가져온 것을 〈행장〉에 기술하였는데, 그 게송은 경허의 창작이 아니었다. 물론 임종게라고 해서 반드시 창작일 필요는 없다.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경지에 어울리는 시를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허의 창작 게송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문만 가지고 경허의 선사상을 따져보는 이들에게 조심스러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번역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경허의 선사상을 왜곡할 가능성도 지적한다. 선시(禪詩)는 그 심오함으로 인해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시의 이면에 있는 작자의 경지를 읽어내어야 하므로 번역은 역자의 수준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번역이 올바르지 않으면 글자를 통한 경허의 이해는 왜곡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연구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연구자 가운데 기존의 번역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경허집》 다시 읽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지적과 새로운 번역은 여전히 진행 중이므로 그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분석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즉 기존의 경허 이해보다 발전된 논리적 근거에 의거해 경허 선사상을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한편 《선문촬요》의 편자가 과연 경허인가 하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교·정토가 융합되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선문촬요》를 편찬했을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새로운 주장 앞에서 근거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선문촬요》 상권은 1907년에 운문사에서, 하권은 1908년에 범어사에서 판각되었는데 1904년까지 범어사에 주석했던 경허를 편자로 추정하여 왔다. 그런데 만약 이 책의 출간이 경허와 상관없다고 밝혀진다면 경허 사상에서 언급되어 왔던 “선의 정체성 확립”은 부분적 수정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이 외에도 경허에 대한 일화와 평가들을 쓴 일제 강점기의 기록이 있다. 이능화는 1918년에 펴낸 《조선불교통사》에서 경허에 대해 “그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음행과 살생을 범하는 일까지도 개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김태흡(1899~1989)은 1938년에 《비판》이라는 잡지에 〈경허대사 일대평전〉을 연재했다. 그는 수년 동안 경허의 행적을 조사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경허가 주색(酒色)에 빠져 있었던 여러 기행(奇行)들을 소개하였다. 한암도 〈행장〉에서 경허에 대해 “화상의 오도(悟道)와 교화 인연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만약 그분의 행리(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 음식과 성색(聲色)에 구애를 받지 않고 호탕하게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화상의 법화를 배움은 옳지만 화상의 행리를 배우면 안 된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글을 통해 볼 때, 경허의 주색은 사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러나 소문이나 전언을 기록한 것일 뿐 사실이라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가령 《경허집》의 〈중노릇 하는 법〉이라는 글에서 경허는 스스로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음행은 정신이 산만해지고 애착이 되니 상관하지 말 것이요.”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경허의 주색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관계의 상반된 주장은 여전히 경허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로서는 자료적 한계 때문에 진실을 알기는 어렵겠지만 사실로 인정해야 할 부분과 조사선을 중흥한 그의 공적 사이에 인식의 괴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경허의 글과 행적은 경허를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경허의 것으로 오해된 것이 있다면 경허의 사상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의 파악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확정된 사실에 기반하여 주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는 경전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지만 학문은 문헌의 사실에 근거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에서 본다면 경허 관련 자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 제기는 사실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3. 사상과 문학, 그리고 시대적 위상

경허에 대한 연구는 여러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종교·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측면에서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각각의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역사학자가 사상을 논하기도 하고, 철학자가 문학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의 논문에서 철학, 문학, 역사적 측면을 모두 다루기도 한다. 이제 다시 이를 해체하여 각각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연구 경향을 살펴보자.
먼저 종교·철학적 측면을 살펴보자. 불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의 경허 연구는 대체로 그 사상의 위대성을 밝히는 호교적 태도를 견지해 왔다. 경허의 선사상을 규명한다고 하지만 경허를 존경하는 법제자들은 경허의 사상이 어떻게 전통과 연결되고 또 어떻게 당대 최고의 사상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경허의 선사상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위대하지 않은 어떤 상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인물이든 상황이든 경허의 위대성을 높여줄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경허의 위대성을 치켜세우기 위해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거론한다. 어느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가지고 경허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당시의 상황을 “불법의 혜명은 사라지고 온갖 기복적 형태의 신앙이 난무하던 구한말 격변의 말세적 상황” “배불정책의 영향으로 종단과 종지가 사라지고 수행납자의 청정한 풍토가 쇠진한 시대” 등으로 표현하고, 바로 이런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선사가 바로 경허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당시를 말세적 상황이라거나 청정한 풍토가 쇠진한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경허가 살았던 때가 암울한 시대였음을 증명해야 한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서구 문물과 종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렸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불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말세적 상황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으며 청정한 풍토가 쇠진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오히려 지금이 더 타락한 말세적 상황이 아닌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논리적 설명 없이 경허의 위대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호교적 선입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경허 선사상의 어떤 점을 훌륭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경허의 사교입선(捨敎入禪),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쌍수(禪淨雙修), 간화선(看話禪) 수행 등을 말한다. 경허는 동학사에서 23세에 이미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강사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옛 은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전염병을 목격하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겠다”며 교학을 버리고 화두를 들고 참구하였고, 마침내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간화선법을 가르치면서 정혜(定慧)를 균등히 관조할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경허의 선사상을 사교입선이나 정혜쌍수로 설명한다. 그러나 역대로 임제선풍의 선사 가운데 정혜쌍수나 간화선을 부정했던 선사가 있었던가. 경허와 동시대를 살았던 선사들도 화두를 들고 참구하였고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다. 이런 설명으로는 경허의 주장이 전통적 선법의 되풀이에 다름 아니었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오히려 그가 위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가장 적합한 선(禪)적 용어를 구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경허가 남긴 글만 가지고 경허 선사상의 위대성을 도출하려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호교론적 연구는 경허의 선사상이 미친 영향이나 시대적 위상을 밝히는 데는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경허의 법제자들이 근대 한국 불교계를 중흥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선입관을 배제하고 보다 논리적 근거로써 경허의 선사상을 설명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분석이 호교론적 연구의 부족함을 메우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허는 23세에 이미 동학사 강사로 명성을 떨칠 만큼 학문적 재능이 남달랐다. 간화선 수행 이전에 이미 많은 경전을 읽었고 참선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선시(禪詩)에는 학문적 넓이와 더불어 선적 깊이가 스며들어 있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한시들과 가사는 시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므로 그 글들을 깊이 음미해보면 경허 사상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허의 글을 분석한 연구 가운데 그 사상의 본질을 ‘법성사상’으로 읽어낸 연구가 발표되었다. ‘법성’이라고 하면 화엄학에서 ‘무명’ 속에 간직된 ‘진여’를 말한다. 경허가 “순간순간마다 ‘다함이 없는 보배 곳간’이 나의 육체 위에서 작용하고 있다.” “마음의 본원을 반조하라.”고 말한 지점을 포착하여 경허 사상의 본질을 ‘법성사상’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법성을 반조하기 위하여 ‘화두 들기’ 수행을 권하였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법성사상이 내용이고 화두 들기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의 타당성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화엄교학을 든다. 경허가 교학을 버리고 선을 수행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화엄교학적 바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화엄교학과 더불어 널리 퍼져 있던 정토의 영역으로도 경허를 재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서도 경허의 정토관은 기존의 선사들이 유심정토의 염불선을 주장한 것과 다르다는 견해도 도출되었다. 경허의 정토왕생관은 수행으로서가 아니라 원리의 측면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경허의 글에서 해석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과 더불어 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중심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먼저 “왜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존의 경허 연구가 ‘큰스님 만들기’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점이 없지 않다는 반성을 통해 경허라는 한 인간을 실존적 문제를 중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생사(生死)의 대사(大事)’라고 대답한다. 간화선이나 수선결사 등은 외형적 형식일 뿐이고 개인으로서 자발적 수행의 입각처는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선(禪)의 견지에서만 보아온 경허의 사상을 화엄학과 정토학으로 확대하고 실존의 문제까지 거론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해석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경허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경허의 문학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자. 경허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선시(禪詩)와 불교가사를 중심으로 언급되어 왔다. 선시는 깨달음의 경지를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므로 문학자들보다 종교·철학자들이 경허 사상을 읽어내기 위해 인용하며 해석하였지만, 불교가사는 주로 문학자들이 경허를 작가로서 이해하고 그 내용의 깊이를 이해하려는 방향에서 연구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경허가 지은 불교가사의 문학적 연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경허가 지은 불교가사는 〈참선곡〉 〈법문곡〉 〈가가가음〉 〈금강산유산가〉 등이 전한다. 이 가사들이 일반 재가자가 아니라 출가한 종교인의 작품이고 보면 그 내용이 계몽적이고 교화적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거나 사랑을 그리워하는 서정적 가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불교적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면 그 내용을 어떤 문학적 키워드로 읽어낼 것인가. 문학자는 문장 단락상의 표현에서 직설적이면서 연계적 전개를 그 특징으로 이해하였다. 즉 경허의 불교가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장 형식이 평서문과 의문문이라는 것이다. 평서문으로 중생의 부정적인 면과 불교의 긍정적인 면을 단정적으로 나타냈고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로 설의적 의문문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불교 이념을 효과적으로 교시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계적 전개에서는 근원적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하는 형식으로 단락을 배열하였다고 보았다. 즉 〈참선곡〉은 ‘문제A→해결A→문제B→해결B→권유’ 〈가가가음〉은 ‘권유→문제A→해결A→문제B→해결B’ 〈법문곡〉은 ‘권유A→문제A→해결A→권유B→해결B→권유C→해결C→권유D’의 순서로 단락이 배열되었는데 ‘문제−해결’이라는 기본 단위에 권유 단락을 배치하는 방식을 보였다고 하였다.
경허의 불교가사 창작이 경허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당시에 여러 불교가사들이 노래 되고 있었고 그 시대적 흐름 속에서 경허가 자신의 가사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경허의 제자인 만공과 한암도 〈참선곡〉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경허의 가사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함의와 경허의 문학적 위상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국문학자들은 경허의 문학적 위상을 평가하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자칫 위대한 종교가에 대한 평가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해서일까. 아니면 종교인이 지은 가사이기에 문학적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이미 경허가 문학적 영역인 가사를 남겼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다른 가사들과 비교하여 경허의 불교가사에 나타난 특징과 문학적 위상을 평가하려는 시도도 뒤따른다면 경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욱 깊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측면에서는 경허가 살았던 궤적을 따라가면서 누구에게 불법을 배웠고, 언제 어디서 머물렀는지, 그가 남긴 글이 무엇인지, 그의 사상적 궤적이 어떤 전통을 계승했는지, 그의 문도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회적 위상을 가졌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또한 경허가 위대하다면 왜 위대한가, 경허의 법맥은 어떻게 되는가, 경허는 당시의 불교적 조류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즉 경허가 살다간 시대의 전후를 설명하고 경허의 시대적 위상을 밝혀보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운데 경허의 법통(法統)과 수선결사를 중심으로 역사적 측면의 연구 경향을 살펴보자.
경허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법통과 관련된 문제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법통 중시의 전통은 현존하는 여러 승려들의 행장에서도 드러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승려 행장이나 비문에서 법통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행장이나 비문에는 대부분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통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법통을 밝힘으로써 깨달음의 인가가 행장의 주인공에게 이어져 오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조선 후기 선사들이 표방해온 임제종 전통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깨달음을 인가하는 사자상승을 기본 요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허는 직접 가르침을 배운 적이 없는 용암혜언(1783~1841)의 법을 계승한다고 천명하였다.
게다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백장과 황벽, 구곡과 벽계, 서산과 진묵 등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면서 사법(嗣法)한 사례까지 언급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학자들은 대체로 “이미 끊어진 종승(宗乘)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선등(禪燈)을 밝히겠다는 선의 부흥자로서 사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 사실만 가지고 보면 지극히 옹호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해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19세기 후반에는 선(禪)보다 교학이나 염불 중심의 불교가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허 스스로 인가받을 스승이 없었으므로 고려 말 태고보우로부터 이어지는 선의 법맥으로서 용암혜언의 법을 이었다고 천명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경허의 수선결사에 대해서는 보조지눌의 정혜결사 계승, 불교 개혁을 통한 선불교의 지향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시작된 불교 결사는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신라시대에 화엄결사가 유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보조지눌의 정혜결사가 대표적이며 여러 종파에서 결사가 이루어졌다. 경허 이전에 있었던 선종의 결사로는 1822년에 백파긍선이 백양사 운문암에서 주도했던 수선결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시기를 달리하며 많은 결사들이 있어 왔지만, 경허의 결사 운동은 보조지눌의 계승이며 근대 선(禪)의 중흥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허는 1899년 해인사를 비롯하여 1900년 화엄사, 1902년 범어사에서 수선결사를 주도하였다. 경허는 결사의 취지에서 정(定)과 혜(慧)를 동시에 수행할 것, 견해가 같은 사람이라면 승려와 재가자, 남녀노소, 귀천을 묻지 않고 함께 동참하도록 하였다. 이는 보조지눌이 정혜결사에서 표방했던 취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허의 결사는 지눌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다른 만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결사문을 보면 미륵신앙과 정토신앙을 결사에 포섭하고 있는데, 이는 재가자를 결사에 동참한 것이고 보면 당시에 유행했던 신앙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보조지눌의 결사를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허의 결사를 개혁을 통한 선불교의 지향으로 보고 있다. 경허 당시 불교계는 선과 교학과 염불을 수행하는 삼문수학(三門修學)이 보편적이었다. 지금의 조계종과 같은 선(禪) 중심의 불교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학적 불교가 선불교를 능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의 불교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당시의 고승 84명 가운데 68명이 교종 승려이고 16명이 선종 승려라고 하였을 정도다. 바로 이런 시기에 수선결사를 주도함으로써 선불교를 선양하였기 때문에 경허를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20세기 초 이능화가 당시 대표적 선승으로 거론한 16명 가운데 9명이 직간접적으로 경허의 가르침을 받았던 승려였고, 또 그들은 대부분 친일불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선학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바로 이들에 의해 오늘날 조계종의 기초가 다져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조계종의 산파 역할을 했던 그의 시대적 위상은 거의 절대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경허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감히 드러내기 어려웠다.


4. 평가의 문제

역사의 무대에서 평가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게 된다. 히틀러라고 해서 비난만을 받지는 않는다. 그를 찬양하는 어떤 그룹이 있기 마련이다. 원효라고 해서 찬양만을 받을 수는 없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경허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역사적 평가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면 찬양과 비난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에게 가하는 선양과 비판도 살아 있는 자의 몫이 된다.
경허의 삶을 평가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출가자로서 주색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과 말년에 환속하여 재가자로서 임종했다는 것이다. 일화에 의하면, 대중 앞에서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며 여색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906년에 환속하여 박난주라고 개명하고 함경도 삼수갑산 등지에서 1912년 임종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일찍이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세상의 선류(禪流)가 다투어 서로 이것을 본받아서 심지어는 음주와 식육이 보리에 장애되지 않으며, 행도(行盜)와 행음(行淫)도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창언(唱言)하고 이를 대승선(大乘禪)이라고 말하며 수행이 없는 허물을 엄폐가장하고자 하는 것을 도도히 모두 옳다고 하니, 이러한 폐풍은 실로 경허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총림은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경허를 마구니에 비유한 이능화는 당시의 승려 파계 행위의 책임을 경허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경허의 주색과 환속을 인정하면서도 깨친 자의 행위로서 자유인의 무애행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중생제도를 위한 입전수수(入廛垂手)며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는 것이다. 경허는 세속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기행(奇行)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인사, 화엄사, 범어사 등지에서 수선결사를 주도하며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게다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많은 승려들이 훗날 일제 강점기 왜색 불교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통의 조사선 가풍을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한암은 ‘자성을 철저히 깨달은 분’이라고 평가하였고, 권상로는 “선종의 거장” 고익진은 “한국 최근세 선을 중흥한 대선장(大禪匠)” 김지견은 “조선 근세의 거인”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은 그의 공적을 더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의 환속에 대해서도 만해 한용운은 〈약보〉에서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관을 쓰고 바라문으로 변신하여 만행두타(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 따라 교화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근래에는 업의 빚을 갚기 위해 세속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에서 경허의 환속을 상채(償債)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경허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엇갈리는 것은 그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이 너무도 지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조사선의 중흥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파계를 정당화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허 이후에 많은 출가자들이 경허의 만행에 자신의 행위를 빗대며 주색을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류들은 경허만큼의 깨달음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도 스스로 깨달은 자처럼 행세하며 주색을 꺼리지 않는다. 재가자 위에 군림하며 독단을 일삼는다.
이런 이유로 경허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는 것 같다. 경허 문도를 비롯하여 그의 법화(法化)를 흠모하는 이들은 근대 조사선의 중흥자로서 더욱 선양하려고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냉정한 시선으로 경허의 만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런데 경허의 만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경허의 공적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경허가 조사선을 중흥시켰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왜 경허의 만행을 이류중행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오늘날 수선하는 납자들 가운데 선(禪)적인 무애행이라는 핑계로 계율을 경시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012년에 경허 입적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들이 기획되고 여러 글이 잡지에 발표되는 과정에서 경허에 대한 평가를 두고 진통을 겪었던 적이 있다. 윤창화는 《불교평론》에서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경허 불교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경허를 흠모하는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지탄한 바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허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글을 맺으며

이상에서 경허가 걸어온 길과 남긴 문집에 대한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와 관련된 자료를 엄밀히 고증하여 사실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저마다 경허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들도 확인하였다. 또한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난 100여 년간 경허에 대한 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풍부해지고 더 격해지고 있다.
자료와 관련해서는, 연구자들이 이용하는 자료가 사실과 괴리가 있다면 논의는 왜곡될 수밖에 없으므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경허 시문과 일화의 정본화(定本化)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원문의 번역에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각 분야의 연구는 사실 규명보다는 경허가 남긴 글을 좀 더 면밀히 분석하여 문학, 역사, 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게다가 본 글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경허의 법맥과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역시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경허에 대한 평가는 2012년의 진통 이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허 연구는 경허를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불교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100여 년 전에 이미 속세의 삶을 마감한 경허가 오늘에도 뜨거운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허에 대한 논의가 없어진다면 그의 정신마저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허를 둘러싼 갈등과 논쟁은 경허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이종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동국대 사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동 대학원 사학과(박사) 졸업. 한국불교사 전공. 주요 논문으로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 후기 불교 이력과목의 선정과 그 의미〉 〈조선 후기 가흥장의 복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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