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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문현공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57호] 2014년 03월 01일 (토) 문현공 darkmhg@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은 죽는다.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이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니, 바로 보면 우리는 지금 죽음과 함께 있다.
붓다는 왜 출가를 하셨는가? 불교의 시작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고(苦) 때문이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를 하셨다기보다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출가하셨고 그 결과 깨달음, 열반에 이르셨다. 출가의 출발점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괴로움이었으며 괴로움의 정상에 있던 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장되어 있던 왕의 지위도 수없이 많은 금은보화도 반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병실의 환자 혹은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닌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과거의 자연스럽던 죽음은 근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차갑고 기계적인 죽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죽음’으로서 저편으로 밀어놓고 묻어놓는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탄생과 소멸, 생과 사라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자연스럽지 않은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남의 죽음’은 부작용의 부산물들을 낳는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33.3명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중에 가장 높으며 OECD 평균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많고 자살률이 가장 낮은 그리스와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청소년 자살률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01년 3.19명에서 지난 2011년 5.58명으로 57.2% 증가했으며 OECD 회원국의 청소년 자살률이 감소하는 추세인 데 비해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급증 추세라고 한다. 인생의 괴로움과 행복이 무엇인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불명예스럽게도 각종 죽음 지표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 이러한 죽음 관련 문제들은 사실상 삶의 질 문제이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라는 문제는 위의 죽음 관련 지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암울한 한국의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삶을 삶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대안이 ‘죽음준비 교육’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죽음연구(thanatology)는 1960년대에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50여 년이 흘렀으며 유럽 또한 죽음 교육(death ed-ucation)이 시행 중이다. 일본 역시 1970년대부터 서양의 죽음연구를 받아들였으며 2005년 이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의 증가에 대한 대안으로 죽음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불교계의 생사학(生死學)을 포함하여 죽음연구가 종종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 타 학문과 외국의 연구를 비교해 보면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언급했듯이 불교의 시작, 붓다의 시작은 죽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을 넘어 깨달음을 얻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우주적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단순히 문자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까지 꿰뚫어 완전히 체득시키는 수행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음연구, 생사교육에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불교계의 활동이 이웃 종교나 타 학문과 비교해 볼 때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명상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삶의 질 개선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직접적인 죽음준비를 제시하는 사찰의 프로그램이나 불교계의 연구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기존의 죽음연구들에 자그마한 벽돌을 하나 보태는 마음으로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2. 죽음, 생각하기

죽음을 준비하기에 앞서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생각의 시작은 죽음의 정의를 살펴보는 일이 될 수 있다. 먼저 의학적 죽음 정의인 심폐기능사를 살펴보자. 죽음은 전통적으로 호흡과 심장박동의 정지로 결정되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하면 맥박, 혈류, 숨이 멈추고 이후 나머지 생체기관들의 정지가 뒤따른다.그리고 영화를 보면 가끔 의사가 사망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을 들어 빛을 비추는 것이 이를 의미한다. 즉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되고 뇌반사가 소실된 것이 ‘불가역적(不可逆的)’일 때, 그 사람은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호흡과 심장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호흡 정지와 심장의 정지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 심각한 고민이었다. 19세기까지는 자발적 호흡의 유무만이 죽음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으나 1885년 이 기준에 의해 사망했던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학계에 보고되면서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려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유럽에 소아마비가 유행하면서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계기로 인공호흡기가 개발되었고 인위적으로 호흡 유지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호흡기의 개발과 같은 의료과학의 역사는 뇌사와 같은 또 하나의 죽음 기준을 만들게 된다.
뇌의 죽음이 일어나면 인간은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첫째는, 소뇌와 뇌간에서 수행되는 생체적 통합조절기능의 상실이고 둘째는, 의식, 사고,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기능의 상실이다. 보통의 경우 뇌의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어 뇌가 죽으면 생체적 통합유지 기능이 상실되고 뒤이어 호흡 및 심박동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가 유도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위적 생명유지 장치가 개발되면서 ‘살아 있는 시체’ 즉, 뇌사라는 또 다른 죽음 정의의 기준이 발생하게 되었다. 뇌사는 장기이식과 같은 무거운 생명윤리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비록 의학적 죽음 정의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죽음 정의의 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적 죽음 정의는 육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정의하는 데에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그리고 원점에서 차분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잡아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죽음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목숨[壽]과 체온[暖] 그리고 의식[識]은 몸[身]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心]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 
 
이 구절에 따르면, 죽음이란 목숨[壽], 체온[暖], 식(識)의 세 가지 요소의 파괴로 인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정의는 잡아함 외에도 중아함(中阿含) 등 초기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수(壽), 난(暖), 식(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수는 수명(壽命)을 말하는 것으로 목숨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하며 난(暖)이란 따뜻한 기운, 즉 체온을 말한다. 이 둘은 의학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영역에 속한다.
수명은 불교의 업사상 또는 인과법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판단하는 데에서 왜 심장사나 폐사 등을 언급하지 않고 체온의 상실을 언급하였는가? 추측건대, 당시의 정황에서 볼 때 시체의 판단 기준이 아마도 열기(熱氣)의 유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더욱 중시하는 것은 바로 식(識, vijñāna)이다.
식은 간단히 말해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심리적 작용을 뜻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일아함(增壹阿含)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러 중생들이 되풀이하면서 받은 몸에 온기[溫]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가지 결합[五親]이 나누어져 오온[五陰]의 몸을 버리고, 명근(命根)이 끊어져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라 하여 오온을 중심으로 역시 수명과 체온이 상실됨을 죽음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온은 인간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불교의 존재론이다. 이들 중에 물질 즉 육체를 의미하는 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심리적 작용을 의미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느낌[受], 마음속에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함[想], 의도 또는 의지를 가짐[行] 등의 마음이 작용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대상을 감지하고 식별, 판단하는 기능인 식의 작용일 것이다. 식을 통해서 쾌(快), 불쾌(不快)의 감수작용이나 의도나 의지 등의 후단계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12단계 중에 세 번째에 위치하며 유식에서 말하는 육근(六根)과 연결된 육식(六識)의 식이기도 하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마음을 지칭하는 대표적 용어가 바로 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쉽게 보면 일반적인 말인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단어에 식의 일부 의미가 연결될 수 있으며 육체와 정신,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식이기도 하다.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윤회라는 바다 위에서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같다. 불행하게도 고통스러운 죽음은 1회로 끝나지 않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버려지고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육체 말고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영혼이니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불교에서는 바로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덧붙여,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반복되는 죽음, 윤회란 ‘식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시작 또는 기준이 되는 것은 정의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정의란 어떤 존재를 명백히 밝혀 규정함을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간결한 표현 방식을 취하며 한 존재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간결하게 어떤 존재를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불교의 관점에 본다면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한 존재의 정의 또한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죽음 정의와 더불어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들은 두려움, 무서움, 불안, 공포, 고통, 슬픔, 후회 등으로 거의 좋은 것은 없다.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나의 죽음’을 떠올리면 무섭거나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또한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지독한 고통에 휩싸이며 공포스러울 것이고 잠시 멀어졌을 때에는 후회를 남길 것이다. ‘너의 죽음’을 떠올리면 슬픔과 우울함에 사로잡힐 것이며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죽음’은 잠시 애도하거나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초기경전에도 죽음에 대한 반응의 예가 종종 등장한다. 잡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여러 비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비구가 번열(煩熱)하지 않고 죽으며 번열하지 않고 목숨을 마칠 수 있습니까?” 존자 아나율타가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진실되고 바르게 보며, 성스러운 사랑을 계로써 삼으면, 그 비구는 번열하지 않고 죽으며 목숨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번열(煩熱)이란 몸이 타는 듯한 고열이 나고 가슴이 꽉 막힌 듯한 고통을 뜻하고 번열함 없이 목숨을 마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속에 죽음의 고통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나의 죽음을 생각함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고통 중의 고통, 바로 순수한 육체적 통증(痛症)이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제 병은 차도가 없어 몸이 편안하지 않으며, 갖가지 고통은 갈수록 더 해져 나을 길이 없습니다. 만일 힘센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붙잡아 노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두 손으로 세게 조른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겪는 고통은 그보다 더합니다. 또 만일 백정이 예리한 칼로 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면 그 소의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제 복통은 그 소보다 더합니다. 또한 마치 힘센 두 사람이 연약한 한 사람을 붙들어 불 위에 매달아 놓고 두 발을 태우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인데, 지금 내 두 발의 열은 그 보다 더합니다.

잡아함에 실린 위 내용은 중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비구의 통증에 대한 묘사이다. 죽음에 다다르면 통증을 수반할 것이고 이 통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통증의 유형에는 날카로운, 아리는, 욱신거리는, 타는 듯한, 쏘는 듯한, 찌르는 듯한 등의 종류가 있으며 기간에 따라 급성통증, 만성 통증이 있다. 또한 통증은 단순히 고통을 육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심리질환을 수반하기도 한다. 통증은 어떻게 본다면 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은 그의 저서에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유형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고통에 대한 공포, ②고독에 대한 공포, ③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 ④가족에게 부담을 준다는 불안, ⑤미지의 세계를 눈앞에 둔 불안, ⑥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 ⑦인생을 미완성인 채로 끝낸다는 것에 대한 불안, ⑧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 ⑨사후의 심판이나 벌에 대한 불안 등이다. ③의 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며 ⑥의 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는 동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생관이 이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극복의 방법으로서 저자는 죽음준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실제로 이 이미지들이 찾아와서 ‘나의 죽음’ 그리고 ‘너의 죽음’이 되어 우리를 뒤흔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죽음, 대면하기

1) 자신‐죽음, 명상하기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 즉 수행이 아닌가.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그 답은 수행이라 생각한다.
초기경전의 대표적인 죽음과 관련된 수행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사념(死念)수행이다. 부정관은 시체가 부패하면서 해골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다. 부정관도 죽음을 대비하는 수행이 될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본 글의 취지상 이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이 글에서는 죽음을 준비한다는 취지에 보다 가까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사념(死念)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vipassanā, 念) 명상은 한국은 물론, 미국 및 해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챙김의 연장선상에서 사념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로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는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으면 큰 과보와 공덕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게 되며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라 하며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사념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①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②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③내가 ‘한 끼 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 을 이룬 것이다.
④내가 ‘네다섯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⑤내가 ‘한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 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⑥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또한 붓다는 위의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르게 사념을 닦는 것이라고 하며 ⑤와 ⑥의 방식은 부지런히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 설한다.
사람의 마음은 안과 밖의 대상의 하인이 되어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면서 기억, 경험과 맞물리거나 쾌(快), 불쾌(不快)의 감정과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대상을 접촉하고 흘러다니면서 업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간과 농도에 비례해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마음에 휩쓸리며 실려 다니지 않고 쾌, 불쾌와 같은 감응이나 다른 판단이 없이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이에 관찰의 내용을 죽음으로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다른 불교수행과 같이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호흡법을 기본으로 해서 내 마음속의 내용을 죽음으로 두고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회피의 대상이고 은폐의 대상이다. 그저 ‘남의 죽음’이다. 그러나 생과 사, 탄생과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섭리를 은폐하고 조작하면 부작용이 발생하여 다시 돌아오고 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감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망각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도 이러한 사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라 말하며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라고 이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여 사념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념 수행은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불교의 죽음준비 훈련의 하나라 볼 수 있으며 자신과 죽음의 거리를 멀리 두고 숨겨두는 심리를 넘어 죽음을 바로 내 ‘곁’에 앉혀두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만약, 불교교리에 낯선 사람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인해 심약한 상태의 사람 그리고 낮은 연령대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죽음대비 명상을 단계적 조정 과정이 없이 바로 시행한다면 생각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 본격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개설하려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없는 단계적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삶 속에서 마음 훈련을 통해 죽음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하는 인식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죽음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하면서 막연한 혐오, 공포, 두려움 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별개의 존재 등으로 죽음을 취급하는 심리를 개선시킬 것이다.

2) 타인―죽음, 돌보기
자기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가? 앞의 죽음대비 명상을 함께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환자와 같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죽음준비를 위한 명상을 권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말기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힘이라 생각한다. 경전을 보면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붓다는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곧 나 부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라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곧 부처를 돌보는 것과 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보아야 한다고 설했을까? 증일아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호인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 법인가? 간호하는 사람이 의사를 잘 분별할 줄 아는 것, 게으르지 않으며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자는 것, 항상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잠을 적게 자는 것,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 병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해 주는 것이다.

위에서 붓다는, ①의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것, ②환자보다 부지런할 것, ③대화를 자주 하고 잠을 적게 잘 것, ④환자의 음식이나 물건을 탐하지 않고 자신이 법공양(法供養)을 할 것, ⑤환자를 위하여 설법할 것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①은 간병인이 무조건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말며 혹은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지 아닌지를 잘 판단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④에서 법공양을 하라는 것은 환자에게 주어진 공양물을 취하지 말고 오히려 간병인이 공양물을 올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음식, 재물 등의 공양물 중에 가장 수승한 공양물이 법공양 즉, 진리를 베푸는 것이며 마치 부처님에게 공양물을 올리듯이 환자에게 보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⑤항은 환자를 위해 설법하라는 내용인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담을 통해서 환자에게서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붓다가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위해 설법을 베풀고 심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몸에 중병이 걸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중략) 부처님께서 이 법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습파서는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게 되어 기뻐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그 병든 비구를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시고 기쁘게 해주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병든 비구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에 이내 목숨을 마쳤는데, 그 비구가 임종할 때에 모든 감각기관이 기쁨에 차 있었고 얼굴은 청정하며 살빛은 곱고 희었다.

대만의 저명한 죽음학자 푸웨이쉰(傅偉勳)은 그의 저서에서 빅터 프랑클(Victor E.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 意味療法)는 말기환자에게 효과적인 정신치료법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정신의학자였던 프랑클은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경험에서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기존의 심리치료와는 다른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의미 요법을 뜻하는 로고테라피는 치료자가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서 환자의 인생 의미를 추출하여 자각게 함으로서 환자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이렇게 볼 때, 위 붓다의 상담도 의미치료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말기환자의 지속적인 통증은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생각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에 환자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줄 수 있게 하는 전문상담가 혹은 스님, 신부님과 같은 종교지도자의 상담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지도자, 의사, 간호사, 호스피스 그리고 가족의 역할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환자에게 마치 주사와 같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생명력과도 같을 것이다. 특히 환자의 죽음을 자주 접하는 의사, 간호사 또는 호스피스 시설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상담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4. 죽음, 넘어서기−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übler-Ross)는 현대죽음학의 선구자로서 최근에 국내에도 그녀의 저서 《인생수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바가 있다. 그녀는 의사인 자신이 직접 수많은 말기환자들을 관찰하면서 기록한 저서인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통해 인간은 부정 및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의사의 오진을 의심하며 타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도 하면서 고립이 된다. 다음으로 병증으로 인한 육체적 초라함이나 심신의 쇠약함을 가족을 포함한 지인, 의사, 심지어 신앙의 대상에게까지 분노로써 표출한다. 셋째는, 타협 단계로 좀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의사에게 잘 협조하고, 획기적인 신약을 기대하기도 한다. 넷째는, 우울 단계이다. 이때 자립능력 저하 등이 일어나며 위축된다.  마지막은 죽음을 수긍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 단계로서 타인과의 접촉, 자기신뢰의 증가 및 극적인 자기변화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퀴블러로스는 모든 사람이 위의 순서대로 단계를 거치지는 않지만 분노나 우울의 단계를 넘어 수용의 단계로 신속하게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용 즉 ‘받아들이기’는 단지 죽음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강력한 수용의 힘이 있다면 어떤 불행한 사건도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파산, 은퇴, 이혼, 불구, 상실, 실패, 암 선고와 같은 인생의 지독한 고통이 들이닥쳤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애써 묻어두려고 한다면 더 깊이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구덩이를 벗어나 이전보다 더 드넓고 환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에서 볼 때 미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서 ‘수용의 힘’을 기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붓다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으며 죽음을 극복하여 열반에 이르셨다. 만약 붓다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붓다는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였는가? 육체적 영생을 통해 불사(不死)에 이르렀는가?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다. 생과 멸이 모두 멸한다면, 적멸의 즐거움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열반경》의 게송은 바로 죽음 극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 게송의 의미, 붓다 가르침의 의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없어져야[生滅滅已],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寂滅爲樂]이다. 즉 삶과 죽음 모두를 없앤 것이 붓다가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붓다가 깨달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12단계를 말하며 이들 각각은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에서 볼 때 죽음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태어남[生]이라는 원인이 없어야 가능하고 생 또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연기(緣起)된 것이므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역으로 이전의 각각의 단계를 올라가서 최초의 지점인 무명까지 가야 한다. 무명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깊은 무의식적 본능에까지 뿌리내린 원초적 무지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무명이 만약 진리의 체득으로 인해 명(明)으로 바뀌면 각각의 인과관계 연결들은 차례로 소멸되고 죽음도 소멸된다. 바로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즉, 붓다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일으키는 무명을 넘어 열반에 이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ṇa)은 원초적 무명이 사라진 상태로서 영어로 “to blow out” 또는 “to quench”로 표현되며 이들 각각은 취멸(吹滅)과 갈증 해소의 결과 등을 의미한다. 불어서 완전히 꺼진 대상은 죽음과 삶,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 등을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을 넘어 심층의식에까지 미친 이분법적 본능, 삶의 괴로움들을 생산해내는 원초적 어둠을 말한다. 또한 이 어둠 속에는 죽음, 공포, 두려움, 슬픔, 애착, 분노 등 삶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세 가지 원초적인 본능[三毒]이 숨어 있다. 즉 열반은 붓다가 깨달은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괴로움과 죽음이라는 모든 번뇌가 전멸(全滅)된 상태이다.
이 같은 교설은 근원적인 측면에서 죽음준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보통의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죽음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왜곡된 심리와 현상들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불교의 생사관은 죽음극복의 진정한 의미가 마음의 세계에서 다시 다루어져서 죽음을 바로 보고 나아가 삶과 죽음을 함께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본문에서는 각 장의 제목에 따라 자세한 내용들을 언급하였지만 단순히 보면 각장의 제목과 순서, 즉 ‘죽음, 생각하기→, 죽음, 대면하기→죽음, 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자체가 하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위 차례의 반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이후에 죽음을 가까이하는 명상을 실천하고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다시 바로 보아서 죽음과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국내에서는 죽음교육 프로그램이 연령별로 보다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국내와 국외 그리고 불교계 내외에서 연구되고 있는 많은 죽음연구들을 반영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법회 또는 템플스테이와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의 틀 위에서 죽음명상과 같은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 경전만을 중심으로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았으며 초기 이후의 다른 불교문헌들을 다루지는 않았다.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Bardo Thӧdol)》와 정토계 경전들은 임종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들이지만 본 글에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차후에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현대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맥락적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제까지 단순히 글을 통해서만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도 계속해서 실천과 수행을 할 것이라 다짐하며 또한 본 글의 부족한 연구를 넘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죽음이 올 때까지 죽음공부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

 

 

문현공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한국학센터 객원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 죽음관의 현대 죽음학적 연구〉 “Death Education based on Modern Tha-natology and Buddhist Thoughts on Death”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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