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몸, 몸의 불교

1. 들어가는 말

김정희
살림여성문화운동 단체 가배울 대표

시장조사 전문기업 트렌드모니터(www.trendmonitor.co.kr)와 리서치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2009년 수도권에 거주하는 만 19세~49세 남녀 1,174명을 대상으로 ‘성형수술에 대한 인식 변화와 경험자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여성 응답자의 19.7%, 남성의 5.3%가 성형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형수술 경험자는 지금까지 평균 2회(1.93회) 정도 성형수술 경험이 있었는데 여성은 1.95회, 남성은 1.79회로 나타났다. 성형 부위는 눈(58.6%, 중복응답), 코(21.5%), 피부 박피(16.6%), 여드름 흉터 제거(15.5%), 색소·기미 제거(15.5%) 순으로 나타났다. 성형수술을 하게 된 이유로는 ‘예뻐지고 싶어서’가 59.7%, ‘자신감 때문’ 16.6%, ‘치료의 목적’ 12.7% 순이었다. 여성은 예뻐지고 싶어서(65.4%)란 응답이 압도적이었고, 남성은 자신감 때문(42.1%)이라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성형수술 경험자는 자신의 수술에 대해 비교적 만족했다. 수술 경험자 181명 중 65.2%(5점 만점 중 3.76점)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실제 성형 비율은 여자의 경우 20%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위의 조사는 만 19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실에서 성형 연령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는 것이 추세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방학이 지나고 오면 한 반에 몇 명씩은 쌍꺼풀이나 코 성형을 하고 나타난다. 특히 중3과 고3 졸업고사 끝나고 아예 새로운 얼굴이 되어 나타나는 아이들도 있다. 경험적으로 학생들은 한 반에서 30~40%의 아이들이 성형을 한다고 보고 있는데, 중·고등학교 기간 전체적으로 보면 과반수의 아이들이 성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부모들은 성형을 자녀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나 졸업 선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일반적 추세이다.

이같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덧 성형문화, 외모 가꾸기 문화가 하나의 일상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외모 가꾸기 문화, 성형문화를 불교적 시각에서 분석·조명해 보면서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불교에서는 외모 가꾸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 글은 먼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고자 한다.

2. 불교에서 몸에 대한 이해

불교의 시선으로 볼 때 성형은 외모 가꾸기에 착(着)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외모 가꾸기는 무엇보다도 몸의 문제다. 따라서 외모 가꾸기의 주된 한 현상인 성형을 불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몸과 몸이 그 한 형태인 물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래의 경구들은 부처가 물질을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무상한 것이기에 내가 아니고,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데 이를 자기라고 고집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나의 자아다’라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서 아래의 경구에서 보듯이 몸은 물질의 대표적인 것이고 물질은 집착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하는 것으로 설해진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몸, 물질에 대한 탐진치 삼독심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다.

그 근본을 보아/ 자세히 관찰하고/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네
이 몸을 비롯해 모두 그렇다고/ 위대한 지혜자는 가르치네/ 세가지 것을 떠나/ 물질을 버려야 할 것으로 관찰하라/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고/ 버려진 채 놓여지니/ 의도 없이 타자의 먹이가 되네
이 몸이 상속하는 것 이와 같네/ 무지한 자가 지껄이는 환상이라/ 살해자라고도 불리우네/ 여기에는 실체는 없다네.
수행승이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처럼 존재의 다발을 관찰하라/ 낮은 물론이고/ 밤낮으로/ 올바로 알고 바로 새겨라
모든 결박을 끊어버려라/ 자기 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이 가르침을 외모 가꾸기, 성형에 대응해보면 부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주름과 검버섯이 생기고 다리는 절룩이다 마침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갈 네 몸을 네가 젊은 상태로 붙들어 매 놓지 못하는 게 자명하다.

2. 이런 무상한 변화를 붙잡을 수 없으니 못마땅해 보이는 네 몸이 네 것이 아님을 관하라.

3. 네 몸이 네 것이 아님을 알면, 세상이 예쁘다, 밉다 칭하는 소리에 오염되어 번뇌 다발에 결박되지 않고 중심을 잡고 초연할 수 있다.

4. 무상한 것을 자기로 아는 번뇌에 결박되지 말고 불멸의 길을 구하여 수행하라.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라는 세간의 왜곡된 기준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과 그래서 일어나는 자신의 몸에 대한 못마땅함 내지 분노, 여기서 다시 발동하는 왜곡된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미인/미남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유혹, 탐욕에서 벗어나서 불멸의 길을 가라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에 대한 번뇌에서 벗어나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해서 구해야 하는 불멸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번뇌를 번뇌로 알 수 있는 바로 그것, 바로 청정한 마음이다. 부처는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임을 노쇠를 한탄하는 노인에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이 병들면 안 된다는 법문을 통해 말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몸에 병이 들어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더구나 세존과 바른 마음을 깨우쳐주는 수행승들의 모습을 결코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장자여, 참으로 그러하구나.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래든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배워야 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한다.”

요즘에는 성형이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벗어나 외모가 직장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다는 명분의 성형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성형이 범람하는 문화의 기저에는 이성이 선호하는 미는 자신의 외모와는 다른 유명 탤런트나 배우의 외모와 같은 것이므로 그런 외모를 자기화하여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이성애, 이를 충족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해탈을 위해서는 당연히 파괴되어야 할 번뇌로 제시된다. 깨달은 여성들은 당연히 이성애에 대한 유혹을 벗어난 경지이고 깨달음은 남녀 모두 도달해야 할 경지이다.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 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때 수행녀 끼싸 고따미는 ‘이는 악마 빠삐만이다’라고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써 대답했다.
고따미: “언젠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모든 쾌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구성요소는 파괴되었네./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속세의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

빠삐만: “그대는 젊고 아름다우며/ 나 또한 젊은 청년이네./ 사랑스런 이여, 오라./ 다섯 악기로써 즐겨보세.”
그때 수행녀 비자야는 ‘이는 악마 빠삐만이다’라고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써 대답했다.
비자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색깔과/ 소리와 맛과 향기와 접촉을/ 나는 그대에게 넘겨주니/ 악마여, 그것은 내게 필요하지 않네. 이 취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부패하는 몸에 대하여/ 나는 곤혹하여 참괴하니/ 애욕의 갈애는 내게서 근절되었네. 형상의 세계에 들어선 뭇삶들과/ 무형상의 세계에서 지내는 자들/ 선정의 성취마저 고요해지면/ 모든 곳에서 어둠은 사라지네.” 

3. 전도몽상으로서 여성성, 남성성과 성형문화

세간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무수한 고정관념이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매우 세밀하게 작동하고 있어 성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gender)라고 불리운다. ‘여자가 왜 그리 선머슴아 같아.’ ‘여자가 못생겨 갖고~’ ‘무슨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여자란 모름지기~’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에 대해서도 ‘남자가 쪼잔하게~’ ‘남자는 울면 안 돼.(부모가 어린 아들에게)’ ‘모름지기 남자란~’ 등등과 같은 고정관념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보다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 고정관념들은 불교적으로 보면,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다름이 아니다. 붓다는 아래의 경구에서와 같이 여성이나 남성이나 안으로는 여성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남성은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탐닉하는 반면, 밖으로는 거꾸로 여성은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남성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탐닉하기 때문에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고정관념으로서 여성성, 남성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통찰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인이 안으로 여인의 본성·여인의 행동·여인의 외관·여인의 교만·여인의 욕망·여인의 소리·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남자의 본성·남자의 행동·남자의 외관·남자의 교만·남자의 욕망·남자의 소리·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인은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남자가 안으로 남자의 본성·남자의 행동·남자의 외관·남자의 교만·남자의 욕망·남자의 소리·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여인의 본성·여인의 행동·여인의 외관·여인의 교만·여인의 욕망·여인의 소리·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남자는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같이 여성성, 남성성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전도몽상에 불과한데 붓다의 통찰에 의하면 여성과 남성은 각각 안으로는 고정관념적인 여성성, 남성성에 탐닉하고 밖으로는 상대 성의 남성성, 여성성을 탐닉한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우리가 이런 전도몽상에서 벗어날 때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 여성주의에서 여성성, 남성성을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과 견해가 일치한다. 성형이란 것도 여성, 남성이 각각 ‘아름답다’ ‘멋있다’라는 왜곡된 여성의 외관(외모), 남성의 외관(외모)에 안으로 정신을 기울임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이다. 다만 과거에는 남성이 외관에 안으로 정신을 기울이는 것은 드물었다. 남성은 과거에는 외모보다는 능력, 힘, 지위 이런 것에 안으로 정신을 기울였다면 최근에는 후자의 것들과 더불어 외모도 안으로 정신을 기울이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남에게 좋다고 평가되는 외모는 서두의 성형 경험에 대한 조사가 보여주듯이 여성(19.7%)이 남성(5.3%)보다 훨씬 더 갈구하는 것이 되고 있다. 즉 여성은 외모에 있어 남성보다 4배 정도 높은 비율로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어 있고 이 타인은 여성이기보다는 남성, 여성이라도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여성이다. 요컨대 외모에 보다 더 신경 쓰는 남성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상대방 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종적으로 비하하고 이것이 어떤 비난도 받지 않는 것은 남성의 여성 외모 평가 또는 비하에 해당된다. 5년 전의 한 사건도, 우리 문화는 남성이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성이 남성의 외모를 함부로 공공연하게 비하해서는 안 되는 문화임을 말해준다.

문제의 사건은, 한 여대생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라고 했고 이는 남성들의 집단적인 분노를 일으켜 남성들이 소송까지 냈다. 이 여성은 지금까지도 취업을 해도 누리꾼이 투서하는 바람에 바로 회사에서 잘린다고 한다. 여성이 남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어림없음을 보여주는 이 사건은 성형문화를 가부장제하의 여성 외모 비하 문화라는 여성문제로 조명해볼 필요성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어린아이 때 남아를 외모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여아는 일찍부터 외모 평가의 시선에 노출된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십여 년 전에 연구했던 사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당시 연구 주제는 성의 사회화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한 엄마를 인터뷰했다. 그 엄마의 딸은 피부가 까맣고 쌍꺼풀이 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늘 남자아이들이 못생겼다고 딸을 놀린다는 것이었다. 그 엄마는 애가 닳아 그런 소리를 안 듣게 하려고 예쁜 치마옷에, 예쁜 핀에, 파마를 시키는 등 안간힘을 쓰며 대응하고 있었다. 교사와의 상담을 통해 남아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교육적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했다. 필자는 교사와의 상담을 권했는데, 내가 제안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는지 아니면 아마도 딸이 성형을 할 수 있을 중학생쯤 되었을 때 바로 쌍꺼풀 수술을 해주는 것으로 해결했을지는 모르겠다. 후자의 경우를 택했더라도 마이클 잭슨처럼 흰 피부로의 성형 시술을 거듭하지 않는 한, 검은 피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같이 성형문화는 우리 사회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아직 너무나도 많은 여성이 남성의 시선과 평가에 결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가부장제 문화로 이해될 때 보다 정확한 대안이 제시될 수 있다.

4. 성형문화 결박에서 벗어나는 불교적 대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이제는 성형이 자기를 돌보는 당당한 수단이 되었다. 성형수술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당당하게 투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한국이 성형 시술을 잘하는 나라로 인식되면서 아시아 여성들이 강남의 성형 병원으로 몰려들고 있어 성형 산업은 국익에 기여하는 산업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잃어버린 헛된 놀음, 헛된 번뇌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함에서 외모가 전혀 고려되지 않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 낌새는 전혀 없다. 어떻게 해야 외모를 둘러싼 번뇌 다발에서 상당히 벗어나는 문화로 옮겨가는 것이 가능할까? 상당수의 국민이 겹겹이 쌓아서 짊어지고 있는 번뇌 다발을 누가 한 번에 녹여낼 수 있을까마는 불교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잡지, 광고, 드라마 등등 ‘코는 날 서고 오뚝하고, 눈은 쌍꺼풀이 있고 키는 얼마 이상 되어야’ 미인, 미남 축에 든다는 전도몽상이 참이라고 믿게 하는 장치들이 도처에 작동하는 현실에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외모를 자족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소위 ‘자연 미인’이 아닌 여성들이 100% 다 성형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하였지만, 이렇게까지 수행하지 않아도 외모 가꾸기, 성형문화에 초연한 여성, 남성들이 있다. 자기중심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 자기중심의 배경은 다양하다.

아직 불자가 되기 이전이었던 필자에게도 외모와 관련한 한 이런 중심이 있어 딸을 기르며 외모에 관한 한 초연할 수 있었다. 아주 약간 눈꼬리가 올라간 딸을 두고 어릴 적에 삼촌, 할머니가 크면 쌍꺼풀 수술을 해주어야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엄마로서 단호하게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딸에게는 당시 외국에서 슈퍼모델로 활약하다 귀국한 김동수 씨가 TV에 나오면 너도 김동수 씨처럼 얼마나 미인인지 모른다고 칭찬해주었다. 김동수 씨는 전형적인 한국인 토종 얼굴로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그런 김동수 씨가 외국에서는 미모를 뽐내야 하는 모델, 그중에서도 슈퍼모델이었다. 여성 영웅 만화영화 〈뮬란〉이 나왔을 때는 함께 보러 가서, 딸에게 눈꼬리가 올라간 ‘뮬란’과 딸이 똑 닮은 미인이라고 부추겨 세웠다.

이런 식으로 엄마가 중심이 있으면 얼마든지 외모·성형 중심 문화에 휘둘리지 않고 자녀를 기를 수가 있다. 필자가 이런 중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남편에게 정신적, 개인적으로 의존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 삶과 사회적 삶에서 주인으로 살 때 행복함을 일깨워 준 여성학 덕분이었다. 불교는 횡행하는 외모·성형문화로부터 여성, 남성이 휘둘리지 않게 하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불자인 여성과 그 자녀들은 비(非)불자 가정의 여성, 자녀들보다 성형문화로터 더 자유로운가?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조사나 연구가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갈수록 성형문화가 극성하는 현실은 설사 불자인 여성과 그 자녀들이 비불자 여성과 그 자녀들보다 설령 약간 더 성형문화로부터 초연한다 할지라도 그 차이는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님을 말해준다. 즉 불교든 기독교든, 오늘날 종교는 성형문화의 극성을 성찰하고 완화시키는 실질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의미 있게 행사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첫째 요인은 어머니들의 집중 수행, 마음공부가 자녀들을 다 성장시킨 후에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하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어머니들에게는 어떤 역할보다도 교육 매니저로서 역할이 과중하게 요구되고 있다. 자녀가 대입에 합격할 때까지 여기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어머니들의 집중적인 종교 생활도 자녀교육과 연관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자녀 대학 무사 입학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시작하면서 신앙생활에 집중하게 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 전에 어머니는 이미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 청소년기 딸의 성형 요구를 ‘예쁜 게 좋은 거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여, 때로는 자식의 스트레스를 조정할 겸 방학에 손잡고 성형외과로 향한 경험이 십중팔구 있었을 것이다. 성형 시점이 중고생 연령대로 내려오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성형문화에의 무분별한 편승이 붓다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것을 자각하며 여성 자신과 자녀의 행복을 외모와 무관하게 이해하게 되는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 불교는 좀 더 젊은 여성, 남성, 혹은 부모 되기 이전의 젊은 세대와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불교 가르침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훈습되는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대학 캠퍼스, 회사나 아파트나 마을 근처의 선방은 어떤가. 작정하고 멀리 차를 타고 절기에 맞추어 가는 사찰 행사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행 불교의 운영 방식만 갖고는 불교 가르침을 일상 삶 속에서 실천하는 불교 생활 문화가 자리 잡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다만 상상해 본다면, 미혼 시절이나 임산부 시절에 가까이서 참여할 수 있는 마음공부나 (예비)부모 강좌 등이 있다면, 불교 가정 문화를 함께 일구어갈 도반 동아리들이 가까이 있다면 상황은 좀 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고려할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한결같은 부처가 아니라는 점이다. 화재로 한 눈과 두 손을 잃고 얼굴까지 심하게 화상을 입은 일명 ‘이티 할아버지’ 고 채규철 씨는 ‘두밀리자연학교’를 세웠다. 화상 자국이 역력한 흉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아이들을 좋아하여, 아이들도 채규철 씨를 잘 따랐다고 한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마음임을 몸으로 입증한 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채규철 씨와 같은 상근기의 불자가 못 된다. 중근기, 하근기의 중생들에게 바로 붓다가 될 것을 요구하면, 아예 도망가버릴 수 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수승한 제자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수행을 요구한 반면, 중근기, 하근기의 제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엄격하였다.

상근기보다는 중근기, 하근기가 태반일 성형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근기의 불자가 감당할 수 있는 교법 그대로를 실행하라고 하는 것 또한 불교적이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성형에 대한 불교적 처방은 획일적일 수 없다. 외모로 너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어떤 부분만 성형하여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외모보다는 마음’이라는 불교의 교법보다는 성형이 이 사람을 더 위하는 것이다. 성형을 무조건 불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금할 수만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형문화에 대한 불교의 대응은 복수적일 수밖에 없다.

성형문화에 대한 불교의 대응을 당사자의 근기에 맞추어 복수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성형을 다 인정할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성형 이후에 대한 자신의 책임 문제 등에 대한 검토가 또한 필요하다. 필자는 이 논의와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된 성형은 자살까지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형은 성형만 떼 내어 검토되기보다는 외모 가꾸기라는 큰 틀에서 다이어트, 피어싱 등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다이어트로 인한 거식증, 피어싱으로 인한 부작용 등 외모 가꾸기가 질병까지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토론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밝히자면, 불교의 성형과 외모 가꾸기 인정 선을 결정하는 잣대는 ‘건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 자신감이 회복되었다 한들 그 부작용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자신감은 일시적인 것이고 평생을 또 다른 고통에 시달려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턱뼈, 종아리뼈를 깎는 것이 나중에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전문적 토론과 정보 제공은 거의 전무한 채, 고통과 흉터 없이 턱뼈를 깎을 수 있다는 광고만 즐비하다. 하근기, 중근기의 중생에게는 ‘외모는 내 것이 아니니 초연하라’는 붓다의 가르침보다는 성형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 건강상의 위해성에 대한 과학적 정보가 중생으로 하여금 성형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성형문화를 불교가 접근해야 하는 사회문제로 본다면, 이런 과학적 토론과 정보 제공의 장을 마련하는 것 또한 불교가 해야 할 몫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계가 성차별에 좀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남성 성형 인구도 생겨나고 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형은 남성의 시선에 종속된 여성문제이다. 즉 사회의 가부장성을 질문하고 이의 변화가 없이는 성형이 극성하는 문화 또한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사회의 성 불평등 문화 시정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여성으로서 삼종지도 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없었던 부처님 생존 당시에 여성이 가정을 버리고 출가를 해도 허용하였고, 이들의 공동체 비구니 승단을 인정한 붓다는 지금의 눈으로 봐도 근본적인 성평등론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계의 비구니 팔경법, 교단 내 성차별 논란(옥복연, 2013)을 쳐다보면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대중들에게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성 평등 감수성에 관한 한 세속의 대중들과 사회는 이미 저 앞에 가고 있는데 훈고학적으로 과거의 계율에 얽매여 고루한 성차별적 계율과 종단 질서를 부처님 법으로 옹호하고 있는 불교계의 리더십의 한계는 대중들에게 너무나 뚜렷이 각인된다. 성 평등은 전 세계인이 합의하는 보편적인 인권가치이다. 이 인권가치가 사회 제도 곳곳에 구현되어 가고 있는 와중에 불교계가 유독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상이 오래 지속될 수록 불교는 젊은 층에게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성형문화에 대한 불교적 토론과 개입은 불교계의 젠더 문화에 대한 토론,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5. 나가는 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수승하다 한들, 현실 삶에 적용되는 위력을 갖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붓다는 우리가 온갖 번뇌 망상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길, 길을 걷는 여정에서 옆 길로 새지 않고 목적지를 향한 바른길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고 결국은 사라지고 소멸하고 말 것이며,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반복되는 고(苦)의 다발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어떤 재앙이나 노쇠도 앗아가지 못하는 일관되게 수행한 마음의 힘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형문화의 극성은 붓다의 시선으로는 당연히 번뇌와 고통의 다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도들도 실제 삶에서 성형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교도가 천만이 넘는 사회이지만, 성형문화는 갈수록 극성하고 심지어 산업적 선(善)으로까지의 자기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필자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불교 가르침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훈습되게 하는 문화의 확대−대학 캠퍼스, 회사나 아파트나 마을 근처의 선방, 미혼 시절이나 임산부 시절에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마음공부나 (예비)부모 강좌−를 제안하였다. 다만 우리 모두가 한결같은 붓다가 아님을 고려하여 성형문화에 대해 근본주의적 처방만 강조해서는 안 됨 또한 강조하였다.

어떤 중근기, 하근기의 중생에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깨닫기까지의 오랜 수행의 여정보다는 성형을 통한 자신감 회복이, 이 자신감도 망상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필요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대중이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건강’을 준거점으로 성형문화를 성찰하게 하는 과학적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중근기, 하근기의 대중이 성형을 시도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장기적으로는 대중이 생활 속에서 마음공부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가는 노력과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성하는 성형문화를 무엇보다도 성차별 문화의 일부로 보고 불교계가 불교계 안팎의 성차별 문화에 좀 더 민감하고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인간 평등도 아닌 만물, 일체중생의 불성을 인정하는 붓다의 만물평등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교단 내 성차별 관행, 사회의 성차별에 둔감하고 그 변화를 위해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 현 불교계가 성형문화라는 ‘불타고 있는 집’에서 대중을 구출할 수 있는 119 소방대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

 

김정희 / 살림여성문화운동 단체 가배울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동 대학원 여성학과 졸업(여성학 석사, 박사). 사단법인 공동육아연구원 부원장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전임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생명여성정치의 현재와 전망》 《불교, 여성, 살림》 《남도여성과 살림예술》 등이 있다. 남도생협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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