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몸, 몸의 불교

1. 나는 몸이다, 또는 나는 몸이 아니다.

이거룡 
선문대
통합의학대학원장

다소 거친 이분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몸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나는 몸이다’이며, 다른 하나는 ‘나는 몸이 아니다’이다. 이 중에서 후자는 수행의 핵심이다. 나와 몸을 동일시할 때 업(業)이 있고 고통이 있으며, 수행은 몸으로부터 나의 탈(脫)동일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몸이 아니라는 것은 간단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의 몸이 아프다”고 말할 때, 몸은 나에게 외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이며, 또한 나와 몸의 관계가 소유의 관계로 인식된다. 만일 몸이 나에게 외적이라면, 나와 몸의 관계가 소유의 관계라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와 같이 나에 대한 몸의 관계가 대상 또는 소유의 관계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또한 몸에 대한 인식은 그 이외의 다른 객관적 대상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측면을 지닌다. 다시 말하여 내가 나의 몸을 대상으로 또는 소유관계로 인식하는 것은, 내가 나의 책상을 나의 대상으로 또는 나의 소유로 인식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몸은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그럼에도 나에 대하여 완전히 외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심지어는 몸이 곧 나라는 생각도 가능하며, 오히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지금 세간의 큰 흐름이 아닌가 한다.

물론 몸이 전부라는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척점에 수행전통이 있다. 수행은 ‘나는 몸이 아니다’를 깨닫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 과정에서 몸 자체를 부정하는가, 몸을 적극적인 방편으로 삼는가, 또는 몸 자체를 긍정하고 해탈하는 몸을 인정하는가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면 그렇다. 시대와 사상 학파에 따라서 때로는 몸을 긍정하는 전통이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몸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탈속적인 경향이 현저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두 전통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몸 긍정이냐 또는 몸 부정이냐의 차이는 몸 자체가 지니는 양면성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여 몸은 업과 윤회의 원인인 동시에 업과 윤회를 멸하고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몸의 두 가지 측면 중에 어떤 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몸 부정 또는 몸 긍정의 사고방식이 부각되는 것이다. 인도 정신사를 통하여 볼 때, 대체로 불교는 몸과 세간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나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측면이 강했다. 몸은 “뼈로써 성곽을 이루고 살과 피로 포장이 되었다. 그 안에 늙음과 죽음 오만과 거짓이 도사리고 있다”(《법구경》 150). 이에 비하여 요가(yoga)는 몸을 해탈의 적극적인 도구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며, 딴뜨라(tantra)는 해탈하는 몸을 상정한다. 여기서는 주로 몸의 긍정적인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요가와 딴뜨라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 몸, 해탈에 이르는 도구

인도 수행전통에서 몸은 궁극적으로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몸은 해탈을 위한 도구로서 의미가 강하다. 몸을 가리키는 용어, 즉 샤리라(śarīra) 또는 데하(deha)는 몸이 인간의 참된 본질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요가의 형이상학적 토대인 상키야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 몸(śarīra, 또는 deha)은 단지 육체(body)뿐만 아니라 마음(mind)도 포함하는 말이며, 이 둘 사이에 어떤 존재론적 구분도 없다. 다만 몸(육체−마음)과 진아(眞我, ātman)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 있을 뿐이다. 서양철학적 전통은 육체와 마음을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요가−아유르베다−딴뜨라 전통은 육체와 마음을 심리−물질적 기능을 지니는 연속체로 간주한다.

몸은 세계와 직접 부딪치는 물질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세계를 감지하고 향수하는 정신 기능도 포함한다. 감정과 욕망뿐만 아니라 사유 과정도 몸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근본원질(prakṛti)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런 의미에서 둘 다 물질적이다. 육체는 마음의 외피며 마음은 육체의 내면이다. 육체는 의식적이며, 의식은 육체의 행위로 간주된다. 육체−마음 연속체, 즉 몸은 진아가 아니다. 서양철학 전통에서는 육체와 마음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심한다면, 요가−아유르베다−딴뜨라 전통은 육체−마음 연속체와 진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심한다. 이 과정에서 요가−아유르베다−딴뜨라의 관심은 구원론적이다. 즉 해탈과 관련하여 몸이 지니는 의미와 역할에 초점을 둔다.

둘째, 몸, 즉 육체−마음은 업과 윤회가 적용되는 당체이다. 몸은 업과 관련을 지닌다. 몸이 있으므로 업이 있고 업이 있으므로 몸이 있다. 이런 점에서 몸은 부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또한 업을 없애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도구이다. 이 점에서 몸은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사실 인도 수행전통이 두 가지 경향, 즉 몸과 욕망을 긍정하는 전통과 부정하는 전통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바로 몸이 지니는 양면성 때문이다. 몸을 업의 원인으로 보는 경우에는 몸의 욕구를 억누르는 탈속적인 고행전통이 강조되며, 이에 비하여 몸을 해탈의 도구로 보는 경우에는 세속의 삶이 주는 즐거움과 가치를 인정하면서 적극적으로 몸을 활용하는 입장이 된다.

빠딴잘리(Patañjali)의 고전요가에서 몸은 행위의 토대이며, 행위는 해탈로 이끌거나 또는 해탈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사람은 심리−육체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을 지니며, 요가수련은 이 세 차원 모두의 정화와 관련된다. 요가는 인간의 심리−육체적인 차원을 정화함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질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심리−육체적인 건강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을 분별함으로써 마침내 독존(獨存)을 성취하자는 것이 고전요가의 목적이다.

《요가수뜨라(Yoga-sūtra)》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독존은 근본원질과는 다른 순수의식으로서 인간본질의 해방이다. “독존이란 수수정신을 위함이라는 목적이 없게 된 성분들이 전변 이전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혹은 지성의 능력(정신력)이 자신의 본성에 확립되는 것이다.”(《요가수뜨라》 4.34)
요가의 8지(支)를 수련하면, 물질과 의식으로서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지가 일어난다. 분별지는 해탈의 성취에 필수적이다. 대개의 인도 수행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가는 고차적인 지식을 해탈에 이르는 열쇠로 간주하지만, 그럼에도 요가는 이와 같은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몸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비록 육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거칠고 낮은 차원의 물질(에너지)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영적 성장에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이다.

《요가수뜨라》에서 요가가 ‘마음작용의 억제’로 정의되는 것처럼, 고전요가는 마음(citta)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결코 육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비록 고전요가에서 몸과 심리적−육체적 건강이 도구적이며 궁극적인 가치는 아니라 할지라도, 몸과 건강은 중요한 구원론적 기능들을 지닌다. 요가에서 몸은 의미 있는 영적 진전이 일어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된다. 엘리아데는 말한다. “자유가 성취되는 것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몸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는 신들은 인간적인 조건보다 열등한 존재의 상황에 있으며,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고전요가에서 ‘마음작용의 억제’를 요가의 본질로 규정하면서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육체와 마음을 연속적인 다층구조로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관련을 지닌다. 즉 마음은 숨을 매개로 하며 육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작용의 억제를 위해서는 호흡과 육체의 정화가 필수적이다. 또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유기적인 관련을 지닌다. 따라서 요가수련은 수행자와 환경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고요해야 하고, 호흡이 고요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고요해야 하며, 마음−호흡−육체가 고요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고요해야 한다.

육체와 마음을 연속적인 다층구조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이미 우빠니샤드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는 《따잇띠리야우빠니샤드》 제2장에서 설해진 오장설(五藏說)이다. 즉 진아를 중심으로 안에서부터 환희(ānanda)로 이루어진 몸, 식(識, vijñāna)으로 이루어진 몸, 의근(意根, manas)으로 이루어진 몸, 음식(anna)으로 이루어진 몸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겹(kośa)의 몸은 진아가 경험적 자아(ego, jīvātman)로 현현하는 다섯 겹의 에너지(물질) 차원이기도 하다.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은 육체를 구성하며, 가장 거칠고 성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가장 겉몸을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명명한 것은, 육체의 유지는 기본적으로 음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음식이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그 안에 있는 생기(호흡)나 의근 및 식은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요가전통에는 “사람은 먹는 대로 생각한다.”는 격언이 있으며, 식이요법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이 육체에 해당한다면, 생기(生氣)로 이루어진 몸은 기체(氣體)에 해당한다.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보다는 미세한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의근이나 식으로 이루어진 심체(心體)보다는 거칠고 성긴 에너지로 이루어진 몸이다. 주로 호흡과 관련되며, 육체와 심체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역할이 핵심이다. 육체가 분주해지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면 마음도 급해진다. 역으로 마음이 급해지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면 육체도 분주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생기로 이루어진 몸은 육체와 심체를 잇는 연결고리이다.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과 생기로 이루어진 몸은 조대신(粗大身)에 해당한다.

의근으로 이루어진 몸은 생기로 이루어진 몸의 안쪽에 위치하며, 저급한 차원의 마음이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외계의 감각 자료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일차적 관문이다. 흔히 의근은 외계의 감각자료가 비추어지는 스크린에 비유된다. 의근으로 이루어진 몸에서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아직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들여진 느낌, 동기, 인식 등의 심리적인 활동영역이다. 의근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감각자료에 대한 판단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받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의근이라는 스크린에 비친 감각자료는 아만과 통각(統覺)을 통하여 분석되고 판단된다.

식(識)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작용이다. 근본원질에서 생겨나는 첫 산물이며, 3구나 중에서 순질이 현저한 마음 상태이다. 흔히 통각, 직관, 지성으로 번역되는 것처럼, 마음의 가장 고차적인 층이다. 통각은 의근에 의해 받아들여진 감각자료를 판단하고 식별하는 역할을 한다. 식(識)은 의근 안에 있으면서 의근에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순수의식의 청정한 빛을 반영하고 객관적 실재로부터 주체를 분별하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識)은 순수의식이 아니며, 순수의식의 껍질에 불과하다. 의근으로 이루어진 몸과 식(識)으로 이루어진 몸은 세 겹의 몸 중에서 미세신(微細身)에 해당한다.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차원은 환희로 이루어진 껍질이다. 환희로 이루어진 껍질은 식(識)으로 이루어진 껍질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은 기쁨을 머리로 지니고 만족을 오른팔로, 즐거움을 왼팔로 지닌다. 지복은 그 심장이며 브라흐만은 그 토대이다. 아난다라는 말은 흔히 조건적인 감성들을 초월하는 절대적 지복을 가리키지만, 보다 낮은 차원의 기쁨을 가리키기도 한다. “개별성이 환희로 이루어진 껍질에 놓여 있는 한, 본질적으로 고통과 즐거움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진아는 고통을 겪고 즐거움을 향수하는,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으로 오해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환희로 이루어진 몸은 단지 불행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한정된 엑스터시의 외양으로 진아의 본질을 가린다. 《따잇띠리야 우빠니샤드》가 제시하는 것처럼, 브라흐만이 각 껍질의 토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난다의 토대이다. 환희로 이루어진 몸은 원인신(原因身)에 해당한다. 환희로 이루어진 몸 안에 진아가 있다.

위에서 논의한 다섯 겹의 몸은 진화론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가장 겉몸인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은 의식이 없고 무감각한 층으로 진화의 가장 낮은 물질적 차원이다. 생기로 이루어진 몸은 생리적인 차원이다. 그것은 식물성 음식물을 피와 살과 뼈로 전환시킨다. 식물성 음식물은 살아 있는 동물 세포로 바뀐다. 생기(生氣)는 육체의 정수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의 차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의근으로 이루어진 몸은 심리적인 차원이다. 의근은 물질이나 생명과는 다르다.

그것은 저차원의 동물과 인간이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인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식(識)으로 이루어진 몸은 지적인 차원, 즉 이성의 차원이다. 이 차원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그것은 자아의식을 지니지 않는 동물과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이 차원 역시 인간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여전히 이원성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몸의 가장 내밀한 층은 환희로 이루어진 몸, 즉 개별성이 사라진 지복의 차원이다. 그것은 존재의 최고 차원이며, 주객 관계의 지적 차원을 초월한다.

여기서 각 겹의 몸이 그 바깥에 있는 몸의 ‘체화된 자아‘로 이해된다는 것은, 각 겹의 몸이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깊은 층으로 들어갈수록, 더욱더 진화된 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차원의 본질이다. 바깥으로부터 더욱 안쪽에 있는 층일수록 보다 미세한 의식의 차원이며, 그 중심에 진아가 있다. 진아는 여러 겹의 몸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참된 본질을 모르고 있으며, 바깥의 측면들에 관심으로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한정시킨다.

이와 같이 몸을 다층 구조로 설명하는 주된 목적은 그릇된 자기 동일화의 다양한 차원을 상술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여러 겹의 몸은 흔히 진아에게 그릇 귀속되어서 진아의 참된 본질을 모호하게 하는 속성들 또는 기능들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은 우리가 유한한 육체와 영원한 진아를 그릇 동일화하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나머지 4겹의 몸에 대해서도 동일한 해석이 가능하다. 요가 수련의 과정은 이와 같이 진아에게 잘못 귀속되어서 진아의 본질을 흐리는 속성들을 한 겹씩 벗겨나가는 과정이다. 본래 진아의 것이 아닌 모든 속성이 정화되고 탈각될 때, 진아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요가수뜨라》의 8지(支) 요가는 연속적 다층구조로 이루어진 몸(육체−호흡−마음)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연속적인 상호 관련을 전제로 한다. 8지(支) 중에서 금계와 권계는 도덕적 윤리규범이다. 특히 금계는 수행자와 환경의 조화로운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규범으로 볼 수 있다. “불살생이 확립되면, 이 사람의 앞에서는 적의(敵意)를 버린다.”(《요가수뜨라》 2.35). 즉 불살생계를 합당하게 실천하면, 수행자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서로 적대적이 아니라 조화로운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좌법(坐法)은 주로 육체적인 정화와 관련되며, 조식(調息)은 호흡조절을 통한 생기(生氣)의 확장이다. 제감(制感)은 외계대상으로부터 감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응념(凝念)과 선정(禪定)과 삼매(三昧)는 마음의 정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지니는 총제(總制)이다.

이와 같이 고전요가에서는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몸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진아의 해탈을 위한 방편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고전요가의 수련체계는 체화된 존재 상태를 초월하기 위하여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전요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상키야까리까(Sāṁkhya−kārikā)》에 따르면, 근본원질(몸)은 순수의식(영혼)의 경험과 해탈을 위하여 있다. “대(大)로부터 차별의 원소에 이르기까지 이 원질이 지어낸 것은 각각의 개아의 해탈을 위함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위한 듯하지만, 타자(他者)를 위한 작업이다.”(《상키야까리까》 56). “주인인 순수의식은 관찰을 위해 소유물인 지각대상과 결합한다. 그 결합을 통해 지각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곧 향수(경험)이고, ‘보는 자(순수의식)’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 곧 해탈이다.” 순수의식은 마치 자신의 소유물 같은 대상과 결합한다. 순수의식과 근본원질의 결합은 인식을 생성하며, 그 인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릇된 인식, 즉 즐거움과 고통에 대한 경험이며 다른 하나는 바른 인식, 즉 독존이다. 따라서 경험과 독존은 순수의식과 근본원질의 결합으로 일어난다. 독존이 성취될 때, 그 둘은 분리된다.

연속적 다층구조로 이해되는 몸의 의미는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즉 육체의 정화가 마음의 고요함을 도모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역(逆)도 타당하다. 《요가수뜨라》 3.47에서는 요가 수련을 통하여 성취되는 몸의 완전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완전한 몸은 아름다움, 우아함, 강함, 금강석같이 견고함을 지닌다. 그리고 3.45-46에 따르면, 이와 같은 상태는 조대 요소들과 미세 요소에 대한 총제(saṃyama)를 통하여 성취된다. 이것은 몸의 완전이 명상수련의 결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과정을 단지 일방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몸이 완전해질수록 보다 수승한 총제가 이루어지고, 또한 보다 완전해진 총제는 보다 완전한 몸을 가능하게 한다. 즉 몸의 완전해짐에 따라 총제가 심오해지는가 하면, 총제가 심오해짐에 따라 몸도 더욱 완전해진다.

《요가수뜨라》에는 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보인다.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 다른 사람들의 몸과의 접촉을 피함은 육체적 정화로부터 생겨난다.” 즉 육체가 정화되면, 저절로 자신의 육체에 대한 혐오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화는 우리가 그것의 불완전을 알게 하며, 그것에 대한 집착의 터무니없음을 알게 한다. 요기의 이와 같은 몸에 대한 혐오의 함양은 다른 사람들과의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게 되고 내면을 향한 집중이 증가된다. 요가 문헌에서 육체에 대한 이욕(離慾)이 강조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게란다 상히따(Gheraṇḍa−saṃhita)》 7.3은 해탈이란 육체로부터 마음을 분리하고, 최고아(paramātman)에 그것을 결합함으로써 성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욕 또는 분리는 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해탈에 이르는 도구로서 몸에 대한 중요성을 의미한다.

3. 해탈하는 몸

인도사상사에서 육체에 대한 완전한 포용은 딴뜨라의 전체주의적 형이상학이 이루어낸 직접적인 결과로 봐도 무방하다. 엘리아데(Eliade)는 딴뜨라의 몸 이해를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정리한다. 하나는 해탈의 실현에 필수적인 생명에 대한 총체적 체험을 중시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인체를 본래의 신성한 몸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인체 통달 의지이다. 전자는 대부분 딴뜨라 학파들이 수용하는 입장이며, 후자는 특히 하타요가와 관련하여 크게 성행했다. 딴뜨라에 토대를 둔 하타요가에서 나디(nāḍi), 짜끄라(cakra), 꾼달리니(kuṇḍalinī) 개념을 중심으로 한 비의적 생리학이 크게 발달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인체에 대한 통달을 위해서는 우선 이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딴뜨라에서 몸에 대한 완전한 포용이 가능해지는 형이상학적 토대는 상키야-요가의 영혼−물질 이원론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된다. 상키야-요가에서는 정신적인 원리로서 뿌루샤(puruṣa)와 물질적인 원리로서 쁘라끄리띠(prakṛti)가 서로 다른 것으로 상정되지만, 딴뜨라에서는 이 둘의 구분을 부정한다. 육체와 마음의 존재론적 연속뿐만 아니라, 몸(육체−마음)−영혼의 존재론적 연속을 주장한다. 몸은 영혼의 존재론적 연속이기 때문에 영혼과 마찬가지로 청정하고 신성하며 또한 의식적이다. 몸은 본질적으로 “신이 사는 세상”이다. 물질적인 몸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우주의 제1 원인인 쉬바와 존재론적인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딴뜨라 유파의 사상이 종합적으로 체계화된 카슈미르 샤이비즘(Kaśmir Śaivism, 10~11세기)에서 우주의 유일한 원인은 의식(citi)이다. “의식은 모든 개별자의 본질이지만, 물질적인 프라나(prāṇa)로 변형되어, 마야(māyā)의 단계를 거치면서, 우주적 의식(saṃvit)으로서 진성(眞性)을 숨기고, 프라나샥티(prāṇa-śakti)로 점차적으로 응축하여 붓디(buddhi), 신체 등의 수준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제1 원인인 의식은 “공작의 난황(mayūrāṇḍarasanyāya)”에 비유된다. “마치 공작의 아름다운 깃털 등이 난황 속에 나뉘지 않은 상태로 있듯이,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의식 속에서 완전한 통일과 분리되지 않는 한, 한 덩어리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딴뜨라는 근본원질과 몸을 비(非)의식적인 것으로 보는 상키야-요가의 입장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세계를 환영(幻影) 또는 브라흐만(Brahman)보다 덜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베단따(Vedānta)의 견해와도 다르다. 즉 딴뜨라는 세계 내의 존재들이나 몸에 대하여 보다 저급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거나 그것을 단지 브라흐만의 가현(假現)으로 보는 베단따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딴뜨라에 따르면, 세계와 인간은 브라흐만(쉬바)과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지니며, 단지 인간의 의식만이 아니라 심리−육체적 복합체로서의 몸도 브라흐만이다. 또한 상키야-요가에서와는 달리 딴뜨라에서 근본원질은 비(非)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브라흐만의 일부로서 근본원질은 의식적이며, 브라흐만은 근본원질에 의해서 자신을 현현된 세계의 개별 사물들로 나타낸다. “개체적 의식이나 개체적 실체는 우주적 의식(saṃvit, citi)의 응축”이다. 세계 내의 모든 현상적 개체들은 쉬바(우주적 의식)의 응축(saṃkoca)일 뿐,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딴뜨라는 몸을 부정하는 입장과는 달리 육체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요가전통이 육체를 해탈에 이르는 도구로 간주한다면, 딴뜨라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를 신성한 창조의 일부로 간주하며, ‘해탈할 수 있는 몸’을 상정한다. 인도사상사에서 육체에 대한 완전한 포용은 딴뜨라의 전체주의적 형이상학이 이루어낸 직접적인 결과이다. 딴뜨라는 현상세계를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가 그대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현상세계가 실재라면 몸 또한 실재이며, 현상세계에 본질적인 신성이 있다면 몸에도 마찬가지로 신성이 깃들어있다는 것이다. 몸은 본질적으로 “신이 사는 세상”이다.

이와 같이 딴뜨라는 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몸으로 사는 세간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상은 몸의 연장이다. “인간의 삶은 자아실현을 위한 플랫폼 혹은 사다리와 같기 때문에 아주 고귀하다는 것이다.” “얻기 어렵고 해탈에 이르는 사다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를 얻고 나서, 참 자아로 건너가지 않는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은 없다.” 인간의 삶은 이와 같이 귀중하지만, 또한 그것은 너무 약하고 짧다. 따라서 해탈을 위한 모든 수련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완전한 깨달음과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우선 지금 여기의 육체적 존재에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을 쓰러뜨린 것을 짚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딴뜨라의 전제이다. “무지한 자에게 이 몸은 끝없는 고통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에게 이 몸은 무한한 지복의 원천이다.” 비록 실재에 대한 견해가 그릇된 자기 동일화에 물든 자가 몸에 구속된 경험을 한다 할지라도, 지혜가 꽃피어남으로써 그 속박이 느슨해지고 마침내 몸은 고통의 원천이 아니라 지복의 원천으로 전환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몸을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입장은 딴뜨라 전통이다.

베다 전통과 마찬가지로, 딴뜨라의 궁극적 관심사는 영적 실현이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와 절대자의 관계에 대한 딴뜨라의 접근은 물질과의 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물질과의 통합을 통해서 물질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딴뜨라에서 상정하는 해방은 이생에서의 영적 웰빙을 포함한다. 딴뜨라 철학은 생해탈(生解脫)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딴뜨라에서 해탈은 모든 인간적인 조건으로부터 ‘신비적인’ 해방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과도 관련된다. 딴뜨라는 이생과 내생 모두에서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이 두 생 모두로부터 해탈을 주장한다.

몸이 의식을 지닌다는 딴뜨라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인도사상사에서 혁명적이며, 현대물리학의 결론과 상통하는 측면을 지닌다. 고전요가는 물질이 비의식적이며, 비물질로서 진아의 실현을 목표로 하지만, 딴뜨라 요가는 해탈의 도구로서 몸을 사용하며 몸의 본질을 의식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딴뜨라의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입장은 인도 수행전통에서 몸 긍정의 사유방식이 수용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딴뜨라는 근본원질과 몸을 비의식적인 것으로 보는 상키야-요가의 입장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세계를 환영(幻影) 또는 브라흐만보다 덜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베단따의 견해와도 다르다. 즉 딴뜨라는 세계 내의 존재들이나 몸에 대하여 보다 저급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거나 그것을 단지 브라흐만의 가현(假現)으로 보는 베단따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딴뜨라에 따르면, 세계와 인간은 브라흐만과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지니며, 단지 인간의 의식만이 아니라 의식과 심리−육체적 복합체가 함께 브라흐만이다. 몸은 공간 속에 인간의 거소이며, 인간의 비물질적인 측면들보다 덜한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 위상과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물질과 몸에 대한 딴뜨라의 긍정적인 입장은 몸에 대한 집착이나 탐닉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딴뜨라는 물질적 본질의 통일과 성화(聖化)를 ‘집착에 대한 해독제‘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집착은 물질이나 몸이 ‘나와 다른 것‘이라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착은 나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만 집착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물질과 몸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미 ‘나’이거나 ‘나의 것’인 것에 집착을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인도 수련전통과 마찬가지로, 딴뜨라 또한 해탈이 ‘진아−지식(ātman-pratyabhijñā)’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진아는 이원적 주관−객관의 관계에서 대상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주관(주체)으로 알려지며, 딴뜨라 수련은 진아−지식의 획득을 도모한다. 딴뜨라에서는 진아−지식을 통한 진아 실현(해탈)이 궁극적 해탈과 현생에서의 즐거움을 모두를 준다고 말한다. 고전요가는 해탈이란 진아의 본질을 순수한 ‘의식’으로 깨닫는 것으로 간주하며, 해탈은 고통이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지복도 없는 상태로 규정한다. 이에 비하여 딴뜨라는 베단따와 마찬가지로 해탈의 상태를 ‘존재−의식−지복’의 상태로 간주한다. 카슈미르 샤이비즘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비나바굽따(Abhinavagupta)에 따르면, “인간 ‘의식의 본질’이 자유이자 지복이고, 그 의식이 신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은 기쁨을 매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베단따 전통에서와는 달리 딴뜨라 수행에서는 육체가 해탈의 진아−지식에 핵심 위치에 놓인다.

고전요가에서도 해탈의 수단으로 몸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딴뜨라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절대자는 육체 안에서 그리고 육체를 통하여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딴뜨라 수련의 핵심 교의이다. 즉 고전요가에서도 해탈이 몸을 ‘통하여(through)’ 실현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몸 ‘속에서(in)’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은 강조되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딴뜨라에서는 몸 ‘안에서’ 실현되는 해탈이 강조된다. “신성함은 오직 ‘거룩한 몸’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계는 쉬바의 현현이며, 인간의 몸은 쉬바가 사는 거처이다. 몸의 진리를 깨닫는 자는 비로소 우주의 진리를 알게 된다. 딴뜨라에서 몸은 인도 전통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미 베다 전통에서도 물질의 중요성과 몸을 긍정하는 사고방식이 나타나지만, 딴뜨라에서는 몸 긍정의 사고방식이 절정에 달한다. 이로써 우빠니샤드의 금욕주의는 힘을 상실한다. 딴뜨라에서 몸은 더 이상 고통의 원천이 아니라 해탈을 위한 가장 믿을 만하고 효과적인 도구로 전환된다.

고전요가의 몸 이해와 비교할 때, 딴뜨라의 인간 이해에 나타나는 쉬바−샥띠(Śiva−Śakti) 또는 남성−여성의 양극(兩極)구조는 매우 특징적이다. 딴뜨라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남성 원리인 쉬바와 여성 원리인 샥띠의 거처이며, 딴뜨라 수행의 목적은 이 두 원리가 인체 안에서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딴뜨라에서 인체의 남성−여성 양극구조는 궁극적 실재의 양극구조와 관련된다. 즉 궁극적 실재가 빠라쉬바(Para-śiva)−빠라샥띠(Para-śakti) 양극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쉬바의 응축인 인체 또한 쉬바−샥띠 또는 남성−여성 양극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와 인체 모두에서 쉬바와 샥띠는 하나 속의 둘 또는 동일한 실재의 양극이다. 쉬바는 순수지성(jñāna)이며 샥띠는 순수 에너지(kriyā)이다.

딴뜨라의 쉬바−샥띠 양극구조는 상키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초월적 인격신의 수용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샤이바 싣단따(Śaiva Siddhānta)는 그 철학적 접근에서 상키야와 동일하다. 다스굽따(Dasgupta)에 따르면, 무활동 상태의 쉬바 위에 서 있는 난폭한 깔리(Kali)의 딴뜨라적인 이미지는 다이내믹한 쁘라끄리띠와 수동적인 뿌루샤라는 상키야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상키야와 딴뜨라는 해탈에 대한 입장에서 차이를 보인다. 딴뜨라는 남성 원리(쉬바)와 여성 원리(샥띠)의 합일을 추구하지만, 상키야는 쁘라끄리띠로부터 뿌루샤의 퇴거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쉬바−샥띠를 지성−에너지로 본다는 점에서 딴뜨라의 궁극적 실재와 인체가 지니는 양극구조는 분명히 상키야의 뿌루샤−쁘라끄리띠 이원구조를 닮았다. 그러나 후자에서 뿌루샤−쁘라끄리띠는 기본적으로 ‘정신−물질 이원구조’임에 비하여 전자에서는 쉬바−샥띠가 ‘남성−여성 양극구조’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러면 상키야의 뿌루샤−쁘라끄리띠 이원구조와 딴뜨라의 쉬바−샥띠 양극구조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스굽따(Dasgupta, Surendranath)에 따르면, 상키야 사상가들이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를 궁극적 원인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딴뜨라 문헌의 언급된 쉬바−샥띠 개념에 의거한 것이다. 즉 《쉬바-마하뿌라나(Śiva-mahāpurāṇa)》의 〈까일라사상히따(Kailāsa-saṃhitā)〉에는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남성 부분과 여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제1 원인자 또한 반드시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의 결합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언급이 있으며, 세계의 궁극적 원인을 남성−여성으로 보는 이 개념을 취해서 상키야의 사상가들이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를 세계의 궁극 원인으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단지 합리적인 토대 위에 확립하려 했으며, 유신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스굽따는 우빠니샤드의 브라흐만(Brahman)과 남성(쉬바)−여성(샥띠) 양극구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브라흐만은 베다들에서 존재(sat)와 의식(cit)과 지복(ānanda)의 통일인 것으로 간주되며, 그것은 중성(neuter gender)으로 있다. 브라흐만에 묘사된 그 존재는 존재에 대한 모든 부정이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존재의 중성적 성격은 그것이 뿌루샤라는 사실을 나타내며, 이 뿌루샤는 또한 조명하는 성질을 지닌다. 존재−의식−환희의 통일인 그 순수정신은 여성 부분을 나타낸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으로 간주되는 그 두 부분은 조명하는 부분(prakāśa)과 순수정신이며, 이 둘은 함께 세계의 생성 원인들이다. 그러므로 존재−의식−지복의 통일 속에서 우리는 쉬바와 샥띠의 통일을 지닌다. …… 최고아(paramātman) 속에는 쉬바 측면과 샥띠 측면 모두가 있다. 지복이 있는 것은 바로 쉬바와 샥띠의 결합에 의해서이다. 아뜨만은 순수정신이며, 이 의식은 그 안에 전지와 전능을 가진다.”

즉 남성 원리는 정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 나타나지 않은 의식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딴뜨라 요가에서 쉬바라고 하며 곧 남성으로 개념화하였다. 반면에 이 쉬바와 상대적인 것을 샥띠라고 하는 동적이고 창조적인 여성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정적인 남성 원리인 뿌루샤와 동적인 여성 원리인 쁘라끄리띠라는 이 두 원리의 거처이며 탄트라 수행자의 목적은 이 두 원리가 육체 안에서 불이의 절대적 합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남성−여성 양극구조 인체관은 딴뜨라에 의거하고 있는 하타요가 문헌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쉬바상히따(Śiva-saṃhitā)》(2.1-36; 5.132-139)에 따르면, 요기의 인체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상호 침투 혼융된 신성한 공간 또는 내적 사원이다. 이와 같은 내적 결합 또는 합일 체험은 여러 하타요가 행법들에 의하여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고차적인 수행을 통하여 요기의 쁘라나-샥띠(prana-sakti)는 짜끄라(cakra)들을 관통해서 정수리의 사하스라라(sahasrāra)짜끄라에 있는 쉬바와 궁극적인 결합을 성취한다. 요기의 척추 기저부(mūlādhaāra-cakra)에 잠들어 있는 꾼달리니(kuṇḍalini)-샥띠는 일깨워져야 하며, 수슘나-나디(suṣmṇā-nāḍi)를 통하여 정수리의 최종 목적지까지 끌어올려져야 한다. 하타요가 수행의 목표는 물라다라짜끄라에 있는 꾼달리니 샥띠와 사하스라라짜끄라에 있는 쉬바의 결합이라 해도 무방하다. ■

 

이거룡 / 선문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장(자연치유전공 교수). 인도 델리대학교(University of Delhi)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부총장(심신통합치유학과 교수)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아름다운 파괴》 《전륜성왕 아쇼까》 《이거룡의 인도사원 순례》 등이 있으며, 역서로 S.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전 4권) 《달라이라마의 관용》 등이 있다. 현재 요가학교 리아슈람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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