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몸, 몸의 불교

철학 공부를 하면서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게 되는 것과 몸을 주된 문제로 삼게 되는 것 간에는 그 동기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은 우선 철학적인 사유 자체가 지닌 반성의 구도 때문이다. 의식의 활동이 아니고서는 철학적인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아 철학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데에는 철학적인 사유 자체를 주된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철학 공부를 하면서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게 되는 동기는 자칫 철학 공부를 하는 자에게 은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아 철학적 사유를 펼쳐나갈 때, 철학하는 자의 사유의 시선은 의식을 자신의 ‘면전에’ 있는 객관적인 대상인 양 여겨 바라보고 있다. 설사 철학적 사유의 시선이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의식으로 향한다고 할지라도 그때 그 의식마저도 그렇게 객관적인 대상인 양 여겨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철학적 사유를 하면서 그 사유의 의식을 활동 그 자체로 놓아둔 채 대상화화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는다고 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의식만큼은 주제로 삼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근원적인 허방을 수반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아 이루어지는 철학적 사유의 자기기만적인 난관이 연출된다. 활동하는 자신을 대상화하면 자신을 워낙 다른 성격으로 변형시키게 되고,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활동 자체에 근원적인 누수(漏水)의 구멍을 허용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의식을 주된 문제로 삼아 철학적 사유를 올바르게 펼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길을 마련해 보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현상학의 비조 후설이다. 그는 이른바 판단중지를 통해 자연적 태도에 의거한 일체의 존재판단과 규정판단을 괄호로 묶는 현상학적-초월론적인(phänomenologisch-transzendental) 태도를 통해 확보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순수자아마저 넘어서서 이른바 ‘순수의식’으로 나아갔다고 여겼다.

후설이 말하는 순수의식은 어떤 방식으로도 대상화되지 않는 의식의 활동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의식의 지향성을 내세운 것이 대단한 위업이 되는 데에는, 의식이 실체가 아님을 역설함으로써 일체의 관념론적인 존재 근거를 제거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식이 대상화되었을 때 그 대상으로서 의식 역시 일종의 노에마로서 그런 노에마를 가능케 하는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순수의식은 ‘의식의 활동 자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라는 근원적인 사태를 지칭하기 위한 편의상의 이름이고, 그 자체 어떠한 규정적인 내용도 없고 따라서 의식이 대상화되는 일체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편의상의 이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혀 엉뚱하게 말하면, 후설이 말하는 순수의식은 의식 중심의 철학을 완결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달리 말하면 완전한 환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후설의 고백인 셈이다.

의식의 반성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의식(c1)에 대한 의식(c2)’ ‘c2에 대한 의식(c3)’ …… ‘cN-1에 대한 의식(cN)(N=∞)’이라는 무한퇴행의 형식을 띤다. 의식이 지닌 무한퇴행의 형식은 의식의 존재 자체가 의식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린다. 후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념적으로(ideally) 최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의 존재를 영점(零點, Nul Punkt)이라고 지칭했지만, 이는 의식이 의식작용 자체를 의식대상으로 삼아 자기 동일적인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지칭할 뿐, 의식의 존재 근거를 밝힌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의식의 존재 근거를 밝힌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면 의식 스스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의식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투명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말년에 이르러, 끝내 의식의 지향성을 포기하지 못한 탓에 초월론적인 주관성에 입각한다고 말하긴 했으나, 후설이 특히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이론적인 인식에 대한 생활세계의 근원성을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몸을 주된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의식이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그러니까 바로 앞에서 말한바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의식이 지닌 자기기만의 근본적인 난관을 아예 인정하고서 이를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전혀 새롭게 모색하기 때문이다. 의식 중심의 철학적 태도로 보면, 이는 일종의 철학적 패배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몸 중심의 철학적 태도로 보면, 그렇게 패배주의를 운위하는 의식 중심의 철학적 태도야말로 자기기만의 난관을 짐짓 도외시하는 일종의 사유의 파시즘을 고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 공부를 하면서 몸을 주된 문제로 삼는 데에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적인 불구 또는 절룩거림을 아예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몸 중심의 철학적 태도가 철학 자체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철학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따라서 헤겔의 ‘절대지’ 내지는 ‘절대정신’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철학적 사유의 완결성을 인간 존재의 완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 중심의 철학적 사유라 할지라도 그 자체 철학적 사유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활동 그 자체로서 의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가능성을 몸의 존재에서 찾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활동 그 자체로서 의식이 어떻게 몸에서 가능한가를 밝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예컨대 후설이 궁극적인 의식으로 본 현상학적−초월론적인 주관성으로서 순수의식이 어떻게 몸에서 가능한가를 밝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는 것이다. 후설이 말하는 순수의식을 그저 철학적 사유의 자기기만에 의거한 가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후설이 말하는 순수의식은 철학적 사유의 자기기만을 인정하고서 철학적 사유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의 그 한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몸 중심의 철학적 사유를 치밀하게 전개한 메를로퐁티가 “[현상학적] 환원의 가장 큰 가르침은 완전한 환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설은 환원 가능성에 대해 계속 새롭게 탐문했다.”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후설이 말한 순수의식을 아예 무시한 것은 다소 아쉬운 조처였다고 할 것이다.

후설이 말한 순수의식이야말로 완전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철학적 사유를 하는 의식을 활동 그 자체로 놓아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플라톤은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예컨대 그는 “지혜를 찾는 자는 누구나 철학이 자신의 혼을 사로잡자마자 그의 혼이 몸속에서 손과 발이 묶인 도리 없는 수감자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직접 실재를 보지 못하고 감옥의 창살을 통해 볼 수밖에 없고 전적인 무지에서 허우적거림을 알게 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몸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후설의 현상학적인 환원은 바로 이 같은 플라톤의 충고를 처음으로 철학적인 방법으로 정착시켜 제시한 셈이다. 그런데 메를로퐁티가 역설한 것처럼 그 길은 결코 완전한 길이 못 된다. 고등학교 시절 메를로퐁티의 제자였던 푸코는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몸의 감옥이다.”라는 언명을 통해 플라톤의 입장을 전격적으로 뒤집었다. 이때 푸코가 제시한 것은 철학적 사유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서, “지혜를 찾는 자는 누구나 철학이 자신의 혼을 사로잡자마자”라고 하는 플라톤의 생각을 뒤집어 철학이 자신의 혼을 사로잡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에 몰두한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지혜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은 못 된다는 것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인물들의 공통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맨 먼저 강력하게 역설한 인물이 바로 니체다. 그는 우선 “우리의 종교, 도덕, 철학은 인간의 데카당스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영혼이 몸을 경멸적으로 보았고, 그 당시엔 그러한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다. 영혼은 몸이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여 영혼은 몸과 대지로부터 벗어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 그 영혼 자신이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게 되었고, 그리고 잔혹함이 그 영혼의 환락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말해다오, 나의 형제들이여, 너희의 몸은 너희의 영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너희의 영혼은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 아니던가?” 그리고 아주 간명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깬 자, 아는 자들은 말한다. ‘나는 고스란히 몸이며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영혼이란 몸에 딸린 무엇인가를 위한 말일 뿐이다’라고.”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표현은 워낙 뛰어나지만 직관적으로 제시될 뿐이어서 날카로운 통찰의 실마리를 얻을 수는 있으나, 그가 경멸하는바 철학적인 사유 내에서 정확한 도정을 안내받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의식을 통해서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의식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뛰어난 결론적인 통찰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러한 통찰을 제시하는 ‘니체의 의식’이 지닌 역량을 내놓고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니체에 앞선 몸 철학의 선구라 할 수 있는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중된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몸은 동일 개체로서 어떤 때는 사유의 속성 아래에서 또 어떤 때는 연장의 속성 아래에서 생각된다.”라고 말하고, “정신은 몸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비록 평행론에 입각해 있긴 하지만 철학적 사유의 반성 가능성이 몸에 입각한 것임을 역설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이 언명들이 실체로서 신에 대한 직관적인 정의(定義)에서부터 도출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철학적 사유의 엄밀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니체의 몸 근원성에 대한 통찰이나 스피노자의 직관적인 정의에 의거한 통찰보다 우선 후설이 제시한바 순수의식에서 엿보이는 의식에 대한 의식의 궁극적인 불가능성, 즉 반성의 근본적인 한계 또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을 오히려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결국, 핵심 물음은 이렇게 된다: 그 자체 의식의 활동인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의식에서 몸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달리 말해, 초월론적인 방법을 통해 의식에서 몸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이 길을 제대로 제시한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

요컨대, 철학적 사유를 하자마자 몸이 의식의 대상으로 돌변하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의식에서 몸에 대한 의식으로 바뀔 뿐, 몸에 대한 의식에서 몸 자체에로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몸의 활동 자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활동 자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도 불가능한데, 몸의 활동 자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른바 적어도 철학적 사유인 한에서 온전한 몸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활동 자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의식의 활동 자체를 몸의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그 필연성을 엿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불가능성으로부터 몸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완전한 철학적 사유의 불가능성을 바탕으로 불완전한 몸 철학적 사유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의식 철학적 사유는 물론이고 더욱이 몸 철학적 사유라 할지라도 불완전하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 자체가 지닌 근원적인 한계와 그에 따른 절대적인 무능력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철학적 사유를 펼치는 자의 무슨 상대적인 무능력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철학적 사유의 근원적인 불가능성과 절대적인 무능력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철학적 사유에 머물러 있어서는 철학적 사유 자신의 근원적인 불가능성과 절대적인 무능력함을 인지할 수는 있어도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심지어 그 근본 원인을 찾아들어 갈 수 있는 실마리조차 확보할 수 없다. 철학적 사유를 벗어나야 한다. 후설이 생활세계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그의 생활세계적인 태도를 원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후설이 말한 생활세계적 현상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생활세계적 현상학은 주로, 생활세계가 과학에 대해 갖는 일차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생활세계에 아예 잠입해 들어가 우리 나름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메를로퐁티가 《행동의 구조》에서 게슈탈트학파의 과학적인 성과를 비롯해 각종 생리심리학적인 성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받아들이는 것을 모델로 삼을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두뇌를 비롯한 신경계에 관한 각종 과학적인 보고들을 비판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가 두뇌와 의식의 관계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서 그 존재론적인 인과관계를 둘러싼 문제에 집중한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인류의 전체 역사를 통해 온갖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지만, 최종적으로 미답의 영역으로서 신비에 둘러싸인 것은 바로 두뇌의 존재와 두뇌의 활동이다. 최근 각종 첨단의 영상 장치들의 발달과 그에 따른 두뇌신경학의 발달로 인해 두뇌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들에 대해 그 메커니즘들이 제법 많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조셉 르두(Joseph LeDoux)의 《느끼는 뇌》(1998/ 최준식 옮김, 학지사, 2006)와 《시냅스와 자아, 우리의 뇌는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되는가》(2002/ 강봉균 옮김, 소소, 2005)를 통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두뇌신경학이 제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두뇌의 전자기적−화학적 활동에서 어떻게 감각−지성적인 의식의 활동이 일어나는지, 특히 두뇌의 전자기적−화학적 상태가 어떻게 감각적인 의식 활동의 결과인 지금 여기에서의 전 우주적인 감각적 현상들의 상태로 전환되는지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두뇌에서 의식의 발생 및 두뇌 상태의 감각 상태로 전환을 둘러싸고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무한반복의 순환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서 연구하는 두뇌는 우리에게 우선 순수한 감각 상태, 즉 의식적인 상태로서 현상한다. 그 순수한 감각적인 현상을 보고서 우리는 두뇌가 전자기적-화학적으로 즉 탈감각적으로 작동한다고 파악해서 판단한다. 이는 순수 감각적인 현상을 전자기적−화학적인 현상 즉 탈감각적인 현상으로 해석한 것이자 변환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전자기적−화학적인 탈감각적인 현상을 원인으로 해서 순수 감각적인 현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정작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전자기적−화학적인 탈감각적인 현상에서 순수 감각적인 현상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그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전자기적−화학적 메커니즘인가 아니면 순수 감각적인 메커니즘인가? 둘 중 어느 쪽에 할당할 수가 없다. 전자에 할당할 경우, 전자기적−화학적 메커니즘은 러시아 인형처럼 인형 속의 인형을 설정했을 뿐이어서 무한소급의 난항에 빠지게 되면서 순수 감각적 상태의 발생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후자에 할당할 경우, 메커니즘이라는 용어조차 붙일 수가 없다.

이에 우리는 두뇌에 대한 현상학적인 접근을 할 수밖에 없다. 두뇌 활동을 통해 그 일부인 의식 활동이 발휘된다고 하자. 두뇌는 자신에게서 발휘되는바 자신의 활동의 일부인 의식 활동을 통해서는 두뇌 자신의 활동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는 두뇌의 의식 활동은 두뇌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뇌 자신이 아닌 것들을 알기 위한 것임을 함축한다. 두뇌야말로 의식에 대해 근원적으로 불투명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는 나의 두뇌가 과연 활동하는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 반해 일견 의식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식 자신에게 투명하게 의식된다. 그러나 앞에서 길게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의식되는 순간 의식 활동은 순전한 의식 활동이 아니라 대상성을 띤 의식 활동이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순전한 의식 활동 자체는 의식에게조차 근원적으로 불투명한 것이다.

이 불투명성을 매개적인 바탕으로 삼아, 적어도 의식에서 순전한 의식 활동과 두뇌의 활동 자체가 의식을 넘어선 기묘한 어떤 영역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후설이 순전한 의식 활동의 의식 불가능성을 지칭하기 위해 순수의식을 한 것처럼, 전혀 의식되지 않고 의식 불가능한 순전한 두뇌 활동을 가칭 ‘순수두뇌’라고 부르고, 그렇게 해서 순수의식은 곧 순수두뇌에 대한 인식론적인 근거이고 순수두뇌는 순수의식에 대한 존재론적인 토대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해서 두뇌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물질 즉 피의식 가능성을 함축한 물질을 벗어나고 의식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정신 즉 반성 가능성을 함축한 정신을 벗어나,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존재를 염두에 둘 수는 없을까? 그리고 이를 몸이라 부르면 안 되는가? 또한 그리고 몸을 인식과 존재의 두 거대한 영역이 아직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제3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고 하면 안 되는가?

고백건대 비록 또 하나의 직관에 의거한 주장이긴 하지만, 인식과 존재의 두 거대한 영역이 미처 구분되지 않은 이 제3의 영역이야말로 몸이 거주하는 곳이다. 불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순수의식’과 ‘순수두뇌’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지대가 바로 몸이다. 두뇌가 인식 활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최종 근거는 순수의식이고, 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최종 토대는 순수두뇌이다.

몸은 제 스스로에게서 순수두뇌와 순수의식을 시원적으로 발동시킴으로써 존재 영역과 인식 영역을 시원적으로 구축해 낸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순수두뇌에서 아래로 내려가 몸을 거쳐 순수의식으로 올라옴으로써 존재 영역은 인식 영역으로 전환되고, 순수의식에서 아래로 내려가 몸을 거쳐 순수두뇌로 올라옴으로써 인식 영역은 존재 영역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인식 내용은 근본적으로 존재함과 어떻게든 연결되고, 존재자들은 근본적으로 어떻게든 인식됨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현상은 근본적으로 어떻게든 사물에로 지시되고, 사물은 근본적으로 어떻게든 현상된다.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세계는 현상의 총체이고, 두뇌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세계는 사물의 총체이다. 그러나 의식과 두뇌의 공통바탕인 몸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세계는 현상의 총체와 사물의 총체로 구분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메를로퐁티의 살(la chair) 개념을 원용해서 말하면, 이 근원적인 세계는 살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이 근원적인 세계는 살로 되어 있다. 살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말한다.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살은 과연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말한다. “살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용어인 ‘원소(élément)’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때 ‘원소’는 사람들이 물, 공기, 흙, 불을 말하기 위해 차용할 때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즉 시공간적인 개별자와 이념(l’idée)의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것(une chose générale)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 달리 말하면 존재자(l’être)가 작은 조각으로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모종의 존재 스타일을 가져오는 일종의 체화된 원리로서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살은 존재(l’Être)의 ‘원소’다. 살은 사실 또는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하지만 장소(lieu)와 지금(maintenant)에 부착되어 있다. 더 나아가 살은 곳(où)과 때(quand)의 시발이며, 사실을 사실이도록 하는바 사실성(facticité)이라는 말로써 사실의 가능성이 되고 또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존재(l’Être)는 하이데거의 존재(Sein) 개념을 자신의 살 존재론에 의거해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한바 살의 세계와 두뇌와 의식의 공통바탕인 몸을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공통바탕인 몸도 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살은 몸과 세계의 공통바탕인 것이다. 몸과 세계가 분화된 모습은 살을 몸통으로 해서 몸과 세계라는 두 거대한 가지가 갈래지어 나온 나무와 같다. 이에 몸과 세계는 또 하나의 거대한 뫼비우스 띠와 같이, 몸은 살로 내려가 세계로 오르게 되고, 세계는 살로 내려가 몸으로 오르게 된다. 세계가 살로 내려가 몸으로 올라오는 것은 세계가 실로 지금 여기에서의 몸의 상황으로 구축되는 것이고, 몸이 살로 내려가 세계로 오르게 되는 것은 실로 몸이 세계에로 확장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같은 몸과 세계와의 교환은 인식과 존재가 미처 분화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영역에서의 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인식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식하는 순간 그 인식이 곧 존재에로 가라앉고,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존재함이 현상으로 드러나기에 엄격하게 인식과 존재를 구분함이 무의미할 뿐이다.

이 정도쯤 되면, 가히 몸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곳곳에서 “사태 자체에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적 탐구의 근본 원리를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혹은 이러한 몸 개념은 스피노자가 말한바 물질과 정신을 속성으로 하는 신으로서의 실체를 축소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서 비난할 것이다. 이러한 몸의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형이상학 입장에서는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바로 이러한 몸 개념을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킨 것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몸의 형이상학을 전개한다고 실토하는 마당에서, 또 한 가지 직관적인 논의를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몸의 활동에 대한 두뇌와 의식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요컨대 두뇌는 몸의 개별성을 구축하는바 자성(自性)을 향한 응축(또는 수렴)의 역할을 하고, 의식은 몸이 세계에로 확장되도록 하는바 대타성(對他性)을 향한 확장(또는 확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살을 공통바탕으로서 매개로 삼아 세계가 몸의 상황으로 구축되는 것은 일종의 응축이다. 이처럼 세계가 몸의 상황으로 응축되는 것에 대응해서 몸에서도 응축이 일어난다. 그 응축은 두뇌의 생성을 야기한다. 그 결과, 몸은 두뇌의 바탕이 되고, 세계는 사물의 바탕이 된다. 반면에 살을 공통바탕으로서 매개로 삼아 몸이 세계를 향해 확장되는 것은 일종의 확산이다. 이같이 몸이 세계에로 확산되는 것에 대응해서 몸에서도 확산이 일어난다. 그 확산은 의식의 생성을 야기한다. 그 결과, 몸은 의식의 바탕이 되고, 세계는 현상의 바탕이 된다.

이럴 때, 문제는 역시 두뇌와 의식의 관계이다. 몸의 자성을 중시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계기에서 성립하고, 몸의 대타성을 중시하는 것은 인식론적인 계기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존재론적인 계기에서 보면 몸의 자성을 향해 응축의 역할을 하는 두뇌가 의식의 바탕이 되고, 인식론적인 계기에서 보면 몸의 대타성을 향해 확산의 역할을 하는 의식이 두뇌의 근거가 된다. 더 풀어 보면, 두뇌가 그 나름 몸의 대타성을 확보하기 위해 활동을 할 경우 자신을 바탕으로 해서 의식을 발동하여 몸을 세계로 확장되도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이 그 나름 몸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활동을 할 경우 자신을 근거로 해서 두뇌를 정립함으로써 세계로부터 몸이 개별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성과 대타성은 상호의존적이다. 자성이라는 중심이 없이는 대타성이 성립할 수 없고, 대타성이 없이는 자성이 의미가 없다. 두뇌가 존재론적인 바탕이 되어 의식이 발동되고, 이 의식을 통해 몸이 자신의 대타성을 확보한다고 할 때, 그 대타성은 어디까지나 몸의 대타성이지 의식의 대타성은 아니다. 몸의 대타성은 쉼 없는 의식의 흐름을 통해 계속 확보되면서 축적된다. 이렇게 축적되는 몸의 대타성은 몸의 자성을 기하는 두뇌에 의해 응축된다. 두뇌는 자신을 통해 계속 새롭게 확보되는 몸의 자성을 바탕으로 또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의식을 발동시킨다. 이에 의식은 새로운 방식으로 몸의 대타성을 위한 노력에 나선다.

이러한 끝없는 순환 과정에서 몸의 개방성과 가소성(可塑性) 그리고 몸의 역사성이 성립한다. 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몸의 가소성이다. 몸에서 발원하는 두뇌, 두뇌를 바탕으로 해서 발동하는 의식, 의식에서 주어지는 대타적인 세계 현상, 의식으로부터 대타적인 세계 현상을 넘겨받는 두뇌, 두뇌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세계 현상의 사물의 힘으로의 전환, 두뇌를 매개로 해서 몸의 운동과 감각으로 전환되는 사물의 힘, 몸의 운동과 감각에 의거한 두뇌의 새로운 발원, 새롭게 발원되는 두뇌를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발동하는 의식……. 이렇듯 계속 축적과 갱신의 순환 과정을 거듭하는 몸의 활동이 바로 몸의 가소성이다. 그러나 몸의 가소성을 이루는 이러한 순환 과정은 결코 인과적이거나 순차적인 것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볼 때, 이 순환 과정은 심지어 인식과 존재의 구분을 넘어선 살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몸의 개방성은 몸의 가소성의 계기이고, 몸의 역사성은 몸의 가소성의 결과이다.

몸의 가소성에 입각해서 볼 때, 그 어떤 종류의 의식을 발동시킨다고 할지라도 그에 따라 몸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그 갱신의 축적에 의해 새로운 두뇌가 발원하고, 새롭게 발원된 두뇌에 의해 또다시 새로운 의식을 발동시키게 된다. 그 반대로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하는가에 따라 다른 방식의 두뇌를 발원시키고, 그에 따라 다른 의식이 발동됨은 물론이다. 이 두 방향의 규정 관계에서 두뇌의 자성적인 존재가 먼저냐, 아니면 의식에 의한 대타적인 인식이 먼저냐를 묻는 것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이미 늘 몸은 인식과 존재의 구분을 벗어나 있는 데다 바탕에서부터 몸이 두뇌와 의식에 발생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따라서 의식의 대타적인 인식에 이미 두뇌의 자성적인 존재가 반영되어 있고, 두뇌의 자성적인 존재에 의식의 대타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논의를 하나 덧붙이고 글을 끝맺고자 한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의식은 제 스스로의 힘으로 현상에서 사물을 파악해 낼 수 없다. 의식은 현상을 의식하면서 현상이 사물의 현상임을 아울러 의식한다. 사물의 현상이라는 것은 사물이 현상을 관통하면서 그 스스로를 현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의식이 이를 파악한다는 것은 의식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치 현상이 사물의 표면인 것처럼, 의식은 무엇인가의 표면이다. 그런데 의식이 마치 표면으로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넘어서는 양 사물의 표면인 현상을 넘어서서 사물 자체에로 육박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기이한 일이다. 의식으로 하여금 표면으로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의식이 두뇌의 표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뇌의 표면이 두개골을 열었을 때 신경생리학적으로 인식되는 실제의 두뇌 표면이 아님은 물론이다.

두툼한 두께를 지닌 또 하나의 현상이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두툼한 두께를 지닌 또 하나의 의식이 두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과 사물의 뫼비우스 띠의 관계와 의식과 두뇌의 뫼비우스 띠의 관계, 이 두 관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존재와 인식의 구분을 넘어선 몸이라는 공통바탕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바, 존재와 인식의 뫼비우스 띠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저로 〈현상학적 신체론; 에드문트 후설에서 메를로퐁티에로의 길〉(박사논문)과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의식의 85가지 얼굴》 《미술 속 발기하는 몸》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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