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선종의 특징과 한국 선법

인도불교의 경우는 1,700년의 역사 가운데 시대별로 다양한 교의와 학파를 출현시켰다. 뿐만 아니라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서력기원을 전후해서는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불교 이천 년 역사의 시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법의 경우 그와 동일하지는 않다. 인도불교의 경우 선은 불교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으로서 전개되어 온 까닭에 특별히 학파 내지 종파를 형성하지는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중국불교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되면서 전면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전승된 까닭에 전역된 경전에 따라서 특수한 교의가 발전하기도 하였고, 나아가서 그에 따라 특수한 학파 또는 종파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선과 관련된 경전이 다수 전래되었고 또한 그 번역된 경전에 의거하여 선을 실수했던 사람도 출현하였다. 이로써 6세기 초반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래할 즈음에는 소위 선경 내지 선법에 대한 이해와 실수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당시 중국의 선법 상황은 달마와 무제의 일화에서 보듯이 유루공덕에 치우쳐 있기도 했고, 또한 대승의 선법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교학자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달마는 그와 같은 장애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때문에 오늘날 2,500년에 걸친 선의 역사 가운데서 중국 선종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시작은 달마가 도래한 6세기 초기로 간주한다. 그 까닭은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중국 선종의 역사는 달마가 중국에 도래한 이후부터 달마의 후손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전개되며 전승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초기 중국의 선종은 선법을 기치로 하여 달마의 서래로부터 시작된 종파이지만 불심을 종지로 삼고 그것을 터득하기 위하여 좌선으로 수행하고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서 좌선은 불심을 터득해 나아가는 제일의(第一義)의 실천으로서 수행 내지는 깨침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선법을 조사선(祖師禪)이라 일컫는 것은 달마 조사로부터 유래된 선풍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달마로부터 조사에 대한 개념 및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라는 개념은 선종에서 정법안장을 전승한 인물로 간주되면서 등장하였고, 그와 같은 조사의 선풍이 소위 조사선으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조사선은 보리달마 조사를 위시하여 본래성불의 사상에 근거하여 일상에서 본래의 청정심 내지 불성의 평상심을 실천하는 것으로 전개된 일군의 선풍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경우 조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달마의 어록에 등장한다.
이와 같은 조사선은 초기 선종의 시대에는 그 정통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일사인증(一師印證)의 원리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전등(傳燈)이라는 용어는 곧 불조의 혜명이 계승되어가는 모습을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붓다의 정법안장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수수(授受)하는 방식의 내용으로 간주한 것인데, 그 범위는 멀리 과거칠불로부터 가섭을 통하여 보리달마에 이르고, 나아가서 그것이 중국선에서 정통성을 강조하는 몇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의 기관으로서 중요시되었다. 이에 따라서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으로 전승되는 전법계보가 형성되었다. 신회는 이에 대한 물증으로서 가사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가사는 소주 혜능의 처소에 있다는 것을 통하여 혜능의 남종이 정통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선종은 인도 선법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출현시켰다. 우선 선을 위주로 한 교단의 형성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좌선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켜 수행과 깨침으로까지 승화시켰으며, 선수행 및 그 깨침을 동일시하거나 일상화하여 보편적인 수증관을 초래하였고, 새로운 선 수행법이 창출되기도 하였다.
가령 도신 시대에는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대규모의 대중이 모여서 선법을 위주로 한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선의 교단이라는 의미의 선종이 출현했다. 때문에 선종의 출현은 이미 인도의 선법과는 다른 중국불교 나아가서 중국선의 특징으로 부각되기에 충분하였다. 이로써 동산법문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자급자족의 생활로 인하여 작무를 수행 내지 깨침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집단생활에 따른 다양한 직무 분담 또는 그에 상응하는 집단내규의 제정 등이 필요함에 따라 이후 본격적으로 청규가 출현하는 원류(遠流)가 마련된 셈이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중국 선법을 수용한 바탕에서 형성되고 전개되어 왔던 한국선의 경우에도 많은 측면에서 그대로 계승되었다. 곧 선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까닭에 발생했던 최초기 선법의 전래자에 대한 오해, 법맥에 근거한 정통성의 강조, 선과 교에 대한 견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선의 경우에는 다른 한편으로 초기 선법의 수입 상황,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이해 방식에 근거한 선과 교의 차별, 정통과 방계를 수반한 법맥의 인식 등에서 지속적으로 중국선과는 다른 변용된 모습으로 수용되고 전개되어 왔다. 이 같은 몇 가지 점을 중심으로 한국 선법의 한계와 그 변용에 대하여 통시적인 입장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전래 시기 선법에 대한 오해와 그 극복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이미 9세기 무렵부터 선문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감변(勘辨)의 방식으로 제시되었던 개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선문답의 주제였다. 조사서래의에 대한 문답에서 그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법거량을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불법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방식으로서 일종의 정답으로 제시되어 왔다. 조사서래의에 대한 문답에 대하여 선리의 입장에서 굳이 답변을 하자면 달마는 정법안장을 계승할 후계자를 찾기 위하여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달마는 중국에 도래한 초기에 자신이 전승하고자 했던 대승의 선법을 말했지만 아직은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마음이 질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달마에게 귀의하였지만 형식과 주의주장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달마를 비난하고 심지어 해코지를 가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교학자들로부터 독살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보원행(報怨行)을 통해서도 드러나 있듯이 많은 장애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마침내 서래(西來)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한국 선법의 전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고난의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신행(704~779)의 경우는 법랑으로부터 전법하고 선법을 홍포하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사회의 여건에 성숙되지 못하여 다시 멀리 바다를 건너 불조의 혜명을 구하고자 배를 타고 당나라에 이르렀다. 778년에 귀국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겨우 준범에게 전법할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후 남종 계통의 선법을 계승한 도의선사(784년 입당유학, 821년 귀국)의 경우에도 당시 사회의 상황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도의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라에 선법을 전파하는 데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사자들의 경우에는 결국 선법 전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홍주종의 선풍이었던 무위임운의 선법에 대한 소식은 당시의 신라불교의 교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였지만 습관존신(習觀存神)의 가르침에 경도되어 있었던 까닭에 새로운 선법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하였다. 다만 기록을 통해 보면 신행의 경우에는 준범이라는 제자가 법을 계승하였고, 도의의 경우에는 염거라는 제자가 법을 계승하였다는 것에 만족하여야 했다. 또한 이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의 경우도 한국 선법의 입장에서 마찬가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상이 신라에 귀국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당시 신라 불교계의 상황이 아직은 무상의 선법을 수용할 만한 시절인연이 성숙되지 못했던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행의 경우에는 그 선법이 대대상전(代代相傳)되어 후에 지선 국사에까지 계승되었다.
신행은 계림에 돌아와서 깨침의 성품이 아직 덜 익은 자들에게는 간심(看心)으로 가르쳐 이끌어주었고, 이미 성품이 익은 자들에게는 갖가지 방편으로 이끌어주어 각각 선법의 비전을 통하게 함으로써 삼매의 밝은 등불을 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행이 전승한 선법은 일찍이 법랑의 심법에 근거하였고 그것을 계승하여 지공 선사의 교학에 근거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곧 달마를 비롯한 선종의 형성기부터 교학의 중시가 일관된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법랑 및 지공의 가르침을 계승한 신행의 선법은 다시 준범(遵範)−혜은(慧隱)−지선(智詵)으로 계승되어 소위 희양산문의 계보를 이루었다. 이로써 판단하면 신행은 동산법문을 계승하였고 동시에 당시의 북종 계통의 법맥까지 계승하였다. 당시에는 신수를 계승한 의복(義福)과 보적(普寂) 등은 황실과 유대관계를 통하여 중앙에서 선법을 홍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여러 지역의 선법까지도 거의 이들을 중심으로 한 동산법문의 계승자들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선법을 수용한 신행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권위와 법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행의 선사상은 법랑을 통한 동산법문의 견불성(見佛性) 사상과 수일불이(守一不移) 사상의 계승이었으며, 지공(志空)을 통한 북종의 간심(看心)과 방편법문의 계승이었다. 이것은 소위 남종 계통의 선법과는 다른 차원의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것은 초기 한국 선법의 성격을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로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이후에 남종 계통의 선법을 계승한 도의선사의 선사상과는 차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도의대사가 심인을 서당지장에게서 받아 귀국하여 선리를 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교를 숭상하고 존신(存神)의 법을 습관(習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도의가 설하는 무위임운의 종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허설이라 하여 소중히 숭상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달마와 양 무제와의 만남과 같았다. 이에 도의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염거 선사에게 부법하였다.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우리 체징 선사가 거기에 가서 그를 섬겼다.

당시에 신라에서 경교를 숭상하는 풍토가 강하였고, 나아가서 마음을 닦는 경우에도 습관(習觀)이 중심이었다. 습관법은 선경(禪經)을 통하여 전승된 관법으로서 아직 조사선법이 형성되기 이전의 선수행법을 총칭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보조체징은 당시의 교학불교에 대하여 “공을 터득한 사람은 곧바로 저 삿된 산을 넘지만 유위에 얽힌 사람은 영겁토록 흑암지옥의 업에 머물러 있다. 말법시대에는 상법(像法)이 분분하여 진종(眞宗)에 부합하지 못하고 서로 편견을 가져 물속에서 달을 찾으려고 하고 새끼줄로 바람을 묶어두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것은 헛되이 육정(六情)만 피곤하게 할 뿐이다. 어찌 지리(至理)에 도달하겠는가.”고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화엄교학과 조사선법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선문보장록》에서 도의의 답변을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서 또한 몰종적(沒蹤跡)의 선법에 대하여 도의와 홍척이 전한 홍주종의 종취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수행은 있지만 그 수행은 분별의 닦음이 아닌 몰수(沒修)이다. 깨침은 있지만 그 깨침은 분별의 깨침이 아닌 몰증(沒證)이다. 그리하여 고요하기로는 산처럼 고요하고 움직이기로는 골짜기가 울리는 것과 같다. 선법에서 내세우는 무위의 이익은 다툼이 없이도 빼어났다. 이에 신라인의 마음을 비우게 해주니 고요한 이익으로 해외를 이롭게 하되 그 이롭게 함을 자랑하지 않으니 참으로 위대하도다.
이처럼 몰종적한 조사선법은 초기 선법의 전래자들이 내세운 선법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수행과 깨침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무분별의 수행이고 무분별의 깨침으로서 수행과 깨침의 일여로서 무위선법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써 신라인의 마음을 위무하면서도 거기에 집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선의 동산법문을 바탕으로 한 최초기 선법의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적어도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랑과 신행의 선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홍주종에서 주장하는 본유(本有)의 각성과 무념·무수의 몰종적한 선법이 신라의 불교에서 보여준 오교(五敎) 이외에 따로 조사의 심인법으로 전승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부처의 형상을 드러내는 까닭은 조사의 바른 도리를 알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짐짓 방편의 몸을 임시로 빌려 나타낸 것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점이야말로 도의의 선풍이 홍주종 계통을 정전(正傳)한 것이었음을 말하였다.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은 경교(經敎)의 교학주의와는 달리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의 종지로서 곧 무념·무수를 심요로 삼고 있다. 이것은 마조 문하에서 발전된 선법에 충실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이후에 법맥의 전승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조계의 남종을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근거로서 한국선의 독자적인 선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선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는 없다. 때문에 법맥에 대한 중국 선종의 사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법랑−신행의 법맥을 정통의 법맥으로 부각시켜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제기된다.


3. 선교차별의 전통과 그 특징

본래 선과 교는 차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종밀의 선시불심 경시불어(禪是佛心 經是佛語)라는 말처럼 정법안장의 불법을 전승하는 방식에 따른 분류였다. 때문에 선과 교는 형식적으로 보면 차별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차별이 아닌 정법안장에 대한 전승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별적인 견해에 근거하여 자파의 우월성을 주장한 전통은 중국불교 교학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의 경우에서 보듯이 교학 자체에서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나아가서 선과 교를 대비시키는 선교차별 또는 선종 내에서도 소위 선상판석(禪相判釋)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의 종파에 대한 우열의 모습은 늘 존재하였다.
그러나 한국 선법의 경우는 중국 선종의 경우와 같지 않은 입장도 있다. 중국 선종의 경우는 남종과 북종의 정통 문제 및 인물을 중심으로 전승된 선종오가 사이의 다양한 법맥의 전통 등이 두드러진 것에 비하여 한국 선법의 경우는 우선 선법의 수입 시기라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직 선법 내부에서 정통과 방계라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교학에 상대하여 의도적으로 선교차별을 부각시켜 나아갔다. 그리고 선법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던 나말여초의 구산문 시대에도 산문 사이의 정통 내지 우월의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정작 선법의 내부에서 우월의식이 드러난 것은 원나라로부터 임제선법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경우에도 일방적으로 임제종지 위주의 우월로서 중국 선종의 다양성과는 달랐다. 이처럼 중국 선종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던 선교차별의 전통이 한국 선법에서는 어떻게 드러났는가.
규봉종밀(780~841)은 그가 살고 있던 당시에 선과 교가 서로 비판하는 상황에 대하여 《도서(都序)》를 저술하여 교와 선의 일치 또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배경에는 수·당 시대를 통하여 형성된 다양한 종파의 출현에 따른 종파 간의 주장 및 우열관에서 드러난 자연스러운 결과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종밀은 나름대로 통합과 분석을 가하여 선과 교에 대하여 각각 삼종(三宗)과 삼교(三敎)의 구조를 통하여 그 의의를 피력하였다. 이것은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 이후 선종이 뿌리를 내린 이후에 나타나는 선과 교의 대립을 각각 붓다의 마음과 경전으로 간주하여 그 절충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선의 경우에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신라 말기 당시에 교학이 경우는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토대에서 선법이 처음으로 수입되던 시기에 해당하는 까닭에 선법의 측면에서 그 일치나 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때문에 선법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선교차별을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교차별의 주장은 선법이 교학과 대등한 입장을 확보하려는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오히려 선법의 우월의식과 특징으로 점차 부각되어 한국선의 전통적인 특징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선교차별의 모습은 선법이 수입되고 나서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에 걸쳐 소위 구산문이 형성되면서 각각 나름대로 몇 가지 특색 있는 선풍을 전개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주산문의 개산조로 간주되는 무염 국사에게는 ‘무설토론(無舌土論)’이라는 가르침이 전하고, 사굴산문의 범일 국사에게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전하며, 가지산문의 도의 선사에게는 지원승통과 문답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이들 내용은 모두 선과 교의 차별을 논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선교차별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선법의 수입 시기에 아직 선법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선법을 정착시키기 위한 선자들의 노력에 근거하였다. 곧 당시의 사회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불법이었던 선법의 전승을 성취하기 위해 애썼던 몇몇 구법승들은 당시의 교학불교와는 다른 측면으로 선법을 홍통하고 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곧 선법이 교학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차별화된 전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력은 당시에 화엄학을 비롯한 교학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불법과 문물을 접촉하고 추구하려는 입당구법승들의 열망에 부합되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특히 선과 교학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불법 곧 선법을 전승한다는 자긍심과 더불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의적인 장치의 고안으로 나타났다. 그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곧 지원승통과 도의 선사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시 유행하던 화엄교학과 조사선법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무설토론’의 경우에 교학은 혀가 있다는 것으로 설법을 의미하는 유설(有舌)이고, 선법은 침묵을 의미하는 것으로 혀가 없다는 무설(無舌)로 대비되어 있다. 따라서 유설은 49년 동안 설법을 해온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유하고 무설은 상대적으로 말을 아끼는 것으로 보리달마의 침묵에 비유하였다. 이것을 유설의 경우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시설하는 응기문(應機門), 언설을 통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언설문(言說門), 청정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정예문(淨穢門)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설의 경우는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충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에서 정전문(正傳門), 언설을 초월하여 이심전심하는 무설문(無說門), 청정과 더러움의 분별조차 초월한 부정불예문(不淨不穢門)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비교는 신라사회에 이미 굳건하게 토대를 구축하고 있던 교학의 바탕에다 새롭게 수입된 선법 우수성과 특성을 드러냄으로써 상대적으로 교법을 능가하는 가르침을 뿌리내리려는 일환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때문에 의도적이고 도식적인 비교를 위하여 상징적인 혓바닥의 유무를 통하여 그 차이점을 논한 것이다.
‘진귀조사설’은 선과 교학의 차이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내용은 요컨대 석가모니가 진귀 조사에게 심인을 받았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요점이다. 여기에서는 조사선이 팽배하면서 조사의 위상은 어떤 선풍보다도 우선이었고 보편적이었으며 부처님을 대신할 정도였다. 그와 같은 조사의 개념을 진귀 조사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다. 한편 석가는 여래의 개념을 상징한다. 여래는 49년 동안 고구정녕하게 설법을 하였다. 반면 조사는 직설적이고 현실적이며 단적인 교화 수단을 활용하였다. 때문에 조사선의 가풍이 팽배해 있던 시기야말로 선을 언설을 통해서 자상하게 이해시켜주는 여래선의 방식보다 직지인심으로 제자의 의표를 찔러 가르쳐주는 조사선의 접화 방식이 큰 매력을 발휘하였다. 곧 석가라는 여래와 진귀라는 조사를 등장시켜 그 접화 수단의 차이를 비유한 것이다.
도의와 지원승통의 문답은 당시에 가장 보편적이었던 화엄의 교학을 내세워 그 입장을 서술하고 선문의 입장이 그와 다르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이에 구체적인 설명으로 화엄교학의 법계연기의 도리를 들어 그 증거로 삼은 것이다. 화엄의 입장은 본래 법계의 인도 없고 또 법계의 과도 없고, 또 지혜와 증득도 없고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도 없으며, 본래 인이 없기 때문에 만행을 닦을 길도 없고 본래 과가 없기 때문에 과를 증득하는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법의 입장으로 보자면 이것은 인과 과의 근본이 연기의 도리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과의 도리를 초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수행의 시작과 깨침의 종착이 곧 인과를 말미암은 것이므로 수증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에 비하여 선문에서 내세우는 심인의 입장은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과 깨침을 터득한다는 것조차도 초월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곧 선법의 입장은 본래부터 법계 및 법계의 인과 과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교학에서 말하는 법계 및 법계의 인과 과를 없앤다는 행위야말로 조작적이고 유위적이며 공용적인 행위임에 비하여, 선법의 심인은 철저한 무조작이고 무위이며 무공용의 종지임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교차별의 전개는 이후에 고려시대에 본격적인 선법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선수행법의 전래 및 선종 세력의 확장으로 인하여 선과 교의 차별을 논하는 문헌도 등장하였다. 나아가서 조선시대의 선법은 임제종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까닭에 임제종지의 정통의식과 더불어 교학에 대한 선법의 우월적인 차별관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청허휴정의 몇 가지 저술을 중심으로 선교차별이 농후하게 강조된 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휴정이 그의 나이 40대 중반에 내놓은 《선가귀감》에서는 삼처전심은 선이고 평생의 설법은 교이다, 마음을 깨치면 선이고 언설에 집착하면 교이다, 사려를 끊고 반연을 잊은 경우는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교이다, 견성법을 전승하며 의지에서 자취를 제거하고 심원(心源)에서 도리를 드러내는 것은 선이고 일심법을 전승하며 제법을 분별하여 나중에 필경공(畢竟空)을 설하는 것은 교이다, 조사의 경우 활줄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설하는 것은 선이고 제불의 경우 활처럼 완곡하게 설하는 것은 교이다, 언교를 초월하여 화두일념을 현전하는 것은 선이고 여실한 언교를 통하여 불변과 수연 및 성과 상을 판별하는 것은 교이다 등 5가지 주제에 의해 차별을 말하고 있다.
한편 휴정이 말년에 내놓은 《선교석》에서는 청허휴정이 묘향산 금선대에 주석하고 있을 때 그 제자인 행주(行珠)와 유정(惟政)과 보정(寶晶)의 세 사람이 《금강경오가해》를 가지고 찾아와서 그 가운데 선지(禪旨)가 있는지, 또 그 반야를 선의 종지로 간주해도 좋은지를 묻자, 청허가 선과 교의 차별에 대하여 대조시키면서 분별하여 설명한 것이다. 청허는 옛적의 글에서 인용하여 선과 교의 차별을 17가지 주제에 의거하여 선교차별을 설명하면서 간혹 주제에 대한 문답형식을 취하여 구체적인 해설을 가하고 있다. 그 내용은 교외별전과 불립문자의 사상적인 배경에 대하여 설명을 가하면서 선이 교학과 차별되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선문의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 정법안장의 전승,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별, 교학과 선의 차별, 불설일자(不說一字)의 도리, 원교와 돈교보다 선문이 우월하다는 주장, 선문에서 보리달마가 《능가경》을 전수한 인연, 사교입선의 도리, 경전을 연찬하는 교학자의 굴복 등에 대한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휴정이 만년에 선보인 《선교결》에서는 선과 교의 차별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점에서는 《선교석》의 경우와 같은 입장이지만 선과 교의 각각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선지를 잘못 이해하여 돈점문을 정맥(正脈)이라 간주하고 원돈문을 종승(宗乘)으로 간주하는 자세를 질책하면서 교외별전의 바른 도리를 터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선과 교의 각각의 특징에 대하여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말 없음으로부터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 있음으로부터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교라는 말로 대변하고 있다. 상당 부분이 기존의 《선문보장록》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서 선문의 특징으로서 교외별전의 도리를 언급하고 그 증거로 삼처전심을 비롯하여 달마의 확연무성 그리고 중국 선종에서 전승되어 온 다양한 공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서 교의 원돈문의 경우는 이로(理路)·의로(意路)·심로(心路)·어로(語路)를 통하여 견(見)·문(聞)·신(信)·해(解)하는 것을 귀중하게 간주하지만, 선의 경절문의 경우는 몰이로(沒理路)·몰의로(沒意路)·몰심로(沒心路)·몰어로(沒語路)의 경지에서 번뇌의 칠통을 타파하는 것마저도 귀중하게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서 그 차별을 설명한다. 결국 선문에서 귀중하게 간주하는 것은 경절문의 활구를 통하여 남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자신도 스스로 깨우쳐서 본분종사의 안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선교차별의 흐름이 전승되면서 한국 선법에서는 선과 교의 차별이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선법의 수입 시기에 선법을 확고하게 뿌리내리려는 장치로서 출발하였지만, 지속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중국선과는 차별된 한국 선법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어 무시할 수 없는 전통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이런 점에서 한국선의 역사에서 선교차별의 모습은 선법의 수입 및 정착의 과정에서 드러난 특수한 상황 및 임제종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시대 임제 법맥의 정통의식에 근거하여 교학에 대한 선법의 우월의식 및 선종오가에서도 임제종지의 강조 등으로 인하여 선교의 차별관이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4. 한국선에서 조계선법의 정체성

현재까지 한국선에서 전승되고 있는 조계선법의 정체성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혈맥의 관점에서는 조계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지만 종조의 법맥이라는 관점에서는 참으로 공허하다. 또한 조계선법의 법맥과 관련된 간화선 수행법의 전승은 사굴산문의 보조지눌 및 그 문하들에 의하여 크게 전개되어 있는 까닭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를 통해서 전승된 또 다른 간화선의 전승과도 그 접점이 애매모호하다. 사실 지눌과 혜심을 통해서 형성된 간화선의 전통과 태고 및 나옹을 통해서 전승된 간화선의 전통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중국 선종의 특징과 마찬가지로 전승된 인물을 중심으로 분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간화선풍의 특징을 드러낼 수는 없다.
때문에 조계의 피와 임제의 머리와 대혜의 뼈대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재 조계선법의 경우에 그 종조와 법맥과 수행 방식의 전승에 대해서는 그 정체성이라는 입장에서는 자칫 아무런 원칙도 없이 비벼진 맛없는 비빔밥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난감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조계의 종지라는 명칭에 부합되는 혈맥을 옹호 또는 강조하려는 점에서 소위 남종의 법맥을 전승한 인물 가운데서 종조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선의 역사에서 최초의 전래자인 법랑으로 계승된 법맥을 제외하고 남악회양 계통의 법맥이 선택되었다. 곧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체징−영혜로 계승되는 가지산파가 염거 −홍각−범룡의 억성사파보다 후대까지 널리 유전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지산파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중흥조 보각국사 일연을 거치면서 고려 후기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조계선법의 법맥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의아스럽게도 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흥화존장−남원혜홍−풍혈연소−수산성념−분양선소−자명초원−양기방회−백운수단−오조법연−원오극근−호구소륭−응암담화−밀암함걸−파암조선−무준사범−설암조흠−급암종신−석옥청공−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으로 계승되는 청허파로 계승되어 있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보면 송대−원대를 거쳐 수입된 임제종−양기파−호구파로 전승된 법맥이다.
뿐만 아니라 간화선 수행법의 경우는 임제종−양기파−대혜파로 전승되는 대혜의 간화선풍을 수용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조계혜능의 심장에다 임제의현의 머리에다 대혜종고의 뼈대를 가진 종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비유로 들자면 도의 선사로 계승되는 가지산파의 법맥과 사상과 그 수행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전승된 조계선법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는가. 법맥으로는 조계의 심장, 사상으로는 임제의 머리, 수행으로는 대혜의 뼈대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어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일한 조사의 법맥과 사상과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한국선에서 조계선법은 이미 그 순수성을 상실해버린 까닭에 차라리 그 성격을 원융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선법의 시작은 도신의 정통 선법을 계승한 법랑 선법과 신행 선법이 바탕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곧 어디까지나 교학적 토대가 굳건했던 동산법문 및 북종 선법을 바탕으로 형성된 조사선의 정통적인 계승이었다. 이로써 최초기 한국 선법의 전래 및 그 성격은 혈맥으로는 보리달마 법맥의 정통인 대의도신의 법맥이었고, 사상 및 실천적으로는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의 전통을 강조한 혜능의 계통과는 달리 도신의 교학적인 바탕 및 북종선 계통의 자교오종(藉敎悟宗)의 전통을 전승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후에 도의, 무염, 범일과 같은 소위 남종의 조계선법을 계승한 사람들은 선법의 전승에서 아직 새로운 선법에 생소했던 신라사회에서 선법의 전래라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교학적인 전통의 방식보다 오히려 교학과 차별된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몰종적 및 무위임운의 선법에 근거하여 선교차별의 방편을 취하였다. 한국선의 역사에서는 이와 같은 선교차별이라는 방편이 선법의 수입 시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 그 결과 조계선법의 경우에 종조와 사상과 수행법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주장이 가능하였다. 특히 무엇보다도 법맥에 근거했던 정통성의 강조, 선과 교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 등이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점이야말로 한국선의 경우에 선법의 수입상황,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이해 방식에 근거한 선과 교의 차별, 정통과 방계를 수반한 법맥의 인식 등에서 중국선과는 변용된 모습으로 수용하고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볼 수가 있다. ■

 

김호귀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동 대학원 선학과 졸업(석사·박사).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 강사 역임. 저서로 《묵조선 연구》 《선과 수행》 《금강경 찬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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