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용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

눈치 빠른 독자는 이 글의 제목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의 생애(The life of Buddha)’라 하면 응당 있을 법한 제목이지만, ‘불교의 생애’라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생애’란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거나 소멸되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객체화된 사상(事象)인 불교에 대해 ‘생애’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명명일 듯싶다.

이번에는 ‘부처님의 역사(History of Buddha)’가 등장한다. ‘불교의 역사(History of Buddhism)’겠지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 붙여진 제목이 아니고 당당한 불교 서적의 제목이다. 이 이상하고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들이 저간의 서구(미주)에서 출간되는 불교입문, 소개서들의 타이틀이다.

책의 내용이 문제되건 서술이 참신하건 간에 책들이 서점에 진열될 때는 하나의 상품이니 어쩔 수 없이 독자(구매자)들의 눈을 끌게끔 책의 제목을 붙여야 된다. ‘ ~개론’ ‘ ~입문’ 하면, 그 책은 이미 팔리기를 거부하는 제목으로 비친다. 적어도 그 강의를 듣는 수강생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제목은 유혹적(seductive)이고 심지어 섹스어필해야 되는 것이 서점가의 상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말하는 두 어휘의 엉뚱한 결합이 이런 눈 끌기의 한 수단으로 차용되기도 한다. ‘불교의 생애’이건 ‘부처님의 역사’이건 제목에서 그런 상업성이 끼어든 흔적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대중기호에의 영합을 훨씬 넘어선 또 다른 이유가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 불교가 노출되고 소개되면서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 질문을 충족시키기 위한 글들과 저술들이 오래 전부터 출간되었다. 서구에서 불교의 소개와 이해는 서적을 통한 것이 대종을 이루었다. 본격적인 효시는 아마 불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외젠느 뷰르뉴프(Eugene Burnouf, 1801~1852)가 출간한 《인도불교사 입문(Introduction큑 l’ histoire du Buddhisme Indien)》(1844년 간행)이 될 터이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벨기에 루뱅대학의 에띠엔느 라모뜨(Etienne Lamotte, 1903~1983) 신부의 거의 같은 제목인 《인도불교사(Histoire du Bouddhisme Indien)》(1958년 간행)가 대표적일 것 같다.

특히 라모뜨 신부는 나의 스승이었던 고 이기영 교수의 지도교수였고, 이 분의 인도불교 연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정평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 전범(典範)이 되는 불교개론서를 최근 우리말로 옮긴 분은 학우(學友)인 전 동국대 교수 호진 스님이다. 개론서라고 했지만 방대한 양의 이 저술은 20세기 불교학의 총화와 같은 전문 학술서이다. 같은 인구어(印歐語)권에 속하는 영어로 번역하기 위한 위원회까지 결성했을 정도로 금세기 최대의 불교서이다.

그리고 이 《인도불교사》는 내가 종교학에서 불교학으로 도약(?)할 때 동국대 대학원 불교대학의 제2외국어 시험문제로 출제되어 나를 진땀 빼게 했다. 고 이기영 교수도 이 책을 당신의 불교학개론의 전범으로 삼은 듯했다. 이 인연은 미국까지 이어져 박사과정 이수를 위한 제2외국어 시험문제로까지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거기에서도 역시 이 책의 몇 부분을 3시간에 걸쳐 번역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 책의 목차를 보지 않고도 그 내용을 눈앞에 그리게 되었다. 이래저래 서구에서 발간된 불교개론은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불교에 대한 학문적 발달, 시대적 변천 나아가 신행의 변화 내용을 담는 그릇 역할을 했고, 나 역시 그곳에서 나의 학문적 자양을 퍼내고 있다. 이러다 보니 나의 학문적 행로는 알게 모르게 서구적 정향(오리엔테이션)으로 자리 잡게 되고, 소위 서구적 방법론에 대한 의존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항상 청출어람(靑出於藍)인 것은 아니다. 더욱 인문과학에서의 자기 인식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학문적 입지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향하느냐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는 화두이다. 더욱 서양에서 학위를 했다거나 서양적 주제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이런 자기 확인은 자기의 태생을 질문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불교학이라는 우리 전래의 전통을 연구하면서 서구적 정향의 특징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근자에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표제 아래 동양학의 연구방향이며 동양의 근대성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서구 일변도적인 방향을 재정립하는 일도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 오고 있다. 곧 모든 것이 청출어람은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인 셈이다.

이런 화두를 지닌 나에게 ‘불교의 생애’라는 제목은 사실 충격을 안겨 주는 타이틀이었다. 결코 잘못 붙여진 책 이름도 아니고 유혹하기 위한 상업적 제목도 아닌 불교의 내용과 폭을 확대하는 시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살아 움직이는 불교를 다루겠다는 시도로 보였다. 근대적 불교학의 발단을 서구에 두고 있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불교학은 문헌학에 기초하였고, 극단적인 이야기로 불교는 책상 위에 존재하거나 책갈피 속에만 들어 있는 형해(形骸)로 다루어진다는 말이 떠돈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다. 소위 불교학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의 실상이었다. 서구에서 불교를 다루는 것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 극복에 대한 뾰족한 길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불교의 생생한 현장과 자신을 불교도로 확인하는 신도가 종교인들의 40퍼센트를 육박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불교는 이제 책 속에 갇혀 있거나 교리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 있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불교의 생애’라는 것이다. 불교의 현장은 현재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하며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한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정치·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부패와 권력과 결탁되어 신문지상을 오르내린다. 승단의 부패상이 드러나는가 하면,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반부패 운동이 그 승단 자체에서 돌출된다. 또 정치와 연루되어 권력행사와 투쟁이 불교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그래서 ‘배반당한 불교(Buddhism Betrayed?:Religion, Politics, and Violence in Sri Lanka, Tambiah, Stanley Jeyaraja 저, 1992년 간행)’라는 책이 출간된다. 그리고 이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불교의 생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런 살아 움직이는 불교를 다룬 개론서나 입문서 혹은 불교에 대한 소개서를 우리의 서가에서 본 적이 없다.

이제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는 길마저 다시 그들이 주도하는 방향을 따라야 할 것인지? 지금 우리의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어디에 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서양 불자들의 수행과 그들의 행태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 것도 어제 오늘이 아니다. 현각 스님(서양 스님으로 본명은 Paul Munzon이다)은 이제 서양적 승려상의 하나로 떠올라 우리 불자의 스타가 된 지 오래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과거의 원형에만 매달릴 수 없다. 더 나아가 서구적 삶의 틀에서 파생된 서구인의 불자적 생활이 우리에게 더 친숙해진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또다시 불교는 서방에서 현대의 마라난타와 같이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념에 빠진다. ‘불교의 생애’는 또 하나의 소개서가 아닌 새 방향을 트는 저술일 수 있다. 책이란 현장을 담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서양에서의 이런 불교연구 경향은 또 한 번 나를 도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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