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念), 상(想), 사(思), 여(慮) 모두 생각이다. 생각은 생각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이다. 염(念)은 지금[今]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머금다[含]에서 나왔다. 마음속에 머금고 있는 생각인 셈이다. 상(想)은 상(相), 즉 이미지로 떠오르는 생각이다. 사(思)는 머리로 따져 하는 생각이고, 여(慮)는 짓누르는 생각이다.

그러니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으면 염두(念頭)가 되고, 그 생각이 바람이 될 때 염원(念願)이라 한다.

이것과 연계하여 저것이 떠오르는 것은 연상(聯想)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空想)과 꿈같은 몽상(夢想)도 있다. 떠오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상념(想念)이다. 따져 생각하고 살피는 것은 사고(思考)다. 이런 생각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면 그것을 사상(思想)이라 한다. 그러니 사고(思考)는 괜찮지만 염고(念考)나 상고(想考)는 안 된다. 마음속을 짓누르는 생각이 심려(心慮)고, 근심스러운 생각은 우려(憂慮)다. 머리를 떠나지 않는 근심은 염려(念慮)다. 깊이 따져서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을 사려(思慮)가 깊다고 한다.”(정민 지음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중에서)

불가에서는 흔히 ‘한 생각’의 엄중함을 말하곤 한다. 한 생각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생의 질은 물론이거니와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천수만 갈래로 나뉘는 것도 부족해 쉴 새 없이 변하기까지 하니 쓸 만한 ‘한 생각’을 움켜쥐고 잘 간수하는 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어디 그뿐이랴. 생각이 곧 내가 되니 내가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나를 꼴 지우는 엄연한 일이 된다. 일찍이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형체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나, 이 생각이라는 까탈스러운 길벗과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 그것이 삶이라는 노정(路程)인지도 모르겠다. 이 길을 신명 나게 가고 싶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이라는 길벗,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 없는 이 운명적 도반과 사이좋게 지내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셋을 버리고 하나를 취하자. 첫째는 어둡고, 습한 생각이다. 땅을 딛고 곧게 서야 할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하고, 숨을 죽이고, 가슴을 웅크리게 하는 생각들이다. 한마디로 주눅이 들게 하는 생각이다. 생을 마르게 하고 급기야는 고갈시킬 수 있는 몹쓸 생각이다. 주저 없이 내치자.

둘째는 잡생각이다. 길 잃은 생각들이다. 방향도 없고, 꿈도 없다. 그저 지난 일들을 혹은 앞으로 올지 안 올지(대부분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도 모르는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흐릿하게 하는 흙탕물 같은 생각들이다. 맑은 생각이 일지 못한다. 무익하다. 단호하게 끊어내자.

세 번째는 노예 생각이다. 끝없이 남이 주인 되게 하는 생각이다. 천하에 그 누구라 할지라도 내 생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처님도 자신을 믿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조직화되고 서열화된 현대사회는 쉼 없이 전도된 생각을 강요한다. 마치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삶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조작된 두려움과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이다. 노예처럼 굴종된 생각에 물들어가면서 자존감은 설 자리를 잃고, 삶은 한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창살 없는 옥살이에 찌들게 된다. 전전긍긍 노심초사의 연속이다. 꾸며지고 강제된 생각의 담을 넘어서자. 수인(囚人)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야 옳다.

대신 하나를 취하자. 생각(慮)을 생각(考)하는 생각(思)이다. 사물의 안을 들여다보는 생각이며, 이치를 꿰뚫어 보는 생각이다.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초청하는 생각이라 하겠다. 생명력 있는 생각은 꿈틀 살아 움직여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생각은 고스란히 온 우주의 힘을 담아내 그 응축된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해처럼 밝은 지혜의 문을 열기도 한다. 이르러서는 ‘한 생각’의 무한한 잠재력이 표출되는 순간을 낳고, 참나로 거듭나게 한다.

올곧은 생각, 마땅한 생각은 불완전한 나를 ‘온전한 나’ 되게 하는 선한 길벗이다. 그래서인가, 유영모, 함석헌 선생은 생각을 ‘각(覺)을 일으키는(生)’ 것으로 풀어냈다. 깨달음을 생하게 하는 것, 그것이 ‘참생각’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것은 출신학교도 아니요, 가문도 아니며, 지위도, 외모도 아니다. 그저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이 나를 이룰 뿐이다. 생각이 고우면 고운 사람이 되고, 생각이 못나면 영락없이 못난 사람이 되고 말며, 행복한 생각을 품으면 행복한 삶이 되고, 불행한 생각을 고집하면 그대로 불행한 삶에 갇히게 되는 간단한 이치다.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어떤 삶을 펼쳐갈 것인가는 생각이라는 도반과의 사귐에서 판가름이 난다.

만 가지 생각을 걸러내 한 생각으로 모으고, 이 한 생각과 하나 되면 한 생각마저 여위는 ‘생각의 비상’을 맛보게 된다. 생각의 주체도 객체도 사라져 그대로 자연이 되고 우주가 되어 비로소 ‘나 없는 나’로 거듭남이다.

이제 생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라 마음껏 훨훨 날 수 있는 파란 창공 되어 펼쳐져 있다. 잘 익은 생각은 삶에 날개가 돋게 한다. 무기력한 동물로 태어나 익은 생각으로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仁)의 사람, 자(慈)의 사람이 되고, 땅의 사람을 하늘 사람으로 변화하게 하는 것, ‘생각’이라는 도반이 안겨주는 생의 놀라운 선물이다. 생각이라는 길벗과 잘 지낼 일이다. 생각을 ‘생각’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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