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나는 한 스님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말미암아 불전(佛典)을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 불전을 대했을 때는, 용어가 생소했을 뿐 아니라 한국말로 해석된 것을 보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삼유(三有)’라는 말이 왜 ‘삼계(三界)’라는 말과 같은 말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 또 간혹 시청하는 불교텔레비전의 강의도 굳이 책상에 앉아 보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귀로만 들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다.

중국어를 좀 안 것으로 말미암아 당송(唐宋) 시기의 백화(白話)로 쓰인 어록체 문장이 문언문보다는 친숙하고, 언어학을 공부한 덕분에 한자 어휘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문장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그것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확하기는 하다. 하지만 불교철학은 홀로 공부하여 이해했을 뿐, 따로 스승을 통하여 익힌 것이 아니고 산발적으로 주위의 스님들께 여쭈어서 익힌지라, 과연 내 생각이 옳은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홀로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매우 위태로운 지식이라고 할 것이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틀에 갇히지 않았고 기발할지도 모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변화될 수 있는 소지가 갖추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홀로 배운 지식은 위태롭기 그지없고, 잘못 익힌 지식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모처에서 스님들께 불교한문법을 강의할 때의 일이다. 한 스님께서는 《금강경》을 3,000독 정도 하고 사서를 300독 정도 하셨는데, 쉬는 시간이면 외운 문장을 칠판에 가득 써서 설명해주시고는 했다. 워낙 많은 문장을 외우고 계셨기 때문인지 설명하면 곧바로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유사한 문장을 만들어 되물으면, 혼자 중얼거려 보다가 그동안 외운 적이 없는 문장을 접하게 되면 곧바로 “모르겠다.”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운동을 홀로 익혀 나쁜 습관이 몸에 익어버리면 나중에는 배우는 속도가 오히려 늦게 되기 때문에 어느 날 다시 바르게 배워 자세를 고쳐보려고 해도, 결코 고칠 수 없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외워서 익히게 되면, 외우거나 접한 적이 있는 문장은 누구보다도 쉽게 해석할 수 있지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장을 접하게 되면 해석이 용이하지 않게 된다 .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하고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니라.”라는 말이 있다. 혹자는 이것을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은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배웠으나 생각하지 않았기로 얻은 것이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배운 것은 있지 않은가?

또 혹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망(罔)’이라는 글자는 ‘어둡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이것 역시 동의하기는 어렵다. ‘罔’은 본시 ‘그물의 모습(䍏)’과 소리 ‘亡’으로 이루어진 형성자(形聲字)로 그것의 본의는 ‘그물’이었던 것이 가차(假借)되어 ‘어둡다’나 ‘없다’ 등의 뜻으로도 쓰인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그물’의 뜻을 따라 ‘그물과 같은 굴레에 사로잡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일방적으로 스승(선지식)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기만 하고, 자기의 생각은 없이 그저 앵무새처럼 뇌까리면, 스승이 쳐 놓은 그물의 굴레에 사로잡히고, 반면 혼자 생각만 하고 스승의 말을 듣지 않으면, 공상에 가까워 돈키호테처럼 위태롭다.’는 의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양자(兩者)가 모두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학(學)’이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思)’는 근기가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문(佛門)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간화선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을 든다(《禪要》). 이것들은 마치 솥의 세 발과 같아서, 이 셋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으면 화두는 결코 타파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모르지만, 나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나의 딸들이나 학생들에게 공부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설명한다.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믿지 못하고 ‘과연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한다면 결코 그것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니, 스스로를 믿은 다음에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발분(發憤)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무작정 근거도 없이 믿고, 그저 열심히 한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수시로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점검하여야 목표를 바르게 성취할 수 있다.

사실 나 자신을 믿고 열심히 한다면,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잘할 수 있지만, 목표(깨달음)의 끝자락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의심 덩어리를 가지고 수시로 생각하며 의심하고 그것을 깨뜨려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커다란 의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비슷한 경지[相似覺·隨分覺]에 이를 수는 있을지라도, 종국[究竟覺]에 이를 수는 없다는 말로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고자 이유를 찾는 경향이 있다. 말이 좋아 자기의 견해이지, 곧 집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스승이나 책을 통하여 얻은 것을 정답으로 정해놓고 그 답이 옳은 이유를 찾는 데 혈안이 되고, 혹시라도 남의 말이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정확한 근거는 대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공부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상대의 의견에 애써 눈을 감는다. 이것은 은사나 책을 통해 배울 뿐,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어찌 그런 사람을 안다고 할 것이며, 그런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흔히 경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며 그저 그렇게 알아두라고 한다. 심지어는 어려운 한문을 익히는 것보다, 포교를 위해서는 쉬운 한글로 쓰인 불전(佛典)을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재가자들이야 쉬운 한글로 교육한다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스님은 한문으로 된 불전을 읽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재가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으니,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루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립문자를 말하는 사람은, 강(講)보다 선(禪)을 잘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핑계 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자기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은 변할 수 있으나, 불립문자라는 말로 기만하거나 학자라는 이름으로 앎을 가장해서는 끝까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리니, 부족한 것이나 모르는 것을 접하면, 애써 눈을 감거나 덮으려 하지 말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나서 배워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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