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스마트폰을 끄거나 가방 안에 넣어두세요”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내키지 않은 눈빛을 보이며 느릿느릿 가방 안에 스마트폰을 넣습니다. 스마트폰을 책과 나란히 두고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모습을 못 본 체하고 강의를 해도 되련만 이번에도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싫은 소리 한 마디 남긴 날에는 제 마음에도 바람이 불어댑니다. 한 돌이 채 안 된 아기들도 스마트폰 조작법을 아는 현실에서 대학생들이 스마트폰을 가까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업시간에 책이나 강의하는 선생 대신, 카페에서 앞자리 친구의 얼굴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일렁입니다. 이제는 흔한 풍경이 된 그 모습에 덤덤해질 만도 한데 쉽지 않습니다.

며칠 전도 그랬습니다. 다행히 그날은 오후 일과를 일찍 마칠 수 있어서 오랜만에 부석사로 향했습니다. 서울을 떠나 풍기에 있는 학교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도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면 언제든 부석사에 갈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붉은 사과들과 누렇게 익은 벼 이삭들, 노란빛이 돌기 시작한 은행나무 길의 길게 구부러진 풍경은 군데군데 길을 넓히느라 옛 정취를 잃어가고는 있지만 느릿하고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헛헛할 때 부석사가 떠오르는 것은 어떤 마주함이 있었던 그곳에서의 기억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기억은 십 년 전 처음 부석사에 간 날의 일입니다. 바람이 찬 초겨울 오후, 관광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부석사 경내를 여느 관광객들처럼 한 번에 훑듯 둘러본 후 내려가는 길목에서 멀리 보이는 소백산 모습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날 안양루 옆 축대 위에서 한참을 마주했던 겹겹의 소백산 능선들의 농담(濃淡)에 마음을 덮고 있던 포장이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듯한 느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별안간의 마주함이었습니다. 그저 그 풍경을 마주하고 바라봤을 뿐인데 장엄한 자연은 마음속 깊은 언저리까지 와닿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마음이 스산하고 다독이고 싶을 때면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고, 때로는 그 자리에 서서 능선 한 자락 한 자락에 속마음을 풀어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그 후 4년이 지난 한여름의 일입니다. 불심 깊은 친구 덕에 부석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새벽녘 방문 밖에서 들리는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예불을 드리는 것은 계획에 없었던지라 어두운 방 안에서 목탁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부석사를 비롯한 사찰을 방문할 때면 다른 종교에 대한 예를 갖춰 무례하지 않게 경내를 둘러보기는 해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안에 들어가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구경 삼아 기웃하거나 그 문턱을 넘는 것에도 어떤 결심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뭇해지는 목탁소리에, 잠을 재워주셨으니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사이엔가 나는 놀러간 친구 집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듯 무량수전 안에 계신 부처님께 깊은 묵례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새벽예불에 참석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마음을 다해 부처님께 절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절을 올리는 사람들과 그 절을 받고 계시는 분, 나는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도 나를 지긋한 미소와 함께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서른 명 남짓 무량수전 안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나는 그때까지 쥐고 있던 긴장의 끈을 툭 하고 놓고 말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때 내가 마주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놓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끈을 놓았을 때 비로소 무량수전의 문턱을 넘어 발을 딛고 들어올 때 갖고 있던 어떤 두려움에 저어됨 없이 그분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석사에서 두 번의 마주함을 통해 나는 마주함에는 지극한 응시와 응대, 마음을 여는 용기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지긋이 상대의 눈빛을 응시하는 데에는 서두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바라보면 그 눈빛이 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없습니다. 마주하는 대상에 눈을 맞추고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듣고자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쌓일 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올렸을 때 그 뜻을 깨달은 마하 가섭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하 가섭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지긋이 마주하였기에 그 뜻을 알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강의실에서 아이들과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며 출석을 확인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옆에 앉은 친구 얼굴을 바라보라고, 학교 운동장 계단에 앉아 멀리 소백산을 바라보라고,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라고,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을 수 있게 견디어 보라고 말을 건네 봅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는 그들의 손가락 끝에서 흔들리는 외로움을 보았기에 그 말은 때로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이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산 능선이고, 무량수전 안의 부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지친 마음에 힘을 내게 해줍니다. 겹겹이 쌓인 사람들의 결 사이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 내 앞에 앉은 사람의 눈빛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마주함이란 가까이 있는 존재들을 향해 나도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냥 가볍게 터치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 마주하여 응시하는 것, 관광객처럼 한 번 훑어보고 떠나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 머물러 함께 있는 것. 그런 마주함을 기억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아이들에게 눈 맞추자고 말하고 싶어서 부석사에 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 마주함의 위로를 알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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