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각과 손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미적 가치들을 아트(Art)라고 이름 하는 시대이다.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담아내는 것이 미술 창작의 힘이다. 이러한 모든 근원은 불교의 유심사상과 맞닿아 있다. 유심철학의 정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서 인간의 마음이 빚어낸 문명의 자취를 회화 사조에 붙여 접근하고자 한다.

거대한 도시로의 대중사회 출현과 과학기술과 더불어 정보화의 극치로 상징되는 우리의 현대미술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그 힘이 작용하고 있을까? 현대미술은 수많은 양식이 병존하고 있다. 서구적 표현방식으로는 평면, 입체, 영상, 설치 등을 비롯한 옛것과 새것, 구시대적인 것과 동시대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대략 나누어 볼 수 있다. 

문예사조의 단적인 흐름은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우리의 삶과 사고를 지배해 온 리얼리즘을 밀어낸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은 다양한 양상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종착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변화된 것인데 오늘에 이른 우리의 미술은 이제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불교적 시각으로 보는 유효한 대답은 마음의 눈을 뜨고 고정관념에서 깨어난 자유스러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가 미술에서는 일찍부터 강조되어 왔다. 이러한 발상은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의식의 흐름이 옮겨갔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작가정신의 갈애(渴愛) 때문이다. 이 역시 자유로운 힘을 갖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 갈애로 빚어진 더 큰 반발이 다름 아닌 한 세기의 문화적 변혁으로서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절대이념을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탈이념까지도 생산해 냈으며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그러나 시대의 문화적 논리에 따른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에 이른 첨단과학의 정보화 시대에 와서도 예술의 탈영역을 여전히 부추기곤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이즘의 힘에 언제까지 무력화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농경사회에서 서양의 자본주의 사상이 만든 근대산업사회, 거대한 도시문명사회, 그리고 오늘의 지식정보화사회로 변모해 왔다. 이를 발전의 척도이자 행복한 삶의 구현이라고 믿는 사고가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냉엄한 비판과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하는 변혁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고르지 못하고 편중된 부의 분배와 도회의 공해는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세계는 지금 정보화 글로벌리즘(globalism)의 소용돌이에 있다. 이 글로벌리즘은 곧 ‘지구주의’로의 순화(巡化)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개별 국가의 단위를 초월하여 세계를 하나의 통합체로 만들려는 힘의 논리다. 한마디로 지구를 독식하려는 미국의 이러한 발상은 유럽 공동체나 북아메리카의 자유무역주의에 대두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글로벌화의 순환이 더딜 뿐이지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뜻대로라면 탈국가주의가 되는 일인데 문화양식마저 그 영역이 무너져 버린다면 무엇으로 우리를 보호하겠는가?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술이라고 하는 문화적 영역은 한류를 지키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도그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를 옥죄고 있는 서양식 사고의 미술은 도시 중심의 미술이며 근현대 사조도 구미인의 시각으로 얽힌 그들 문명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정서에 맞는 예술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서양미술과 다른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한국예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이자연(法爾自然)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이는 자연 안에 길이 있음을 포괄한, 우주를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불가의 가르침을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우리의 사고는 인간을 포섭하고 있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며 귀의함을 이상으로 삼아 왔다. 전통적인 정신에도 아직 이러한 근간은 남아 있을 것이다. 대다수 작가가 도시에 거주하는 지금에도 거의가 인물보다는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 정서다. 이와 같이 무의식 속의 한국인의 심성은 자연관이 뿌리박힌 또 다른 신(神)의 이름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이라는 비평적 입장에서 보면 자연주의는 19세기에 유행했던 낡은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양식상의 논리보다도 자연의 실체는 작가에게 영구불변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서양의 도시적인 산물과 분명한 차이점을 엄격히 구분하게 되면 자연을 보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얼마든지 창출되리라고 본다. 물론 자주성 확립이 쉬울 리는 없다. 안이한 도시 의식으로 깊숙이 박힌 고정관념을 몰아내고, 우리의 자연신 즉 불성을 새롭게 깨닫는 정신적인 자각과 수련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술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도 작의를 품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창작력이다.

문제는 작의에 불어넣는 생명력이다. 생명을 지닌 창작물들은 삶을 뛰어넘어 존재하기 때문에 천 년의 뒷날도 변함이 없는 영원성을 지니게 된다. 보이지 않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뭇 생명, 무언의 몸짓, 숨결, 변화무쌍한 기상과 바람 소리의 의미를 작의의 생명으로 담아내기 위하여 작가는 선(禪)을 통한 대답과 자연율(自然律)이기도 한 유위법(有爲法,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만유일체의 법)을 품어야 한다. 생명으로 탄생한 작품은 고대나 현대, 이즘이나 사조에 구애될 수가 없다. 우리 회화의 정체성을 향한 메타포는 유심적 성찰로 모든 존재가 구현되는 자연신 즉 우주의 대생명인 불성을 통해서 키워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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