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당연한 말이겠지만, 또 어느 분야에나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음악은 그것이 어울리는 때와 장소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그 장소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젠가 서울 시내의 한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다.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살아 있어서 불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가족과 함께 휴식 삼아 들르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가라앉은 절 마당에 생동감을 주는 풍경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덧 살쯤 되는 어린아이가 갑자기 칭얼거리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얼른 아이의 바지를 벗기더니 잘 가꾸어진 대웅전 앞마당 화단에 소변을 보게 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물론 아이 아버지의 공공의식 부족이라 여길 수도 있고, 이웃종교 신자의 무지한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면 그뿐일 수도 있겠지만, 종교적인 공간이라면 성황당 앞에서도 조심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일반적인 정서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아버지의 행동은 참으로 파격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던 차에 문득 느껴지는 소리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 방송이었다. 그 절에서는 편하게 찾는 시민들을 위한 배려였는지, 스님의 독경 대신 클래식 음악을 절 구석구석에서 들리도록 방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좋은 음악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카페나 공원 등지에서 분위기 조성용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음악이 들려오는 공간에서 그 아버지는 그곳이 종교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저 공원에 놀러 온 것쯤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음악 탓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절이 언제나 근엄하고 조심스러운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모신, 누구에게나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 되는 것과 ‘공원에 모신 부처님’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요즘은 산사음악회를 마련하는 절도 적지 않고, 절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불교와 음악을 소재로 대중들과 만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각각의 목적에 따라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음악들이 다를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불교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전통음악과 불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면 좀 더 효과적일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불교와 음악

‘불교에서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종종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는 마음에는 이견이 없지만, 다소 섭섭한 말씀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을 위한 계율에는 음악과 춤을 멀리할 것을 당부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음악은 소극적으로나마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여럿이 같은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가락과 장단이 더해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혹은 경전 결집 당시 부처님의 말씀을 함께 외던 비구들 역시 그런 가락과 장단이 없다면 그 많은 경전을 입을 모아 외우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오늘날 전해지는 아함경이나 니까야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절들이 그런 음악적 요소들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법당에서 외는 스님들의 독경 역시 음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십송율(十誦律)》에는 부처님이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성패(聲唄)를 권장하는 말씀이 있다. ‘몸이 피로하지 않다.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 준다. 정신이 맑아진다. 소리가 맑아진다. 경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장아함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때 세존은 삼매에서 일어나 반차익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반차익이여, 너는 청정한 소리로 유리 거문고에 맞추어 여래를 칭찬하는구나. 거문고 소리와 너의 목청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슬프고 화하고 아리따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네 거문고가 아뢰는 바는 온갖 뜻을 갖추어 있다. 욕심의 결박을 말하기도 하고 또한 범행(梵行)을 말하기도 하며 또 사문을 말하기도 하고 또 열반을 말하기도 한다.”
— 장아함 권 10 《석제환인문경(釋提桓因問經)》

부처님이 음악을 멀리할 것을 말씀하신 뜻은 수행자가 향락적인 음악에 빠져 본분을 잃을 것을 걱정한 까닭이지, 그 음악으로 부처님과 가르침을 찬탄하고 널리 알리는 일조차 막으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음악이 없는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널리 알려진 종교 가운데 이슬람교가 음악에 소극적이고, 예배 의식에서 음악 사용을 배제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잔adhān)’만 해도 나름의 독특한 가락과 리듬을 가지고 있어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악기에 신성을 부여해서 신이 인간을 위해 준 선물로 여기기도 했다. 세속적이거나 오락적인 음악,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음악들도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오늘날에는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학자들은 인류음악사 전체에서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백과사전(두산)의 ‘종교음악’란에는 ‘음악이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음을 소재로 하고 또 논리를 초월하여 직접적인 감동을 주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와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일반적인 종교음악에 두루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불교에 더욱 잘 부합하는 것 같다.
3. 불교와 국악

불교가 적극적으로 음악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기록만 살펴보더라도 그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불교음악인 범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830년) 진감선사가 옥천사(지금의 쌍계사)에서 많은 제자에게 범패를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그보다 이전에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작자로 유명한 월명사라는 스님이 지나가는 말로나마 범패에 대한 언급을 한 기록이 있다. 진감선사 이전에도 불교 의식에 음악을 널리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월명사가 언급한 범패든 진감선사가 새로이 들여온 범패든 그것이 어떤 형식과 가락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당시 신라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기에 명칭도 구분했을 것이다.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그 시절 신라에서 널리 불리던 범패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범패의 홋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영역이었던 경상도나 강원도 일대의 민요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 보급에 음악을 잘 활용한 분으로는 원효대사를 꼽을 수 있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구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그때 원효대사의 노래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박을 악기 삼아 부른 것인 만큼, 당시 민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친숙한 거리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무애가(無㝵歌)〉는 바로 민중들의 가락을 이용해 불교를 포교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른 노래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당대 음악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고려시대 화엄의 대가였던 균여 대사는 향가로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를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가사(歌詞)만 남아 있지만, 당대에는 분명 많은 사람이 노래로 불렀을 것이다.
세종대왕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불교음악 작곡가 중 한 분이다. 세종대왕은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유네스코 인류의 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악〉이다. 당시 문신 김수온이 지은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에는 세종대왕이 불교음악을 작곡한 내력이 실려 있다. 세종대왕이 선왕의 원을 잇기 위해 궁성 북쪽에 불당(佛堂)을 짓고 삼존불 등을 모신 후에 ‘나의 효성이 능히 부처님을 감동시켜 대중에게 감응 보이기를 기원’하자 불전에서 방광하고 사리탑 앞에 사리 두 과가 나타나 찬란한 광채를 내뿜어서 모인 사람들이 크게 경탄했다는 내용이다. 이 낙성식을 위해 세종대왕이 친히 음악을 만들었는데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 발대원지곡(發大願之曲), 융선도지곡(隆善道之曲), 묘인연지곡(妙因緣之曲), 보법운지곡(布法雲之曲), 연감로지곡(演甘露之曲), 의정혜지곡(依定慧之曲) 등 모두 7곡이었고, 가사는 귀삼보(歸三寶), 찬법신(贊法身), 찬보신(贊報身) 등 9장이 전하고 있다. 이 무렵에 창제된 〈여민락〉 같은 궁중음악도 유장한 가락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적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교음악들은 우리 전통음악의 형성과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범패는 다른 말로 어산(魚山)이라고 한다.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조조의 아들 조식이 어산(魚山)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을 때 공중에서 들려오는 범천의 소리를 본떠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지만 범패의 특징적인 가락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연못 속의 물고기가 유유히 방향을 바꿔가며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양을 본뜬 것이라는 것이다. 범패의 가락은 장인굴곡(長引屈曲), 즉 가사를 길게 끌어서 다양한 변화를 주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현재 영산재에서 불리는 〈나무대성인로왕보살〉 같은 곡은 이 아홉 자를 노래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린다. ‘나무’ 두 글자를 노래하는 데만도 약 15분, 그러니 글자 하나하나에 가락이 얼마나 다채롭게 변화하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현재 전통음악은 크게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구분한다. 정악은 궁중음악이나 선비들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음악을 가리키는데, 그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다. 제목만 봐도 불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이라는 일곱 자를 부르던 불교 성악곡이었다고 전해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래는 사라지고 기악만 남았는데, 여기에 민간에서 연주되던 곡들이 보태지고 변화되면서 지금은 9곡의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전체 연주 시간이 약 45분 정도 걸린다. 그 가운데에는 〈염불(念佛)도드리〉라는 곡도 있다. 〈영산회상〉 전체는 악기 구성이라든가 조성(調性)에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를 함으로써,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정악의 가장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정가(正歌)는 풍류방에서 즐겨 부르던 성악곡을 말하는데, 주로 시조시나 가사체의 긴 시를 노래한다. 그중에서 가곡(歌曲)은 느린 곡부터 빠른 곡까지 여러 곡조를 이어서 부르는 모음곡 형식이고, 각각의 곡은 시조시를 그 가사로 한다. 시조시 하나를 노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약 4분, 긴 곡은 12분 정도 걸리는데, 자연히 노랫말은 길게 끌면서 굴곡이 지는, 범패의 장인굴곡과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범패보다는 훨씬 짧고 빠른 셈이지만, 역시 범패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당패는 조선 후기에 사찰에 근거지를 두고 불사(佛事)가 있을 때면 마을을 돌며 소리와 춤 등으로 시주를 모으던 유랑예인 집단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불사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염불이나 범패 가락을 흉내 내고 또 대중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생겨난 곡들이 경기민요 〈회심곡〉 남도잡가 〈보렴〉 같은 곡들이다. 재 의식은 주로 범패로 진행되지만, 대중들을 위한 축원은 우리말로 노래한다. 이런 곡을 화청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향을 받은 곡이 〈회심곡〉이다. 서산대사가 사설을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삶의 무상함을 내용으로 삼고 있어서 그 내용만으로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렴〉은 보시염불(報施念佛)의 줄임말로 불보살의 힘을 빌어 나라의 평안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이다. 그 외에도 서도민요 긴염불, 자진염불 등 많은 민요들에 불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판소리도 역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장르이다. 〈수궁가〉의 토끼와 자라 이야기는 《자타카》의 악어와 원숭이 이야기가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지면서 동물들이 바뀌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덧붙여진 것이다. 〈심청가〉는 잘 알다시피 심청이가 목숨 대신 얻은 공양미 삼백 석을 절에 바치고 그 공덕으로 심봉사가 눈을 뜬다는 이야기이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실 때 그 공덕으로 일체중생이 모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 있다. 〈심청가〉에서는 심봉사가 눈을 뜰 때, 맹인 잔치에 참석했거나 안 했거나 간에 모든 봉사들이 모두 함께 눈을 뜬다. 한 사람의 공덕으로 모든 사람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니, 보시와 자비의 공덕과 함께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말씀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 무용도 불교의 영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화려한 궁중 무용 중에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있다. 대개 학춤과 처용무가 함께하기 때문에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이라고 한다. 세조 때 영산회상곡이 만들어지면서 창작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려 때 전래된 서역의 자지무(柘枝無)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대 위에 작은 산과 연못, 꽃 등과 함께 커다란 연꽃 두 송이를 설치한다. 학이 나와서 춤을 추다가 연꽃을 쪼면 그 속에서 동녀(童女)가 나와서 춤을 추고, 뒤에는 처용무가 이어진다. 요즘은 여기까지 하고 춤을 마치지만, 예전에는 다시 동녀가 등장해 ‘나무아미타불’을 관객과 함께 염불하고, 〈관음찬(觀音讚〉을 부르면서 세 번 도는 것으로 마치는 일종의 불교 가무극(歌舞劇)이었다.
민속 무용 중에 널리 사랑받고 있는 승무(僧舞)는 불교 의례 중 법고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조지훈의 시 〈승무〉는 화성 용주사에서 열린 재에서 승려의 춤을 보고 영감을 얻어 지은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의 음악과 문화는 조선시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불교 음악의 현실은 어떤가. 법회에서는 이웃종교의 성가 형식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찬불가를 노래하고, 대중과 함께하는 산사음악회에서는 현대인들이 불교를 고리타분하게 여긴다면서 전통음악보다는 가벼운 대중음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화를 이끌어가기보다는 이끌려 가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음악과 무용만으로도 충분히 다채로운 산사음악회를 구성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그 내력을 소상히 알고 감상하거나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명상과 국악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와 비례해 명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일반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명상프로그램이 많이 보이다.
명상을 위한 장소로는 대체로 가능한 한 조용한 곳을 찾는다. 어지러운 소리에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진공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바에야 완벽하게 조용한 곳은 없다. 인적 없는 깊은 산중이라도 바람 부는 소리, 새가 우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러니까 조용한 곳이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 아니라 가능한 인위적인 소리가 배제된, 자연의 소리로 채워진 공간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능엄경(楞嚴經)》에는 소리로써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밝히는 구절이 있다.

그때에 관세음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 아래에 절하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생각해 보니 옛날 수없이 많은 항하사 겁 이전 어느 때에 어떤 부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그 이름이 관세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처님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었더니 그 부처께서 저를 가르치시되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삼매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가운데 흐름에 들어가되 들을 바가 없어지고 들을 바와 들어간 곳이 이미 고요해져서 움직이고 고요한 두 모양이 또렷이 생기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이 듣는 것과 들을 대상이 다 끊어지며 듣는 것이 다 끊어진 것도 머물지 아니하여 깨닫는 자와 깨달을 대상이 공하였으며, 공한 깨달음이 아주 원만하여 공한 것도 공할 것도 없어지더니 나고 없어짐이 이미 끊어진지라 끊어져 고요함이 나타났습니다.”
— 《능엄경》

명상을 하기 위해 반드시 음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혹은 명상자의 상태에 따라서는 음악이 집중으로 이끄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이 좋을까? 이왕이면 자연의 소리를 잘 살린 음색이라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국악기는 자연의 재료를 가능한 한 가공하지 않고, 원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살리는 쪽을 유지해 왔다. 가야금과 거문고는 오동나무나 밤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일정한 두께로 깎아서 잘 말린 후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인두로 지지는 정도의 가공을 하고,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얹어 소리를 낸다. 대금이나 단소 같은 관악기는 적당한 길이로 자른 후에 굽거나 찌고, 그 후에 적당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으면 그뿐이다. 최상의 음색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작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적당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재료의 성질을 바꾸는 것이 아닌 그 성질을 잘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연주 방법에서도 국악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최대한 이용한다. 솔바람이라도 나뭇잎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대금을 불 때는 입김을 불어넣는 소리조차 억지로 조절하지 않고, 갈대 속에서 채취한 청(淸)을 이용해서 오히려 잡음과 같은 소리를 강조하기도 한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는 술대가 악기에 부딪히는 소리, 해금을 연주할 때는 줄과 활대가 마찰하면서 나는 거친 소리가 그대로 음악이 되는 식이다.
음정을 내는 방식은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정서와 맞물려 있다. 한옥의 처마는 직선이 아니라 살짝 휘어진 곡선이다. 심지어 돌로 만든 탑마저도 지붕돌에 곡선을 살린다. 한복 배래선이나 버선도 곡선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곡선을 선호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음악 역시 곡선을 중시한다. 피아노는 ‘도’ 음을 치면,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일정하게 ‘도’ 음을 유지한다. 쭉 뻗은 직선이다. 우리 전통음악에서는 음을 한 번 내면 밀어 올리든지, 흘러내리든지, 흔들어 주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주어서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곡선을 만들어 낸다. 서양 악기 중에서도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약간 떨리는 음정을 내기도 하지만 국악기의 음폭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오랜 세월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온 불교에 국악이 잘 어울리는 것은 단지 우리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그 바탕을 이루는 정서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악의 속도가 느리며 가락의 변화가 적다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다. 빠르고 변화가 많은 음악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전통음악을 들을 때면 종종 졸린다는 표현을 한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된 몸을 이완시키는 효과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명상에서 국악이 좋은 이유로 화성(和聲)이 아닌 단선율(單旋律)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국악은 여러 악기가 함께 연주해도 가락은 서로 엇비슷하다. 화성을 위해 여러 가락이 한꺼번에 쏟아지거나 서로 부딪히는 서양음악에 비해서 명상자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따라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통음악 중에서도 과연 어떤 음악이 좋으냐는 문제가 남는다. 평소에 국악을 자주 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가지 음악만 국악이라고 여기기 쉽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판소리가 전부라 생각하기도 하고, 사극에서 궁중음악을 접했던 경험이 생각나는 사람은 그 음악이 국악의 전부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악도 그 세계로 들어가 보면, 이렇게 다양한 음악이 있었던가 놀랄 정도로 갈래가 많다. 그중에서 한두 가지 음악을 선택한다면 〈영산회상〉 중에서 첫 번째 곡인 상령산(上靈山)이나 도드리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이런 곡들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정악(正樂)’이라고 해서 선비들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음악이다.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 즉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악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음악으로서는 좀 단순하고 심심하게 여겨질 수 있다. 불교의 선(禪) 역시 단순하고 간결한 것을 지향한다는 데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선비들에게도 이런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은 수양을 위한 방편이었다.
전통음악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악기들을 자유롭게 달리 구성할 수 있다. 거문고나 대금, 가야금 같은 악기들로 독주 음악을 선택하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간결한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이중주나 관현악이 어우러진 곡을 선택한다면 서로 다른 음색들이 같은 길을 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멋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상음악은 듣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정돈해서 한곳으로 모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국악이 자극적이지 않은 음색을 가지고 있고, 음과 음 사이의 여백이 충분하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이어지는 가락은 마음이 다른 길로 벗어나는 것을 잡아준다는 것은 전문 연주자들이 연주를 할 때 직접 체험하는 부분이기도 한다.


5. 불교 의례

불교 의례 중에서 영산재(靈山齋)나 수륙재(水陸齋) 같은 재(齋) 의식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과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산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유네스코 인류의 무형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수륙재도 2013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바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지만, 의례에 담긴 의미나 노래와 춤의 가치에 대해서 깊이 알리려는 노력은 부족해서 일회성 이벤트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재에 대해서 검색을 하면 대개 ‘중생에게 부처님의 말씀과 음식을 베풀어 천도하는 불교 의식’ 정도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기는 하지만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우선 범패와 작법(作法)은 그 자체로 스님들에게는 수행의 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중생들에게는 재를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갖고, 보시와 부처님 말씀으로써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분률산번보궐행사초(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에는 “범패를 일명 지단(止斷) 또는 지식(止息)이라고 하는바, 이것을 소리함으로써 일체의 외연을 지식하고 적정안온(寂靜安穩)의 경지에 도달하여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달 그림자 비추듯 모든 법사를 진행한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나무대성인로왕보살〉을 노래하는 데 1시간, ‘나무’ 두 글자만 노래하는 데도 15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자음은 어느샌가 훌쩍 지나가고 ‘아, 으, 어’ 같은 뜻도 없는 모음만 이어지게 마련이다. 긴 노래 가사를 외우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가사도 없는 노래를 부르기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익숙한 노래 한 곡을 골라 가사를 빼고 모음만으로 허밍을 해 보면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입으로는 ‘아’를 노래해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가사를 새겨야만 끝까지 부를 수 있다. 그것과 비교해 보면 범패 한 곡을 외워 부르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필요한지 짐작될 것이다. 더구나 재를 지낼 때는 유나(維那)가 경청하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소리가 틀리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재장 밖으로 끌어내어 무안을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범패승들은 일체의 잡념을 버리고 오직 소리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가운데 일심의 경지로 몰입되고 무아의 혼연일체인 선의 경지도 터득할 수 있다고 한다.
작법(作法)은 단순히 재나 재가 펼쳐지는 도량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추는 춤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을 몸짓으로 그려내는 행위이다. 동작을 통한 신업(身業) 공양, 경전 내용을 암송하거나 염불을 하는 구업(口業) 공양, 마음과 생각으로는 그 뜻을 새기는 의업(意業) 공양을 통해 삼업(三業)의 이치를 되새기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는다.
그리고 재가 펼쳐지는 도량에는 괘불을 비롯해서 부처님 세계를 담은 다양한 탱화들을 모셔놓고, 화려한 꽃과 여러 가지 장식들로 장엄한다. 각각의 절차는 말보다는 범패와 작법으로 진행된다. 중생들은 그림과 장식을 통해 불세계(佛世界)로 들어가 부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도량에 가득 찬 가락 속에 온몸을 맡김으로써 그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직관을 매개로 하는 예술로써 구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재의 의식은 죽어서도 안정을 얻지 못하는 중생들의 넋을 모셔 차와 음식을 대접해 안정을 취하게 하고, 관욕 의식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으로 번뇌를 씻어 예를 갖춘 후에 부처님을 청해 가르침을 듣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부처님께 공양하고, 영가에게 음식을 시설하는 형식을 통해 고혼(孤魂)들은 청법대중(請法大衆)으로서 자리에 모셔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리심을 내어 마침내는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천도재는 연고가 있는 넋을 위로하는 형식이지만, 수륙재만큼은 물과 육지에 떠도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대상으로 한다. 내 가족과 남의 가족,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구분이 없고, 고혼들과 함께 그 자리에 모인 다양한 대중들 또한 함께 부처님의 법을 듣는다는 점에서 삶을 마친 넋과 아직 살아 있는 존재라는 구분 역시 의미가 없다. 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비록 본인은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함께 해탈하기 위해 기꺼이 재물을 보시하고, 정성을 바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때 갈양사(葛陽寺)에서 처음 수륙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는가 하면,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기도 했다.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이 이어졌고 마침내 중종 때 폐지되었는데, 다시 선조 때 창의문 밖에서 수륙재를 열어 이것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이 유교 국가로서 불교를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행(國行) 수륙재를 지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새 왕조가 들어서기까지는 고려의 왕족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이며 가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대개 전 왕조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고, 새 왕조에 대해 순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치 이념으로서 유교에는 그렇게 지친 백성들의 상처와 상실감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의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때,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보살피는 수륙재는 여전히 불교적인 전통에 젖어 있는 백성의 마음을 달래어 통합을 이루어 내는, 소통과 화합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선조 때 수륙재를 열었던 것도,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도 임진왜란 이후 너나없이 지치고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그 시절보다 나은 것일까? 근 몇 년 사이 우리는 광우병 파동과 신종플루 같은 질병의 위협에 직면하거나 구제역으로 살상된 수많은 가축들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또 천안함 사건이나 용산 참사 같은 비극을 바라보았으며, 이제는 방사능 위협에 음식조차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 불안과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전부 각 개인의 몫일 뿐이다. 요즘 힐링이나 명상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 같다. 이럴 때 수륙재나 영산재가 조선 초나 임진왜란 이후처럼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쉬운 점은 현재 이러한 의식들이 사회적인 역할보다는 문화재로서 전통문화 복원에 더 마음을 쏟고, 단순히 불교도들만의 행사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 불교 의례는 옛 의식의 절차와 내용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회성 행사로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재의 의미를 음미하고 참여한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재의 각 절차들, 그 절차에서 구현되는 범패와 작법에는 나름의 귀중한 뜻이 담겨 있지만, 그것이 전통에만 머무른 채 이 시대에 참여하는 중생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복원한다 해도 언어와 풍속이 달라진 오늘날에는 그저 박제된 관광 상품에 머무를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문화재로서 접근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의례의 문화와 그 목표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의례와 절차를 현대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또 각 절차에 담긴 의미를 그 자리에 모인 대중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6. 나오는 말

불교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오면서 민족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또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풍요로운 문화를 이끌어 왔다. 음악은 그중 하나이다. 범패로 대표되는 불교음악은 민중들의 정서를 반영하며 변화되어 왔고, 〈영산회상〉이라든가 판소리, 〈회심곡〉 등 전통음악의 많은 갈래 속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자취가 남아 있다.
그러나 격변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불교와 국악은 많은 상처를 입었고, 각자 그 상처를 회복하느라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부족했다. 그러는 가운데 본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조차 잊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이제 양쪽 모두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고, 좀 더 많은 대중과 함께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는 시기에 이르러 서로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산사음악회나 명상, 전통 의례 등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전통음악 분야에서는 불교적 요소들을 반영한 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얻고 있다. 영산재는 유네스코 인류의 무형유산에 등재되어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어느 창작국악 그룹에서는 몇 년째 계속 범패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이제 함께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다시 상대방을 살피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음악은 어떤 정교한 이론보다도 그것을 연주하고 듣는 사람들의 정서적 교감이 가장 중요하다. 같은 음악이라도 그 속에 담긴 불교적인 의미나 이야기를 알고 들을 때 중생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불교음악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국악인들 역시 음악의 근원과 그 속에 담긴 정신을 이해할 때보다 깊이 있는 연주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자주 만나서 상대의 영역 밑바탕에 깔린 정서를 몸으로 체득할 기회가 필요하다. ■

 

남화정 /
방송작가. 이화여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한국방송(KBS)과 국악방송의 국악프로그램과 국악 공연 등에서 활동 중이다. 저서 《사람이 있는 곳에 흘러라 우리 음악》이 있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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