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동체, 혹은 틀 속의 개창(開創)

且道 放行卽是 把住卽是
                                 — 《碧巖錄》 第51則

모든 공동체는 우리가 몸담은 세속(世俗)을 의미 있게, 그러므로 ‘다르게’ 지나/거쳐 가려는 형식이다. 단순히 (웰빙 테크닉이나 조찬기도회나 혹은 호국의 장치처럼) ‘사회적 동화’(한나 아렌트)의 기제나 방편과는 다르기에, 우리는 그것을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형식[틀]은 다양하고, 더러 성가실 만큼 복잡하기도 하다. 루카치의 변별적 용어를 이용하자면, 그 형식들은 대체로 영혼, 혹은 삶의 진정성을 보살피며 광증(匡證)하려는 노력과 실험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변증법적 변화와 개선의 고비고비에는 우리 인생이 희망하는 지선지고의 표현과 실천들이 공부길의 표지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고귀한 것은 다 힘들고 또 그만큼 드문 것(Sed omnia prae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스피노자)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나 링컨(노무현)의 암살(자살)같이, 반드시, 루카치적 비극에 의해서만 양자가 화해한다고 중얼거리는 페시미즘만이 진실일 수는 없다. 특히나 세속 속에 놓인 종교 공동체는 죄다 ‘지는 싸움’에 외려 익숙하고 ‘무능의 급진성’을 환대하지만, 도토리 키재기라도 하듯 촌선(寸善)을 온축하며 낱낱의 일상과 그 생활양식을 통해 개량[淑世]하려는 공동체적 노력은 여전히 쓸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형식’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서, 그 구성원들의 삶을 규제하고 보양하는 얼거리(framework)의 생산성에 대한 믿음에 터 한다. 이 얼거리는 우리 시대 자유주의적 소비자 개인들의 생각과 이유와 변덕을 죽여서 이들을 동무와 도반으로 조형하는 태반이 된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그의 종교사회학 논술 속에서, 구원종교(Heilsreligion)의 현실적 가능성이 워낙 ‘의례적(儀禮的)’ 전제조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는 대로, 공동체 속에서 규정되어 집단적으로 집행되는 의례적 실천(ritualistic practices)은 인간의 삶을 양식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의 원형으로서 특히 종교 공동체의 실험과 활동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대한 이 사실의 취의를 추리자면, ‘태초에 형식(틀)이 있었다!’고, 과장할 만도 하다. 새로운 틀이 없으면 새로운 진보나 개창(開創, Erschließung)이 없다는 사실은 갖은 역사적 사건들이 증명해주는 바와 같다. 마찬가지로, 비록 불교 특히 선불교의 전통은 일신교와 달리 갖은 자기부정과 아이러니로 그득하지만, 불교를 인류의 정신문화사 속에 우뚝 세운 그 도도한 성취는 오히려 지계(持戒), 즉 부처의 육성 대신에 남겨진 가장 분명한 깨달음과 수행의 얼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틀은 충분조건이 아니므로, 틀로 인해 가능해진 긍정적인 요개(搖改)를 다시 일상에 내려앉히고, 그 새로운 일상에 알맞은 주체의 재구성은 차라리 더 중요한 이후의 과제일 것이다. 공동체라는 어울림의 격식은 바로 이 같은 일상의, 이러한 주체생성의 연습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틀이 사람들을 보편적 대의를 향하도록 격동시키는 ‘동원(動員)’의 국면이 지나자마자 바로 그 틀이 기약했던 다른 삶의 알속은 곧 잊히고,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세속적 보상을 당대의 체계로부터 뽑아내려고 희떱게 구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틀이 사지소혜(私智小慧), 혹은 정략의 도구가 되는 꼴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는가! 그러므로 (칸트식으로 말해서) 이 틀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일러 ‘사이비’라고 부르며, 개인들의 경험적 특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수행공동체의 경우 특히 이 점을 유심히 살펴 개방성과 보편성의 지평을 얻도록 애써야만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공동체의 현실은 형식(전통)과 삶(영혼)의 일치에 대한 희망에서 발원한다. (서둘러 말하자면, 희망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힘들여 배워야 할 타자적 지평의 것이다.) 하지만 만약 형식과 삶의 일치가 일회성의 비극적 사건 속에서 부사적으로 번득일 뿐이라면, 공동체의 꿈이란 특히 종교공동체의 꿈이란 수많은 평자들의 날 선 말처럼 기껏 환상적 자기 되먹임에 불과할 것이다. 혹은, 공산당이 체계적 형식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복지를 구현해준다는 식의 일방적 시도와 같은 것이라면, 그 틀은 “다원성과 다양성과 상호 견제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정치”(한나 아렌트)를 민멸시키는 짓이 될 것이다. 무릇 공동체는 독선기신(獨善其身)으로 졸아들 수 없으니, 지계(持戒)와 순명(順命)의 틀거리 속에서도 필경 인간들의 세속이기에 필요한 현명한 ‘정치’를 생략할 수 없다.
공동체의 틀은 개인들로 하여금 제 ‘생각’대로 할 수 없는 넓은 영역을 설정해서, 이른바 상상적 동일시의 작패(作悖)를 넘어서도록 돕는다. 그리고 어렵사리 운신할 수 있는 좁은 영역 속에서 노동과 수행과 어떤 어울림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한, 하지만 방외인들은 상상할 수 없이 더 넓고 깊은 영역을, 그 개창을 약속한다. 물론 이 약속은 형식과 삶의 일치를 그 비용으로 요구하며, 공동체의 성패는 이 일치를 향해서 지며리 공부하고 애쓰는 실천에 달려 있다.


2. 공동체, 호감과 호의가 아닌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 僧璨 〈信心銘〉

틀과 그릇 속에 들어가서 벼려져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공부길의 요체니,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자라면 얼마간 스스로를 야무지게 묶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답답하나마 그릇이 아니라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 물이 정정(淨淨)하지 못하면 달이 뜨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속(時俗)과 제 생각을 닮은 ‘꼴’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의 사유와 실천을 바꿀 수 있는 ‘본’일지 하는 선택에 있으며, 자신의 생각과 이유와 변덕과 냉소와 허영을 죽이고 이 선택에 조응하는 좁은 ‘틀’ 속에서 살 수 있는지, 하는 데 있다.
공동체가 세속과 벋버듬하게 어긋나(내)면서 생산적 불화의 장(場, champ)을 이루어 내려는 것은 당연하다. 불화의 예기(銳氣)를 잃으면 곧 공동체의 영혼이 소실되는 것이요, 생산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근기(根氣)를 잃고 필경 흐물흐물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산책’이라는 개념을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로 정의하고, 이것을 동무공동체의 동력으로 해명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거하는 수행자들의 에너지라도 물론 스피노자적 의미에서는 ‘능동적’일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언어적 소통(lexis)과 사회적 실천(praxis)의 요구를 피할 수 없다면 이들조차도 그 ‘산책’에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공부하고 수행하는 공동체란 (아감벤의 구분처럼) 세속에 우연히, 그러나 ‘유효(Geltung)’하게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바로 그 세속에 ‘의미(Bedeutung)’의 터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란 ‘분노도 편견도 없이’(막스 베버) 기능적으로 복무하는 관료사회도 아니며, ‘비인간화되면 될수록 더욱더 활발해지는’(베버) 자본주의적 개성도 아니다.
스스로 틀 속의 좁은 길을 마다치 않고 정진하면서 안팎으로 줄탁(啐啄)해서 대성하려는 이들에게 세속은 (지눌의 말처럼) “넘어지게 하는 땅이면서 또한 짚고 일어서게 하는 땅(因地以倒因地以起)”과 같은 것이다. 과연 세속이란 무엇인가? 특별히 ‘어긋내고 어울려서 어리눅게’ 살아가려는 공동체 성원들에게 세속이란 무엇이며, 그 세속의 어떤 부면과 특성이 도드라져 주목되어야 하는가? 중생(衆生)이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의 관계역(關係域)이듯이 세속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세속은 단연 자본주의적 세속이다. 이 세속을 특징짓는 방식이 여럿이긴 하되, 이 글의 취지와 관련해 볼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호감과 호의(好意)의 천국’으로 표상된다.
호감이나 호의와 같은 친밀성으로 대표되는 사적 정념의 범람을 특히 자본주의적 세속과 연루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이 연루관계를 오늘을 살아가는 공동체의 환경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는 대체로 분명하다. 여기에서 길게 거론할 일은 아니지만, 도시자본제적 체계가 세속을 모짝 지배하기 이전의 가족은, 애정이니 친밀성이니 하는 등속의 사적 정념의 텃밭이 아니었다. 생식(生殖)이라는 기본적 전제 이외에, 혼인과 가족은 가문(家門)이 확인되거나 그 위세가 교환되는 광의의 정치적 절차였고, 서민과 하층민의 경우에는 주로 노동력의 확산과 재배치를 위한 광의의 경제적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요점만을 스치듯이 정리하자면, 알다시피 자본제적 도시의 삶은 갖은 제도와 전통−혼인이나 가족관계를 집단적으로 규제하는 제도적 전통을 포함해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던 전래의 종교와 형이상학이 해체되고 파편화된 모든 것이 시장으로 내몰려 들어가는 와류(渦流)를 형성한다. 요컨대, 미래적 시장이 과거적 전통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 해체적, 파편적, 개인주의적, 물신주의적 세속이 전방위적으로 체감되면서, 이 위기에 부르주아적으로(그러니까 ‘단편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와 방식이 변화된 가족주의의 배경을 이룬다.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는 오이디푸스 체계(Oedipus system)와 공모함으로써 전통적 가족의 집단성을 배각(排却)하고 여기에 주로 사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로써 가족 내부의 욕망을 변질시키게 된다. 조금 더 평이하게 말하자면, 기든스나 울리히 벡(U. Beck) 등의 지적처럼 전통적 문화와 관계가 자본제적 시장에 의해 축출됨에 따라 오히려 연인이나 가족 같은 가까운 관계가 갖는 매력은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강박적으로 증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적 시장논리에 내밀린 개인들은 다시 친밀성에, 사적 정념에, 애정에 혹은 (하다못해) 실재감을 흐벅지게 담은 (내) 아이의 살에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종교 없는 시대의 신종 종교가 되고, (할리우드 영화가 검질기게 재생산하는 것처럼) 내 가족은 신성(神聖)이 없는 시대의 새로운 신성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무공동체가 호감이나 호의를 대하는 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어울림을 아는 밝은 지혜[知和曰明]는 불교, 특히 선가의 문헌 속에서 샘물처럼 이끌어 낼 수 있다. 내가 《동무론》 3부작(2008)에서 평설한 세속이란, 그 무엇보다도 개인의 호감과 호의가 타인으로 향하는 신뢰의 문턱에 이르지 못한 채 우스꽝스럽게, 때론 그로테스크하게 자빠지면서 내비치는 화색(禍色)과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가 밝게 설명해 놓은 것처럼, 개인의 정념 속에 묶여서는 타인들의 실제에 이르지 못한다. 애증(좋아하고 미워함)이라는 혼동이 극명하게 예증하듯이, 사적 정념과 객관적 실재 사이를 자의적으로 오가는 생각과 변덕과 허영이야말로 ‘어울림’이라는 공동체적 활동에 서식하는 세속적 어리석음의 가장 흔한 면모다. 세속은 무엇보다 호감과 호의의 어리석음이 펼쳐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풍경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어리석은 호감과 호의 앞에 돌이킬 수 없이 (더) 어리석고 무력해지는 관계의 구조를 가리킨다. 그 모든 의도가 의도대로 외출할 수 없는 것처럼, 호감과 호의의 불모(不毛)가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관계들의 사막을 일러 세속이라고 한다.
이 같은 세속은 전술했던 대로, 혼인과 가족이 뒷받침하는 친밀성과 애정의 유사종교적 행태들에 의해 쉼 없이 되먹임되고 확장된다. 그러므로 어울림의 긍경(肯綮)을 알고 실천하는 공동체적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적 가족체계의 명암과 허실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 이세간적(離世間的), 초월적 은둔이 아니라면, 공동체의 기초는 가족(이라는 세속)과 함께 가족을 넘어가려는 새로운 삶의 지향이겠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지적(‘근대성의 종교적 기원’)처럼, 구원예언(Erlösungsprophetie)이나 해탈의 깨달음이 예를 들어 원시 불교나 원시 기독교의 동무공동체와 같이 종교적 성격의 공동체를 결성하게 될 경우에, 위협적인 반대 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버성기게 될 관계는 다름 아닌 애정과 친밀성의 공동체(가족, 애인 그리고 친구라는 세속의 삼총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숭앙받는 성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릇 새로운 깨달음과 어울림의 길을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혈족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중요한 욕망으로 여기고 있는) ‘진리를 보지 않으려는, 혹은 자신의 병을 치유받지 않으려는 욕망’의 굴레이자 타성에 다름 아니었다. 가족이란 게 아무 성역(聖域)이 아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족제도 그 자체를 발본적으로 혁파하는 게 어렵다면 가족주의적 태도와 정념을 문제시할 수 있으며, 또 새로운 공동체적 실천을 위해서는 반드시 문제시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공동체는 당대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족주의적 논리와의 현명하고 생산적인 불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raison d’etre)와 존재방식(Seinsweise)을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지속적이며 지속가능한 상상이란 가족, 가족주의적 태도, 그리고 호의와 호감과 같은 가족주의적 정념의 너머에서 발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리를 호감이나 호의와 같은 공통 정념이나 친밀성에 두는 한, 그 공동체의 관계는 다시 오이디푸스 체계로 환원되고, 필경은 새로운 가족주의의 복원으로 결말을 맺게 될 것이다.
호감과 호의, 혹은 그 같은 친밀성의 정념에 공동체의 토대를 둘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신뢰다. 예컨대 나로서는 부처와 가섭, 공자와 안연, 그리고 예수와 요한 사이의 관계를 공감(共感)이 아니라 신뢰의 관계로 본다. 세속의 집단적 논리에 전염된 그 모든 공간과 관계 속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신뢰를 가장 아쉬워하게 되는 방식은, 의도가 자기 생각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호감과 호의가 상상적 동화(imaginary ass-imilation)에 매몰된 채 타인/타자에 이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꼴들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흔히 선량한 이들일수록 호의와 신뢰를 자주 혼동한다. 가장 손쉬운 사례로는, 성적 욕망을 사랑이라는 문화적 승화 속에 안착시키는 과정의 부작용(들)을 살펴보면 족할 것이다. 그들은 ‘좋아하는 데 왜 이래?’라고들 항변하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 결코 돕는 데 이르지 못하는 것이 곧 세속의 실체다. 
공동체가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관계, 그리고 새로운 연대(어울림)를 지향하는 검질긴 공부의 장소라면 우선 가족으로, 가족주의적 형식으로, 그리고 오이디푸스적 호감과 공감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타성과 퇴행을 극력 제어해야 한다. 그리고 사적 정념을 넘어선 신뢰의 문화를, 혹은 ‘무심한 경지에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태도’를 일구어내는 데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공동체는 실로 세속의 전체성과 대결하는 마당이다. 나는 《동무론》 3부작에서 ‘약속의 윤리학’ 등의 실천적 개념에 의지해 세속을 재생산하는 애증(愛憎)의 정념을 넘어서려고 했거니와, 불교에서 강조하는 지계(持戒) 일반의 무게야말로 대등한 가치를 지닌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내 존재의 무게로 바로 선다”(크리스테바/시몬 베유)고 했을 때에 그 무게의 현실적인 장치는 오직 지계일 뿐이다. 약속의 실천이 이루어낼 진경(進境)에서 ‘하아얀 의욕’을 상상했듯이, 지계의 실천을 통해서야 근근이 비워낼 에고의 빈자리에 달이 뜨고, 꽃이 피며, 반조(返照)하고 회향(廻向)하는 지혜와 힘이 생겨날 것이다.
공부와 어울림을 통해 깨닫고 닦으려는 공동체의 미덕은 세속의 가족이나 시장처럼 친밀성과 공명(共鳴)의 정념에 기초하지 않는다. 호감과 호의를 산처럼 쌓아 놓아도, 그 산과 신뢰 사이에는 치명적 심연이 도도할 뿐이다. 세속의 중생은 호의와 호감의 천국 속에서 나날이 사적 규칙을 만들어가지만, 인간의 가능성과 삶의 진경은 제 생각, 제 관심, 제 변덕, 제 호의가 아니라 생활양식의 새로운 틀거리 속에서 현명한 어울림과 응함(和應之智)을 가능케 하는 약속과 지계, 그리고 현복지(현명한 복종과 지배)를 통해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3. 응하기로서 공동체

물계자(勿稽子)는 누가 무엇을 묻든지 묻는 그 말에 따라 예사로 대답을 해 주었다.
               — 김정설 〈花郞外史〉

보살행처럼 겸선천하(兼善天下)를 위한/향한 어울림의 공동체는 그 자체로 어떤 틀을 겪어내면서 얻는 개창의 결과이자 선물이다. 이는 이미 상술한 바대로 지계나 약속 등의 제도적 생산성, 혹은 전통이나 문화 등의 환경적 조건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거꾸로, 이 공동체의 알짬이 호감이나 호의 같은 공감의 정념에 있지 않고, 어울릴 때마다 오히려 낯설게 체감하는 너와 나 사이의 타자적 심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단케 만든다. 참으로, 관념과는 달리 사람의 일이란 단박 이루어지는 게 없다(理雖頓悟事非頓除). 그리고 버틀러(J. Butler)의 통찰처럼, 이처럼 어긋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 세속적 관계의 허우룩함과 슬픔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알속을 이해할 때에 필수적인 그 빔[空性]을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심오한 이론이나 변설도 촌선(寸善)의 실천이 갖는 공동체적 가치를 무색하게 하지 못한다. 가령 일상의 작은 실천과 응대에 착실하지 못한 채 주워섬기는 대오선적(待悟禪的) 몰록 깨침은, 마치 하이데거가 자아를 비운 채로 기다림 없이 기다리는 것(Warten)을 목적행위적 고대함(das Erwarten)과 대조한 것처럼, 에고를 숨겼다가 다시 꺼내놓은 짓을 방불케 할 뿐이다. 제임슨(F. Jameson)이나 지제크 등이 혁명의 다음 날을 말하는 중에 ‘욕망을 욕망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라는 라캉적 형식을 통해 권고하듯이, 일상과 그 관계들의 재구성이 뒤따르지 못하는 깨달음과 교설은 결국 반편의 진실에 불과할 것이다. 그 성격과 지향이 어떠하든, 모든 공동체는 매기매시(每機每時)마다 계속되는 어울림의 노동과 지혜를 생략할 수 없으며, 그 시종(始終)은 오직 갖은 형태의 응하기에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상 역시 사람살이의 연장인 한 응하기의 연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시각각 이어지는 대인대물(對人對物), 혹은 대신(對神)의 응하기에 실패한다면 공동체의 취지는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깨침[悟]과 닦기[修]를 별개로 나눌 수 없으며, 이른바 실천적 지혜[phronesis] 속에서 앎과 삶은 변증법적으로 통일을 지향하게 되고, 로티(R. Rorty)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지론과는 달리 “자아 창조의 요구와 인간들 사이의 연대에 대한 요구를 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어울림이라는 공동체의 생활은 면밀하고 창의적인 응하기라는 활동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미 논급한 대로 호감과 호의라는 공감적 정념에 터 한 공동체−이를테면, 분노니 명랑(Heiterkeit)이니 혹은 사랑이니 하는 것들을 포함해서−를 기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내 오래된 지론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결코 ‘돕는’ 것이 아니지만, 응하기의 요령은 오직 돕기에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죽음충동(Todestrieb)이 주로 침묵 속에서 작동한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어쩌면 불교식의 적멸(寂滅)은 바로 이 죽음충동을 연기(延期)하는 미묘하고 생산적인 승화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특히 선종 불교에서 인간의 언어적 행위에 그리 큰 수행적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이미 유명하지만, 쉼 없는 어울림을 공부의 토양으로 삼는 공동체 일반의 경우에 ‘소통’은 몸의 기맥이나 혈류와 같으므로, 마치 들숨에 대한 날숨의 경우처럼 동무, 혹은 도반과의 대화적 소통의 지경에 곡진하고 슬기로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대로 된 침묵이란 말의 이쪽이 아니라 저쪽의 사건이며, 따라서 말의 공백이 아니라 피카드(Max Picard)의 지론처럼 말의 수준을 상회하는 어떤 충만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같은 장소에 있는 “타인은 곧 지옥(l’enfer c’est les autres)”(사르트르)이라기도 하지만, 제 마음 속으로 선량한(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입만 벌리면 오해와 상처를 물고 들어오는 곳이 다름 아닌 공동체다. 그러므로 제대로 응할 수 있는 현명한 실천−응접, 대화, 갈무리, 복종, 냅뜨기, 모심, 치유 등등−이야말로 깨닫고 닦는 그 모든 공부가 한데 모이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가령, 대화 속에서의 응하기란, “유심히 한 말을 유심히 들음은 응접(應接)을 잘한 것이니 곧 무심한 것과 같다”는 이덕무의 생각을 화두처럼 품고 나설 때 얻을 수 있는 지경일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궁리했고 또 공동체적 맥락을 통해 실천해 본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념은 바로 이런 식의 무심함에 이른 응하기의 주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응하기 속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전통적인 권력지배 이론으로는 걸러낼 수 없는 관계이며, 따라서 권력위계적 고정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천의 이력에 따른 ‘생산적 권위’는 존재하되, 갖은 응하기의 활동을 통해 상보상조하는 관계는 일방적 권력을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공동체든 삶과 어울림을 위한 갖은 형태의 노동은 필수적인데, 나는 ‘몸이 좋은 사람’의 응하기를 일러 ‘현복지(현명한 복종과 지배)’로 개념화하고, 이를 상호관계의 노동 속에서 적용해온 바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현복지’의 경우에는 복종과 지배의 주체와 객체가 대상적으로 분리, 고정될 수 없다. ‘몸이 좋은’ 동무/도반들의 좋은 버릇과 현복지에 따른 응하기들이 적시적소에 집결해서 현명하게 어울리는 방식, 다이내미즘, 그 겨끔내기 식의 공평성, 그 리듬과 균형이 외려 주체가 아닌 주체를 형성하며, 그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오직 그 실천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주체화의 나눔과 누림을 잠시 공유할 뿐이다.
매클로플린(C. McLaughlin)의 지적처럼, 공동체는 이미 주어진 유토피아가 아닐뿐더러, 당신이 ‘밖’에서 혐오했던 것들을 ‘안’에서도 고스란히 참아내야 하는 곳이다. 그곳은 일종의 ‘네델란드(nether-land)’이며, 따라서 세속의 물결이 쉼 없이 범람하고 침범하는 더 낮은, 더 오염되기 쉬운 곳이다.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삶, 더구나 세속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동력으로 지속되는 공동체적 삶은 단지 공유된 이해와 합의, 원칙과 이념만으로 건질 수 없다. 가을의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 의도와 기대, 선의와 배려는 새롭고 현명한 응하기로 조형해내는 어울림의 슬기와 근기, 그리고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4. 장소(감)와 공동체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을 염치없이 배제하고 하나의 풍경으로만 과장하고 있었다…… 어느 특정한 고장에 들어가서 그곳에 대한 겸허하고 진지한 개입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건 그곳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진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 고은 《제주도》

“불교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부처님의 앉은 자세부터 본받아 익혀야 한다”(법정)고들 한다. ‘부처의 마음[禪]’도 아니고 말씀[敎]도 아닌 앉은 자세를 앞세우는 이유는 간단하지만 적절하다. 그 같은 관심과 의욕 속에서 몸을 끌어본 사람은 다 느끼겠지만, 공부나 수행은 일모도원(日暮途遠)의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의 장정(長程)이므로 응당 ‘몸’이 중요하고, 따라서 그 몸을 앉힐 ‘자리(장소)’가 중요하다. ‘장소’란 한 마디로 사람들과 사물들이 긴 노동과 응하기의 이력과 함께 어울려 내려앉은 으늑하고 웅숭깊은 자리를 말하는데, 이 장소(감)는 공동체의 장기적 생산성에 결정적인 가치를 갖는다.
감히 ‘땅과 대화를 나눌 경지’(최장조)에 이르진 못하더라도, 렐프(Edward Relp)의 비평처럼 역사와 그 특징을 부주의하게 없애버리는 무장소화(placelessness) 현상이나 장소감의 중요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무감각에 기인한 규격화된 경관 만들기는 근대화에 준하는 흔하디흔한 풍경이긴 하다. 그러나 장소와 풍경을 매섭게 가르는 선택이야말로 특히 종교나 수행공동체들이 첫째로 유념해야 할 여건이며,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불교의 장소적 자산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왕청뜨게 좋은 편이다. (그러나 많은 사찰은 자신의 장소를 엉뚱하게 관광과 웰빙에 동원하고 있긴 하지만!) 공동체가 세속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동력으로 삼는다고 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부터 공간(풍경)과 장소와의 근원적 불화는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도, 외려 장소감의 박략(薄略)과 속물성에 시달리는 개신교 건축을 닮아가듯이 확장, 개축과 증축으로 산사의 적청(寂淸)을 어지럽히면서 자본제적 발전논리에 편승하는 산중도량의 풍경은 참으로 안쓰럽다 못해 생게망게할 지경이다.
영혼과 형식을 동시에 살리면서 훌륭하고 가치 있는 체제외부적 생산성을 유지하는 공동체의 필수적인 조건 한 가지는 장소감이다. 그런 뜻에서 모든 공동체의 움직임은 풍경에서 장소로 옮아가는 역정(歷程)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얼굴, 개성, 인격, 그리고 양심이라는 게, ‘장소 중의 장소’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 년의 장소를 가꾸어온 한국의 많은 산중 사찰들은 이미 그 장소감에서 그 역정의 생산성을 넉넉히 품고 있지 않은가? 마치 “나이 마흔을 넘긴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는 말처럼, 수행과 공부가 길게 이루어진 장소나 관계에서는 반드시 그들의 얼굴이, 영혼이, 그리고 더불어 추구했던 이념이 봄밤에 피어나는 꽃처럼 드러나게 마련이다.
장소(감)의 요점은 어떤 형식의 가없는 노동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삶의 총체적 무늬에 있다. 시장에서 교환되지 못한 노동, 대가 없이 이바지로 주어진 노동, 이해받거나 감사받지 못한 노동, 어떤 미래에서 다가올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만 그 가치와 의미가 수용될 노동이 지극한 무심함 속에서 가없이 쌓여갈 때, 그 무심함과 더불어 사람들과 사물들(그리고 이를 둘러싼 귀신들까지!)은 깊고 아름답게 낮아지면서 어떤 얼굴, 혹은 장소감을 피워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공부와 수행의 증상이자 표정으로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겉으로 드러나듯(成於中形於外), 그 세계의 가치와 성취를 온전히 증거하게 될 것이다. ■

 

 

김영민 / 철학자. 《동무론》 3부작 외 여러 권의 단행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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