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라.”

2013년 9월 25일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허드슨연구소 강연에서 군국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중국의 군비 증강을 핑계 삼아 한 대응적 성격의 발언이라 해도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수상으로서 적절한 언동이었던가는 이후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군국주의를 표방한 아베 총리의 거침없는 발언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2006년에 이어 2012년 12월 두 번째로 총리에 취임한 아베 신조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행보를 지속해 왔다. 아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지 68돌이 되는 2013년 8월 15일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피해국을 향한 가해와 반성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과거 일본 총리들이 패전일을 맞아 침탈당한 국가와 피해자들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아베는 이를 무시했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은 고사하고, 침략의 역사에 대한 유감 표명조차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오히려 이날 일본 정부의 각료와 국회의원 등 190여 명이 태평양전쟁 당시 A급 전범(戰犯)들을 합사(合祀)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참배를 강행했다. 일본 정부 관료와 정계 인사들은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013년 10월 18일 또다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총무상은 참배 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개인의 마음의 자유 문제”라면서 “외교상 문제가 될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아베 정권의 과거 회귀 정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수용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평화헌법에는 일본 정부가 전쟁과 전력(戰力) 보유, 교전권(交戰權)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군국주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로, 전쟁도발국 일본이 세계와 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최근 평화 정신과 약속을 담은 평화헌법을 파기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2013년 7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의 “독일의 나치식 개헌 수법을 배우자”는 발언이 대표적인 증거이다. 아베 총리도 같은 해 10월 15일 일본 임시국회 개원 연설에서 “세계 평화와 안정에 적극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면서 “적극적 평화주의는 일본이 짊어져야 할 21세기 간판”이라고 강변했다.

아베 정권의 지속적인 과거 회귀 행각은 일부 보수우익 단체의 노골적인 우경화 활동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군국주의 부활 시도에 발맞춰 일본 사회 내부의 우경화 세력의 준동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익단체들의 인종차별적 혐한(嫌韓) 시위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 기간에 잠시 중단됐던 혐한 시위가 다시 극성을 부리면서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 활동에 가장 활발하게 행동하는 우익단체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다.

이들은 2013년에만 여러 차례 일장기(日章旗)와 욱일기(旭日旗)를 앞세우고 한국인 상점이 밀집한 도쿄의 신오쿠보 거리를 활보하며 한일단교(韓日斷交) 등의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시위 과정에서 상인들에게 “바퀴벌레들은 일본을 떠나라”며 협박하고 영업을 방해했다. 또한 한인 타운을 방문하는 일본 여성들에게 “일본의 수치다.(한국인들에게) 강간당한다”는 등의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재일 조총련 자녀들이 다니는 교토시 미나미구의 조선초급학교 앞에서 확성기를 틀어 놓고 “스파이는 조선으로 돌아가라” “김치 냄새가 싫다”는 구호를 외치며 수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아베 집권 이후 일본 정부와 극우단체의 보수 우경화 조짐은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다. 지난 2012년 아베 정권 2기 출범 후 그 경향은 더욱 노골화되는 양상이다. 일부에서는 장기간의 경제 불황에 지친 일본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꼼수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공격 가능한 나라’를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일본 정부의 ‘질주’에 대해 주변국들의 우려는 당연하다. 문제는 아베 집권 이후 확대일로에 있는 정부와 일부 보수 우익단체들의 과격해지는 과거 회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2. 우경화를 반대하는 양심세력들

물론 일본 사회 전체가 보수 우경화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일부 양심적인 시민단체와 인사들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회귀 시도와 극우단체들의 우경화 활동에 반대하고 있기는 하다. 일본 시민사회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과거 반성’과 ‘세계평화’ 등의 양심적인 목소리도 있다. 사태를 공정하게 살펴보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보자

2013년 9월 22일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일본인 1,000여 명이 “차별 반대” “우리는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다”라고 적은 손 피켓과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도쿄 대행진’ 행사를 가졌다.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일본 민주당 의원은 혐한 시위 금지 법안 제정을 위한 초당파 연구 모임 결성에 나섰다.

평화헌법을 고쳐 합법적으로 재무장하려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 결성된 시민단체도 있다. 군국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제어하고, 평화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헌법 96조를 지키기 위한 시민단체’가 그것이다. 개헌 발의 규정을 담은 헌법 96조를 의원 2분의 1 이상 찬성으로 완화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아베 정권은 참의원 선거 공약으로 헌법 96조 개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피스(Peace) 9’와 ‘9조회(九條會)’ 등에 참여해 활동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양심적인 일본 시민단체의 대표적 인사이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 교수도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도쿄도(東京都) 공무원인 야마모토 나오요시(山本直好) 등 일본 지식인 25명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전몰자의 분사(分社)를 주장하며 도쿄고등법원에서 진행되는 분사 관련 재판에 참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내 40여 시민단체도 2013년 8월에 “8월 14일을 UN 위안부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며 연대 기구를 결성했다. 이들은 군국주의 시절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정당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공포했다. 이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 2010’ ‘전시성 폭력문제 연락 협의회’ 등의 시민단체도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는 또 있다. ‘전쟁과 여성 대상 폭력에 반대하는 연구행동센터(VAWW RAC)’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인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정통한 일본의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는 일본의 양심 세력도 있다. 1970년대 일본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진행해 온 야스쿠니신사 문제 위원회가 바로 그 단체이다. 이 밖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위령하는 모임 △평화활동지원센터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 21 등 시민단체들이 양심에 따른 과거사 청산과 궁극적인 평화구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 종교계의 양심적인 목소리와 행동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일본의 양심’으로 존경받는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 회장인 마쓰우라 고로 주교와 독실한 기독교인인 고(故)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가 양심적인 종교계 인사로 꼽힐 정도이다.

가톨릭 오사카(大阪)교구에 머물고 있는 마쓰우라 고로 주교는 사제와 수녀, 신도들과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1999년 일본 사회 일각에서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이 일자 ‘9조회 오사카’를 결성한 데 이어 2002년에는 ‘피스(peace) 9’를 조직하는 등 평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경제학자인 야나이하라 타다오(1893~1961)는 무교회주의 전도자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우려하며 전쟁 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 인물이다.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사직당했다. 해직 후인 1938년 1월 《가신(嘉信)》이란 잡지를 창간해 시국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과 성서(聖書)에 근거한 양심적인 대중의 자각을 촉구했다.

1944년 《가신》이 강제 폐간당할 때 경시청장 앞으로 “비록 볼품없이 작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양심이며, 나라의 기둥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가신》을 폐간하는 것은 국민의 양심을 뒤집는 것으로, 나라의 기둥을 없애는 것과 같으며, 《가신》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뜨리고 나서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길까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패전 후 도쿄대(東京大) 교수로 복직한 후 총장에 선출된 그는 군국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책을 발간하고 대중강연을 통해 기독교인의 양심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국가주의와 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2001년 4월 한국과 일본의 국회의원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참여한 ‘한일기독의원연맹’ 회장인 김영진 의원이 중의원 의사당 앞에서 교과서 왜곡에 반대하는 단식을 했다. 이때 일본의 개신교 목회자와 천주교인 등 100여 명이 “이제는 우리에게 맡겨 달라, 우리가 우리 정부에 바른 말을 하겠다”며 단식을 만류했다.

일본 시민단체와 가톨릭, 개신교 등 종교계 및 종교인의 활동에 비해 일본불교계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움직임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이다. 일본불교계에도 대사회적 활동을 하는 단체와 인사들이 존재하고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공동체 운동과 재난구호사업, 사회교육사업, 국제구호활동 등에 집중한다.

가장 대표적인 불교 활동 단체는 2003년 1월 설립된 ‘불교NGO 네트워크(BNN)’이다. 재단법인 전일본불교회(全日本仏教会)를 비롯해 아유스(Ayus) 불교국제협력네트워크, 아시아의 친구를 지원하는 RACK, BAC 불교구호센터 등 19개 단체가 가입해 있다. 하지만 니와노 평화재단의 요이치 노구치 상임전무는 “회원들의 기본 목적이 해외협력사업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슈를 전면적 하는 소속된 개별단체에 힘을 싣는 것으로 하고 연대기구로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나마 BNN 가입 단체인 니와노평화재단(庭野平和財團)의 활동이 위안이다. 1978년 일본 법화종 계열의 입정교성회(立正佼成會)에서 만든 이 재단은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활동과 탈핵(脫核) 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무게중심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종교인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는 등 국제사회 평화 구현에 있다. 요이치 노구치 상임전무는 한국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후 세대인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일본헌법 9조’ 개정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게 나오는 등 우경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아프가니스탄과 방글라데시 등 국제구호사업을 펴고 있는 일본불교계 단체인 ‘산티 발런티어회(Shanti Volunteer Association, SVA)’의 대표 치노순코(茅野俊幸) 스님은 “(2011년 3월 발생한 일본 대지진에 대해 한국불교계가 구호물품 등을 전달한 것에 대해) 그동안 한일 간의 역사적인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로서 많은 갈등이 있어 왔다. 갈등이 깊을수록 교류가 더욱 많아져야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일본불교계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개인적인 입장 표명이나 단발적인 의사 표현은 있지만 조직적으로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은 미미하다. 이것이 일본불교의 현주소이다.


3. 국가주의에 봉사한 일본불교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불교계의 무심(無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대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부역(附逆)한 과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불교계의 ‘모르쇠 행보’가 군국주의 침략 시대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일본불교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의 대표적 종단인 조동종(曹洞宗)이 군국주의 침략의 선봉을 자처하고 나선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군국주의 당시 침략전쟁에 적극 동조한 일본불교계, 특히 조동종의 과오를 반성하는 책들이 나와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서 출간한 《조선침략참회기》를 한국어판으로 낸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과 《불교 파시즘》이란 책을 펴낸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미국 앤티오크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둘 다 일본 조동종 승적을 갖고 있는 승려 신분이다.

《조선침략참회기》와 《불교 파시즘》에는 일본 조동종이 과거 군국주의 시대 침략전쟁에 어떻게 협조했는지 생생한 증거가 실려 있다. 이치노헤 스님은 “조선 침략 과정에 일조한 조동종의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과거 역사를 잊으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불교 파시즘》 표지에는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과거 일본에서 불교는) 칼을 휘두르는 것이 깨달음이 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보살행이 되었다”는 글이 책 제목과 함께 실려 있다. 군국주의 시대 전쟁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전락한 일본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일본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조동종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가 깊이 개입한 것은 물론 조선 전역에 포교소를 세워 사실상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명분은 전도(傳道)였지만 주요 도시에 건립된 조동종 포교소는 제국주의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 군국주의 통치에 순응하게 해 최종적으로 ‘조선인의 황민화(皇民化)’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조동종은 조선 침략에만 부역한 것이 아니다.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露日戰爭)에도 적극 협력하며 일본 군국주의 확산에 앞장선 과거가 있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불교는 불살생(不殺生)을 최우선으로 하는 불교의 정신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현실 속에서 침략전쟁을 적극 반대하는 것이 한계가 있겠지만, 앞장서서 전쟁을 옹호하고 참전을 종용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왜곡해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찬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 난징(南京) 대학살을 합리화한 것이다. 당시 일본 승려들은 “그들(중국인)에게서 ‘번뇌’를 없애주는 불교 자비심의 표현”이라고 학살을 정당화했다. 또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자살 공격을 “개인적인 자아를 부정하고 스스로 역사의 짐을 떠맡은 영혼의 재탄생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라고 선동했다.

군국주의 시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협력한 일본 조동종은 조선 침략에 본격적으로 앞장섰다. 1894년 9월 조동종 승려 모리타가 발표한 ‘군인선화(軍人禪話)’는 침략전쟁에 복무한 조동종의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리타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에게 선(禪)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군인의 마음가짐을 밝힌 그의 ‘군인칙유(軍人勅諭)’는 왜곡된 불교관을 병사들에게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내용이다. “불조(佛祖)의 대도라 함은 죽음에 대해 망설이지 않을 각오로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만약 병사들이 이 글을 본다면, 불조가 말씀하신 대도란 ‘군인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야 하고 의는 험준한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봉황의 깃털보다 가볍다고 각오하는 것’이 그 요점이다.”

일본은 1910년 8월 20일 조선을 강압적으로 병합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협약의 형식을 띠었지만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태왕(太王)으로 격하되고, 외교권은 박탈됐다. 일제는 헌병경찰 제도를 만들어 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하도록 했다. 조선인은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식민지인으로 전락됐다.

이에 대해 당시 조동종 관장(館長) 이시카와 소도(石川素童)는 “천황폐하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한국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병합했으니 앞으로 조선인을 동포로 유도 계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고유(告諭)’를 발표했다. 또한 조동종 전 사원에서 축하법요를 거행하도록 했다. 강제합병 9년 후인 1917년 7월 조동종 경성포교당에 ‘일한병합 기념종’이란 범종을 달기도 했다. 이 같은 조동종의 태도는 불교 가르침보다는 국가권력, 잘못된 제국주의 편에 철저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일본 선불교 지도자들은 군국주의를 위해 선(禪)이 존재하는 것이란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15세에 승려가 된 나카지마 겐조이다. 승려 신분으로 21세에 자진 입대해 해군에서 10년간 복무한 경험을 지닌 그가 80세 넘어 작성한 회고록은 군국주의 시대 일본 승려들의 왜곡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험담을 기술하면서 나카지마 겐조는 동료들의 비참한 고통과 죽음에는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일본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카지마 겐조의 스승인 야마모토 겐포(山本玄峰, 1866~1961)는 “절대자인 부처님께서 화합을 깨뜨리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고 설법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승려들은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집착을 버리라’는 불교 교리를 왜곡해 전달했다. “생사를 초월한 채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의무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 …… 즉,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의무다. 비록 몸은 죽더라도 생사일여를 통해 국가의 영원한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선악과 생사를 뛰어넘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아(無我)의 경지를 잘못 이해하고 전파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불교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신적 무기’였던 것이다.

사례는 또 있다. 야스타니 하쿠운(安谷白雲, 1885~1973)은 서양에 선(禪)을 전한 일본 승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한때 일본 군국주의의 맹신자였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야스타니 선사는 민족 우월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반유대주의자임은 물론, 그의 스승보다 훨씬 더 광적인 군국주의자였다”고 비판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1943년 2월 조동종이 공포한 〈수증의(修證義)〉에서 야스타니는 도겐(道元) 선사와는 다른 오도(誤導)된 해석을 내놓았다.

야스타니는 〈수증의〉에 주석을 달면서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했다. 한발 나아가 생명을 해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에 대한 야스타니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대승불교 계율의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즉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물론 죽여야 한다. 가능한 한 많이 죽여야 한다. 열심히 싸워 적군을 모두 죽여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과 효행(孝行)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면 선을 돕고 악을 벌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적군을 죽일 때는 이 살인이 지금으로서는 살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명심하고 눈물을 삼켜야 한다. 살해해야 마땅한 사악한 자를 죽이지 못하는 것, 혹은 섬멸해야 하는 적군을 섬멸하지 못하는 것은, 자비심과 효행을 저버리는 일이며 생명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는 계율을 어기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계율이 지닌 특질이다.”

일본불교는 1876년 전도(傳道)활동이란 명분을 내세워 중국에 진출한다. 조동종이 조선에 사찰(포교소)을 건립하면서 내세운 명분과 같다. 하지만 속내는 군국주의 침략의 첨병을 자처한 것에 불과했다. 조동종의 중국 진출에는 일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일본의 주도로 동아시아 민족들을 통합하는 데 범아시아적 종교인 불교가 유용한 도구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분석했다.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일본의 주요 불교 지도자들은 중국과 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의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 일본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1932년 일본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승인한 뒤 중국에서는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1935년 6월 일중불교학회(日中佛敎學會) 대표단 11명을 급파하는데, 여기에 일본 임제종 승려 야마모토 겐포도 포함된다. 그는 앞서 기술한 중국 전도라는 명분을 앞세워 만주국에 사찰을 건립해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전력(前歷)은 과거 군국주의 시대 일본불교가 무엇을 했는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침략 전쟁에 동조한 과거사를 반성하는 일본불교계의 양심적인 목소리와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양심적인 인사들의 반성은 있지만 종단 차원의 ‘진정성 있는 참회’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1992년 일본 조동종이 과거 침략을 참회하고 사죄하기 위해 종무총장(宗務總長) 명의로 참사문(懺謝文)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2012년 참회와 사죄의 입장을 사실상 번복하고 말았다. 참사문에는 “우리는 과거 해외전도(海外傳道)의 역사 위에 저질러 온 중대한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아시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를 행하고 참회(懺悔)하고 싶습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과거 군국주의에 부역한 과오를 반성하는 취지의 참사문이다. 이 참사문을 이치노헤 스님과 한국의 종걸 스님이 2012년 9월 비석으로 만들어 군산 동국사(東國寺)에 건립했지만 조동종이 ‘저작권’을 내세워 참사문 사용 불가 입장을 전해왔다. 참사문 철거를 요청한 것과 다름없다. 조동종을 대표하는 종무총장 명의로 참사문을 발표한 지 20여 년이 지나 바뀐 태도는 참회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실증적 사례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불교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197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불교계는 매년 양국을 번갈아 방문하며 ‘교류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한일 불교계의 주요 종단과 스님, 신도 등이 참여하는 한일교류대회는 세계평화와 인류공생이라는 명분을 갖고 진행된다. 양국의 아픈 과거사를 딛고 선린우호의 발전적인 관계를 조성하자는 공동선언문을 매년 채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불교계가 과거사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발전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일이 발생했다. 2013년 6월 공주 전통불교문화원에서 열린 제34차 한일 불교문화 교류대회에서 일한 불교교류협의회 부회장 모치다 니치유(持田日勇) 스님은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이뤄냈다’는 역사 왜곡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메이지 27년(1894) 일청전쟁(日淸戰爭)은 중국과 일본의 조선을 둘러싼 대립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여기서 이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포기시키고 조선의 독립을 이뤄냈다”는 것이 문제의 발언이다. 한국불교계가 즉각 항의해,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모치다 니치유 부회장은 2010년 한·중·일 불교우호 교류대회에서는 “일본은 과거의 역사적 행위를 반성한다. 일본·한국·중국 불자들은 석존(釋尊)의 대자대비 정신에 입각해 서로 연대하면서 ‘황금 유대’를 강고하게 하자”고 말한 바 있다. 불과 3년 만에 정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과연 일본불교 지도자들이 과거사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일본 조동종 승적을 갖고 있는 이치노헤 쇼코 스님과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교수가 과거 군국주의 시대 일본불교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참회했지만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1992년 종무총장이 발표한 참사문의 사용을 반대하는 조동종의 입장이나, 세계평화와 인류공생을 말하면서 과거 침략사를 왜곡하는 일본불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4. 반성과 교훈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 보수 우익 단체들의 질주 속에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와 가톨릭, 기독교와는 달리 일본불교계가 보이는 ‘무심(無心)’은 불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반성하게 한다. 일본불교계 인사 가운데 이치노헤 쇼코 스님과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교수와 같은 양심적인 인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단(종단) 차원의 ‘무관심한 태도’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한일 과거사 미화는 물론 보수 우경화로 달리고 있는 일본 정부와 단체들에 대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일본불교계의 현실이다. 이 같은 일본불교계 상황을 보면서 과연 한국불교는 군국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해 자유로운지 일본불교계의 현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사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은 역사적으로 국가주의(國家主義)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전래 이후 불교는 늘 국가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불교와 국가의 협력관계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지만, 침략전쟁이나 군국주의 확장 등 잘못된 국가 시책에 불교가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불교가 보인 ‘반불교적’ 태도는 불교와 국가가 잘못 결합했을 때 초래하는 결과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아베 정권 출범 후 일본 사회 전체가 보수 우경화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불교계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교는 일본을 대표하는 종교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불교의 영향력하에 살고 있다. 더구나 불살생과 공존, 평화를 지향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일본불교계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힘들다. 침묵과 방조, 방관은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상황을 확장시킬 뿐이다.

물론 이 같은 비판이 일본 군국주의 시대 불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국가에 의해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는 음으로 양으로 종교가 관여해왔다. 종교의 역사에서 전쟁이나 침략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동조하거나 참전(參戰)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성전(聖戰)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십자군 전쟁, 식민지 개척시대 제국주의에 앞서 선교(宣敎)라는 이름으로 첨병 역할을 수행한 선교사들, 1980년대 이슬람 성전을 내세우며 ‘종교전쟁’을 일으킨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침략전쟁에 동조한 근대 일본불교의 과거사를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63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소신공양한 틱꽝득(Thích Quảng Ðức) 스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 크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을 결행한 틱꽝득 스님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 전쟁을 반대하고 나선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절대권력을 장악한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에서 비폭력 평화를 주창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국가 주도의 ‘잘못된 전쟁’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거나, 오히려 적극 나서 독려하는 것은 불교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종교인 특히 불교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적극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군국주의 시대에 복무했던 일본 근대 불교를 비롯한 전 세계 종교와 종교인들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과거 침략전쟁으로 숱한 생명을 희생시킨 과오를 저질렀던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의 잘못된 행보를 막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직면한 ‘바로 지금 우리’의 숙제이다.

1966년 7월 10일 법정(法頂) 스님이 청안(靑眼)이란 필명으로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 ‘여시아문(如是我聞)’에 게재한 ‘역사여 되풀이되지 말라’는 글은 종교의 근본적인 태도와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법정 스님은 “지혜와 자비의 길을 닦는 도량, 거기를 우리는 사원(寺院)이라고 부른다. 바야흐로 이 나라의 불교사원에서는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깃발을 내걸고 기도를 하고 있다”면서 “그 어떠한 명분에서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악(惡)이다. 그런데 싸움을 말려야 할 종교인이 그 싸움에 동조한다는 것은 더욱 큰 악이다.”라고 경책했다. ■       

 

이성수 / 불교신문 편집국 부장. 충북대 철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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