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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문인사대부의 불교 인식 / 김상일
[56호] 2013년 12월 01일 (일) 김상일 sik6033@dongguk.edu

1. 시작하는 말

필자는 이 글쓰기의 주제를 받고 생각이 이는 대로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조선시대 불교사를 파악할 때 ‘숭유억불’이란 용어에 지나치게 구애되는 것은 아닌가? 조선 초기 불교계의 수난이 전후 불교사의 내적 흐름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를 깊이 살펴보았는가? 조선 초기 성리학적 집권자들의 억불과 탄압행위만을 지나치게 부각해서 보고 정작 불교사의 내적 흐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간경도감 시기 불교 언해(諺解)의 성과에 대해 그 현상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은 아닌가? 조선 초기 유교 사대부들의 글쓰기 양상에 대해 충분히 파악해 보았는가? 조선 초기 유교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규모 있게 파악하고 그 층위를 충분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이상의 질문은 이 글을 쓰는 데 기본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이고 그에 대해 적절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조선 전기의 불교사나 관련 사상(事象)에 대한 인식이 얕기 때문에 이에 대해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주제로 한두 편의 논문을 쓴 적이 있고 이 분야를 더 살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지면상 한계가 있겠으나 이 글을 진행하면서 특히 끝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유념하고 나머지 질문들도 얼마간 의식하기로 한다.

2. 조선 초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산문

불교와 관련된 글로 조선왕조실록의 상소문이나 조선조 사대부들의 문집에 실린 주의문(奏議文)을 보면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불교 비난론 일색이다. 국가적 불사(佛事)와 일부 사대부들의 친불 행위는 물론 임금의 친불교적 행위나 발언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뿐이다. 그것은 유교 사대부들이 성리학적 통치의 이념화를 위해서 임금을 설득하려는 정치적 주장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얼마간의 여유를 가지고 지어서 승려들에게 준 증서류(贈序類)의 글을 보면 불교 또는 불교인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비난 일색만이 아니다. 사대부들의 문집에는 승려들에게 준 증서류 산문이 적지 않게 실려 있는데 여기엔 불교의 출세간적 속성 또는 반인륜적 성향을 비판한 글이 있는가 하면, 승려들과의 교유론이 실려 있어 사대부들 간에도 불교 또는 불교인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은 도학자보다는 사장(詞章)을 중시한 ‘문인사대부’들의 문집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로 불교 관련 글을 남긴 이들로 건국 초 조선의 제도적 골격을 세운 정도전(鄭道傳)과, 이후 태종 대에 문병을 잡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 세종 대에 과거에 합격하거나 태어나서 세조 대를 거쳐 성종 대까지 활약했던 김수온(金守溫),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이승소(李承召), 강희맹(姜希孟), 김종직(金宗直), 성현(成俔), 김일손(金馹孫)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문장에 능한 ‘문인사대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수온, 신숙주, 서거정, 강희맹, 이승소 등은 세조 대와 성종 대의 훈구 사대부들로 문명을 떨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정도전, 권근, 김수온, 서거정 등은 불교와 불교인에 대해 적극적인 논의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글은 의론적 성향이 강하고 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이들은 선초 사대부들 불교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의 문인사대부들은 경우에 따라 그에 맞는 불교적 글쓰기를 보이고 있는데 변(辨), 설(說), 기(記), 서(序), 발(跋) 등의 산문체와 여러 시체의 한시 작품 등 다양한 한문학 양식의 작품들을 남겼다. 여기서는 송별할 때 지어주는 문인사대부들의 증서류 산문에 담긴 불교와 불교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배척이 심했던 조선 초기의 정도전, 권근, 김수온, 서거정 등의 증서문을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둔다.

3. 인륜을 저버린 이단
: 불교적 가치관과 행태에 대한 비판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은 이전의 유교 사대부에 비해 불교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고려 말에 이르면서 번다한 불사와 권승의 발호로 민폐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당시 불교계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폐단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은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학습하면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 교리를 비판하는 경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당시 불교 비판의 정점에는 신흥사대부층의 좌장이었던 이색(李穡)과 조선시대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 정몽주가 있다. 특히 정몽주는 불교의 현실 초월적 경향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반윤리성, 그리고 마음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였는데 이런 점은 이후 사대부들의 불교 비판의 방향타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색의 문하로서 정몽주와 더불어 불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남긴 이는 정도전(1342~1398)이다. 특히, 그는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유·불·도 삼교를 비교한 뒤 유교가 우위에 있음을 밝혔다. 또 〈불씨잡변(佛氏雜辨)〉 15편과 이를 보조하는 4편의 관련 글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론·자비설·윤회설·화복설·지옥설·걸식설 등과 불교의 초월성, 반인륜성 등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불교가 인륜의 근거인 부모와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반인륜성을 가장 주목해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고 걸식을 하면서도 호화롭게 사는 불교인의 몰염치한 행태를 극렬하게 비난하며 불교는 인륜의 해충이요 천지간의 좀 벌레와 같다고 하였다. 《불씨잡변》에 서문을 붙인 권근이 전하는 정도전의 말을 보면 불교를 배척하는 그의 말이 매우 격앙되어 있다.

(정도전이) 무인년 여름에 병으로 며칠 쉬면서 이 글을 지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불교의 해독이 윤리를 무너뜨리므로, 반드시 금수를 끌어다가 인류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명교[유교]를 맡은 사람들은 마땅히 적으로 여겨 극력 공격해야 할 것이다. −(중략)− 울분한 마음을 절로 그만둘 수가 없기에 이 글을 만들어 후인들이 언제라도 깨닫기를 바라는바,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비유를 든 것이 저속하거나 자질구레한 것이 많고, 저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에 언사가 분격(憤激)한 데가 많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유교와 불교 중에 어느 것이 정당하고 사특한가를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지금 시행하지 못하더라도 후세에 전하게 된다면, 내가 죽어서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라 했다.

‘유학을 공부하는 자는 불교를 적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공격해 멸절시켜야 한다’는 언급에서 잔뜩 벼린 칼날을 마주한 것 같은 섬뜩함 느껴진다. 불교를 인륜을 무너뜨리는 종교로 보고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그의 글을 읽는 이는 누구나 유교가 옳고 불교가 그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하여 자신의 변설에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그의 가슴속에 신앙처럼 충만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정도전은 이처럼 불교의 반인륜성을 심하게 배척하면서도 비록 승려이지만 유교 윤리적 행실을 보일 경우에는 그들의 그런 점을 인정하여 칭찬하고 격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백성은 세 곳(임금, 스승, 부모−필자 주)에서 삶의 혜택을 받았으므로 동일하게 섬겨야 할 것이니 그 섬기는 곳에 따라서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라고 들었다. 이것은 우리 유가의 말이다. 절의 중들은 집과 세상을 떠나서 어버이 버리기를 내던지듯 하니 임금이나 스승에 대해서는 의당 생각조차 못 할 것 같은데, 이따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은혜가 돈독하여 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어진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보다 위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조명상인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런 걸 보면 그 마음속에 의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어 없애려도 없앨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윗글은 정도전이 조명이란 스님에게 준 증서(贈序)문으로 조명이 그 스승인 무열 스님을 구한 것을 칭찬한 글이다. 그와 그의 스승이 있던 절에 갑작스럽게 왜구가 침략해 와 절집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달아났는데도 그는 스승을 업고 화를 피해 생명을 구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돌보지 않고 스승을 구한 조명의 의로운 행위는 유가의 윤리적 규범의 하나인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어서 그를 인인·의인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명이 이러한 행실을 하게 된 것은 본래부터 그에게 의로운 마음이 간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이는 물론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 승려와 그 행실을 바라본 것이다. 이처럼 정도전은 불교를 인정할 수 없지만 성리학적 관점에서 상대의 행실을 비춰보아 그것이 유교적 규범 안에 들면 인정하고 허용하는 선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권근(1352~1409)은 성리학자로 경학에 힘쓰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했던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태조 말년부터 정도전을 이어 문형(文衡)으로서 정치 외교 등에 소용되는 국가의 문장을 전담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 초기 사대부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의 불교 관련 글을 남긴 점이다. 그의 불교와 승려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증서문 한 편을 보도록 한다.

① 영암이 사방으로 수행하러 가는 것을 훌륭히 여겨 이름 있는 선비와 시승(詩僧)들이 시를 지어 준 것이 많았는데, 내게 와서 보이며 서문을 지어 달라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략)−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은 한 시대의 큰 선비였는데, 승려 문창이 그들의 시를 얻었으니, 그 이름이 천년토록 전하여 한유·유종원과 더불어 잊히지 않은 것은 그들의 시문의 힘이다. 문창은 이미 영광이었거니와,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은 함께 고금에 으뜸인데도, 후세에 모두 한유만을 높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문창에게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첨하지 않았기에, 바로 우리 유교를 말하여 불교의 그름을 지적하고 배척한 것이다. 문창이 기꺼이 받아들였는지 노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유종원은 같은 유자이면서도 오히려 깊이가 없다는 것으로써 한유를 헐뜯었으니, 문창이 노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유로 말하면 도를 밝히느라 힘을 다할 뿐이었으니, 어찌 유종원이 헐뜯고 문창이 노할 것을 헤아렸겠는가.

② 아, 도는 천리에 근원하여 인륜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요와 순도 이로써 임금이 되고, 이윤과 주공도 이로써 신하가 되었으며, 공자와 맹자는 이 도를 얻고도 아래에 있었고, 증자와 민자는 이 도를 얻어서 어버이를 섬겼다. 이런 점은 처지에 따라 각각 그 직분을 다한 것으로 이는 성현들이 인륜을 다하고 천리를 온전하게 구현한 것이다. 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관혼상제, 작게는 부부의 거처와 농사 누에치기와 베 짜기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도리가 없는 데는 없으며 미미하다고 생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유자들의 도는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사물마다 각기 법칙이 있어, 친함에 따라 사랑이 생기고 엄함에 따라 공경이 생기는 것이, 마치 곱자로 네모를 그리고 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행하면 그다지 별다를 것이 없으나, 증험하면 매우 실하고 시행하기가 매우 조리가 있어, 전해도 아무 폐단이 없다. 은나라와 주나라 이전에는 그 도를 얻어 천하를 다스렸고,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에는 그 도를 잃어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③ 노자와 석가의 말이 그즈음에 일기 시작했는데, 석가 말이 더욱 크게 번성하여 천 년을 내려오며 천하를 휩쓸어, 배우는 자가 더욱 많고 받드는 자가 더욱 독실했으니 그 도가 크게 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음은 무슨 일인가. 윤리를 끊는 것을 고매하게 여기고 사물을 떠나서 도를 구하니, 이는 마치 곱자를 버리고 네모 방정하기를 바라며, 컴퍼스를 버리고 둥글어지게 하려는 것과 같으니 될 수 있었겠는가.

④ 상인이 몸과 마음 그리고 성명의 이치를 일상생활하는 윤리의 떳떳한 것에서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방향 없이 사방을 헤매니, 나는 이른바 ‘나그네가 갈 곳을 모른다’는 것과 같게 될까 염려된다. 

이 글은 운수행각에 나서는 영암이란 스님의 요청에 지어 준 것이다. 영암은 자신에게 시를 써 준 당대의 명유와 시승들의 시를 내세워 서문을 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권근의 대답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① 불승 문창이 한유와 유종원 같은 명유의 글을 모두 얻었지만 훗날 한유만 칭송되는 이유와, ② 천리에 근거를 두어 인륜을 밝힌 유교의 경세상(經世上)의 역사, ③ 불교가 널리 퍼졌지만 그 반인륜성 때문에 경세적 역할을 못 한 점, ④ 그러한 불교를 믿어 사방으로 떠도는 영암을 비판한 것 등이다.

전통적으로 승려가 사대부와 관계를 틀 때 그 매개는 시문이었다. 대개 승려가 상대의 명성을 듣고 시문을 요청하면 사대부가 그의 행색과 사람됨을 보아 시문을 지어 주면서 이른바 ‘방외(方外)의 교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①은 이러한 모범 사례로 한유·유종원과 문창의 사귐을 든 것이다. 그런데 권근이 문제 삼는 것은 유종원이 한유가 문창에게 준 글에 대해 비판한 점이다. 그러나 권근이 볼 때 한유는 승려인 문창에게 아첨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유교로써 문창이 믿는 불교의 그릇됨을 지적하고 배척했다. 권근은 그 때문에 훗날 유종원이 일컬어지지 않았고 한유만을 높이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②와 ③은 유교가 경세적인 면에서 불교보다 우위에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그것은 유교가 인륜을 중시하는 데 비해 불교는 그것을 저버린 데 원인이 있다고 한 것이다. 요컨대, 권근은 사대부의 승려와의 잘못된 교유 방식, 불교의 반인륜성, 그것을 믿고 따르는 불교인의 행태 등을 비판한 것이다.

4. ‘우리’와는 다르지만 함께해야 할 사람들
  : 유불 교유론과 유불일심일리론

앞의 정도전과 권근에게서 보았듯이 조선조의 유교 사대부에게 불교와 불교인은 배척의 대상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인륜을 저버린 불교인들의 행실은 유교의 윤리적 강령에 어긋나는 것이고 사회적 기강을 흔들게 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대부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불교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 또한 최하층에 위치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대부가 승려와 내왕하며 교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대부라고 누구나 그렇게 강경한 입장만을 가지고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집권 관료나 문인사대부의 한쪽에서는 승려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배척하기보다는 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포용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불가의 승려일지라도 그들의 행실이 유가의 행위 규범에 맞는다면 그런 점을 칭찬하고 그들을 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앞서 살펴본 권근에게서도 일부 보이고, 세종 때 과거에 합격해서 세조·성종 대에 관각(館閣)을 장악했던 서거정이나 김수온에 이르면 이러한 의식은 더욱 확대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거정은 동아시아 유가층의 불가와의 전통적 교유 방식인 방외지교(方外之交)를 들어서 승려들과의 교류를 적극 도모하였고, 김수온은 불서의 편찬, 불경 언해와 같은 국가적 불사에 적극 호응하면서 승려들과 격의 없이 어울린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1420~1488)은 23년간이나 문형(文衡)으로 나라의 문장을 관장했던 관각문학의 대가였다. 그는 한문이 들어와 자기 시대까지 지어진 우리나라의 한시문(漢詩文)을 망라한 《동문선》 편찬을 주도했고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통치기반 구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찬 사업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불교와 관련해서는 수백 편의 시와 10여 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의 시문집을 보면, 그는 앞서 본 권근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인 태도로 유불(儒佛) 교유론을 펼치고 있고, 시승(詩僧)은 물론 일반 승려들과의 교유도 크게 꺼리지 않았다. 이처럼 서거정이 승려들과 많이 교유했던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그는 9세 때부터 승려들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중간에 10여 년간 절집에 유학하였으며, 벼슬길에 들어선 뒤에도 절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적이 있어 날마다 사귀고 종유(從遊)한 자가 승려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교유하는 승이 조계(曹溪)의 승려 가운데 절반은 될 정도라 했다.

서거정이 정면에서 유불 교유론을 다룬 글로는 〈송인상인시서(送印上人詩序)〉(《四佳集》 권 4)와 〈증수이상인서(贈守伊上人序)〉(《四佳集》 권 4)가 있다. 먼저 〈송인상인시서〉에서는 객이 서거정에게 ‘유가와 불가가 교유할 수 있는가?’라 묻고 서거정이 그것에 대답하는 형식을 통해 그 교유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서거정은 유가가 교유할 만한 불가의 승려를 판단하는 근거로 사람됨[人]과 마음[心], 그리고 도(道)를 들고, ① ‘사람이 괜찮고 그 마음이 괜찮다면 그 도가 옳지 못하다고 해서 교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 하고, ② ‘도가 옳지 않고 그 마음도 옳지 않다면 그 사람이 괜찮다고 해서 교제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따라서 ③ ‘사람이 괜찮고 그 마음이 괜찮다면 그 도가 옳지 않다고 하여 그와 교유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사람됨과 그의 마음이 괜찮다면 그가 불교도라 해도 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거정은 당 대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송 대의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이 이러한 교유의 원칙에 따라 각각 태전(太顚), 호초(浩初), 혜근(惠勤), 불인(佛印) 등과 깊이 교유했다고 보았다.
다음 서거정이 수이(守伊)라는 승려에게 준 글도 그의 대표적인 유불 교유론의 하나이다.

한유와 유종원은 모두 이름난 유학자이다. 유종원이 유주에 있을 적에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한유가 편지를 보내 그것을 비난하니 유종원이 글을 지어 변론하였다. 그 내용은 자기가 불교의 학설에 미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론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불교에서 취한 말이 있었다. 한유가 앞서 유종원을 비난하였지만, 그가 조주에 있을 적에 태전이라는 스님과 친하게 지냈다. 어떤 이가 한유를 전에 한유가 유종원을 비난했던 것처럼 비난하니, 한유도 글을 지어 변론하였는데 그 내용은, 자기가 불교의 학설에 미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론한 것이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불교를 단절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유와 유종원이 어찌 부처가 재앙도 내리고 복도 내린다는 설에 겁을 먹을 사람이었겠는가? 불교는 청정하고 담박하며 명성과 이익을 도외시하여 세속에 연연하지 아니하니, 욕심을 줄여서 마음을 기른다는 그들의 학설은 우리 유학과 비슷하다. 우리 유학자들은 그 학설에 비록 미혹하지는 않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는다. 심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그들을 이끌어 나아오게 하고, 이끌어 나아오게 하면 그들과 어울리게 되고, 어울리게 되면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한 실상은 마음[心]이 아니면 자취[跡]였고, 자취가 아니면 형세[勢]였다. 한유와 유종원은 유학자 중에서 걸출한 자들이었는데도 이런 비난을 받았으니, 하물며 이 두 사람에게 못 미치는 사람들인 경우이랴.

근대 이전의 한문문화권에서 수지한 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귀는 것을 자신들의 처지에서 ‘방외와의 교유[方外之交]’라 했는데 유가인 한유나 유종원이 태전(太顚)이나 문창(文昌)과 같은 승려들과 사귄 것이 그 모범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서거정은 한유와 유종원이 불교를 즐기고 승려와 교유하였지만 불교의 설법에는 미혹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불교에서 취한 점이 있고” “불교를 단절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불교는 청정하고 담박하며 명성과 이익을 도외시하여 세속에 연연하지 아니하니, 욕심을 줄여서 마음을 기른다는 그들의 학설은 우리 유학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서 “꼭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여기서 서거정이 한유나 유종원의 불교에 대한 대응 방식과 불교의 성향에 주목한 것은 그가 제한적이나마 불교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서거정이 유가의 처지에서 불가와 교유를 애써 피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과 상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 근거하고 있음을 윗글은 보여준다.

다만, 윗글에서 서거정은 “유가가 비난을 받는다 해도 불가와 어울려야 한다는 것은 승려들을 유교로 이끌어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한유와 유종원이 태전을 사귄 것은 그를 유교로 교화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본 것이다.

한편, 서거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이 선탄(禪坦), 환암(幻庵), 귀곡(歸谷) 등의 선사와 방외지교를 맺었던 유불교유의 전통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여말선초의 백여 년간 그 전통이 끊겼다가 자기 시대에 이르러 신숙주(申叔舟), 김수온(金守溫), 강희맹(姜希孟), 홍응(洪應), 이승소(李承召), 자신과 같은 사람이 일암(一菴)이란 승려와 친하게 지내며 유불교유를 중흥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상에서 서거정의 유불교유론과 승려들과의 적극적인 교유는 유가의 처지에서 그들을 유교로 교화시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거정이 불교를 얼마간 인정했다 해도 그의 유불교유론은 유가 중심적 교유론인 것에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서거정은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유가 본래의 교조적인 교유 태도를 넘어서 상대의 마음과 행실[자취], 그리고 그들이 처한 형편[세(勢)]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치며 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이처럼 그의 유불교유론은 승려와의 교유에 대해 교조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탄력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지향하고 있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김수온(1409~1481)은 당대 문장의 거벽으로 성리학적 통치기반 구축을 위한 《치평요람(治平要覽)》과 같은 관찬 사업에 참여하였고, 《석가보(釋迦譜)》와 같은 불서의 편찬과 불경의 번역[언해] 등 불사에도 공헌한 바가 컸다. 한편, 김수온은 세종 대에서 세조 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불사를 주도했던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산문에 노닐며 불교계의 노숙(老宿)들과 허물없이 지낸 일이 많았다. 이렇게 불교계의 노숙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의 덕택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불교에 대해 꽤 박식했고 그의 행적에서 불교적 삶을 지향한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수온은 동시대를 살았던 서거정과 더불어 승려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사대부였다. 하지만 서거정이 승려들과 ‘방외지교’란 전통적 관념에 기대 교유하면서도 유교적 명분과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김수온은 승려들과 교유에서 유가 중심적 방외지교를 넘어서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대부로서 하층의 민중이나 노비들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는 행적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김수온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그가 궁중의 경찬회에서 공장(工匠) 또는 내시들과 계를 맺거나(《세종실록》 세종 31년 5월 21일 두 번째 기사), 수륙재(水陸齋)에서 음식을 나눌 때 걸식자들에게도 평등하고 풍족하게 나눌 것을 주장한 행위(《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4월 11일 네 번째 기사)가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이 상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 대한 그의 무차별적 대응 태도는 존재와 현상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근원해 있다고 보인다.

한편, 김수온은 입장이 서로 다른 쪽에서 자신을 각기 그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며 탄식한다. 곧 자신의 행적과 성향을 두고 유가 쪽에서는 불가와 같은 사람이라 하여 비난하고, 불가 쪽에서는 불가와 같으면서도 유가적 행동을 일삼는다며 헐뜯는다고 했다. 하지만 김수온은 유가와 불가 양쪽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은 도를 구해 즐기는 낙도자(樂道者)라 하였다. 다시 말해 자신은 맹목적인 유불에 대한 경도를 떠나 사상적 중용을 지향하면서 참진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수온은 유가와 불가를 막론하고 자신을 찾아오면 똑같이 시서(詩書)와 인의(仁義)의 유가적 도리를 일러준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 기뻐하면 자신도 기쁘지만, 그것을 듣지 아니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김수온의 태도는 도를 인식하거나 체득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유교적 선왕(先王)의 말을 하는 것보다는 불교의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를 말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유교에 대한 맹목적인 묵수를 경계하고 불교의 가르침이라도 옳다면 그것을 기꺼이 전하겠다는 것이다.

김수온의 이러한 태도와 주장은 나름의 불교 철학적 성찰 속에서 견인된 견해로 보인다. 〈증철수좌서(贈喆首座序)〉란 글에서 김수온은 우리의 현상적인 동이론적(同異論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불교적 인식론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철(喆)이라는 승려로부터 글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얼마 뒤에 그가 철이 있는 곳을 갔는데 마침 철이 선방에 들어가 있어 볼 수 없었다. 중개자인 소(昭)라는 승려에게 여러 가지로 철의 겉모습을 추상하여 철이 어떠한 모습의 승려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소는 그 어느 것도 진짜 철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가 진짜 철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진짜 철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 ‘같은 것[同]과 다른 것[異]이라고 하는 상(相)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이를 다시 풀이하기를 “(사람의 얼굴에 대해) 같은 점에서 말한다면, 눈썹은 가로로 되어 있고 코는 곧으며 머리는 둥글고 발이 모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고, 다른 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의) 크고 작은 것, 예쁘고 못난 것, 굵고 가는 것, 거칠고 고운 것 등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그것은 관점과 기준에 따라 인식되는 대상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데에 그 다른 것을 세운 것은 범부(凡夫)이고 중생(衆生)이며, 다른 데에 그 다른 것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제불(諸佛)이고 성인(聖人)이다. 혜능(惠能)이 이른바 ‘항상 육근(六根)에 응하여 사용하여도 사용하는 상(相)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일체의 법을 분별하면서도 분별하는 상(相)을 일으키지 않는다.[常應諸根用, 而不起用相, 分別一切法, 不起分別相]’라고 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김수온은 자신의 견해가 육조혜능의 법언과 같은 뿌리임을 밝혀 자신의 주장이 선불교적 교리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혜능이 말한 이 구절은, 깨달은 이는 일상생활 가운데 눈과 귀와 같은 여섯의 감각기관으로 보고 듣는 것 등 여섯의 경계를 인식하나 그것으로 인한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경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분별하나 그것으로 인한 또 다른 분별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서 존재와 현상의 실상에 대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서 또 다른 생각을 덧붙이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실상을 가려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능엄경》에서 “지견이 앎을 세우니 이것이 무명의 근본이다[知見立知,是無明本]”라 하고, 그러한 무명의 식견을 버리고 보고 들으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사식용근(舍識用根)’이라 한 구절과 그 뜻이 통한다고 하겠다.

한편, 김수온은 “모든 법은 같으나 이를 흩어놓으면 만 가지 법으로 나뉜다. 따라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같다고 하는 것도 일찍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명제는 그의 생각의 저변에 ‘제법무아(諸法無我)’ 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같은 불교적 존재론과 인식론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수온은 동이론적 또는 현상적 인식의 한계를 깨닫고 그러한 인식의 한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혜능의 법설을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김수온의 불교적 인식론으로 그의 교유론을 추상해 보면 어떻게 될까? 비약일 수 있겠으나, 그의 눈에는 유가의 사대부와 불가의 승려는 그들이 모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개별로 보면 생김새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계층적 행색은 다를 것이나 그들이 의식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같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를 것이고, 다르면서도 같을 것이다. 이 같은 그의 불교적 인식론이나 존재론은 그의 주장이나 행적에 이따금 보이는 기이함과 무차별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그가 벼슬을 사임하고 3년을 기약하고 회암사로 출가를 단행한 점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노비들에게 보인 무차별적 시혜 행위, 특히 불교계의 노숙들과 허물없이 교유한 점 등은 유교와 불교가 하나에서 근원한 것임을 말하는 유불일심일리론(儒佛一心一理論)에 바탕을 둔 그의 불교철학적 인식론과 세계 인식에 근거해 있다고 할 것이다.

5. 글을 맺으며

앞에서 조선 초기 문인사대부들인 정도전, 권근, 서거정, 김수온 등의 증서문(贈序文)에 담긴 불교와 승려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정도전과 권근은 태조와 태종 대의 창업과 수성 과정에서 필요했던 성리학적 경세(經世) 문장을 거의 전담했던 문인사대부들이었다. 성리학적 이념을 세워 조선의 기틀을 세워야 했던 그들로서는 불교는 배척해야 할 이단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이 승려들에게 준 증서문 양식의 글에서도 승려의 반인륜적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승려들에게 유교적 행실이 있으면 그런 점을 들어서 권계하고 있다. 세종·세조·성종 대 유불 관련 문헌의 관찬(官撰) 사업을 주도했던 서거정과 김수온은 이들에 비해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서거정은 본격적인 유불교유론을 내세워 승려들과의 교유를 적극 도모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교 중심적인 유불교유론을 펴고 있다. 이에 비해 김수온은 유불일심일리론적 세계 인식과 불교 인식을 바탕으로 불교적 삶을 지향하고 승려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김수온은 명색은 사대부이지만 속은 승려라는 혹독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처럼 선초의 문인사대부들은 불교와 불교인에 대한 인식에서 얼마간 차이를 보이며 상대하고 있다. 숭유억불의 기세가 서슬 퍼렇던 조선 초기에 서거정과 김수온 같은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문인사대부들이 있었기에 세종 말년과 세조 대에 전에 없이 많은 불교서적이 편찬, 간행되고 유불 합작으로 불경을 언해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김상일 / 동국대 국문·문창학부 교수.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석·박사) 졸업.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저술로 《동악 이안눌시 연구》 《불가의 글쓰기와 불교문학의 가능성》(공저)《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공저) 등이 있고, 역서에 《한국 불가 한시선(대동시선·총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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