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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수경스님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30호] 2007년 03월 10일 (토) 수경스님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천하가 다 아는데도 비밀에 부쳐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일러 ‘공개된 비밀’이라고 한다. 과거 권력자들의 비리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공개된 비밀의 생산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해 다니는 수고조차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권력은 초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하는, 시절은, 그리고 대중들은 어떻게 그들을 벌하는가? 풍문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유비통신의 형태로 그들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자자(刺字)의 형벌’을 내린다. 이보다 더한 ‘조롱’이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엔 성역이 거의 없어졌다. 굳이 ‘거의’라는 표현을 쓴 데서 짐작이 가겠지만,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종교계’가 바로 그곳이다. 들추면 또 있겠지만,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목적에서 벗어나므로 논외로 한다. ‘종교계’라는 범주 설정도 너무 포괄적이다. 불교계, 그것도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에 한정하여, ‘공개된 비밀’을 한번 들여다보자.

‘권력’과 ‘돈’이라는 욕망의 수레를 탄 조계종

나는 요즘 사문으로서, 조계종 종도의 한 사람으로서 거울을 볼 수가 없다. 중노릇을 하는 사람에게 거울이란 ‘경전’일 터인데, 한 글자 한 구절이 모두 내게는 서슬 푸른 ‘장군죽비’다. 하지만 차라리 그건 견딜 만하다. 내가 차마 비추어 볼 수 없는 거울은 ‘신도’라는 거울이다. 엄동에 새벽 별빛을 밟으며 부처님 앞으로 나와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은 ‘절망’도 사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순수한 신심에 더 이상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이 부끄러운 글을 쓰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우습다. 그리고 서글프다. 천하가 다 아는 비밀을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는 것이 우습고, ‘자정기능’마저 상실한 조계종단의 현실이 서글프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행위도 어릿광대짓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꺼이 쓰는 이유는 종도의 한 사람으로서 조계종단이, 나아가 불교계 전체가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될지언정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해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총무원의 권력화, 돈, 종회 계파의 권력 다툼, 사부대중 관계 설정의 왜곡, 재정 불투명, 승려의 세속화, 사찰의 기업화, 호법(護法) 기능의 호권(護權)화, 수행체계의 난맥상, 세상과의 소통 부재……. 조계종단과 관련된 ‘공개된 비밀’의 굵직한 항목들이다.

한국불교는 대승을 표방한다. 하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감히 대승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무엇이 대승인가. 시대의 고통을, 중생의 아픔을 뜨겁게 끌어안는 것이 대승 아니던가. 현재 한국 불교계의 대승 표방은 위선과 기만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일부 스님들이 깨달음이니, 청빈이니, 무소유니 하는 이름으로 내다 파는 상품에서 상업주의의 냄새가 짙은 것이다. 내가 왜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말을 하는가. 시대의 고통을 외면한 대증요법적 처방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타고 있는데 도덕군자 같은 얘기만 일삼는 것이 과연 수행자가 할 일인가.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호도하는 위선적 자기기만 행위로 일관하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세상의 작동 원리는 ‘자본주의’다. 극좌파라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그것을 정의하자면, ‘탐(貪)·진(嗔)·치(癡)’라는 삼독(三毒)을 자양분으로 삼는 욕망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가 득세한 세상에서도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경계한다. 시장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독과점규제법을 만들고, 공정거래법을 만들고, 덤핑을 규제한다.

시장이 옳은 쪽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퍼뜨린 욕망의 바이러스가 숙주인 인간을 파멸의 지경으로까지 떨어지지는 않게 자기 수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업 수당이라는 것도 주고, ‘공동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도 모색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급부상한 것이 바로 ‘생태위기’와 ‘양극화’의 문제다. 적어도 생태위기에 관해서는 불교의 사상이 대안의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양극화 문제에 있어서는 현실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계종에 한정하여 본다면, 돈과 권력의 자장 속으로 너무 빨리 쉽게 흡수돼 버렸다.

나는 지금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들추기 위해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스스로가 경계해 마지않는 ‘인간성 상실’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할 불교의 시대적 사명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강남에 아파트를 사지 못하면 스스로를 빈민의 대열에 끼워 넣고, 자식 과외를 시키기 위해 주부가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 눈물겨운 현실을 최소한 그냥 두고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계종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조계종단은 ‘권력’과 ‘돈’이라는 두 바퀴의 수레를 타고 위태로운 질주를 하고 있다.

‘선거’로 본 종단 권력과 돈

조계종단의 세속화는 총무원장·종회의원·교구본사 주지 선거를 통해 극명히 드러난다. 총무원장·종회의원·교구본사 주지 선거에 몇억 소리가 예사로 떠돈다. 그야말로 공개된 비밀이다. 이런 비밀일수록 세상이 다 아는데 당사자만 모른다. 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의 유치한 꼬투리 잡기에 말려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소문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걸음 물러서 본다. 지금 얘기한 돈의 10분의 1만 쓰였다 해도 이건 심각한 문제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조계종단 사상 초유의 현직 본사 주지에 대한 압수 수색이 벌어진 마곡사 주지 구속 사건은 비밀의 진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국 사회의 온갖 비리 사건 수사에 이골이 난 검찰로서는 돈이 들어가고 나간 곳을 샅샅이 파악했을 것이다.

사안이 이러함에도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에서는 종교 탄압 운운하며 있지도 않은 성역으로 숨어들려고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자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종교의 공간은 성역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세속 권력과 실정법을 압도하는 도덕성과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같은 의미에서 성직자와 수행자의 권위는 사회적으로도 소중하다. 하지만 돈에 기초한 추악한 권력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사찰 재정 투명화가 절실한 것이다.

사찰 운영 책임을 맡은 소임자는 금전을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철저히 사찰 운영과 대중을 위한 일에 한정돼야 한다. 개인적 축재나 사치스러운 일을 하는 데 쓰여서는 곤란하다.

마곡사 주지 구속 사태로 증명이 되었듯이 현행 조계종 선거 제도의 폐해는 교구본사 주지 선거에서 폐해의 극을 이룬다. 본사 주지가 바뀌면 공찰(公刹)인 말사 주지는 대부분 교체된다. 차기 선거를 위해서 자기 사람을 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돈이라는 악순환의 사슬이 더욱 공고해진다. 공찰(公刹)은 공찰(空刹)이 될 수밖에 없다. 불요불급한 대형 불사의 유혹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른 종교 얘기하기가 민망하지만, 최근 개신교도들의 개종 이유 중 첫 번째가 ‘헌금 강요’라는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못하는 것이다. 임기가 완전히 차서 자리에서 물러날 경우 다음 주지의 수순은 불 보듯 뻔하다. 묵계에 의해 비리는 구조화되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으로 되돌아가기도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리와 모순의 관성이 통제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사찰의 세속화=기업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립공원 내 사찰 입장료 문제는 현재의 조계종이 얼마나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지를 비극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불교계 어디서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조계종의 방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타성에 젖어 있다는 방증이다.

지금 조계종과 정부, 국민 사이에 벌어지는 입장료 징수 논란의 핵심은 매표소의 ‘위치’다. 철저히 세속적인 잣대로 공방을 벌이는 것이다. 조계종의 주장은 간단하다. ‘재산권’을 ‘정당하게’ 행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런데 왜 ‘정당한’ 주장을 하는 조계종단의 모습에서 ‘스크루우지’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일까? 참으로 희극적이게도 그러한 당당함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다 알다시피 승가(僧伽)는 승가(僧家)가 아니다. Sa ?gha라는 산스크리트 어의 음역인 승가(僧伽)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승가의 재산은 승가 ‘공동체’뿐 아니라 사회적 공공재로서 ‘공동체적’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승가의 재산은 그렇게 해석돼야 한다. 그래야만 대승의 정신에 부합한다. 중생이 없는데 부처가 무슨 소용이며, 예토가 없다면 정토는 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옛 조사의 말씀대로, ‘목불을 때서 사리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교리적으로도 ‘재산권’ 운운은 초라하다.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면 대승불교의 근간이자 모든 스님네가 노래처럼 부르는 ‘공(空)’사상은 저잣거리로 떨어지고 만다.

재산권 주장의 또 다른 논거인 문화재 관리도 옹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정 문화재의 유지 보수비는 국민의 세금에서 충당된다. 백보를 양보하여, 문화재 관리를 위해서 필요한 사찰의 경상비 마련을 위해 입장료 징수가 불가피하다면 사찰 입구에서 징수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결코 불특정다수의 국민을 상대로 멱살잡이 하듯이 다툼을 벌일 일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전국 모든 사찰의 입장료 폐지도 고려해 볼 만하다.

부처님 만나러 오는 사람에게 돈을 받는 것도 민망한 노릇이지만, 불자들의 순수한 시주금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의 공간을 제공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위한 보시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조계종의 구성원 모두가 ‘돈’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식 있는 불자들도 징수 방법의 문제점만 따질 뿐이지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는 별도로 입장료 문제에 대한 조계종 총무원의 무능과 무책임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이미 정부에서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를 발표했을 때부터 예견됐던 사안이다. 입장객이 아니라 ‘제도해야 할 중생’의 입장에서, 대다수 국민의 편익을 지렛대로 정부와 협상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도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고 국민적 손가락질을 받는 일을 자초하고 있다.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가 충분한 논의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말도 한가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공약으로 걸었던 사안이다. 정부의 엄정한 법(law) 집행과 조계종단의 부처님 법(dharma)다운 해법이 원칙에 입각해서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종단 자정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종단이 잘못 굴러가도, 승풍이 무너져도, 이를 경책하는 종단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종단의 원로 스님은 다 어디로 가셨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종단 내에 존경하는 어른이 많다. 개별 사찰에는 아직도 위엄을 잃지 않은 어른이 계시다. 그런데 왜 종단 전체의 일에는 침묵하실까? 그 원인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산중 총회나 대중공사, 임회(林會)와 같은 전통의 단절이다. 형식적으로 있다 할지라도 세속화한 주지 선거 방식 때문에 유명무실해져 버린 것이다. 원로 스님의 목소리는 제도적으로 묻힐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문중·파벌 의식이다. 문중과 파벌의 순기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중 나름의 가풍은 한국불교 전체 지형도를 다채롭게 하는 측면이 있다. 종회의 계파는 종단 운영의 합리성을 높이고 총무원장의 전횡을 견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긴 해도 종단 전체를 보면 역기능이 더 크다. 원로 스님이라 할지라도 다른 문중의 허물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공개적으로 경책을 하지 않는다. 종회 계파의 폐해도 마찬가지다. 견제와 상호 경책이라는 선한 의도보다는 권력 나눠 먹기의 장치로 전락할 우려가 상존한다.

지금 조계종이 처한 위기의 성격은 10·27법난 때와는 전혀 다르다. 10·27법난은 군사정권의 불교계 길들이기 차원의 탄압이었다. 94년과 98년의 내홍과도 궤를 달리한다. 그때는 거칠긴 해도 개혁의지가 충천했고, 자기반성의 기제도 작동했다. 하지만 지금의 조계종단은 수치심마저 상실한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 문제의식조차 없는 총무원 집행부의 태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보다 더한 비불교적 태도가 어디 있는가. 살인자 앙굴리마라도 정법에 귀의하여 구제를 받았다. 이것이 불교의 진면모다. 그러나 현재의 종단 지도부는 자자(自恣)와 포살(布薩)의 정신도 망각하고 있다. 종도로서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지금 종단이 처한 현실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중세의 암흑기를 지난 가톨릭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 서구의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보면 당장 10년 뒤의 조계종이 걱정된다. 쇼 비즈니스로 변신한 미국을 제외하면 서구의 기독교는 거의 종교적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 동시대인들의 정서에서 이반된 종교는 존재의 근거조차 마련하기 힘들다.

자신의 허물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조계종 총무원은 정법의 씨앗이 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속히 범종단적 자정기구를 발족하는 것이 그 길이다. 원로 스님과 재가불자를 포함한, 그야말로 사부대중이 참여한 자정기구를 세워서 사찰재정 투명성부터 확보해야 한다. 이것만 돼도 무분별한 대형 불사는 근절될 것이다. 승려는 돈을 만져도 남의 것을 잠깐 헤아려 보는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어떻게 치부를 위해 정재에 손을 댈 것인가. 그런 승려는 먹물 옷으로 위장한 승단 파괴자일 뿐이다.

‘종립 율원’을 세워 승풍을 바로잡자

종교 집단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많다 보면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문제 해결 방식이다. 승가의 경우 문제가 있으면 계율을 근거로 허물의 경중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문중과 파벌과 같은 인맥에 따라 징계가 좌우된다. 정법이 살아 있는 종단이 아니라는 얘기다.

조계종단에 율원이 없는 건 아니다. 총림에 율원이 설치돼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들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기능은 율장 연구가 중심이고 영향력의 범위도 총림에 한정돼 있다. 일부 총림의 율원은 명목만 갖추고 있기도 하다.
사실 계율이 없어서 승풍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비구 250·비구니 348계가 있지만 5계만 제대로 지켜도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승려가 될 수 있다. 계율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느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계율이 마련돼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도 부질없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계율 한 줄 몰라도 인천사(人天師)로서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 모범이 될 수 있다. 수행자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수행자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행자나 사미도 안다. 그런데 왜 종립 율원의 설립을 제안하는가. 무리를 이루어 살기 때문이다. 도제식 교육의 한계가 교육 내용이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되지 않는 점에 있듯이,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수행자 ‘개인’에 맡겨 놓으면 집단 윤리 의식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체(戒體)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유능한 작가나 약사일수록 사전과 처방전을 소중히 여기듯이, 계율 시스템의 ‘처방전적’ 기능은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종립 율원을 제안하는 첫 번째 이유다.

종립 율원을 제안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계율의 ‘보편성’을 강화하자는 취지에서다. 예컨대 먼 과거에 우리와 문화와 풍토가 아주 다른 인도에서 제정된 계율이 한국 승가의 지침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상이성의 문제보다는 보편성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보편성의 힘은 예외적이고 상대적인 문제의 애매성을 해결하는 힘이다. 이 점에 주목하면 계율의 현대적 해석에서 자의적 오류나 독단에 떨어질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종립 율원은 총림 율원의 독자적 영역을 보장하고 연구 역량을 강화시키면서, 조계종 승가 전체의 계율 체계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총림 율원 간 유기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도 많은 재정이나 인력이 필요치 않은 종립 율원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계율에는 삼가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독려하는 기능도 있다. 이것이 종립 율원을 제안하는 세 번째 이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종단 차원의 율장 연구를 통해 불교가 이 시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음주계’에 대해서는 무조건 술을 먹지 마라, 술을 먹으면 이런 저런 점이 좋지 않다고만 할 게 아니라, ‘술 권하는 사회’에 불교가 해 줄 일이 무엇인지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도 있겠고, 술을 덜 먹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문화 활동을 독려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율장 연구를 통해 정치, 경제, 교육, 의료, 문화 등 우리 사회의 전반에 걸친 문제에 불교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종립 염불원’의 설립을 제안한다

지금 전국 사찰 어디고 대부분 신도들의 신행은 기도와 염불과 참회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도 조계종단에서는 간화선(看話禪)의 진작만을 전면에 내세운다. 조사들의 오도기연(悟道機緣)을 읊조리며 고원한 경지만을 펼쳐 보인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의 신비화와 절대화는 고공비행을 계속한다. 깨달음의 경계에 집착하는 이들은 허전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소위 ‘선공학(禪工學)’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봐타’ 같은 수행에도 매달린다. 종단 소속 승려가 1주일이면 깨닫게 해 준다며 아봐타 수행 프로그램을 판매해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도들은 이 큰스님 저 큰스님, 이 수행법 저 수행법을 찾아 이 절 저 절로 기웃거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원하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덩실 춤이라도 출 일이다. 과문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나는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명 법문 명 강의를 찾아 헤매다가도 2~3년 사이에 식상해 하고 또 새로운 곳을 기웃거린다. 이른바 수행 중독증이다.

승가 집단에서 앎〔知〕과 함〔行〕의 일체화를 통해 일상에서 보람과 긍지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수행상의 모범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눈 푸른 납자들의 기상은 분명 재가 신도들의 귀감이다. 그리고 진정 간화선이 수승한 수행의 방편이라면 그 수행의 기운을 세간으로 돌려 이 시대의 중생들이 일상에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더 이상 신도들을 수행 유목민화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다경전’ ‘다방편’의 종교다. 누구나 다 아는 불교의 특징 중 하나다. 실제로 사찰에는 염불, 간경, 주력 수행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단의 ‘간화선’ 우위 분위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의 당간만을 높이 세웠다. 결과적으로 간화선 과잉 분위기는 깨닫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라는 ‘막연한 오만’과 깨닫지 못한 한 누구나 중생이라는 ‘오만한 평등주의’를 낳았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한 다수의 불자는 근거 없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맥없이 주눅이 든다. 심지어 지장기도나 산신기도를 하는 불자들은 기복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매도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한국불교의 외호 대중이 누구인지를. 바로 이들이다. 큰손 화주 보살이 아니라 이들의 순수한 불심이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설사 이들의 신앙에 기복성이 있다 할지라도 그 책임은 스승을 자임한 승가의 몫이다.

대부분 불자들의 신앙 행위가 간화선 위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종단 차원의 배려는 없다. 염불과 간경과 주력을 권하면서도, “간화선이 가장 수승한 방편이지만 근기에 따라서……”라는 친절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과연 간화선을 하지 않는 불자들은 하열한 근기의 소유자들인가? 이건 아니다. 비굴하고,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위다. 간절하고 진실하면 통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만시지탄이나 실천적 대안으로 종립 염불원 설립을 제안한다. 종립 염불원이라 칭해 봤지만 염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참선 이외의 많은 수행 방편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대해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불가의 모든 수행 방편의 궁극처는 ‘개오(開悟)’와 ‘보살행’이다. 이 둘은 차서의 관계일 수도 있고, 동시적 관계일 수도 있다. 역순도 가능하다. 지극한 보살행을 통해서도 개오의 체험은 가능한 것이다.

똑같이 부처님 앞에 절을 하면서도, 기도라 하기도 하고 참회라 하기도 한다. 둘 다 그른 건 아니다. 기도가 참회일 수 있고, 참회가 기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체계적인 인도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러다 보니 초심자들은 절에 와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막연해 한다. 불교 대학이나 책을 통해 공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대로 한계가 있다.

종단 차원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학문적 연구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신앙의 실제’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세상과 소통하라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는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꽉 닫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마곡사 주지 구속 사태나 사찰 관람료 논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명백한 불법을 저지른 주지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종교 탄압 운운할 뿐, 대국민 사과나 공개 참회도 하지 않고 있다. 모든 사회 부문에서 100%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대세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국민 모두의 이해가 걸린 관람료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대국민 설득을 하려면 최대한 정중히 논리적으로 해야 할 텐데, 왜 내 땅을 돈 안 내고 쓰려 하느냐는 말밖에 없다. 이래서야 국민은 고사하고 불자들인들 어떻게 고운 시선으로 승가를 볼 것인가.

혹시 총무원에 대한 비판이 감정적이지는 않는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만, 지난 1월 23일 총무원장 스님의 신년기자회견을 보고는 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 인식조차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의 종단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총무원장 스님은 ‘수행과 전법’에 매진하기 위해서 종풍 진작과 수행 승가 진작, 대중 원융살림 회복, 전법과 복지 진흥, 사회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수행 종가 등을 4대 비전으로 제시했다. 원론적이긴 하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제시한 비전과 반대로 돌아가는 종단 현실에 대해서는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고 수수방관하면서 ‘어떻게’ 수행 종풍을 회복하겠다는 것인가. 중요한 건 ‘어떻게’다.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실행의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대중 원융 살림 회복’이라는 말은, ‘비리와 불법이 있더라도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을 삼가해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 동안 실천승가회나 재가연대, 불교환경연대에서 총무원에 대해서 상식 수준의 비판적 발언을 해도 총무원은 승가집단다운 응답을 하지 않았다.

총무원은 일선 사찰과 구실이 다른 집단이다. 큰 물줄기를 관리하면서 샛강에 해당하는 개별 사찰을 품어 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불교 전체의 이미지는 총무원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총무원이 권력 피라미드의 최상부에서 훼불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일부 비리승을 비호하는 역할을 한다면 불교 전체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크고 작은 비판의 목소리를 열린 태도로 수용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총무원과 달리 많은 개별 사찰과 스님네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지역민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한 활동은 물론, 다양한 문화 강좌를 열어 불자들에게 봉사한다. 신도들도 세상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총무원만큼은 반대로 가고 있다. 권한이 너무 막강하고 그 권한이 금권을 가진 일부 승려와 커넥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총무원에서는 최우선 과제로 총무원장, 종회의원, 교구 본사 주지 자리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부터 해결할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이를 보장할 구체적 대안을 내 놔야 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서로 주지 안 하겠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수행자다운 주지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모든 비리의 근원은 돈과 권력이다.

또 구업을 지었다. 갚을 길은 오직 하나다. 발로참회(發露懺悔)하며 정진 또 정진하는 일만 남았다. 아울러 조계종단의 일그러진 모습에는 나에게도 크고 작은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바대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모든 중생에게 부처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연기’의 법칙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너는 곧 나’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

수경
서울 화계사 주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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