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웃종교에서 보내온 우정의 충고
1. 들어가는 말
중국의 한(漢)나라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하여 통치한 나라였다. 한나라의 통치이념이었던 유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아니라 순자(荀子)의 유학이었다. 유학은 크게 세 요소로 구성된다. 형이상학적 요소, 형이하학적 요소, 두 요소의 중용적 조화가 그것이다. 형이상학적 요소를 강조한 사상가 중의 대표는 맹자이고, 형이하학적 요소를 강조한 사상가 중의 대표는 순자이며, 두 요소의 중용적 조화를 강조한 사상가 중의 대표는 공자이다.
순자는 인간의 육체적 삶을 확보하는 것에 주력했다. 순자는 그것을 위해 성악설을 주창하고 예를 강조했다. 순자의 사상은 인간의 육체적 삶을 확보하기 어려운 때는 크게 환영을 받지만, 육체적 삶이 확보된 뒤에는 많은 부작용이 생긴다. 사람들은 육체적 삶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안정이 되면 허무주의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훗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가 만연하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고, 예도 지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다시 혼란해진다.
한나라 말기의 혼란은 한나라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나라의 정치수단이 예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가 부정당하면 한나라는 지탱할 수 없었다. 한나라가 망한 뒤 새로운 정치이념이 등장할 때까지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은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시대가 혼란한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사상이나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론이나 사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정치이념으로 하는 정권이 등장을 하여 나라를 안정시킨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였다. 불교는 한나라 후기에 수입되었지만, 확산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가르침을 접하면 사람들은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원래부터 죽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한나라 이래 허무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정권이 등장하여 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수당의 안정기가 그것이었다.
불교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위대한 역할을 했으나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사원의 수가 불어나고 사원경제가 비대해졌으며 승려들이 타락했다. 이 때문에 경제가 피폐해진 국민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국민의 반발이 격렬해지자 지식인들 사이에서 불교 배격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불교가 외래 종교였기 때문에 불교를 배격하는 수단은 전통사상인 유학이었다.
유학의 세 요소 중에서 공격용으로 적당한 것은 맹자의 형이상학과 순자의 형이하학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논리적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사상은 다른 사상을 포용하는 능력은 뛰어난 반면, 논리 싸움에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맹자의 사상과 순자의 사상이었다. 먼저 불교 공격의 포문을 연 사람은 순자 사상으로 무장한 한유(韓愈, 768∼824)였다.
2. 한유의 불교 비판
한유는 문장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원도(原道)〉 〈원성(原性)〉 〈원인(原人)〉 〈논불골표(論佛骨表)〉 등을 저술하여 중국 전통사상을 옹호함과 동시에 불교의 배격에 힘씀으로써 신유학 형성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불교 배격 이론은 주로 〈원도〉와 〈논불골표〉에 나타나 있다. 특히 〈논불골표〉는 당시의 군주인 헌종이 불골(佛骨)을 영입할 때 그 부당함을 건의한 표문(表文)인데, 이 표문을 바침으로써 그는 헌종의 노여움을 사 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불교가 일세를 풍미한 시대에 감히 그것에 대항하였던 유학사상사에 미친 한유의 영향이, 양주와 묵적의 배격에 힘썼던 맹자보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되는 것은 여기에 의거하는 바가 많다.
〈논불골표〉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모(臣某)는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합니다. 불교는 오랑캐의 한 법일 뿐입니다. 후한 때에 중국에 유입되었습니다. 상고에는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황제는 제위에 있었던 것이 100년이고 나이가 110세이었으며 ……무왕은 나이가 93세이었습니다. 목왕은 제위에 있는 것이 100년이었습니다. 이때 불법은 아직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두 부처를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한 명제 때 처음으로 불법이 있었습니다. 명제는 제위에 있었던 것이 18년뿐이었습니다. 그 후 혼란과 멸망이 계속되고 운수와 복이 길지 못하였습니다. 송, 제, 양, 진, 원, 위 이하 부처를 섬기는 데 힘쓸수록 연대는 더욱 짧았습니다. 오직 양의 무제만은 제위에 있는 것이 48년이었으나 전후 세 번 몸을 바쳐 부처를 섬기었으니 종묘의 제사에도 고기를 쓰지 않았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데도 야채와 과일을 먹는 정도였습니다.
그 후 결국 후경에게 쫓겨나 대성에서 굶어 죽었고 나라도 따라서 멸망하였습니다. 불교를 섬겨 복을 구하였으나 오히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보면 부처는 섬길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폐하께서는 여러 중으로 하여금 불골을 봉상에서 맞아들이게 하고, 누각에 나아가 보시며, 받들어 궁내로 들여오고 또 여러 절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맞이하여 공양토록 하고 계십니다. 신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반드시 폐하가 부처에 미혹되어서 이렇게 받들고 복상을 비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해가 풍년이 들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서울의 백성들을 위하여 괴이한 구경거리와 갖고 노는 노리개를 장만하는 것일 뿐일 것입니다. ……
그러나 백성은 어리석어 미혹되기 쉽고 깨닫기 어렵습니다. 폐하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또한 진심으로 부처를 섬긴다고 생각하여 모두 ‘천자인 대성인도 한마음으로 섬기는데 아무것도 아닌 백성들이야 어찌 몸과 마음을 아껴서 되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마를 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며 100으로 10으로 무리를 지어 옷을 벗고 돈을 흩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로 본받아 오직 때에 늦을까를 걱정하여 노소가 분주하게 다니면서 자신들의 하던 일을 버릴 것입니다.
만약 바로 금지시키지 아니하면 다시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반드시 팔을 자르고 몸을 저며서 공양을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풍속을 그르치고 사방에 웃음거리를 전하게 될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저 부처는 본래 오랑캐로서 중국과 말이 통하지 않고 의복도 달리 만들며 입으로 선왕의 말을 말하지 않고 몸은 선왕의 옷을 입지 않으며 군신의 의와 부자의 정도 알지 못합니다.
가령 그 몸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어서 국명을 받들어 서울에 온다면 폐하는 그를 맞아들여 정치적 회담을 한 번 하고 잔치를 한 번 베풀어 주며 옷 한 벌을 주고서 호위하여 국경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백성들을 미혹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하물며 그 몸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어 말라붙은 뼈의 때 묻은 찌꺼기들을 어찌 궁중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여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옛날 제후가 자기의 나라에서 문상을 함에 있어서도 무당으로 하여금 먼저 복숭아 가지나 갈대 줄기로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치게 한 연후에 나아가 문상하였습니다.
지금 까닭 없이 썩고 때 묻은 물건을 가져오게 하여 직접 가서 보시며 무당을 앞세우지도 않고 복숭아 가지나 갈대 줄기도 쓰지 않으시며 신하들도 그 잘못을 말하지 않고 어사도 그 실책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신은 참으로 이를 부끄러워합니다. 폐하에게 바랍니다. 이 뼈를 가지고 유사에게 부탁하여 물이나 불에 던져 길이 근본을 끊고 천하의 의심을 단절하여 후대의 미혹됨을 단절시킴으로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대성인의 작위하심이 보통과 다름을 알게 하시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이 〈논불골표〉의 논술에서 보면 한유의 배불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중국에 불교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역대의 군주가 다 장수하였고 국가가 태평했다. 백성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대였으나 불교가 수입되어 융성해진 결과 어지러워지고 멸망하여 재앙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
② 부처는 오랑캐이고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언어와 풍속이 다른 것이다.
③ 불교는 군신 간의 의나 부자간의 정 등 일상적인 윤리를 알지 못한다.
④ 이마를 불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는 등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또 경제 관념도 엉성하여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게 된다.
⑤ 죽은 자의 뼈 등은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수입 이래의 중국은 재앙이 많은 시대였다고 지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한유의 배불논리에서 불교를 재앙의 근원으로 파악하는 사상적 기반은 마음보다 몸을 더 중시하는 순자 사상이었다. 중화 사상, 예절과 윤리의 강조, 생업의 중시 등이 순자 사상의 핵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유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이론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한유는 불교의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유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당시에 노출되었던 불교의 부작용에 관한 것이었다.
유학의 불교 비판은 순자와 맹자가 협공하는 방식이었다. 순자의 사상으로 불교를 공격한 대표가 한유였다면, 맹자의 사상으로 불교를 공격한 대표는 이고(李翶, 770년경~841년경)였다.
3. 이고의 불교 수용과 비판
현실적으로 당나라의 불교는 부작용이 많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러나 불교의 이론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번뇌와 망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생로병사의 숙명에서도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 해결하는 탁월한 방법을 불교는 가지고 있었다. 이고는 이러한 불교에 매료되면서도 부작용이 심한 불교를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매력을 유학에서 찾아내면 된다. 이고는 불교의 성불론에 해당하는 이론을 유학에서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했다.
이고는 말한다.
아! 性命의 書가 있다 해도 배우는 자들이 능히 밝히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모두 莊子, 列子, 老子, 석가에게로 간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공자의 무리들(유학자)을 통해서는 性命의 道를 궁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하고, 마침내 책에 써서 誠明의 근원을 열어나가려 한다. 끊어지고 폐기되어 선양되지 못한 道가 이로써 거의 전해질 수 있으리라.
이고는 당나라 때 불교와 노장사상 등이 유행하게 된 원인으로 유가 사상의 진리가 밝혀지지 않았음을 들었다. 이고의 불교 비판은 직접 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진리에 해당하는 것을 유가 사상에서 찾는 것이었다. 불교는 부작용이 많기 때문에 유가 사상의 진리를 밝히기만 하면 불교는 저절로 쇠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命)은 천명(天命)이므로 천(天)의 작용이고, 성(性)은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의 작용이다. 따라서 성명(性命)의 도(道)를 밝히기만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에서 오는 번뇌는 저절로 소멸된다. 이고는 성명의 도를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성인(聖人)이라고 정의한다.
주역에 이르기를 무릇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함께 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함께 하며, 사시와 그 질서를 함께 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함께 하니 하늘보다 먼저 하면 하늘이 그를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나중에 하면 하늘의 작용을 받든다. 하늘도 그를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를 어기며 하물며 귀신이 그를 어기겠는가. 이는 밖에서 부터 얻은 것이 아니다. 능히 자기의 성(性)을 다했을 따름이다.
이고에 의하면, 성인은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내재하는 자기본래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내부에 있는 자기본래성을 다하면 천지우주와 합일되는 종교적·신비적 존재가 된다. 이고가 성인이 되는 근거로 성(性)을 들었다.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性이다. 그 性을 미혹시키는 것은 情이다.……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性이 이에 가득 찰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情)은 불교의 이른바 ‘무명번뇌(無明煩惱)’이고 성(性)은 ‘정명원각지본심(淨明圓覺之本心)’이므로, 무명번뇌를 제거하여 그것에 덮여 있는 정명원각지본심을 밝힘으로써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불교의 성불론이 여기서는 정을 없애고 성으로 돌아감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으로 대치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고의 배불론은 불교의 성불론을 중국 전통사상인 유학 사상을 재료로 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것으로 대치된다.
한유와 이고의 배불론은 각각 흐름을 형성하여 발전을 거듭한다. 한유의 배불론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1007∼1072)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을 거치면서 발전하고, 이고의 배불론은 송나라의 주돈이(周惇頤, 1017∼1073), 장재(張載, 1020∼1077), 정이(程頤, 1033∼1107) 등을 거치면서 발전한 뒤에 주자(이름 朱熹, 1130∼1200)에 의해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유학에서의 배불론은 크게 두 가지로 귀결된다. 한유의 방식과 이고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한국의 유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4. 이색의 불교 수용과 비판
고려시대의 상황은 당나라 말기의 그것과 비슷했다. 불교가 너무 성행하여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고려시대 말기의 지식인들이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찾아낸 것이 중국의 주자학이었다. 고려 말기에 수입된 주자학의 대표적 지식인은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었다.
목은 선생은 불교를 비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불교의 폐단이 심각했기 때문에 불교를 비판하는 것도 시급했지만, 그것보다도 목은은 진리에 더욱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은은 불교의 빼어난 진리에 심취했다. 뿐만 아니라 목은은 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주자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목은은 주자학에서 얻은 진리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하나로 통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목은은 불교의 문제점 또한 알았다. 현실과 이상이 애당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떠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목은은 승려들의 구도 방식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고요함 속에 깨달음 있음을 나는 믿지만
좌선하는 스님들 헛되이 늙는 게 가련하구나.
목은의 현실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리를 얻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현실을 떠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독신의 삶으로 일관하는 불교의 승려나 천주교 신부의 수도 방법 역시 목은의 현실주의에서 바라보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만약 그들이 현실을 떠나 구도의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득도를 하면 현실과 진리의 세계가 둘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바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득도를 하는 것도 빠른 시일에 가능할 것이라 보장할 수 없지만, 설사 득도를 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의 삶의 방식이 굳어져 있으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진리를 얻는 구도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목은은 사방을 유람하러 떠나는 봉 상인이라는 스님을 전송한 글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상인은 내가 평소에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적막한 나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만나기를 청하였을 때, 내가 그를 한 번 보고서는 손을 마주 잡고 오래 사귄 사람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나의 아내가 세상을 뜨자 그가 2주일 동안 집에 머물면서 영가를 향하여 한 마디 해 주고 불경을 독송하며 복을 빌어 주었는데, 그 음성이 너무도 청아해서 듣는 이들이 송연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그를 다른 데로 못 가게 붙들어 두고도 싶었으나,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로 그가 떠나려고 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는데, 이는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묵지 않는다는 불가의 전통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가 작별에 앞서서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스님이 사방을 유람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십니까?”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다만 도를 구할 따름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어디 한 번 물어봅시다. 도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바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하자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도를 찾아서 사방을 유람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쓸 데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이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 도가 바로 부들방석 안에 있을 것이고, 스님이 짚신을 신고 걸어가시면 도가 바로 짚신 안에 있을 것이니, 담장이나 기와에도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이고, 강산이나 풍월 역시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도 도 아닌 것이 없고,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도 아닌 것이 없을 것인데, 스님은 어찌하여 꼭 사방을 유람하면서 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쓸 데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르다고 하겠습니까?”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옳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인데, 조주는 나이가 일흔이 되어서도 다시 참선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어찌 쓸 데 없는 일을 한 것이겠습니까? 나는 지금 태어난 지 29년 밖에 되지 않으니, 조주의 나이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런 내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묻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도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서리와 눈을 무릅쓴 채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도 꺼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심하게 기롱하십니까?”하였다. 이에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래서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부들방석’과 ‘짚신’이라고 말한 그 속에는 사실상 가고 머무는 것과 움직임과 고요함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초학자의 입장에서는 모름지기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부부터 시작해야지 무작정 조주의 행위를 본받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행히 스님의 자질이 아름다우니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조주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그때가 되면 내 말을 수긍하리라 믿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그와 작별했다.
위의 문답에서 보면 봉 상인은 색과 공을 분리한 뒤, 색의 세계를 떠나 공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수준이지만, 목은은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이라는 사실을 알아 색과 공을 일치시키고 있는 차원이다. 봉 상인이 공을 터득하여 공과 색이 일치함을 안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색과 공을 분리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다. 새로이 가정을 갖기도 어렵고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문답에서 이를 안타까워하는 목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그만큼 도를 얻기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도를 구해야 제대로 구할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간에 화합하며 자녀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도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의 자세이다. 만약 구도의 자세를 망각하고 현실에 매몰되어 버리면 진리에서 아주 멀어진다. 그렇게 되면 현실을 떠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못한 수준이 되고 만다. 그런 사람을 썩은 선비, 또는 속된 선비라 한다.
5. 정도전의 불교 비판
한국에서의 불교 비판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에게서 극에 달한다.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이란 책을 저술해서 19개 조로 나누어 불교 비판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②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辨) ③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④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辨) ⑤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辨) ⑥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昧於道器之辨) ⑦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辨) ⑧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⑨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辨) ⑩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⑪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辨) ⑫불씨걸식지변(佛氏乞食之辨) ⑬불씨선교지변(佛氏禪敎之辨) ⑭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辨) ⑮불씨입중국(佛氏入中國) ⑯사불득화(事佛得禍) ⑰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⑱사불지근연대우촉(事佛至謹年代尤促) ⑲벽이단지변(闢異端之辨)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한유의 불교 비판과 유사하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진리관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 나타난 불교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불씨잡변》의 첫머리에 있는 ‘불씨윤회지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도전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죽은 사람이 다시 그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런 일은 없다고 비판한다. 정도전이 불교 비판에서 사용한 이론은 누가 보더라도 타당하다.
천지의 조화는 만물을 낳고 낳아 다함이 없지만, 만물의 개체로 보면 모임이 있으면 반드시 흩어짐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시작하는 것을 살펴 태어남의 이치를 알면, 끝을 살펴 반드시 흩어져 죽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이란 기(氣)와 함께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고 이미 간 것이 다시 오는 것은 없다. 숨을 쉬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만, 숨을 내쉴 때 나간 기가 숨을 들이쉴 때,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나무에서 잎이 나지만, 지난해에 떨어진 나뭇잎이 본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물 속의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있지만, 그 물은 이미 길어낸 물이 다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곡식의 자람도 그렇다. 씨가 뿌려져 10배 100배 수확이 되는 것은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지, 지난해에 사라진 곡식이 다시 되살아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혈기가 있는 모든 것은 일정한 수가 있기 때문에, 오고오고 가도가도 더하거나 멸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도리어 농부가 곡식을 재배하는 것만 못한 것이 된다. 윤회설에서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조수(鳥獸) 어별(魚鼈) 곤충이 될 것이니, 그 수에 일정함이 있어 이것이 늘어나면 저것이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이 반드시 늘어나므로 다 함께 늘어날 수가 없고 일시에 다 함께 줄어들 수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운이 왕성한 해에는 사람도 늘어나고 조수 어별 곤충도 함께 늘어나지만, 기운이 쇠한 해에는 사람도 줄어들고 조수 어별 곤충도 또한 줄어든다. 기가 성하면 일시에 늘어나고 기가 쇠하면 일시에 줄어드는 것이다. 불이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간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의 연기는 곧 사람의 혼이며 불의 재는 곧 사람의 백이다. 또 화기(火氣)가 꺼져 버리게 되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죽은 후의 혼과 백이 다시 합하여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으므로 태어남에 따라 다시 형체를 받는다.”고 하는 불교의 윤회설은 잘못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정도전의 불교 비판 이론을 보면, 불교의 이론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부처님 사상의 핵심이 아니다.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얻는 것이다. 이를 놓아두고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를 보면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이론 중에서 와전된 내용에 관한 것이거나, 불교의 부작용에 관한 것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가르침에는 와전되어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이 있다. 그 와전된 내용을 붙잡고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부작용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교를 비난하기만 해도 공감한다. 그런 사람들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비판하는 과격한 이론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 감정적일수록 더욱 효과가 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그러한 의도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불씨잡변》은 당시에 많은 호응과 지지를 받았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과격하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교를 비판하는 유교의 대표자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도전의 비판이론의 잘잘못을 가린다고 해서 유교의 불교 비판론을 재비판할 수는 없다.
6. 율곡 이이의 불교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불교관은 그의 〈풍악증소암노승(楓嶽贈小菴老僧)〉에 잘 나타나 있다. 율곡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18세 때까지 3 간 묘막 생활을 한 뒤,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한 암자에 있는 스님을 만나 문답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자초지종을 소개하는 것은 율곡 이이의 불교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그대로 소개한다.
내가 풍악에서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혼자 깊은 골자기를 걸어 몇 리를 들어가다가 한 조그마한 암자를 발견했다. 거기에 한 늙은 스님이 가사를 입고 정좌하고 계셨는데, 나를 보고 일어나시지도 않고 또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암자 속을 둘러보니 아무 물건도 없었고 부엌에는 밥하거나 불을 때지 않은 지가 여러 날 되어 보였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무엇을 먹고 요기를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시험하려고 “공자와 석가 중 누가 성인(聖人)입니까?” 하고 물으니, “서생은 늙은 중을 속이지 마라.”고 대답했다. 나는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니 중국에서는 시행할 것이 못됩니다.”고 했다. 이에 스님은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이니 그들도 오랑캐이냐?”고 했다. 내가 “불가의 진리는 우리 유학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하필 유학을 버리고 불교의 가르침을 구하십니까?” 하니, 스님은 “유가에도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이 있느냐?”고 했다. 내가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옳다는 것을 말할 때, 말끝마다 반드시 요순을 일컬었으니 어찌 즉심즉불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유학은 실질을 압니다.”고 하니, 스님은 즐거이 여기지 아니하며 한참 있다가 “비색비공(非色非空)은 어떤 말이냐?” 했다. 내가 “이것도 전경(前景)입니다.”라고 하니 스님은 피씩 웃었다. 나는 바로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 것은 색입니까, 공입니까?” 하고 말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비색비공은 진여체(眞如體)다. 어찌 이 시에 비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웃고 말하기를 “이미 말이 있었으니, 바로 경계입니다. 어찌 체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가의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진리는 문자 밖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놀라 나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당신은 속된 선비가 아니다. 나를 위해 시를 지어 연어(鳶魚)의 구(句)를 풀이하라.”고 했다. 나는 바로 한 절구를 썼다. 스님은 본 뒤에 옷소매 속에 걷어 넣고 몸을 돌려 벽을 향해 앉았다. 나도 골짜기에서 나왔다. 어둑어둑하여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랐다. 사흘이 지나 다시 가보니 조그만 암자는 여전히 있었지만 스님은 이미 가버렸다.
다음은 율곡이 그 스님에게 써준 시이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낢은 위아래가 같은 것
이는 색(色)도 아니고 또 공(空)도 아니다.
부질없이 한번 웃고 이 몸을 바라보니
석양 빗긴 총림 속에 홀로 서 있네.
인간은 감각기관의 감각작용을 통해 의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생각하고 헤아리고 분별하고 사물을 알아보는 등의 의식작용을 한다. 의식은 본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에서 생각하고 헤아리고 분별하고 사물을 알아보는 등의 의식작용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의식은 또 살면서 경험한 내용들을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의식의 밑바닥에 저장된 기억이 덩어리가 되면 그것이 ‘나’라는 것으로 둔갑을 한다. ‘나’가 생기면 바로 ‘너’가 생기고, ‘그’가 생기며 만물이 생긴다.
그러므로 만물은 의식이 만들어낸 사진이다. 의식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므로 만물 또한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산은 산이 아니다. 사람이 그것을 산으로 보는 것은 그의 의식이 찍어낸 사진이다. 눈에 보이는 물은 물이 아니다. 사람이 그것을 물로 보는 것은 그의 의식이 찍어낸 사진일 뿐이다. 사진은 참이 아니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이 아니고 공(空)이다. 물 또한 물이 아니고 공이다. 산이 공일 때 참된 산이고 물이 공일 때 참된 물이다.
사람이 의식으로 찍어낸 산은 다른 것과 구분된다. 그런 것을 색(色)이라 한다. 산이 색이고, 물 또한 색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색이다. 색은 모두 의식으로 찍어낸 가짜다. 그것을 알면 산은 공으로 돌아가고 물 또한 공으로 돌아간다. 만물이 모두 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색으로 존재하는 산이 공으로 존재하는 산과 다른 것이 아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하나일 뿐인데, 사람이 색이라고도 하고 공이라고도 한다. 공을 또한 사람이 의식 속에서 공이라고 의식하면 공이 아니다. 그 공 또한 의식에 의해 찍혀진 사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이라 해도 색이 아니고 공이라 해도 공이 아니다. 비색비공이다. 그러나 비색비공이라고 하면 그 또한 비색비공이 아니다. 말로 하면 바로 의식에 찍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색비공이라는 말도 본래모습을 표현한 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율곡은 전경이라 했다. 전경은 진여의 전 단계라는 말이다. 진여체라고 해도 역시 하나의 단계가 되고 만다. 진여는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진여체라고 표현하면 이미 진여체가 아니다.
《시경》에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못에서 뛴다.”는 노래가 있다. 사람들은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른다고 하지만, 솔개가 하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솔개는 솔개가 아니다. 그냥 자연이다. 하늘 또한 하늘이 아니라 자연이다. 나는 것 또한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다. 물고기도 물고기가 아니라 자연이고, 뛰는 것이 뛰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다. 못도 못이 아니고 자연이다.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못에서 뛴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진여체가 위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아래에서 드러나기도 하는 모습을 노래한 것일 뿐이다. 그것을 진여라고 표현하면 이미 진여가 아니다.
진여의 세계에서는 일체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고, 승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율곡이 불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승이 속이고 속이 승인데, 하필 속을 버릴 까닭이 없다. 속을 버리고 산사에 있어야 할 이유가 따로 없고, 가족을 버리고 혼자 살아야 할 이유도 따로 없다. 만약 그것이 진리를 깨치기 위한 방편이라면 진리를 깨친 뒤에는 달라져야 한다. 불교에 대한 율곡의 지적은 바로 이것이다.
7. 맺음말
유학에서의 불교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불교의 부작용만을 열거하여 그것을 피상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 진리를 실천하는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있다.
불교는 이 두 경우에 대해서 다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진리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남긴 불교의 부작용은 불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과 속을 떠나는 것, 독신으로 일관하는 것 등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색즉시공의 이론으로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유학을 연구하는 지식인들에게도 반성할 점이 많이 있다.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고 섣불리 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목은 선생이 말한 썩은 선비나 속된 선비가 되는 웃음거리를 피할 수 없다.
불교인, 유교인, 기독교인 등으로 자기를 소속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불교인 이전에 사람이고, 유교인 이전에 사람이며, 기독교인 이전에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으로서 진리에 목이 말라야 한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은 불교의 진리를 접해도 감동하고, 유교의 진리를 접해도 감동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접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다가온다.
자기를 불교인, 유교인, 기독교인 등으로 가두는 사람은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 아니다. 불교인으로 가두는 사람은 불교인이 될 때 얻게 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유교인으로 가두는 사람이나 기독교인으로 가두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나를 가두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나를 가두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람은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을 구별할 뿐, 남을 자기의 울타리에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먼저 진리에 목이 말라야 한다. 진리를 얻은 사람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모든 종교와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된다. 물론 사이비를 사이비로 알아보는 혜안도 생긴다. 진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 진리를 얻을 때 비로소 대화의 장이 열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얻는 것이다. ■
이기동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동 대학원 동양철학과(석사), 일본 쓰쿠바대학 철학사상연구과(박사과정) 졸업. 주요 저서로 《대학중용강설》 《한국의 위기와 선택》 《한마음의 나라 한국》 《기독교와 동양사상》 등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