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이 2013년 6월 1일 개최한 ‘북한불교의 이해’ 세미 나에서 발표된 발제문이다.

 

1. 머리말

북한에서 조선불교도연맹(이하 조불련)이나 조선그리스도연맹 등과 같은 종교단체들이 결성된 지 60여 년이 지났고,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일부 종교단체들과 활발한 교류를 해 왔다. 하지만 북한에는 어떤 종교도 인정하고 있으며, 북한의 종교단체들은 공산화 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위장조직에 불과하고 북한의 외화벌이에 동원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다.

최근 미 행정부 산하의 독립기구인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2013 연례 종교자유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북한, 중국 등 15개 나라를 종교자유 특별우려대상국(CPCs)으로 지목했다. 이 보고서는 북한 당국이 지하교회 활동을 하는 개신교도들이나 점 보는 사람들을 체포나 구금, 심지어 처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종교를 접한 뒤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상당한 수의 종교인들이 수감돼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북한 당국은 모든 주민이 완전한 종교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실시한 북한에 관한 보편적 정례검토(UPR)에 참석한 강윤석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제부장은 “헌법 68조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지며…… 사람들은 자기 신념에 따라 어떤 종교든지 자유로이 믿을 수 있으며, 종교인들은 평양 봉수교회, 장충성당을 비롯한 전국의 70여 개 성당, 교회당, 사원에서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1년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불련에 소속된 승려는 300명 정도이고, 이들을 제외한 중앙당 소속의 신분을 가진 책임지도원이 직무를 맡고 있는 유물보존총국 소속의 인원들 중 일부도 불교신도로 분류된다. 조불련에 가입된 인원은 약 1만 명이고, 전국에서 약 10만 정도의 신도가 부처님오신날,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 등 불교의 4대 명절 등 불교행사에 참가한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의 종교 실태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불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 당국의 사회정책과 불교정책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본 연구는 우선 제1절 왜 현 단계에서 북한불교의 실체와 성격 규명이 필요한지 문제의식을 제시하였다. 제2절에서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당국의 종교 및 불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제3~5절에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기와 사회주의 혁명기, 남북교류 협력기로 나누어 북한의 종교정책과 그에 따른 북한불교 파급 영향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요약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한다.

2. 북한체제와 종교

1) 북한체제의 종교관

북한의 종교관을 결정지은 요소는 사회주의이론과 주체사상의 두 가지이다. 북한 사회주의체제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북한 고유의 주체사상으로 재편되었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의 영향 때문에 북한에서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60년 넘게 반종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이론과 종교의 관계이다. 현존 사회주의의 뿌리가 된 과학적 사회주의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하여 언제나 비판적인 입장에 섰다.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 나온 서술이다. 그는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전도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인간이 만들었는가 하면 국가·사회 자체가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종교는 현실의 불행으로 고뇌하는 민중의 ‘한숨’ ‘아편’이기 때문에 이러한 환상적 행복을 폐기하는 것이야말로 민중의 현실적 행복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종교 비판은 법 비판으로, 신학 비판은 정치 비판으로, 더 나아가 비판은 실천으로 바뀌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력사사전》(1971), 《조선 문화어 사전》(1973), 《철학사전》(1981)에서는 종교를 신, 하느님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숭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북한과 마르크스 종교관의 다른 점은 마르크스가 종교를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신념이라고 본 데 비해, 북한에서는 논리체계 없이 막연한 신비주의, 몽매주의에 기초해 비현실적인 미신과 동일시되었다.

북한에서는 종교의 기능을 지배계급의 착취 도구로도 인식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를 아편으로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시 기독교가 기성의 정치체제를 신성화하는 도구로 변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종교들이 정치와 유착해 봉건지배계급들의 특권과 결탁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종교들이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처럼 북한의 종교관은 마르크스주의의 종교관에 입각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미신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 이후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른바 ‘정치적 종교(political religion)’로서 주체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둘째는 주체사상과 종교의 관계이다. 1972년 이후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북한의 종교기구들이 재등장한 것도 북한 주체사상의 이론적 확립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북한의 종교는 주체사상의 틀 속에서 사상적으로 종속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북한 당국은 1972년 12월에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수령으로 규정하는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북한헌법 제3조는 북한정권이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노동당 규약 전문에는 “조선로동당은 오직 김일성의 주체사상·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주체사상이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이자 정치·경제·사회·문화뿐만 아니라 종교까지도 규율하는 통치이념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 북한 당국은 1974년에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하 ‘유일사상 10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원칙이 발표된 이후 북한사회에서는 주체사상과 그 창시자인 수령 이외에 다른 숭배 대상이 존재하기 어렵게 되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유일사상 10대 원칙’이 발표되면서 모든 부문에서 이 원칙이 적용되었다. 종교 활동의 보장은커녕 모든 종교의 가르침도 이 ‘유일사상 10대 원칙’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 당국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김일성의 저작을 경전화했으며, ‘김일성주의’ 학습을 의식화·의무화하고, 주민들의 옷에는 김일성 초상 배지를 달도록 했으며, 곳곳에 김일성 동상을 건립하고, 김일성의 연고지를 성역으로 만들어 주민들을 참배하도록 하여 이를 완전히 종교화했다. 따라서 이러한 주체사상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된 북한에서는 어떤 종교라도 독자적인 특색을 갖추며 존립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2) 북한 당국의 불교인식

북한의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는 《조선말대사전》의 개념 변화에서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82년판 《조선말대사전》의 정의는 1972년 헌법에서 규정한 ‘반(反)종교선전의 자유’에 입각하여 불교를 폄하하고 봉건잔재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2년판에서는 이 글 〈표-1〉(375쪽)에서 정리한 1992년 북한헌법의 규정처럼, 제한적이기는 하나 종교 건물의 신축이나 종교의식을 인정하는 ‘신앙의 자유’에 입각해 보다 객관적으로 재정의되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말대사전》을 살펴보자. 남북 간 불교교류가 없었던 1982년판에서는 불교에 관해 “현실세계에서의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여야 한다는 노예적인 굴종사상과 무저항주의를 설교하는 데 있다…… 봉건지배계급의 사상적 지배도구로 리용되면서 인민대중의 계급의식과 투쟁의식을 마비시키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과학발전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다”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북교류가 시작된 1990년대 들어와 불교에 대한 사전적 정의도 바뀌었다. 1992년판 《조선말대사전》에는 “인간을 고뇌에서 해방하며 자비심을 베푸는 것을 리념으로 하고 속세를 떠나 도를 잘 닦으면 극락세계에 이른다고 설교한다”라고 하여 객관적인 서술로 바뀐 것이다.

불교 관련 《조선말대사전》의 개념 변화는 북한 당국의 불교 인식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2년판의 정의는 1972년 헌법에서 규정한 ‘반(反)종교선전의 자유’에 입각하여 불교를 폄하하고 봉건잔재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2년판에서는 이 글 〈표-1〉에서 정리한 1992년 북한헌법의 규정을 따라서, 제한적이기는 하나 종교건물의 신축이나 종교의식을 인정하는 ‘신앙의 자유’에 근거를 두어 재정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의 변화 말고도, 북한불교의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 북한 당국의 불교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남한불교와 비교해 보았을 때 북한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취처육식(娶妻肉食)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북한불교의 모습은 말 그대로 일본강점기 불교의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보다도 더 철저하게 일제청산을 내걸었던 북한에서 어찌하여 일본강점기 불교의 잔재가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북한 당국의 불교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북한불교 내의 일제잔재를 문제 삼기보다 북한불교 그 자체를 봉건잔재로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한 당국은 해방 이후 북한불교를 불교 교단 내부의 정화 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차원에서 반봉건 인민민주주의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 때문에 북한불교 내부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려 하기보다 아예 북한불교 자체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3. 인민민주주의개혁기 북한의 종교정책과 북한불교

1) 북한의 인민민주주의개혁과 종교정책

8·15 해방 뒤 북한 지역에서 인민정권이 수립된 뒤, 북한정권은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맨 처음 취한 정책은 토지개혁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표방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원칙 아래 시행된 남한의 농지개혁보다 철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한국전쟁 동안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급제가 도입되었고, 1957년 11월 ‘내각결정 96호 및 102호’에 의해 협동농장원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다.

북한 당국은 명분상으로만 종교를 허용했을 뿐 토지개혁과 노동정책을 통한 직접적인 탄압과 행정적인 간섭을 심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종교 개입정책을 시행하였다. 북한의 초기 종교정책은 인민정권의 수립과 대남 체제경쟁에 대비한 통일전선의 차원에서 접근되었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초기에 종교가 이념투쟁과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반혁명적 요소로서 제거의 대상이라고 간주했지만, 당시까지 북한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종교세력을 무작정 배척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할 수 있는 종교인들을 통일전선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북한의 초기 종교정책은 김일성 자신의 정권을 공고화하고 반제 반봉건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필요성과 이용가치에 따라 선별적인 종교정책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정권수립의 초기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종교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북한정권이 안정화되면서 점차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8년 9월 정부수립 이후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철저히 통제해 왔다. 어느 나라든지 기존에 시행된 정책들을 성문화한 것이 헌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의 제헌헌법은 북한의 종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북한헌법(1948.9.9.)’ 제2장 14조에서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1950년 3월 3일 북한 당국은 형법을 제정하면서 종교탄압을 본격화하였다. 1950년 3월 3일 ‘북한형법’은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제257조)고 규정하고 “종교단체에서 행정적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교화노동에 처한다”(제258조)고 규정함으로써 종교를 믿는 자유는 인정하면서도 일체의 성직 활동을 금지시켰다.

2) 토지개혁, 배급제 및 전쟁이 북한불교에 미친 영향

(1) 토지개혁, 배급제 실시와 북한불교

북한 당국의 토지개혁은 북한 종교계의 기반을 뒤흔든 최대의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발효된 ‘토지개혁법령’으로 사찰과 교회의 토지가 몰수당해 북한의 종교는 재기할 수 없는 치명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5일부터 30일까지 26일 동안 실시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1,050,038 정보(町步)의 토지가 무상 몰수되었고, 이 가운데 1.4% 정도인 종교단체 소유의 토지 14,855 정보가 무상으로 몰수당했다.

종교단체 소유토지의 대부분은 사찰 토지이다. ‘토지개혁령’ 제5장 산림 제21조에서 “일본인 지주 및 승원 등의 일체 산림은 몰수한다”고 규정하여 토지뿐만 아니라 사찰이 소유한 산림까지도 몰수당하였다. 농지뿐만 아니라 임야까지 포함된 토지개혁으로 북한사찰의 존립기반이 붕괴되었고, 사찰 재정의 취약은 사찰공동체의 이완을 초래하였다.

당시 북한 당국은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사찰의 토지를 모두 무상으로 몰수하였는데, 석왕사에서만 4,000여 정보의 토지가 몰수당하였고, 보현사, 건봉사, 유점사, 귀주사 등도 많은 토지를 몰수당하였다. 이처럼 대규모의 토지와 산림을 소유했던 북한의 사찰들은 토지개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경제적 기반을 상실했다.
토지개혁으로 인한 사찰 식량의 부족은 스님들의 생존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46년 3월부터 북한 당국이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북한불교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배급제의 실시로 ‘일하지 않고는 먹지 말라’는 원칙에 따라 종교단체의 일정 인원 이상에 대해서는 배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사찰농지가 몰수된 데다가 배급까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찰에 거주하는 많은 북한 스님들이 노역장으로 가거나 머물던 사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식량배급제의 실시로 인해 석왕사에서는 200명이 넘던 스님들이 3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100명 이상의 스님들이 주석(駐錫)하던 보현사, 건봉사, 유점사, 귀주사 등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 밖에 작은 절들은 규모에 따라 5명 이하로 축소 제한되었다. 이와 같이 토지개혁으로 사찰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상태에서 식량배급제까지 실시되자, 많은 스님들은 사찰에서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2) 한국전쟁과 북한불교

이처럼 해방정국에서 북한 당국의 토지개혁과 식량배급제로 인해 북한불교의 재정적, 인적 기반이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사찰운영의 물적 토대가 무너지자 스님들의 사찰 내 거주가 불가능해졌다. 이와 같이 참담한 북한불교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으로 북한불교는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인적, 물적인 피해를 입었다.

북한 지역의 사찰들이 대부분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찰에 군 입대를 기피한 청년들과 공산당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은신하여 투쟁하게 되자, 북한 당국은 사찰에 대한 삼엄한 감시와 강도 높은 탄압을 가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한적으로나마 이루어지던 북한지역의 불교 신행 활동조차도 불가능해졌다.
스님들과 절에 상주하던 신도들은 인민군 또는 인민자위대로 대거 전장에 동원되었다. 1950년 7월 15일 북한의 불교도들은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가 모여 연합회의를 열고 1,300명이 자발적이라는 형식을 취하며 인민자위대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 많은 스님들이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거나 피살되는 비운을 겪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북한 지역의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들이 소실됐다. 해방 직후에 1,793개가 있던 사암 가운데 대부분이 소실되고 현재는 60여 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휴전이 되자 북한 당국은 패전 책임의 일부를 종교인들에게 전가하여 목사와 선교사, 신부를 미제 스파이로 몰아붙여 대숙청을 단행했다. 또 전쟁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불교 승려들을 반동분자로 지목하여 여행과 진학, 장학금 수여, 공직사회 진출 등에 제재를 가했다. 이 조치는 1965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4. 사회주의개혁기 북한의 종교정책과 북한불교

1) 북한의 사회주의개혁과 종교정책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복구·재건과 사회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1957~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1946년의 토지개혁 때 나누어주었던 모든 토지를 협동농장으로 바꾸고 사유재산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북한 당국은 일반주민에 대한 사상검토사업(1958~59)을 전개하면서, 봉건잔재 척결대상으로 종교를 지목하고 종교행위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1950년대 중반 이후 북한사회에서 공식 무대에서 종교단체의 이름이 사라졌다. 조불련은 1965년부터 1971년 사이, 조선그리스도연맹은 1964~1973년 사이, 조선천도교회는 1949~1973년 사이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교단체의 은둔은 1972년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고, 주체사상이 북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확립될 때까지 계속된다.

1972년 12월 27일 북한은 기존 헌법을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하면서 “모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였다. 이처럼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명시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주체사상의 확립 이후, 북한 당국은 이 헌법 조항에 근거하여 기존의 종교들을 북한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개조하기 시작했다.

1972년 9월 북한의 종교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조불련이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뒤를 이어 1974년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조선기독교연맹, 1988년 6월 조선카돌릭협회가 뒤를 이었다. 이처럼 197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 종교단체들이 다시 등장한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 확립과 더불어 남북 당국자 간 대화가 시작되고 국제사회와의 종교교류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하자, 북한 당국은 사찰 및 교회의 건립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팔만대장경 번역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등 다소 유화적인 종교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방세계로부터 북한에 종교자유가 없다는 거센 비난이 제기됨에 따라, 북한 당국이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오히려 대남 통일전선 구축에 남한의 종교단체를 이용하려 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북한불교는 아직까지 ‘북한 내의 반종교선전 강화’라는 실질적 과제와 ‘국제종교단체와의 연대’ ‘남한 및 재외동포 종교인들과의 상층통일전선 구축’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동시적으로 결합시킨 이중적인 종교정책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 당국의 종교정책이 획기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89년 평양 세계청소년축전의 개최이다.

북한 당국은 남한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의 세계청소년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북한 당국이 1989년 평양 세계청소년축전을 준비하면서 종교의 자유에 대해 대대적인 검토에 착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이 평양 세계청소년 축전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국제사회와의 교류·협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양 세계청소년축전은 북한이 기대했던 국제적 이미지 개선에 별다른 성과를 가져다주지도 못한 채,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정낭비를 초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체제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2) 사회주의개혁이 북한불교에 미친 영향

(1) 사회주의체제의 구축 이후 종교활동의 재개

1950년대 중반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던 조선불교도연맹이 1970년대에 들어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2년 9월부터 북한불교계에서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의 임무는 대외사업, 즉 해외 불교계와의 교류나 남한 불교계와의 교류·협력사업이다.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종교단체를 관할하는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제6과가 담당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중앙위원회’라는 이름을 덧붙인 것은 조불련의 역할이 대중조직을 상대로 한 하층 통일전선 사업이 아니라 대남, 대외용 상층 통일전선 사업이기 때문에 중앙부서의 역할만 필요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으로 지방조직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지방 당조직이나 행정조직의 관할 아래에 있어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 뒤에는 이와 같은 통일전선사업을 넘어, 국제사회와의 종교교류 필요성 때문에 종교활동의 허용 폭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1981년 7월에 인도, 스리랑카, 태국 등에 조불련 대표단을 처음으로 파견하였고, 1982년 8월에는 몽골에서 개최된 제6차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에 처음 참가했으며, 1986년 12월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1989년 7월에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최를 계기로 조불련을 비롯한 북한종교계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남북한 불교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2) 남북한 체제경쟁과 북한불교의 재기

1989년의 평양 세계청소년축전의 개최는 북한 당국이 외부세계로 문을 열기 시작하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허용과 종교시설 신축의 주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세계평양축전을 준비하면서 북한 당국은 통역사 양성을 위해 김일성종합대학이나 평양외국어대학 등 어문학계 출신들을 제3세계에 어학연수를 보냈다. 또한 제3세계 청소년들이 평양에 들어와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종교시설들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묘향산 보현사의 복원(1987)과 장충성당(1988), 봉수교회(1988), 칠골교회(1989)와 같은 종교건축물이 신축되었다.

이와 같은 종교 건축물 건립 외에도 본격적인 종교 연구가 시작되었다. 1989년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산하에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이슬람교 등 5개 학과를 설치하였고 그 뒤 정교회 학과가 추가로 신설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양강도 삼수군 중흥사에 승려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북한은 국가 차원에서 종교지도자 양성체제를 마련하였고, 1989년 5월에는 종교차원에서 남북대화와 통일논의 등 대남선전과 국제적 연대성 강화를 위한 창구로서 조선종교인협의회(KCR)가 창립되었다.

북한의 이러한 변화된 종교정책으로 인해, 1986년 12월에 조선불교도연맹이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88년 5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묘향산 보현사에서 북한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석가탄신일 기념법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매년 출가절(음력 2월 8일), 열반절(음력 2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 성도절(음력 12월 8일) 등 불교의 4대 명절에 맞춰 기념법회를 공개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1980년 중반부터 2, 3년 간격으로 묘향산 보현사 팔만대장경보관소(1987년), 광법사(1991년), 조불련 청사(1992년), 정릉사(1993년) 등 대규모 건물이 신축되고 사찰을 꾸준히 복원함으로써 북한불교는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어 왔다. 그리고 문화재 보호와 주체 건축이라는 이름 아래 사찰에는 예전 스님들을 전문관리자로 임명했다. 이는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사찰을 스님 출신에게 맡김으로써 종교적 기능을 부분적이나마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에서 타 종교와 다른 북한불교만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5. 남북 교류협력기 북한의 종교정책과 북한불교

1) 남북교류협력과 종교정책

북한의 사회주의헌법(1992.4.9.) 제5장 68조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고 개정되었다. 그 결과 1992년 4월에 개정된 북한헌법상으로 종교들의 독립성을 다소 보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오늘날 북한에서는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북한의 체제위기를 반영하여 외세와 결탁하거나 체제도전 세력으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견제당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조항은 1998년 9월에 제정된 북한헌법에서 “누구든지”라는 단어 하나만 삭제되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있으며, 2009년 4월의 헌법개정과 2011년 4월의 헌법 일부 수정 때도 이 조항은 바뀌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1992년 사회주의헌법 제정 이후 북한 당국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와 종교교류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종교단체들의 대외교류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외국종교단체나 국제원조기구의 상대 역할을 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특히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식량난 등 체제위기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대내적으로 북한주민들의 종교활동에 대해 계속 억압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다양한 외국 종교단체와 접촉하여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과 인도적 지원을 확대시키는 일종의 ‘외화벌이’ 수단으로 종교를 활용하고 있다.

최근 북한인권정보센터가 수집한 시기별 종교탄압의 사례를 보면, 한국전쟁 시기와 1950~60년대 사이에는 종교탄압의 사례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교류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부터 북한 당국에 의한 종교탄압이 크게 늘어났다. 이것은 중국에서 종교를 접했던 탈북자들이 귀국 후 종교생활을 계속하거나, 남북한 교류협력이 북한주민의 종교활동을 크게 촉발시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 남북교류협력이 북한불교에 미친 영향

(1) 남북 교류·협력의 활성화와 남북불교의 교류

남북한 간의 종교교류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이 식량난에 봉착하면서 종교계의 인도적 지원을 계기로 본격화하였다. 남북한 종교 교류의 건수를 보면, 1990년 2건, 1991년 13건, 1992년 7건, 1993년 1건, 1994년 4건이었으나 1995년 북한의 수재와 관련하여 인도적인 지원이 실시되면서 1995년에는 12건으로 늘었다. 특히 1995년 5월 조불련 측이 북한 지역의 홍수피해 상황을 남한불교계에 공식으로 알려옴에 따라 북한수재돕민돕기 범종단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본격적으로 종교계의 대북 지원이 시작되었다.

남한불교계는 일찍이 북한불교계와 교류를 해왔던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 외에 한국JTS,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불교운동본부(‘좋은 벗들’로 개명), 북녘동포돕기불교추진위원회(민족화합불교추진위로 개명)가 잇달아 창립되어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서고, 조계종 총무원도 직접 나서 조불련에 지정 기탁하는 방식으로 식량, 의약품, 생활용품 등 지원사업을 전개하였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종교교류의 횟수도 1998년 35건, 1999년 20건,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던 2000년에는 21건으로 크게 늘었다. 2001년에는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등장에 영향을 받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북 간 종교교류는 9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2002년 하반기 이후 남북교류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종교별로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이 재개되었다. 이 같은 남북종교 간의 교류와 협력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불교계에서는 2000년 6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운동본부(민추본)이 창립되어 본격적인 남북불교 간의 교류·협력에 나섰다. 2002년 이후 남북불교 간의 교류는 기존의 대북 인도적 식량지원에 더해 신계사, 영통사 복원불사, 불교문화재 공동 조사·발굴 및 복원, 59개 사찰에 대한 단청불사 지원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그 밖에도 남과 북에서 각각 남북불교도 동시법회를 열거나 서울, 평양에서 남북불교도가 한자리에 모여 합동법회를 개최하고,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2003년과 2004년에 시작된 북한사찰의 복원불사는 2005년 10월에 개성 영통사, 2007년 10월에 금강산 신계사의 낙성식을 각각 가졌다. 복원된 북한 사찰의 운영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이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조계종 측은 남북한 스님의 공동상주 및 공동운영을 북측에 요구했지만, 조불련 측이 끝내 공동상주 및 공동운영 방안을 거부하였다. 만약 남한 스님들이 북한 지역에 상주하며 북한 스님들과 신계사를 공동운영할 수 있었다면, 불교통합뿐만 아니라 남북통합 과정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 남북공동 낙성식(2007년 10월 13일, 금강산).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남북불교 간의 교류·협력사업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9년 8월 31일 중국 선양에서 남한 7대 종단의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와 조선종교인협의회(KCR)가 남북 종교 간 교류의 활성화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여기서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을 포함해 금강산 평화기도회와 음악회 등이 협의되었다. 이와 같은 남북종교 간의 합의에 따라 2010년 1월 30일~2월 2일 사이에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을 단장으로 하는 남한불교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조계종 방문단은 조불련 측과 3개항 합의와 6개 사업에 관해 합의를 이루었다.

하지만 2010년 ‘5·24 조치’로 남북관계가 전면 단절되면서 남북불교계의 합의가 이행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2011년 9월에는 남한불교대표단 일행이 ‘5·24 조치’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등, 한국불교계가 분단된 남북한에 다리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 김정은 체제의 등장과 북한불교

2012년 4월 김정은 체제의 공식 출범 이후 북한 불교계에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북측 조불련은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앞으로 팩스를 보내, 조불련 중앙위위원장의 교체를 공식적으로 알려왔다. 이에 따르면, 2012년 11월 19일 중앙위원회 17기 4차 전원회의에서 위원장이던 심상진 대선사를 신병관계로 조불련 부위원장으로, 강수린 상무위원을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으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신임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지난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2006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2007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실무회담 대표단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 있다. 강수린 신임 위원장은 조불련 중앙위원회 상무위원과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위원을 맡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지 1년이 갓 넘은 시점에서 불교정책의 변화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뒤에도 종교자유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USCIRF의 보고서는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2013년 1월까지 북한 내 인권과 종교자유 상황에 아무런 개선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북한 당국이 모든 종교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김씨 일가를 사이비 종교처럼 극단적으로 우상화시키며 숭배를 강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6. 맺음말

해방 직후 북한불교는 남한불교보다 훨씬 엄혹한 정치사회적 환경에 처해 있었다. 북한 당국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불교가 갖고 있던 농지와 산림의 거의 대부분을 몰수당했을 뿐 아니라, 식량배급제의 실시로 사찰의 물질적 기반이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으로 북한지역에 있던 사찰 대부분이 파괴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 당국의 사회주의적인 종교개조작업은 결과적으로 북한불교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하였다. 북한 당국은 불교를 봉건잔재로 간주했기 때문에 북한불교 내의 일제잔재를 청산하기보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아예 북한불교 자체를 없애려고 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1970년대 들어와 북한불교가 재기했을 때 그 내부에 일본불교의 잔재를 온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북한불교의 현재 모습이 모두 일본불교의 잔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날 북한의 스님들이 사찰에서 가정생활을 하지 않고 사하촌에서 가정을 꾸리고 출퇴근한다는 점에서, 같은 대처승 제도라고 해도 북한불교는 일본강점기의 불교와 차이가 난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60세 이전까지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스님의 부인들도 모두 직장생활을 하는 점도 일본강점기 불교의 잔재라기보다 사회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북한불교를 대표하고 있는 기구는 조선불교도연맹이다. 조선불교도연맹은 반관반종(半官半宗)의 성격으로 띠고 있으며 북한지역의 60여 개 사찰 가운데 20여 곳만을 관장하고 있다. 또한 주지 임명권과 사찰의 재산권은 조선로동당이 행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북한불교의 처지는 일본강점기의 ‘사찰령’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북한불교가 남한불교와도 많은 차이가 나고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북불교의 차이점이나 북한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조불련이 비록 조선로동당의 외곽 단체로 출발했지만 남한의 종단과 같은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북한스님들이 처음엔 당원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매일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불경을 읽고 염불을 외는 등 적어도 겉으로는 남한 스님들과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

오늘날 북한의 불교를 바라볼 때,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만 집착한다면 올바른 인식과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북한불교는 남북교류협력시기 이후 진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미래의 관점을 통해 북한불교의 성격을 올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공대 화공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불교 관련 논문으로 〈불교사상과 국제평화주의〉 〈통일운동에서 불교의 역할〉 〈남북불교의 통합전략과 추진 과제〉 〈북한불교의 특징과 성격〉 등이 있다.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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