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지음 《원효의 십문화쟁론》

박태원 지음
《원효의 십문화쟁론》
원효(617~686)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연구했고 특정한 한 종파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사상의 핵심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일심과 화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마음과 더불어 원효사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져 온 것이 그의 화쟁이다. 9세기 초에 세워진 고선사 서당화상비에서도 그의 여러 저술 가운데 특히 화쟁에 관한 대표적 저술인 《십문화쟁론》을 언급하고 그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신라 당시부터 원효의 사상적 특색으로 화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화쟁이 원효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특색이라고 더욱 중요하게 인정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원효는 고려 문종 때에 화쟁국사(또는 화정국사)라는 호를 추증받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을 화쟁에서 찾은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특히 선과 교의 대립이 심하여 이의 화해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였다. 이에 따라 특히 원효의 화쟁이 높이 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사상적 특색을 화쟁으로 대표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화쟁이 원효의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그 자체로서 본격적으로 많이 연구된 것 같지는 않고 원효와 가까운 시기보다는 좀 더 후대에 원효의 화쟁이 주목받는 것은 사실이다.
원효의 화쟁을 대표하는 저술이 《십문화쟁론》임은 고선사 서당화상비 등을 통해서 일찍이 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십문화쟁론》은 한동안 잊혀 있었다. 그 저술이 제대로 전해져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대의 다른 사람들의 저술에 인용된 것 등을 통하여 그 내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 해인사 판각 중에서 《십문화쟁론》의 일부가 발견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목판 4장에 불과한 것이어서 전체적인 내용을 알기에는 상당히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척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앞뒤 문맥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다 보니 전체적인 번역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부 번역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이제 원효의 《십문화쟁론》 전문을 번역 해설하고 원효의 화쟁의 철학에 대해서 논한 박태원 교수의 저술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나왔다. 원효 화쟁 연구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실적이 될 것이다. 박태원 교수는 이 저술에서 제1장에서는 원효의 화쟁에 대해서 개관하고 제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십문화쟁론》 전문을 직역과 의역으로 번역한 다음, 제3장에서는 《십문화쟁론》을 단락별로 그 뜻을 풀이하고 화쟁사상에 대하여 해설하였다. 그런 다음 제4장에서는 “견해의 배타적 주장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화쟁 논법과 쟁론의 치유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논할 때 먼저 화쟁의 대상과 목적을 확실하게 말하여야 할 것이다. 화쟁의 대상이 무엇인가가 먼저 문제이겠다. 다양한 이론들이라는 주장도 있고 쟁론이라는 주장도 있다. 화쟁의 목표가 다양한 이론들을 화해하고 종합한다는 의미에서 화쟁의 쟁(諍)을 꼭 다툼이라고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자신의 견해에 집착해서 자신의 이론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생각하여 다툰다는 의미가 쟁의 일차적인 의미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태원 교수는 그것을 정확하게 잘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쟁의 대상은 ‘불교이론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로 인해 생겨난 배타적 대립과 불화 및 상호불통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화쟁 이론의 성격은 ‘화해이론으로서의 종합주의’라기보다는 ‘통섭이론으로서 화회주의’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화쟁 이론은 ‘불교 내부의 배타적 이론 다툼과 불화를 해소하려는’ 측면도 있고, ‘경전상의 상이한 이론들을 모순 없이 이해시키려는’ 측면도 있는데 이 두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한다. 즉 차이들이 서로를 향해 열리고, 상호 지지하며 포섭되어, 차이를 안으면서도 더 높고 온전한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화쟁사상이라는 점에서, 화쟁 이론의 성격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태원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화쟁은 불교 내부의 배타적 이론 다툼과 불화의 해소라는 측면과 더불어 경전 내용의 상함을 모순 없이 이해시키려는 측면이 있다. 원효는 《열반종요》에서는 그것을 화쟁과 회통이라는 말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론들이 다투는 것에 대해서는 쟁론을 화해시킨다고 하여 화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열반문의 사덕문(四德門) 중 화상쟁론(和相諍論) 부분), 뜻은 같은데 글이 다르거나 글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들은 통하게 해준다고 하여 회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불성문(佛性門) 제6 회통문(會通門)).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려면 둘이 다 옳다고 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둘이 다 그르다고 하여야 하는가?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여야 다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견해를 모두 인정하고 살려주는 것 못지않게 부정되는 측면이 중요하다. 원효의 화쟁은 다양한 견해를 그저 긍정하는 단순한 절충이나 종합이 아니다. 다툼의 해소를 위해서는 뼈아픈 자기부정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화쟁의 또 다른 한 측면은 경전상의 상이한 이론들을 모순 없이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부정의 방법은 동원되지 않는다. 경전 말씀이 틀린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잘 이해하느냐가 문제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어서 서로 싸우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고 그 싸움을 화해시킨다는 것이 화쟁의 첫 번째 의미라면 왜 화해를 시켜야 하는가가 먼저 문제이겠다. 화해를 시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여 싸우는 것 자체가 부처의 근본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기 때문에 단정하게 되고 자신의 견해에 집착해서 다툰다는 것이 원효의 주장이다. 다툼을 없앤다는 것은 그래서 번뇌와 집착을 없애는 과정이기도 하다. 앞뒤 문맥을 잘 알아서 집착을 없앨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집착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쟁이 필요한 것이지 무조건 다툼이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번뇌와 집착이 없어서 다툼이 없어야 한다. 번뇌와 집착이 가득한데도 표면적으로 다툼이 없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싸움은 나쁜 것이고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꼭 다툼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다툼보다도 나쁜 평화가 있을 수 있다. 불만이 많이 있는데도 억지로 참아서 유지되는 평화는 좋지 않은 평화이다. 스스로의 불만을 내세워서 말하고 그것을 서로 알게 될 때 갈등이 해소되고 더 나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부싸움의 경우 전혀 하지 않는 것이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한다.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불만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수 있고 그래서 싸움이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상대의 불만이나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그냥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쟁도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화쟁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의 자재라는 것이 원효 화쟁의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고 원효는 쟁론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말도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처의 참된 뜻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화쟁이다.
박태원 교수는 2장과 3장에서 《십문화쟁론》의 현존 부분에 대하여 번역과 해설을 하고 있다. 화쟁이 원효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특색의 하나이고 《십문화쟁론》이 원효의 화쟁에 대한 대표적인 저술이지만 현존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고 앞뒤 연결도 잘 안 되어서 제대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랬다. 번역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이제 완전한 번역과 해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번역은 일단 직역을 하고 다음에 의역을 하고 다시 좀 더 자세히 풀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번역은 비교적 정확하고 그것을 자세히 음미하여 번역하려는 시도는 기존에 없던 것으로 《십문화쟁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해준다. 다만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십문화쟁론》의 현존 부분은 공유화쟁과 불성유무화쟁이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저자는 그 내용을 음미하며 자세한 해설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좀 부족한 것이 눈에 띈다. 먼저 인용 문헌의 출전을 밝히는 문제이다. 요즈음은 번역에서 출전을 밝히는 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저자는 자세한 번역을 시도하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노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 같다. 공유화쟁의 부분에서는 《금고경(金鼓經)》 《대혜도경(大慧度經)》 《중관론(中觀論)》 《유가론(瑜伽論)》 등이 인용되고 있고, 불성유무화쟁 부분에서는 《열반경(涅槃經)》 《현양론(顯揚論)》 등이 인용되고 있다. 이 인용 부분의 출전을 찾아서 밝히면 정확한 이해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십문화쟁론》의 공유화쟁과 불성유무화쟁을 번역 해설하면서 원효의 여타 저술에 나와 있는 그 문제에 대한 논의를 소개했으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으리라는 점이다. 공유화쟁의 문제는 《무량수경종요》나 《대승기신론별기》에 그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고 불성유무의 문제는 《열반경종요》에 그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풍부하다. 그런 것들도 함께 소개하면서 논의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제4장에서는 화쟁 논법과 쟁론의 치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화쟁사상을 사회적으로 구현시켜보자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시도이고 필요한 시도이기도 하다. 원효의 화쟁이 불교 내부의 이론에 한정되어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그 근본정신은 확대 적용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에서 한두 가지 지적하자면 먼저 십문화쟁론의 십문을 화쟁의 대상이 아니라 화쟁의 방식으로 보고 싶다는 필자의 주장은 상당히 새로운 주장이긴 하지만 근거가 충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은 일단은 구별하는 이름이다. 불교문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원효의 저술에서도 다양한 용례가 있다. 원효의 화쟁에서 ‘문’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은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십문화쟁론》의 문이 의지문(依持門) 연기문(緣起門)의 문이나 종인생기지문(從因生起之門) 식연귀원지문(息緣歸原之門)의 문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당장 현존하는 《십문화쟁론》에서 그런 종류의 문이 등장하지 않는다. 열 가지 부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 《십문화쟁론》의 열 가지 문 중 첫째 문이 공유화쟁이라고 말하는 저술도 있다(이 책, 232쪽 참조).
둘째 화쟁 논법에서 화쟁은 한편으로 여러 견해를 긍정적으로 살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논파하는 것이기도 하다. 견해를 조건문으로 읽는다는 것이 긍정뿐 아니라 부정까지도 함축하고 있다는 측면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화쟁을 무조건적인 절충주의 긍정주의로 보는 관점이 있기에 부정의 계기가 더욱 충분히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부록에서 타인의 저술에 인용되어 전하는 《십문화쟁론》 내용을 종합하여 번역 소개하고 있고 《십문화쟁론》에 대한 인식 및 평가하는 저술 내용들도 번역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원효의 전기 자료를 번역 소개하고 있다. 모두 유용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이 소개된 자료 중에 한 가지는 더 확인해야 할 것 같다. 230쪽의 “《십문화쟁론》에 대한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의 극찬(《종경록(宗鏡錄)》)”의 내용에 대해서이다. 먼저 《종경록》은 규봉종밀의 저작이 아니라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저작이다. 그리고 《종경록》의 이 부분에 나오는 “화쟁론(和諍論)”이라는 말은 원효의 《십문화쟁론》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쟁론을 화해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 맥락을 볼 때 책 제목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최유진 
경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주요 저서로 《원효사상연구》 《강좌 한국철학》(공저)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