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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불교윤리학 / 이슬비
-O. Flanagan의 논의를 중심으로
[55호] 2013년 09월 01일 (일) 이슬비 dewrain21@naver.com

1. 불교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믿음

글을 시작하기 전 자문(自問)해본다. 나에게 불교(佛敎)란 무엇인가? 필자에게 불교는 신앙적 믿음을 전제로 하는 엄밀한 의미의 종교(Religion)는 아니다. 필자는 종교적 의미의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학문적 의미의 불교 신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에게 불교는 하나의 체계적이고 거대한 담론으로서 그 안에 유한한 인간의 삶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학문적 탐구와 믿음의 대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불교는 비록 엄밀한 의미의 종교적 믿음의 대상은 아닐지라도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을 점유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제적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실천철학 또는 삶의 양식으로서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새로운 믿음은 이미 서구에서는 불교를 바라보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작년 우리 사회를 움직였던 키워드였을 뿐만 아니라 그 열풍이 여전히 한창 진행 중인 소위 힐링(healing)과 치유의 중심에 바로 불교의 명상과 참선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웅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불상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소위 ‘템플스테이(temple stay)’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동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교에 대한 새로운 믿음 즉 실천철학이나 삶의 양식에 대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일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버리고 일정 부분 종교에서 멀어져 버린 소위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라는 맥락에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일시적인 사회현상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정당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정당화 작업은 불교 외부에서가 아니라 불교 내부에서 제시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물론 ‘불교’ 그 자체에 토대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믿음은 아닐지라도 다른 맥락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교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고 그것은 당연히 불교에 대한 믿음의 일부이기에 불교 자체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가 가능할 때 새로운 형태의 믿음으로서 불교는 지나친 세속화라는 비판을 견뎌내고 불교 자체에서 기반을 두고 그 의미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믿음에 대한 정당화 가능성을 윤리학적 차원에서 보여주는 반가운 주장이 있다. 오웬 플래나간(Owen Flanagan)이 제안하는 ‘자연화된 불교(naturalized bud-dhism)’는 모든 종파의 불교가 인정할 수 있는 초기불교의 교리뿐만 아니라 현대 인식론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통해 상당한 체계성과 막강한 경험과학적 근거를 가진 불교이론으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믿음에 대한 정당화의 가능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불교윤리학의 가능성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자연주의와 불교

현대 철학에서 ‘자연주의(naturalism)’는 그다지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은 실재(reality)는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 자연(nature)에 의해 규명될 뿐이고 과학적 방법은 ‘인간 정신’을 포함한 실재의 모든 영역을 탐구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한,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본래 자연주의의 철학적 의미는 “세계와 이에 관련된 인간의 관점으로 오직 자연적(초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반대로서) 규칙과 자연적 힘만을 인정하거나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플래나간은 다양한 종류의 자연주의가 있지만 이러한 자연주의들을 관통하는 핵심 명제는 ‘초자연주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플래나간은 흄(David Hume)을 자연주의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칭하였다. 자연주의는 인간에 관한 모든 탐구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며, 나아가 과학적 설명의 범위를 벗어난 그 어떠한 실재나 사건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를 명백히 거부한다. 즉 자연주의는 존재론적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존재론적 자연주의와 이러한 자연적 존재의 실재성과 자연성을 과학적^경험적 방법을 통해 규명하려는 철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 존재론적 자연주의와 방법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자연주의라는 자연주의의 분류를 통해 플래나간은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한 존재론적 자연주의의 입장과 불교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경험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탐구하는 인식론적^방법론적 자연주의를 통해 불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과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불교가 수많은 초자연적인 형이상학적 요소들(대표적으로 열반, 환생, 업 그리고 다시 육체를 받아 환생한 라마승의 문제들)을 갖고 있음에도 자연주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불교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형이상학적 전제 없이도 흥미롭고 자연주의적으로 충분히 방어 가능한 철학이 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는가에 관한 인식론임 동시에, 덕과 악덕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윤리학 이론이기 때문에 분석철학자나 과학적 자연주의자들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포괄적인 철학으로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인간적 곤경과 본성, 번영의 문제를 심오하면서도 경험에 근거한 상식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자연주의적이고 초월적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자연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접근해 자연주의로 해석한 불교가 바로 자연화된 불교 또는 불교의 자연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화된 불교는 과학적 자연주의자와 분석 철학자들의 흥미로운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고 의미 있는 삶인지 논의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 위에 남아 있는 위대한 영적 전통들 속에서 유교를 제쳐 두고 불교를 자연화하는 것은 불교가 물리적 세계 속에서 유한한 물질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도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인간의 상황에 대해 꽤 자연주의적이고 흥미로우면서도 유용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3. 자연화된 불교의 규범적 지향점
 
플래나간은 비교철학의 관점에서 불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나 ‘번영’ 또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의 개념을 비교하여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라는 개념을 인간 삶의 공통적 지향점이자 규범적 지향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차원의 제시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살’을 그 구체적인 인간상이자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하나의 규범적 지향점으로서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는 규범적인 이론과 깨달음 또는 덕이나 좋음, 마음챙김의 실천 철학으로 이해되는 불교 철학에 대한 헌신과 실천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가 인습적인 덕들을 실천하고 무상한 변화의 일부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며,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실천적인 명상까지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다른 목적을 그 자체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에우다이모니아(행복, eudaimonia)”, 문자 그대로 “정신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에우다이모니아 즉, 행복을 철학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정당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규범적 개념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덕에 의한 실천적인 삶이 요구된다. 행복이란 단어와 가장 유사한 불교의 용어는 ‘dukkha(고통)’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sukkha(즐거움)’이다.
이러한 비교에 대해서 불교적 즐거움이 행복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뿐만 아니라, 불교는 본질적으로 행복이나 즐거움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출발점으로 하는 철학이자 종교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플래나간은 ‘인간의 삶과 행복 그리고 덕의 관계’라는 기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불교의 행복을 비교하고 이를 통하여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는 상태로 규정한다.

첫째,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는 평온과 만족의 안정된 감각이다. 물론 이것은 서구인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행복인 행복과 즐거움에 겨워하는 것처럼 구두의 양 뒤꿈치를 붙여 딱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일대일로 맞아떨어지는 감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첫 번째 측면과 같은 평온과 만족스러운 상태가 불교 철학의 핵심인 깨달음이나 지혜, 덕과 선, 명상과 마음챙김을 통해 야기되거나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 조건은 붓다적 잘삶의 한 부분으로서 ‘행복’이라는 주관적 측면을 상술한 것이고, 두 번째 조건은 삶의 형식의 방향 또는 그 형식의 측면의 원인이 행복한 상태를 가져오는지, 다시 말해 붓다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것이다. 즉 첫 번째는 어떤 종류의 불교적인 정신상태가 무엇을 제공하는가를 조건으로 지정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정신상태가 지혜와 덕, 마음챙김,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라는 삶의 형식에 의해 야기되는 것을 붓다적인 행복이라고 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화된 불교의 규범적 지향점으로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는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과도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특성으로 탐·진·치의 삼독의 제시하는데 그러한 삼독이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의 달성을 도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약화시키는 수 있는 많은 심리적 방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삼독은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고 한 인간의 존재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으로, 삼독을 절제하고, 조정하고, 제거하는 것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플래나간은 불교를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여 자연화된 불교를 고유한 종류의 잘삶과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체화된 철학으로 본래의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과잉된 불교를 대신해 내세우려고 한다고 밝힌다. 또한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불교를 비교해 그는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삶의 의미 있는 상태로 찾아내고 이를 자연주의적 연구 성과들을 통하여 검증하고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규범적인 목적으로 삼고 이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포함하고 있는 ‘자연화된 불교’를 제시하고 있다.


4. 자연화된 불교의 3가지 구성요소

플래나간이 비교철학적 관점을 통해 규범적 지향점이자 인간 삶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는 단순한 이론적 지향점이 아니라 규범적인 이론과 깨달음 또는 덕이나 좋음, 마음챙김의 실천 철학으로 이해되는 불교 철학에 대한 헌신과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 플래나간의 관점에 따른다면 불교는 깨달음과 지혜, 덕과 선량함, 명상과 마음챙김의 세 가지 요소가 보살의 삶 같은 탁월한 붓다적 삶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는 마치 서로가 있어야만 그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세 겹으로 이루어진 끈이나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맞물린 세 개의 톱니바퀴와도 같다.
깨달음과 지혜, 덕과 선량함, 명상과 마음챙김은 붓다적으로 에우다이모니아로부터 요구되는 단순한 흥미로운 의미론적 조건이 아니라 2,500여 년 동안 발전해온 광대한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플래나간은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이 어떻게 규범성의 토대가 되는지 그리고 불교가 어떻게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실재성을 탐구하고 있는가를 자신의 ‘최소한의 심리적 실재론(The Principle of Minimal Psychological Realism)’에 기초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실재성으로 탐·진·치라는 삼독(三毒)을 제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 안에 깨달음과 덕, 명상이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고 이를 통해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는 단순한 의미의 행복이 아니라 지혜를 달성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난 행복이거나,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하는 일반적인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더 나아가 모든 유정적 존재를 향한 깊은 자비와 연민을 스스로의 삶에서 찾아감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다. 이처럼 자연화된 불교의 규범적 지향점으로서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구성하는 구성요소이자 하나의 이론으로서 자연화된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깨달음과 덕 그리고 명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깨달음과 지혜이다. 이것은 불교의 형이상학적 통찰의 핵심을 이루는데 불교적인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이해하는 일을 포함한다. ①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無常). ②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영원한 자신, 자아 또는 영혼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어떤 변화하는 심리적 연속성과 연기성에 의해 구성된 일시적인 존재로서 무아(無我)이다. ③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사물의 모든 상태는 되어가는 중이고 총체적인 연기성 속에서만 형성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緣起). ④ 대승불교는 깨달음과 지혜의 부가적인 구성요소로 모든 것들은 본질적이거나 불변하는 본질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공(空)을 추가했다. 이처럼 불교적 지혜의 핵심은 무상, 무아, 연기성, 공이다. 이러한 것들은 불교의 모든 종파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타마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들이다. 플래나간은 이러한 불교적 지혜의 내용이 자연주의적 사유와 충분히 맞닿아 있으며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과잉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불교는 거기에 무엇이 있든지 모든 것을 사건과 과정의 연속으로 바라본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무상), 영원하지 않은 것 가운데에는 나도 있다(무아). 모든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앞선 사건과 과정이라는 원인에 의한 것이고, 이것은 다시 최초의 것에 의존하는 다른 사건과 과정을 생기게 한다. 불교적 지혜는 모든 것이 생성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연기적 관계의 심원이 어딘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분석적인 해체에 의해서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선(禪)과 같은 것이 그 심원으로(空) 이끌 것이라는 인식이 불교적 지혜의 핵심 내용이다. 불교는 만약 누군가 자신의 뼛속까지 이러한 불교적 지혜를 받아들이고 자애심과 이타심 같은 특징적인 불교적 탁월함을 의식적이고 지속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줄이고 평온과 만족이 가져다주는 삶의 형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둘째, 덕과 선량함이다. 불교적 덕과 선량함은 도덕적 행위(戒)를 요구하고 이것은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 십선업(十善業), 사무량심(四無量心)과 같은 불교적 덕을 의미한다. 진정한 덕은 물론 도덕적 행위 이상을 요구하는데, 플래나간이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이룬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한 보살은 탐·진·치라는 삼독을 극복하고 스스로 한량없는 중생에게 갖는 4개의 마음인 동정심과 자애심, 기뻐하는 마음, 평등하게 보려는 마음이라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체화한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체화된 덕과 선량함은 무상, 무아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셋째, 명상과 마음챙김이다. 명상과 마음챙김이라는 구성요소는 우선 덕과 선량함에 대한 경험의 일반적인 기원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기법들을 포함한다.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 즉, 일인칭적인 경험에 주목하는 방법을 안다. 예를 들어, 위빠사나의 발우 공양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음식의 맛과 질감, 그리고 먹는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이다. 자기 자신의 호흡과 마음가짐, 정신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인지적인 자기, 즉 앎이라기보다는 체화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교적 지혜에 대한 일인칭적인 확인과 입증을 제공해준다. 모든 감각과 인식, 생각은 영원하지 않고 나 역시도 영원하지 않다. 결국 수행은 도덕적 통찰과 훈련을 위하여 활용된다. 이처럼 명상적인 수행은 세 개의 줄로 이루어진 감정과도 같은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한다. 우선 명상은 지혜와 덕에 대한 헌신을 정당화해주는데, 예를 들어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지나친 자기중심성이나 이기주의를 극복하도록 하는 수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고통을 덜어내고자 하는 누군가의 바람(요구)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깨닫도록 함으로써 무상을 드러내준다. 이와 같은 지혜와 덕, 마음챙김은 한 가지 현상에 대한 세 가지 측면의 분석적인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래나간은 이 세 가지를 세 겹으로 이루어진 끈이나 하나의 목적으로 위하여 맞물려 있는 세 개의 톱니바퀴처럼 불가분적인 상호의존적 관계로 설명하였고,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불교의 이론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다섯 수행자에게 설한 사성제(四聖諦)를 제시하였다.
삶의 본성에 대한 첫 번째 관점으로서 고성제(苦聖諦)는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고성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술된다.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거나 고통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사건, 경험, 일출이나 일몰 같은 우연적 사건들이 믿기 어렵기 때문에 만족스럽고 그렇지 못한 것은 불행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는 수많은 고통과 불만족스러움이 있고 그런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좋은 경험도 영원한 만족스러움으로 남지 않는다. 만개한 장미가 시들었을 때처럼 즐거움의 원인이 부질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일상적인 거짓말이나 속임수와 절도는 인간적인 원인을 갖는 고통들이고 쓰나미, 지진 등은 자연적인 원인을 갖는 고통들이다. 우리는 더 나은 행위를 함으로써 인간적인 원인이 되는 상당수의 고통들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의 최종적인 죽음을 포함하는 자연적인 고통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지 않다. 이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물음은 우리를 패배시키는 고통의 순환(samsara, 윤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한 가장 자연주의적인 대답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실의 부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조절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고통도 조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실의 부분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고통의 원인인 우리 자신의 태도와 행위뿐이다.
집성제(集聖諦)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타자들에 대하여 고통의 원이 되는 공유된 인간 본성의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만개한 꽃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라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믿음이나 어리석음(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탐욕이나 열망(貪),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으나 우리는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의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탐욕, 노여움, 분노(塵)라고 한다. 즉 탐·진·치라는 삼독이 인간 본성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멸성제(滅聖諦)는 만약 우리가 탐·진·치라는 세 가지 해로움을 억누르거나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의 본성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한 본성에 기인하고 있는 잘못된 이기적인 믿음과 욕심으로의 경향성, 노여움, 증오 그리고 분노를 향한 경향성 같은 탐·진·치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유사한 것으로 인간 심리학의 보편적 실재성를 묘사하고 있다.
도성제(道聖諦)는 탐·진·치를 무력화하거나 어쩌면 제거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이고 이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다르마, dharma)으로서 가능성을 제시하고 모든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열반, nirvana)을 달성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팔정도는 연마하고 수행해야 하고 결국은 체화되어야 한다. 이처럼 고성제와 집성제의 초점은 고통의 편재성과 고통의 원인인 탐욕, 화냄 그리고 허상에 대한 설명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팔정도를 따르는 기술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淨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팔정도는 해로운 욕구를 소멸시켜주고, 고통으로부터 치유를 제공해준다. 특히 플래나간은 팔정도를 자연화된 불교의 세 가지 축인 지혜와 덕 그리고 마음챙김의 영역으로 분류해 이 세 영역의 불가분적인 상호의존적 관계를 재차 강조하는데 정견과 정사는 지혜에 관련되어 있고, 정어, 정업, 정명은 덕과 관련되어 있으며 정정진, 정념, 정정은 명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자연화된 불교의 통합적 성격

자연화된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적으로 잘산다는 것, 붓다적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인과관계, 무상함과 무아, 연기성, 공과 같은 핵심적인 불교적 지혜를 포함한다. 또한 이것은 팔정도와 사무량심 같은 특정한 덕들에 대한 일상적인 헌신을 포함한다. 이러한 일상적인 헌신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명상과 마음챙김이다. 이와 같이 자연화된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구성요소를 다음과 같은 그림을 통해 구조화해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보여주는 결국 자연화된 불교가 인간에 대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실천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규범적 지향점 또는 이상을 향해가는 일련의 통합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이라는 점이다.
출발점(사실)                                  방법론(실천)                                    지향점(가치, 규범)

첫 번째 덩어리는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을 통해 삼독을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실재성으로 진단하고 있는 자연화된 불교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편적인 심리적 실재성인 삼독으로 인하여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고통 그 자체이다. 불교 최초의 도덕심리학적 저서라고도 볼 수 있는 아비달마(Abhidharma)는 삼독의 감정이 어떻게 인간의 파괴적인 감정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매우 정교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자연화된 불교는 인간의 경험에 가장 충실한 경험적 연구 방법인 철학적 심리학을 통해 고통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사실(fact)’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 인간들의 보편적인 경험적 사실이 출발점이 되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는 의미를 추구하는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의 궁극적 물음이 자연화된 윤리학을 두 번째 덩어리로 이끈다.
두 번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구성요소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상호의존적이고 세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야만 그 기능을 온전히 해낼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지혜’는 무상과 무아, 연기성, 공이 그 핵심인데, 이러한 깨달음의 내용은 불교의 형이상학^존재론^인식론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즉 불교적 지혜는 단순한 종교적 지혜나 교리가 아니라 형이상학^존재론^인식론적 사유의 총합이다. 이처럼 지혜가 불교 철학의 형이상학^존재론^인식론적 사유의 총합이라면 두 번째 구성 요소로서 ‘덕’은 규범 윤리학과 덕 윤리학을 동시에 담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규범 윤리학에서 출발하지만 덕 윤리학을 목표로 삼는다. 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인 동시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천적 규범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규범의 준수라는 규범 윤리학적 관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체화함으로써 심리적 실재성으로서 하나의 덕성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의미까지 확장된다. 플래나간이 구체적인 ‘덕’ 또는 ‘계(戒)’로 제시하는 ‘팔정도(八正道)’나 ‘십선업(十善業)’ 등은 그 자체를 하나의 규범으로서 지키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사무량심(四無量心)’, 자비심, 자애와 같은 불교의 고유한 덕성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내면화되고 체화된 덕성은 인간의 심리적 실재성으로서 도덕적 행위의 동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기법이 바로 마음챙김과 명상이다. 마음챙김과 명상은 불교적 지혜를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덕을 내면화하기 방법 그 자체이다. 또한 두 번째 덩어리는 첫 번째 덩어리에서 제시한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적 사실이 어떻게 세 번째 덩어리의 가치^규범으로 연결되는가를 연결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인간에 대한 심리적 사실이 유한성이라는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국면과 만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물음과 해답에 대한 탐구는 가치^규범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세 번째 덩어리는 자연화된 불교의 규범적 지향점이자 삶의 이상으로서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지혜와 덕 그리고 마음챙김을 통해 삼독을 극복하거나 극복하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은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의 상태에 있게 된다. 플래나간은 자연주의자답게 규범적 지향점 역시 자연화된 방법을 통해 검증한다.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를 이룬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보살을 제시하고 이와 비슷한 상태라고 여겨지는 불교의 수행자들의 뇌를 신경현상학적 방법으로 검증해 그들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세 덩어리의 합으로서 자연화된 불교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나는 무아이고 무상의 존재로 삼독을 그 본성으로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깨닫고 명상과 마음챙김을 통해 그 본성을 억제하는 것이 붓다적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하나의 온전한 윤리학 그 자체이다.
 

6. 불교를 종교로 믿지 않고도 불교적으로 살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플래나간의 ‘자연화된 불교’가 갖는 나름의 강점과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자연화된 불교는 특정한 종교로서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교적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불교 자체에 근거하여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불교를 특정한 종교로서 배척하거나 거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의 온전한 철학이나 윤리학으로서 불교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화하고 있다.
둘째, 자연화된 불교는 자연주의를 통해 기존 불교철학을 체계적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보편윤리로서 불교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실천성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보편윤리의 가능성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박병기 역시 보편윤리로서 불교 계율의 확산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의 오랜 영적 전통 역시 자연주의의 거대한 흐름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주의가 인간 삶의 의미와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와 사실은 이분법적 구분의 대상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두 측면의 설명 방식이다. 퍼트남(H. Putnam)은 이를 가치와 사실의 얽힘이라는 말로 표현하였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로 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연화된 불교는 종파를 초월하여 받아들여지는 고타마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에 의한 불교의 핵심적 교리들에 집중하면서도 이를 자연주의를 통해 체계화함으로써 다른 어떤 영적 전통들보다도 보편윤리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 자연화된 불교는 자연화된 윤리학에 대해 제기되는 여러 비판에 대한 훌륭한 방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화된 불교는 규범적 지향점뿐만 아니라 이에 도달하기 위한 규범적인 내용을 자연주의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연화된 윤리학의 한계를 보완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어떻게 가치^규범의 문제와 이를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미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넷째, 자연화된 불교는 명상을 단순한 정신훈련을 위한 기술이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불교 철학의 맥락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명상에 대한 철학적^자연주의적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요즘 불교의 힐링과 치유로 대표되는 템플스테이는 ‘국민힐링캠프’라는 불린다. 이러한 힐링과 치유의 중심에 바로 불교의 명상과 참선이 서 있다. 즉 종교와 상관없이 불교를 일종의 삶의 방식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미 서양에서는 삶의 방식으로서 불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1980년대부터 꾸준히 증가하여 21세기 초반에는 급증한 상태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유교와 더불어 불교를 하나의 전통 그 자체로 여겨왔던 우리 사회에 이런 현상이 지금에서야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물론 명상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고 이러한 현상이 불교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명상이 가지고 있는 제 기능이 발휘될 수 있고 사람들이 명상을 진정으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명상에 대한 토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데 자연화된 불교가 그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화된 불교는 명상에 집중하면서도 그것이 깨달음과 윤리적 행위 그리고 삶의 의미와 직접 맞닿아 있어야 함을 재차 강조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자로서 플래나간이 탐구한 불교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 윤리학, 가치론, 존재론, 인식론, 형이상학, 도덕 심리학, 현상학, 신경주의 등의 굵직한 논의들이 불교의 자연화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플래나간은 이러한 방대한 논의를 통해 결국 자연화된 불교는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지극히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충분히 인간의 삶의 의미라는 규범적 지향점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적 내용, 즉 불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방편(方便)까지도 제시할 수 있는 실천철학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잘 살아가는 일과 물리적 세계 안에서 유한한 운명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고 또 그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aporia)이자 화두(話頭)이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한 인류의 오랜 시도 끝에 21세기 우리는 서구의 과학적 방법과 동양의 영적 전통이 화해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적이고 반가운 화해의 길목에서 우리는 ‘자연화된 불교’를 만날 수 있다. ■

 

이슬비
한국교원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서원대학교 윤리교육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졸업(석사), 오웬 플래나간의 《보살의 뇌: 자연화된 불교》를 번역했고, 주요 논문으로 〈플래나간의 심리적 실재론과 도덕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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