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나’는 누가 만들었나
어릴 적 연을 자주 만들어 날렸다. 연에는 방패연, 꼬리연, 가오리연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나는 주로 방패연을 만들어 놀기를 좋아했다, 방패연을 만들려면 우선 한지를 구해 직사각형으로 오린 다음 한가운데 바람구멍을 뚫어야 한다. 그런 다음 베어낸 지 오래된 대나무를 다듬어 만든 살을, 구멍을 중심으로 엇갈리게 붙이고 네 귀퉁이에 적절한 비율로 실을 달아 놓으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게 방패연이었다. 이른바 존재의 탄생이었다.
무연한 것들끼리 포개고 얽혀 새롭게 태어나 이름을 얻는 것이 어디 연뿐이랴.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고, 골짜기와 물이 만나 계곡이 되고, 배추와 양념이 만나 김치가 되고, 게와 간장이 만나 서로의 몸속에 스미고 배어 게장이 되고, 생면부지의 너와 내가 만나 운명처럼 한 가족을 이루었듯이 인연이란 무연한 사물과 사물이 만나 관계를 맺고, 맺은 관계가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숙성되는 것이다. 요컨대 인연이란 관계의 발효 같은 것이다.
만든 연을 가지고 사립을 나서 바람 부는 언덕으로 달려가 연을 날렸다. 실패의 실을 풀었다 감았다 바람의 속도를 조율하며 연을 날렸다. 바람이 세게 불면 실을 풀고 바람이 적으면 실패의 실을 감아올려 바람을 만들면서 연을 날렸다. 아무리 그래도 전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연은 오르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곤 하였다. 내가 만든 연이 갓 태어난 새 뿔로 우쭐우쭐 좌왕우왕 천방지축 겁 없이 하늘을 찔러대며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산 너머의 세계를 꿈꾸고는 하였다. 저 산 너머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리라. 또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비밀처럼 존재하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오르던 연도 한순간의 부주의로 혹은 예기치 않은 강풍을 만나 줄을 놓치게 되면 연이 다해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다.
내 생을 다녀간 무수한 인연들을 떠올려본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바로 나를 다녀간 그 무수한 인연들이라 할 수 있다.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사물들과 사람들이 나를 다녀갔다.
부모와 형제와 친인척과 이웃, 해, 달, 별, 물, 불, 공기, 흙, 구름, 바람, 산, 강, 바다, 논, 밭, 언덕, 길, 꽃, 벌레, 새, 나무, 돌, 밥, 옷, 집, 친구, 연인, 학교, 직장, 목욕탕, 노래방, 모텔, 휴대전화, 페이스북, 부동산, 영화, 비디오, 비행기, 기차, 지하철, 노래, 여행지, 장마, 폭설, 이슬, 버섯…….
우주 안에 편재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것들과의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이다. 또 내 여생을 다녀갈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만남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삶이 종착에 이르는 날 내 이상의 추는 진자 속 마돈나와 소돔 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내 생을 다녀갈 미래의 인연들에 달렸다.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부디 좋은 인연들이 나를 다녀가길 기원해본다.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돌멩이와 구두에 대하여
석 달 전 길을 걷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추적해보았다. 걸으면 소리가 들리고 멈추면 소리가 멈추는 게 아무래도 소리의 진원지가 구두 밑창인 것만 같아 구두를 벗어 눈여겨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 언제 뚫렸는지 구두 밑창엔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보이고 그 속에 앉은 작은 돌멩이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들어 왔을까. 나는 돌멩이를 꺼내 길에 놓아주었다. 그 후로도 돌멩이들은 수시로 예의 구멍에 들어와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다가 꺼내져 길로 돌아가곤 하였다.
과연 이들의 동숙은 서로가 간절히 원해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하나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아무려나 이 일은 나와는 별무상관이었기에 크게 괘념하지 않고 나는 다만 꺼내는 일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생각을 고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반복 행위가 우리네 설운 생을 다녀가는 무수한 인연들과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인연이란 큰 테두리 안에서는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의 관계 유무는 개별자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지금의 집사람을 만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내가 다른 여자들을 전전할 때 아내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다가 상경 후 우연히 재야 단체가 주관하던 행사장에 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내 옆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 후 결혼에 이르기까지 나와 아내 간의,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고, 어찌어찌하다가 둘의 개인적인 의지와 결단이 합의점에 이르게 되어 어렵사리 결혼의 성과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돌멩이와 구두와의 인연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들의 인연이 맨 처음에는 인간들의 의지를 넘어선 곳에서 주어지듯이 이들(돌멩이와 구두)의 인연 또한 사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었으리라. 다만 이들은 사람이 아니므로 개별적 존재자로서의 의지와 결단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다. 이런 생각으로 오늘 하루도 먼지처럼 떠돌다 하루만큼 저물어갔다.

3. 싸리나무 꽃에 대하여
십 년 전 유월 어느 날 강원도 정선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나는 보랏빛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가니 산 중턱 못 미쳐 올망졸망 싸리나무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싸리나무는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눈 깜짝할 새에 수십 년 전 고향 집 마당에 내려놓았다. 싸리나무와 칡넝쿨을 베어다가 즉석에서 싸리비를 만들던 시절이 떠오르고 어린 내가 공부나 심부름에 게으를 때마다 손수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오게 해 내 종아리를 파랗게 물들이던 엄니의 매운 회초리가 생각났다. 사립을 나와 훌쩍거리면서 할 수만 있다면 온산을 뒤져서라도 싸리나무란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낭창낭창한 회초리들이 내 맨살에 와서 척척 안기며 먹빛 고통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어찌 훗날 내가 최소한의 사람 노릇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알싸한 향기가 잠자던 후각을 깨워 자극하는 동안 나는 싸리나무 꽃으로 돌아온 죽은 엄니를 보듬기 위해 향기의 치마폭에 안겨들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싸리나무가 나를 밀쳐내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불쑥 회초리를 꺼내 들어 나를 후려치는 게 아닌가. 이놈, 이 게으른 놈, 하시며 이번에는 종아리가 아닌 불룩 나온 아랫배를 사정없이 패대는 것이 아닌가. 아아, 엄니, 내가 잘못했슈.
엄니는 싸리나무로 다시 돌아오셔서 여전히 내 방만한 삶을 나무라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싸리나무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사는 동안 싸리나무와 맺은, 저 질긴 인연을 풀지 못할 것을 나는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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