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스님은 700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당으로 건너갔다. 청년 시절에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으며, 인도에서 돌아온 후 계속 중국에 머물다가 780년을 조금 지나 입적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어서 혜초가 어떠한 일정으로 다섯 천축국을 여행하였는지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대략 광주에서 해로로 먼저 동천축으로 들어가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지나면서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하고, 카슈미르 지방으로 이동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해서 중앙아시아를 경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를 거쳐 4년여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인 비행기로 홍콩을 경유하여 뉴델리에 도착하였다.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바라나시에 도착하였다. 바라나시에서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로 이동하여 영불탑, 녹야원 등을 돌아보며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들에게 불법을 전한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기쁨과 함께 퇴락한 모습이 매우 안쓰러웠다. 바라나시에 돌아와 시장을 돌아보았는데 마구 돌아다니는 소와 개들의 분뇨들, 방치한 그것을 먹기 위해 모여든 파리떼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특히 장작을 쌓아놓고 시신을 그 위에 놓고 화장을 하는 모습에 일행 중 한 분은 실신하고 말았다. 밤에는 갠지스 강가에서 힌두교 의식을 참관하였다. 반복적으로 의식을 진행하며, 특히 불을 많이 활용하여 배화교의 의례를 상당히 수용한 것 같았다.  
다음날 보드가야로 이동하여 부처님이 성도하신 마하보디 사원에서 보리수 및 금강좌와 7선처를 돌아보았다.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보리수를 보니 치열하였던 고행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미얀마와 태국에서 온 승려들이 수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7선처 중 반얀트리 나무와 연못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부처님의 8대 성지 중에는 반드시 나무와 연못이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다음날 라지기르로 이동하여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신 영축산에 올랐다. 설법지의 공간이 기대보다 협소하여 과연 1,250명이 다 모여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높은 산이기 때문에 확성기 없이 산울림으로 가능했을 것 같기도 했다. 최초로 마련된 가람인 죽림정사를 보며, 비가 많이 오는 지형이라서 빗물을 잘 빨아들이는 대나무를 활용한 지혜에 감탄했다. 우리나라 사찰들에도 언덕에 대나무를 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란다 대학터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 규모가 예상 밖으로 매우 컸다. 5세기에 세워졌으니 세계 최초의 종합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 논리학,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 학문을 가르쳤던 불교대학으로, 선생이 많을 때는 2,000명, 학생들이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강의실뿐만 아니라 기숙사, 도서관, 사원 등 거의 작은 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 굴에 들어가 불상을 보고 나오다 일행을 놓쳐 이리저리 헤매다 10여 분이 지나 겨우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바이샬리로 이동하여 사리탑 유적, 대림정사터, 원숭이 연못, 아쇼카왕 석주 등을 보았다. 아쇼카 왕의 석주가 부처님의 8대 성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기념물이다. 쿠시나가르로 이동하여 부처님이 열반하신 열반당과 다비장을 둘러보았다. 생사일여의 그 경지가 무엇보다 존경스러울 뿐이다.
다음날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 경내로 들어가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 구룡못, 아쇼카 왕 석주를 돌아보고 카필라바스투 왕궁터를 답사하였다. 카필라 성 왕궁터는 그 초석이 잘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는데 한 변이 450미터, 다른 한 변이 550미터라고 하니 우리 경복궁 규모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다.
다시 국경을 통과하여 인도로 돌아와 아요디아 지방에서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 나오는 김수로왕비 허황옥의 고향이라고 전해지는 아유타국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김해 김씨 종친회에서 조성한 공원에 고대 한국과 인도의 교류에 대한 기념비를 세워 놓았을 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유타 왕국의 문장이 쌍어문이라는 것과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과 파사석탑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파사석탑은 그 석재가 김해 지역에서 나오는 돌이 아니라 아요디아 지역에서 나오는 돌이라는 것이 교류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보다도 먼저 가야에 인도로부터 직접 남방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후에는 쉬라바스타로 이동하여 기원정사 및 수닷타 장자 스투파, 앙굴리마라 스투파 등을 둘러보았는데 역시 기원정사터가 가장 명당자리라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에는 10시간 걸려 상카시아로 이동하여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마야부인을 구원하고 하강한 꿈의 계단을 돌아보았다.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서로 자기들의 성지라고 주장하고 있어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힌두교도와 승려들이 참배하고, 우리 일행도 참배하였는데 별다른 제제는 없었다. 여기서 또 6시간 걸려 아그라로 이동하여 이날 16시간을 버스에 앉아 참을성을 발휘하는 고행(?)을 하였다.
다음날 뉴델리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모헨조다로의 인더스 문명 유물을 비롯하여 불교문화, 힌두교문화, 이슬람문화 등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박물관 입구에 우리나라 산대놀이에 사용한 산대의 원형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악기 중에는 장구와 단소가 전시되어 있어 우리 악기와 상관관계가 유추되었다. 인도와 한국은 이역만리 떨어져 있지만 고대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도 여행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며, 특히 우기에 비가 많이 오고 더워서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하듯이 8대 성지 어디를 가나 관람객들이 적어서 아주 여유롭고 편하게 혜초 스님의 안내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음미할 수 있었다. 이 더위에 하필이면 무더운 인도를 갔다 왔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무더운 인도를 다녀오니 한국의 더위는 더위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불편함이 편함을 느끼게 해준 인도의 여정은 비움과 채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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