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겨 사용하는 불교 용어 중에 ‘화두’라는 말이 있다. 물론 불교에 정통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말이 지닌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대개 ‘얼치기’들은 이럴 때 거기에 자기 식대로 살을 많이 붙이게 되는데,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이 말을 즐겨 사용하는 자리는 강의실이다. 즉, 강의실에서 내가 ‘썰’로 풀어내는 화두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먹혀들어가는’ 강의 소재다. 강의실에서 진리는 대개 글보다는 말에 있고, 그 말은 다행히도 공식 문건에 남지 않으니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 ‘썰’은 강의실에서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스님들이 참선에 들 때 어떤 한 가지 주제를 가지는데, 그 주제를 불교 용어로 화두라 한단다. 이를 문학작품에 적용해 보자. 김성동의 장편소설 《만다라》의 주인공 법운은 오랜 방황 중에 만난 파계승 지산에게 크게 매료된다. 지산은 어느 날 법운에게 ‘병 속의 새를 병을 깨지 않고 꺼내는 방법을 구하라’라는 화두를 안긴다. 법운은 이 화두를 안고 떠돌며 고행하다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에서 ‘병속의 새’라는 화두는 주인공에게 던져진 삶의 과제일 뿐 아니라 나아가 작품의 주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소설 전체를 이끄는 구심점이 된다는 것이다.
《만다라》는 스님 얘기를 다룬 소설이니까 화두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알려진 많은 작품에도 이와 같은 유의 화두가 꽤 자주 등장한단다. 가령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작품인 〈뫼비우스의 띠〉도 좋은 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겉의 구분이 없는 띠(면)를 뜻한다. 이는 작중에서 수학 선생이 뜬금없이 제시한 도형일 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소설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그러니까 제목도 ‘뫼비우스의 띠’ 아니겠나). 그것은 소설의 스토리 전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도 소설 전체를 이끄는 주도적 상징으로 자리한다. 조세희는 〈뫼비우스의 띠〉에 이어 〈클라인씨의 병〉이라는 소설에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병’이라는 뜻의 ‘클라인씨의 병’이라는 도형을 제시해 독자를 그 낯선 도형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는 정신병원을 탈출한 작가 박준이 등장하는데, 이 박준의 트라우마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 고이 잠든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들이닥쳐 그의 얼굴에 전짓불을 들이대며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추궁한다. 전짓불을 든 사람이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대답은 그 자체로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박준은 작가가 된 이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을 요구하는 시대에 큰 억압을 느끼면서 어릴 적의 ‘전짓불의 공포’라는 트라우마에 집착한다. 작가 이청준은 여러 주요 작품에서 이 ‘전짓불의 공포’를 되풀이해 다룸으로써 그것을 우리 문학의 화두로 자리 잡게 했다.
화두는 이처럼 한 작가나 한 작품에서 좀처럼 풀리지 않은 문제로 뚜렷이 부각돼 있다. 또한 그로부터 뜻밖에 작품의 뼈대가 절로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니 작가가 되려는 자는 자기 작품에 제시할 화두를 잘 가꾸어야 한다. 자, 그러면 자기 작품에 내세울 화두가 어떤 게 있을지 미리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화두〉라는 제목의 에세이 한 편을 써 보자.

이렇게 해서 지난 학기 강의실에서 십여 편의 에세이를 받았다. 학생들은 나름대로 자기 작품의 화두로 내세울 만한 주제를 짧은 에세이로 드러냈다. 가족의 죽음이나 부모 갈등, 사업 실패 등에 따른 불화 관계를 바탕으로 이별, 상실, 열등감, 보복 등의 주제를 설명한 이야기가 많았다. 진정한 어른 되기, 남과 잘 소통하기, 나이에 맞는 새로운 꿈을 선택하기 등등 지금 살아가는 현재의 희망 사항을 설명한 학생들도 있었다. 소설 쓰기에 국한해서 해피 엔딩, 재미있게 쓰기 등을 화두로 말한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의미 있는 문학적 상징으로 부각될 만한 구체성까지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나름의 소박한 표현의 화두로 설명했다고 할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 과정이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는 되었으리라는 강사로서 자부심이 절로 일기도 했다.
사실을 말하면, 학생들에게 그런 시간을 주기 위해 나 자신의 ‘화두’에 대해 먼저 말하기도 했다. 나는 문단에 나온 이후 10년은 시를, 그 뒤 10년은 소설에 몰두했다(그 뒤부터는 무엇에 몰두했다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지만). 시를 쓰는 동안은 현실에서 근원을 향해 갔다면, 소설을 쓰는 동안은 근원에서부터 현실로 나오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장르적 본질에 대한 설명일 수 있겠다. 물론 나는 장르적 본질을 내 문학의 화두로 삼고 있지는 않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드러난 현실과 그것을 배태시키는 배경과의 관계인데, 이를테면 ‘탄력성이 공을 만들었다’(시)와 ‘공은 튀고 있다’(소설) 식이 되겠다. 솔직히 더 이상은 나도 어려워서 설명을 못 하겠다. 어떻든 ‘현실과 그 근원’(시)과 ‘근원으로부터 이미 제시된 현실’(소설)의 차이로 설명될 내 화두는 그러나 아직도 ‘병 속의 새’나 ‘전짓불의 공포’ 같은 세련된 기호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에 우연히 문명비평가 김용범의 《꽃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개미, 2008)에서 ‘화두’ 편을 읽게 되었다. 성철 스님이 ‘화두는 암호다’라고 한 말을 따오면서 시작되는 이 글은 ‘화두를 해설하는 일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철 스님이 “화두라는 것은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이라며 “숙면일여(熟眠一如)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니, 사실 나 스스로 화두가 무엇입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다. 화두는 설명하면 “설명하는 이나 듣는 이나 다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화두가 세련된 기호로 제시되지 못했다 해서 아쉬워할 것 없고, 또한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일도 없을 듯하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