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과 헌신으로 희망을 심는 ‘생명보살’

일면 스님(日面, 1947~ , 이하 일면)의 첫인상은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편하고 자상한 스님을 보지 못했다고 이구동성이다. 일면은 전형적인 외유내강 스타일의 인물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그 마음의 심지가 굳기로는 불암산 바위보다 더하다.

마냥 좋기만 한 성정의 소유자였다면 반세기가 넘는 출가 생활 중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면이 걸어온 여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지 싶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고단함이나 지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자비로운 미소와 부드러운 말로 여러 중생을 맞이할 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를 출가의 길로 가게 한 직접적인 이유는 가난이었다.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조차 부담스럽던 시절, 그는 우연히 탁발 나온 한 스님을 따라 절로 들어갔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절집에 가면 지금보다는 낫지 싶어 반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부처님 은혜로 이만큼이나 살았다. 세속에 있었다면 남의 집 머슴이나 살았을 자신이 오직 부처님 은혜로 대학도 나오고, 종단에서 중요한 소임도 맡고, 종단과 사회를 위해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음을 촌음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올해 일면은 2013 만해대상의 만해실천대상 수상자가 되었다. ‘한국의 노벨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해대상을 받은 것은 그가 경영해온 삶의 족적이 높은 평가를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큰 산처럼 느껴지면서도 뒷동산처럼 포근한 사람, 불도저를 능가하는 추진력을 가진 사람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상한 표정을 한 사람. 이제부터 일면의 진면목을 탐구해보기로 하자.

출가 후 일면에게는 세 분의 스승이 있었다. 일면이라고 하는 한 인물을 배출하기 위해 세 분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스승들이다.

첫째 스승은 은사 명허 스님(이하 명허)이다. 명허는 별명이 ‘호랑이’로 불릴 만큼 엄격하고 불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상좌가 남아나지 못했다. 1960년대 주석하던 해인사에서 남긴 명허의 일화들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짐작하게 한다.

명허는 경내에서 젊은 사람들이 손이라고 잡고 있으면 “여기가 파고다 공원이냐”며 불호령을 내렸다. 젊은 사람이 뒷짐 지고 도량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명허는 특히 사찰의 정재(淨財)를 끔찍이 여겼다. 일 원 한 푼, 쌀 한 톨 허투루 쓰지 못하게 했다. 빨래를 하고 더러워진 비눗물을 버리는 것조차 엄격히 금했다. 다음에 걸레라도 빨 수 있으니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면은 행자생활을 하며 검소하고 맑은 정신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일면은 은사로부터 경전 몇 권 읽고 참선 잘하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라는 점을 배웠다. 작은 일 하나까지 예사로 여기지 않는 철두철미한 수행자의 자세를 배웠다. 수행자로서 지금껏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힘은 그 시절에 길러졌다고 믿고 있다.

일면에게 어쩌면 은사보다 더 큰 영향을 준 스승이 있었으니, 지월 스님(이하 지월)이다. 해인사 유나를 지내던 지월을 그는 두 번째 스승으로 꼽는다. 지월은 키가 작고 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 상대가 어린아이건 여성이건 언제나 존대를 했다. 일면이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는 원칙은 바로 지월로부터 배운 것이다.

지월은 자비의 화신이었다. 행자 시절 불 조절을 제대로 못 해 밥을 태워 ‘이제 쫓겨났다’고 낙담을 하고 있는데, 지월이 부르더니, “일면 보살, 밥이 꼬들꼬들해서 맛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또 하루는 물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진(죽)밥을 올렸는데 그때도 지월은 역정 대신에 “촉촉해서 밥이 아주 맛있어요.” 하면서 자비로 감싸 안았다.

지월은 도량을 오갈 때 늘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누구든지 만나면 “자기 허물을 벗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을 제도하지 못한다. 삼 일간의 수도는 천 년의 보배이지만, 백 년간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는 내용의 즉석 법문을 들려주었다. 또한 사시가 되면 사시불공을 올린 후 반드시 행선축원을 했다. 그 축원의 내용은 가슴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사실 일면은 그런 지월에 반해 상좌가 되고 싶다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월은 “나보다 더 훌륭한 스님을 모시거라.”며 거절했다.

또 한 분의 스승은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하 성철)이다. 성철은 일면이 강원을 졸업할 즈음 해인사에 오셨는데, 엄격하기가 추상과 같았고 늘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성철은 학인들에게 “만약 너희가 공부를 잘해 견성성불하면 금싸라기를 삶아 먹어도 죄가 없지만, 공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경책했다. 한번은 학인들이 운동하고 나서 지쳐 대중방에 와서 좌복을 베고 누웠는데, 마침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본 성철은 호통과 함께 시자를 시켜 좌복을 모두 물에 처넣어버렸다. 선 수행자의 생명과 같은 좌복을 베고 누운 것에 불처럼 화를 낸 것이다. 

성철은 선방에서 일주일 철야정진을 하면, 죽비를 몇 개나 부수는지 모를 정도로 후학 제접(提接)에 엄격했다. 조는 기색이 보이면 사정없이 죽비를 휘둘렀다. 일면은 성철을 통해 공부의 중요성과 치열함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평생 삶의 지침이 되었다.   

상좌가 상좌를 두고 그 상좌가 다시 상좌를 둘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서릿발 같은 은사 명허의 꾸지람 소리, 관음보살의 화현 같았던 지월의 따뜻한 마음, 죽비를 부수며 공부를 게을리 말 것을 재촉했던 성철의 덕화가 지금도 생생하게 일면의 귓전을 맴돌고 있다.

일면은 선사였던 은사 명허의 강력한 권유로 처음에는 참선에 매진했다. 은사는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은 선사였다. 경(經)이 좋아 강원에 가있는 후학들을 보기만 하면 ‘선방 가라’고 경책하는 것이 일상사였을 정도였다.

선방에서 두 철을 난 일면은 그러나 생각이 좀 달랐다. 우선 참선 수행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았다. 부처의 길이 하나만 있는 것도, 공부 방법이 똑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은사에게 용기를 내어 ‘참선이 안 맞는다. 선사들을 받드는 행정승이 되겠다. 참선이 아닌 행정으로도 도인이 나와야 불교가 산다’며 행정승의 길을 걷겠다고 설득했다. 일면의 ‘행정도인’의 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읽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일면의 고향은 경주시 탑동 오릉 주변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11살 때에 아버지가 54세로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진갑 되던 해에 돌아갔다. 아버지는 출가 전에, 어머니는 출가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13살 되던 해(1959년) 늦여름(9월)에 사라호 태풍이 불어와 경주 포항 지역을 휩쓸었다. 전봇대의 중간쯤까지 물이 잠겼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살기가 팍팍하던 어느 날 한 스님이 탁발을 왔다. 왜 그랬는지 어린 일면은 그 순간 가슴에서 큰 떨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스님이 되겠다고 졸랐다. 탁발승도 불연이 있음을 알았는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날 스님을 따라간 것이 불문에 든 계기가 되었다. 

일면이 행정의 도인을 꿈꾸게 된 것은 출가 전 치열하게 진행된 정화불사, 즉 분규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면은 “불교가 사회에 기여하려면 행정에 도인이 나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교는 망한다”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갖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일면은 해인사 강원을 1968년 4월 3일에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3년 동안 군 생활 후 제대를 하고 해인사에 가니까 암자에 있는 감원 몇을 빼고는 다 바뀌어 있었다. 그때 도성 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하셨는데 소임을 보라고 해서 잠시 머물다가 1973년 5월 현재의 주석 사찰인 불암사로 올라왔다.

일면은 불암사에 있으면서 동국대에 입학했다. 1975년에 동국대에 입학했는데, 그 전에 고등학교 학력이 필요해, 인천 선인고등학교 야간부 과정을 다녔다. 군까지 다녀와서 고등학교에 갔고 그 뒤로 대학에 입학했으니 매우 늦은 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국대를 졸업하니 부처님 은혜가 너무 고맙게 다가왔다. 부처님의 은혜 갚기 위해서 해인사로 가 공양주를 자칭했다. 공양간의 일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고, 시간이 나면 법당에서 기도를 했다. 내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오직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눈썹까지 다 깎았다. 털끝 하나라도 다 비운 상태에서 기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님들의 고무신이 더러워지면 닦아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하루 24시간을 하심하며 보냈다. 부처님 전에 꿇어앉아 중노릇 잘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렇게 두 철을 지내니까 해인사 스님들이 좋게 보았는지,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일면은 그 순간, 세상의 이치, 살아가는 도리를 체득했다.

해인사의 여러 소임 중에 가장 중요하고 알아주는 소임이었던 회계를 맡아 일 원 한 푼 빈틈없이 소임을 마쳤고, 이어 교무국장도 지냈다. 성수 스님이 총무원장을 하면서는 조계사에서 재무를 살았다. 그러나 1년쯤 소임을 보다가 가장 친한 도반이었던 시현과의 인연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한 달쯤 머물며 사찰을 돌면서 사찰이 운영하는 유치원, 포교원, 학교 등을 돌아보며 일면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이후 행보에 이 시기의 일본여행은 매우 큰 영감을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공부를 더 하고자 했던 일면에게 지병이 찾아왔다.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간에 이상이 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83년도에 흥국사 주지를 맡았고, 이어 종회의원과 포교원 포교부장, 총무원 사회부장을 맡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서는 ‘한강 유등제’를 연구해서 주관해 시행했다. 이 밖에도 조계사 합동결혼식, 불우이웃돕기 장학생 지급을 위한 선서화전 등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의미 있는 불교행사를 열었고 그때마다 큰 성과를 거뒀다.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면 거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그만의 성정이 가져다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98년에 들어서는 건강이 최악으로 악화되어서 2년간 16번이나 아산병원에 입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수가 차고 황달 현상이 심해져 쓰러지면 입원을 하고 조금 회복되면 퇴원을 하던 일을 거듭했다. 일면은 그 와중에서도 종단의 교육원장 소임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 아프면서도 기초교육과정 정비, 사미(니) 의제 정비 및 시행을 관철했다. 교육원장을 하면서 총무원장의 신임을 받아 중앙승가대 총장직을 권유받았지만 건강 문제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회복한 후에는 군종교구장을 맡아 군포교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최근에는 호계원장을 맡아 봉사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총무원장 후보로도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 그가 총무원장이 되어 ‘행정도인’의 꽃을 만개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간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던 일면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0년 1월 8일 간 이식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이전에 3번의 실패가 있었으니 피를 말리는 과정이었다. 수행자로서 생체이식을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료진에게 통보했고, 따라서 뇌사자의 장기를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소문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간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일면은 연락이 올 때마다 생체이식은 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워질 무렵 일면 스님은 마지막 기도를 부처님께 올렸다. ‘빨리 몸을 바꿔서 이곳 대한민국에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과 함께 ‘만일 이생에 살 기회가 한 번 더 주신다면 정말로 큰일을 하겠다’는 두 가지의 발원이었다. 일면은 기도를 마지막 날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과 스승들, 그리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연을 맺은 분들을 위해 정성껏 천도재를 올렸다. 천도재를 마치고 나니 그날따라 잠이 잘 왔다. 모처럼의 편안한 잠이었다.

그런데 그날 마침 병원에서 입원하라고 연락이 왔다. 기증자가 있으니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간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병원으로 가면서 죽을 경우를 대비해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러고는 밤 10시 5분부터 무려 20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그렇게 제2의 생명을 얻었다. 그에게 간을 준 이는 22살의 젊은이였다.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였던 그 젊은이가 생명을 전해주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일면은 지금도 그를 위해 빠짐없이 영가백중 기도를 해주고 있다. 이름도 성도 모르기에 “선재선재 영가 왕생극락”이라고 부른다.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일면은 수술 전 부처님께 올렸던 발원 내용을 실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건강을 되찾아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지금부터의 삶은 오직 이웃을 위한 보살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일면은 자신을 곧잘 ‘단순세포’에 비교한다. 한 가지를 생각하면 거기에 몰입하는 성정을 표현한 말이다. 예를 들어 생명나눔실천본부 같으면 그것을 화두로 삼아 몰입해서 집중해 더욱 좋은 생명나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광동학원(광동고등학교, 광동중학교, 의정부광동고등학교 3개교 관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광동학교의 역사가 67년이나 됐는데, 늘 분규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이때 일면은 봉선사에서 구원투수처럼 학교의 소임을 부탁받았다. 학교에 가서 이사들을 만나 설득하고 학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성심을 다해 설명했더니, 이내 모두가 마음을 열어주었다. 만장일치로 이사장에 추대해준 것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부임할 때만 해도 광동고는 의정부 지역에서는 기피 제1호 학교였다. 광동고에 자녀가 배정되면 학부모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을 그는 단숨에 확 바꿨다. ‘고등학교 선생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어릴 적 꿈을, 교사가 아닌 이사장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실현하기 시작했다. 학교 분위기 쇄신을 위해 39세의 군법사 출신 교법사를 교감으로 전격 발탁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말도 있었지만 학교를 바꾸겠다는 그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후에는 모두가 따라주었다. “내가 참 열심히 했다.” 일면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광동학교는 지금 지역의 명문학교가 됐다.

“내 장기가 무엇이냐? 난 사실 무식하다. 사회행정이라든가 이런 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전문가를 활용할 줄 안다. 확고하게, 삿되지 않게, 합리적으로 일하도록 격려한다.”

일면의 자신의 장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전문가들이 자신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주는 능력, 그것이 지도자가 할 제일 덕목이라는 것을 그는 생명나눔이나 광동학원 등에서 웅변으로 입증하는 중이다.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생명나눔실천본부는 일면이 뒤를 이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군종특별교구도 초대 교구장을 맡아 처음에는 서툰 점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군법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따라주었을 정도로 기반을 잡았다. 군종특별교구에 배당된 총무원 예산이 연 2억 5천만 원에 불과해 도저히 교구 운영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일면은 직접 전국사찰과 인연처를 발로 찾아다니며 연평균 20억 원의 화주를 이끌어냈다.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2003년 일면장학회를 설립하여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과 학인 스님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연간 30여 명에게 3천여만 원씩 전달하고 있으며, 지금껏 360명에게, 3억 6천만 원을 전달했다. 일면은 해인동문회장을 맡아 해인승가상(연 1회)을 제정하고 사무실을 구입하며 해인동문회 자립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해인동문 장학사업을 확대하여 어려운 스님들이 정진할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일면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생명 보살’이다. 그가 하는 일이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지만, 그 핵심에 생명나눔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나눔운동은 일면에게 있어 매우 각별한 사업이다. 자신이 생명나눔으로 인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에 이 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장기기증이야말로 불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실천하는 진정한 이타행이다. 보살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 중 제일 덕목이 보시 바라밀이다. 보시란 무엇이던가?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쓰인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에 이미 장기 보시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다.”
일면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런 가르침은 그 울림의 폭이 다르다. 진정성과 함께 그의 초인적 이력이 가져다주는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면의 발걸음은 갈수록 빨라지는 중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기회만 생기면 생명나눔의 중요성과 공덕을 역설한다.

불교계의 큰 지도자이자 생명존중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동체대비사상과 보시행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스님, 일면. 그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사)생명나눔실천본부는 보건복지부 장기이식등록기관으로서 장기기증 희망등록, 조혈모세포기증 희망등록, 환자 치료비 지원, 자살예방센터 운영 등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는 12만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핵심사업인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매년 증가하여 2012년 기준 32,814명이 보건복지부에 등록했다. 또한 백혈병 환자에게 새 생명의 기회를 주는 사업으로 조혈모세포기증 희망등록을 지난 2004년부터 추진해 총 30,216명을 보건복지부에 등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면은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부임 후 우리 사회에 치료비 마련의 어려움으로 입원이나 수술 등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마의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지원 사업을 확대하여 총 602명의 환자를 선정하여 24억 5천만 원을 지원하여 환자 및 환자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최근에는 사회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자살사고 예방을 위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11년 6월 법인 내 자살예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상담과 면접상담,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을 대상으로 순회교육을 실시하여, 총 765명에게 따듯한 상담과 체계적인 위기관리를 통해 자살예방 전문기관으로 위기관리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일면의 생명존중사상 실천과 장기기증문화 확산 원력은 2012년 대한민국 나눔 국민대상 ‘생명나눔’ 분야 수상과 대원상 수상, 그리고 이번의 만해실천대상 수상으로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일생을 통해 세 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부모님과 함께했던 삶, 두 번째 출가 후 불제자로서 삶, 세 번째 간 이식을 받아 시작한 제2의 삶 등이 그것이다. 

특히 생명나눔에 대한 헌신적인 실천과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은 2만여 명의 말기 질환자와 그 가족에게 꿈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을 주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동체대비사상을 널리 알리며 우리 시대 참 보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면. 그가 전하는 생명나눔의 향기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

 


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기자. 경기도 양평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1988년 〈법보신문〉 창간과 함께 입사하여 편집데스크를 거쳐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8년 4월부터 불교 인터넷 언론 〈미디어붓다〉를 창간, 대표기자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산승의 향기》 《가정법회》 《선을 찾아서》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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