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한국전통문화학교강사

  1.

헨드릭 빌렘 반 룬의 《예술사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서양미술의 긴 역사에 대한 작가 필생의 역작으로 그 첫 구절은 “예술은 보편타당하다.”는 정의로 시작된다.

과연 예술이라는 것이 보편타당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겠으나 작가는 예술의 보편타당성을 감상자의 측면이 아닌 제작자의 편에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인간 의지의 보편성을 지적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내면의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창조하고 싶어 하며 이것이 감상자와 공명될 때 예술이라고 하는 단계로 승화한다는 것이다.

예술(藝術, Art)이라는 용어는 전적으로 근대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반 룬의 지적대로 인간에게는 분명히 창조, 유희 등의 본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예술이라는 개념은 적어도 긴 역사를 지닌 인류에게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조각, 건축, 문학, 음악 등 우리가 문화나 예술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들이 창조, 유희라는 관점에서 예술로 인식된 것은 동서 모두 18세기 이후부터이다. 이전까지 이러한 활동들은 크게 보자면 종교, 유희, 학문 등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그 관점과 출발은 동서(東西)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반 룬의 명제를 다시 따라가 보자.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그림’만을 대상으로 보자면 동서양 모두 예술적 창조 의지를 주체하지 못해 나온 것들이 아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지만 작가의 창작 의도는 동양과 서양의 두 지역만큼이나 먼, 그 출발선이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그린 것을 서양에서는 풍경화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는 산수화라고 한다.

풍경화라고 하는 관점에는 자연이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산수(山水)는 자연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이는 철저하게 체험의 대상이 된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산수를 수행과 체험의 대상으로 인식하거니와 감상하는 사람 역시 그림 속 자연으로 들어가 우주와 자연을 인식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과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 안의 일부로 스스로를 인식해 왔다. 그러므로 그림 속 산수는 실제 풍경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우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중국에서 소위 감상용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는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를 그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1) 이때부터 그림은 건물이나 무덤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종이나 천이 대중적인 그림의 매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림의 용도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건축물이나 무덤 안의 그림은 범사회적인 의도를 지니고 대중과 대중의 소통 즉 다자간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반면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이들 매체는 작가와 감상자, 즉 화가와 대중 간의 은밀한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동진(東晋 : 371~420)의 고개지(顧愷之)가 전신(傳神)을 강조한 이래로 그림이 내포한 의미와 정신이 강조되기는 하였으나 건물이나 사당 벽을 장식하던 이들 그림은 주로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한 역대 고사(高士)와 성현(聖賢)과 같은 인물이었으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이들의 가르침과 정신이었다.

하지만 당말 오대 화가들의 관심은 자연으로 옮겨지기 시작하였고 여기에는 불교와 노장 수행의 대중화와도 큰 관련이 있다. 자연을 우주로 인식하고 자연을 화폭에 그림으로써 우주를 자신 안에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산수화의 출발 자체가 불교적 혹은 도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은일(隱逸)을 표방하는 문인화(文人畵)라고 칭하는 그림과 선화(禪畵)의 구분은 매우 모호할 수 있다.

아직까지 선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구분은 논란 속에 있다. 이 글에서는 선화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고 또한 선화가 등장하는 시기인 송대(宋代)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그림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바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선화(禪畵)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기실 문인화(文人畵)란 어떤 그림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 회화에 있어서 문인화란 개념은 명대(明代)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회화의 남북종(南北宗)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불교의 선종이 당대에 남종과 북종으로 나뉘었고, 회화에서 남종과 북종도 역시 당대에 나타났다.”고 하였으나, 남종과 북종의 회화 형식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수묵화냐 혹은 청록산수화(채색이 가해진 산수화)냐 하는 회화형식과 창작방법을 출신 배경과 연결하였고, 이 과정에서 점오(漸悟)와 돈오(頓悟)라고 하는 깨달음의 방식을 그림의 창작방법에 접목하였던 것이다. 즉 훈련과 연습을 통한 그림의 기예를 습득하는 것을 두고 점진적인 깨달음에 비유하였고, 문인의 소양이 무르익었을 때 이루는 필묵의 유희를 단박에 깨닫는 돈오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가 남북종 회화를 구분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출신 배경이었다. 이 기준에 따라 문인화는 문인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으로서 “그림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문인의 정취(士氣)’를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림이 실제 경물(景物)과 얼마나 같은가에 대한 문제보다는 작가의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의 은일(隱逸)의 정취와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당말의 왕유(王維, 701~761)에서 시작하여 송대 소식(蘇軾東坡, 1036~1101)에 이르러 화론(畵論)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이 시기는 불교에서는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하는 신불교 운동이 시작된 시기이며 당대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들이 불교를 믿고 참선 수행을 하면서 선종 사상에 관계하였다.

특히 혜능 선종의 발생 시점과 왕유의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에 문인화와 선종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던 것으로 이해된다.2)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문인화와 선화가 완전히 구분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분명 선화라고 하는 그림은 일반적인 수묵 문인화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것을 선미(禪味) 혹은 선기(禪氣)라고 해도 좋으며 일탈의 정취(逸氣)라고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인화의 전개와 발전에는 선화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문인화가 정착하는 북송에서 남송에 이르는 시기 선화(禪畵)와의 관계 그리고 전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문인화 산수화는 은일(隱逸)을 그 기조로 하고 있다. 어지러운 세간의 생활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자연에서 노닐면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 자연(산수)을 자신의 방 안으로 들이고 누워서 그림 안에서 노닌다는 와유(臥遊)사상이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출세간에서의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사상과 선수행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에 몸담고 있던 승려들 역시 이들과 교류하였던 것이다. 특히 당말 안사(安史)의 난 이후 어지러운 사회상황은 사대부계층이 그들의 마음을 기탁할 만한 통로를 필요로 하게 하였고 이 시기에 출현한 선종이 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종과 문인화, 문인화와 선화의 관계는 점차 밀착되어 갔다.

왕유는 혜능의 제자였던 신회(荷澤神會, 684~758)의 제자로 자신의 호를 유마거사의 이름 마힐(摩詰)로 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시로 더 알려져 있으나 선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후대 소동파는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당대 많은 시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자신의 시에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였으며 출세간의 담담하면서도 적요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산수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깊은 산속 인적조차 드문데 深林人不知
밝은 달만 오가며 비추고 明月來相照 ― 죽리관(竹里館)

시냇가 외딴집엔 인적이 없고 澗戶寂無人
흰 눈(백목련)만 하염없이 내리네. 紛紛開且落 ―신이오(辛夷塢)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눈 덮인 개울가의 풍경>(그림 2)은 비록 명대에 그려진 모작(模作)이긴 하나 왕유 시의 고즈넉하면서도 담담한 기풍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속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고요함이야말로 수행자들이 머물러야 할 곳으로 여겨졌던 것이며, 사회가 어지러워질수록 당대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불교에 귀의하고 선종에 매료되어 갔다.

특히 왕유는 그림에 있어서 채색보다는 수묵을 우위에 두었다. 수묵 한 가지로도 만 가지 색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무릇 그림에 있어서는 수묵이 으뜸이다.”(山水訣)라고 단언하였으며 수묵의 필법이 정교해지면 그것은 능히 도에 이를 만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때 붓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왕유에게 있어서는 그림이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작업이 아닌 자신 속의 감정과 더 나아가서는 도(道)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며 이것은 이후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에게 강조되었던 덕목이다.

본격적인 문인 산수화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는 작가 중에 거연(巨然: 약 960~985 활동)이 있다. 그는 현재 남경인 강녕(江홭) 출신이었으나 후에 개봉(開封) 개보사(開寶寺)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거연은 특별히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으나 자연을 충실히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본 광경과 그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이것이 인상파적 화풍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담묵(淡墨)과 유려한 필선으로 이어지며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불교의 존재관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화는 승려(僧侶, 禪師)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으로서 선사들의 수행의 정취를 만족시키는 그림이다.3) 즉 선화는 스님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출신이 불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동기창은 사혁(謝赫)이 제창한 그림의 육법4)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은 타고나는 것으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펼쳤는데, 때론 이것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한 후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즉 평소의 기본 수양이 그림에 저절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문인이라고 하는 출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스님을 포함한 불교 수행을 삶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그림에는 선미(禪味)가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 것이다.

보리달마에서부터 시작한 중국 선종은 당 말기 조사선 불교의 전개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일체의 권위주의나 형식을 탈피한 생활로서의 수행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마조 선사(馬祖道一, 709~788)이다. 그는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특히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즉심시불(卽心是佛)’의 두 구절을 강조하였다.

도(道)는 수행을 필요치 않는다. 다만 오염(汚染)하지 않도록 한다. 무엇이 오염이 되는가. 다만 생사의 마음을 내고 조작하여 취향(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바로 오염이 된다. 만약 곧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凡)도 없고 성(聖)도 없는 것이다.5)

이와 같은 마조 선사의 설법은 조사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범한 언어로 조작과 분별심이 떠난 마음이 평상심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평상심은 인위적이지 않은, 일상의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동기창이 주장한 문인화가 지향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선화 역시 일상의 수행으로부터 얻어진 선의 기운으로 드러나는 선미(禪味)가 기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선화는 인위적으로 무엇을 그리고자 하여 그린 그림이 아닌 수행이 바탕이 된 후에야 천연으로 얻어지는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4.

문인들의 그림이 그러하듯이 선화가 지향하는 것은 형사(形似;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나 사물(寫物)이 아니라 그 뜻을 전달하는 것에 있으므로 사의(寫意) 혹은 사의화라고 한다. 중요한 점은 그림이 직업이 아닌 남는 기예〔餘技〕, 혹은 유희로서의 작업이라는 점인데, 그림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작가의 자유로운 정신을 전달하는 소통 방법 중 하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때 붓의 운용(運用)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신속하다. 이것은 마치 선사들이 화두를 통해 종지(宗旨)를 내어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선화는 빠른 붓놀림, 먹의 번짐 등을 이용한 우연한 효과 등을 통해서 단순하고 신속하게 그 뜻을 전달한다. 동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해의 <시를 읊는 이백>(그림 3) 그림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도 그 눈길을 달에 멈추었던 시성(詩聖) 이백의 정신세계를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양해(梁楷)는 남송(南宋) 때의 화가이다. 인물 산수 모든 분야에 능하였으나 선화(禪畵)가 그의 주 종목으로 여러 폭의 선화를 남기고 있다. 황제가 금대(金帶)를 내리며 화원(畵員) 자리를 주었으나 이를 받지 않았고, 주로 절에 머물렀다. 아마 그의 선미(禪味) 풍부한 그림들은 그의 수행에 근간을 두었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먹을 번지게 하는 발묵법(潑墨法)을 즐겨 사용하였으나 먹을 금보다 더 귀하게 썼으며, 붓질을 아끼면서도 그 뜻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인 김명국이다. 그가 그린 달마도(그림 4)는 선의 초조인 달마를 주제로 하여 그리기도 했으나 거침없는 단순한 몇 번의 붓질만으로도 달마의 종지를 드러냈다. 달마를 그린 것은 달마 조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달마 조사가 전하고자 했던 선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진심으로 통하는 마음은 긴 말이 필요 없고, 지극한 도는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듯, 그 정신을 드러낼 때 많은 붓질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며 그림에 있어서는 감필(減筆)의 묘미이다. 선화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절제와 간결함이다.

이와 같은 선화의 용필법은 선에 있어 화두에 비교할 수 있다. 화두는 간결하며 함축적이고 때론 엉뚱하기조차 하다. 조주 선사는 도를 묻는 물음에 “차나 한 잔 하라.”고 답했으며, 임제 선사는 “할”, 덕산 선사는 몽둥이로 응답하였다. 선사들의 화두는 그 경지에 다다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선화의 단순함이나 우연성은 이와 같은 조사선의 소통방법에 비교할 만하다.

사혁은 그림을 평하는 기준으로 신(神)·능(能)·묘(妙)로 나누었으나 후대의 화론가들은 여기에 일품(逸品)을 더하기도 하였다.

일품이란 일기(逸氣)가 있는 작품이란 뜻으로 전형적이지 않은 단순함과 간결함, 즉각적이면서 우연한 효과와 같은 일탈의 묘미를 말하는 것이다. 선화는 흔히 일기가 있는 작품으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선사들의 일탈적인 행동과 가르침 즉 화두와 같은 교시법이 선화의 일기와 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종의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가르침은 교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깨달음에 곧바로 다다르게 하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결국 선화의 일기는 선의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의 <발묵법으로 그린 신선>(그림 5)은 먹의 번짐 효과만으로 선인(仙人)의 자유분방함을 표현해 낸 수작이다. 양해는 세속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수행자의 자유로움과 호방함을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해 내었다. 채색보다 더 함축적이고, 세필(細筆)로 그린 그림보다 더욱 즉각적인 것으로서, 다른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수행자가 궁극에 이루어야 할 정신적인 자유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5.

뜻을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선화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남송의 초기 선화는 불교의 인물이나 고사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주로 역대 조사들과 관련된 일화가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선화에 있어서는 부처나 보살보다는 선맥을 위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특히 달마 조사는 선화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이와 같은 현상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선종에서 초조(初祖) 보리달마의 위상은 부처님의 정법을 전했다는 측면에서 절대적이다. 석가모니로부터 전해진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전승자라고 하는 절대적인 이미지와 함께 달마의 서래(西來) 과정에서의 신이한 행적으로 인하여 원래 모습에 신비감을 더하였으며, 이것은 시대와 종파의 요구에 따라 그 초상(肖像)이 달라졌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달마의 모습은 9세기 이후 선종의 성립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보리달마의 특징 있는 모습은 선종 각 파의 등사서(燈史書) 에 나타난다. 북종계 최초의 등사(燈史)인 《전법보기(傳法寶記)》에서는 달마가 숭산에서 혜가에게 전법하고 문인을 모아 서래전법(西來傳法)의 종극을 밝히며 독약을 먹고 천화(遷化)해 보였으며, 무덤에는 빈 관만 남기고 서쪽으로 다시 가던 도중 총령에서 서쪽에서 오던 동위(東魏)의 사자 송운(宋雲)을 만나 왕의 죽음을 알려주는 신이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6)

한편 남종의 종조로서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즉시 남조의 양무제와 문답하여 “공덕이 없다〔無功德〕.”의 한 구절을 가르친 후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9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는 중 눈 위에서 자신의 팔을 잘라 의지를 보인 제자인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그 증명으로서 가사를 주었다고 한다. 혹은 세 사람의 제자를 제도하여, 골수와 뼈, 살의 인가를 내렸으며 북위의 불교학자들에게 독살되자 무덤에는 짚신만을 남기고 인도로 돌아갔다고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7)

선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달마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두건을 둘러쓰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활달하면서도 괴이한 모습의 몽타주가 완성되었다. 아마 서역승이라고 하는 신이한 이미지에, 황제 앞에서 보시의 공덕 없음을 단박에 설파하고 난 후 소림사 굴에서 9년을 두문불출한 괴팍한 측면이 달마의 모습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남송에서부터 전해지는 대부분의 선화의 소재는 남종선의 전등서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특히 자신의 팔을 잘라 보임으로써 의지를 보인 2조 혜가와 6조 혜능 선사는 선화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소재였다. 이들 선사들의 전법 일화는 그 내용 자체가 매우 극적이기도 하지만 초조 달마, 2조 혜가, 3·4·5조 선사를 거쳐 6조 혜능으로 이어지는 남종 법맥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석각(石恪)의 <2조조심도(二祖調心圖)>는 단비(斷臂)의 일화를 보여주기보다는 달마 선사의 안심(安心) 법문을 강조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혜가(慧可) 조사가 초조(初祖) 달마(達磨) 문하에 있을 때 일이다.
혜가 조사가 스승을 섬기기를 밤낮으로 지극히 하였으나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하였다. 눈 오는 어느 날 밤, 혜가가 달마의 거처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새벽녘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달마가 물었다.
“ 그대는 나에게서 무엇을 구하는가?”
“ 가르침을 베푸시어 중생을 제도하여 주십시오.”
“ 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이에 혜가는 칼을 뽑아 왼쪽 팔을 잘라 대사 앞에 놓았다.
혜가가 말했다.
“ 제 마음이 편치 못하오니 대사께서 편하게 해주십시오.”
“ 그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하게 해주리라.”
“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석각(石恪)의 <2조조심도(二祖調心圖)>에는 한없이 편안한 혜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 6)
석각은 중국 오대(五代)에 활동했던 화가로 북송(北宋) 때의 기록에는 그가 촉(蜀)나라 사람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그림에 규범이 없고, 붓질에는 일격(逸格)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불교 인물화에 능했던 그가 화원(畵員)으로서 상국사(相國寺) 벽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이를 허락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의 필법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으나, 단 한 순간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 활달한 일격(逸格)이 있다. 그림 속 혜가 스님의 편한 모습은 이전에 팔을 잘라 보이던 결연함을 뛰어넘어 얻어진 바일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의 몸가짐과 상호에는 한 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다. 어깨에서 한껏 힘을 빼고 있는 그는 고개를 숙여 남은 오른팔에 편히 기대고 그 몸은 졸고 있는 호랑이에 온 몸을 기대어 함께 졸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가사(袈裟)로 가려져 있으나 왼쪽 축 늘어진 소매품으로 그의 왼팔이 번민과 함께 잘려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산군(山君)이라 일컫는 호랑이의 용맹도, 죽기를 각오한 조사의 각오도 이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조심하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한편 양해(梁楷)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6조재죽도(六祖裁竹圖)>는 6조 혜능 선사가 대나무를 쪼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그림 7) 6조 혜능으로부터 남종선을 개창한 신회가 법을 이었으므로 남종선에서 혜능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혜능은 불성에는 차별이 없음을 강조하고, 깨달음은 어떠한 인위적인 사유나 규범도 필요하지 않은 인간의 자각이며 직관적인 체득임을 강조하였다.

그림 속에는 이미 댓잎과 잔가지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이제 혜능은 그 밑둥치부터 한 번에 내리칠 태세이다. 대나무는 한 번에 쪼개진다. 두 번 세 번 내리칠 일이 없다. 한 곳을 베어내면 담박에 쫙 동서를 달리한다. 대나무를 쪼개는 모습으로 의심이 단박에 걷히고 바로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돈오(頓悟)를 표현한 것이다. 특히 주인공 옆에는 열 번은 도끼질을 해야 넘어갈 듯한 고목을 비스듬히 그려 놓아 북종선의 점오(漸悟) 선법(禪法)인 단계적인 깨달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용필에 있어서는 붓질을 감하며 뭉뚝하고 거친 붓으로 일관한 그의 표현은 충분히 선의 의미를 담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나 좀더 간결하고 거칠음 속에 있는 부드러움이 한껏 드러난 그의 다른 작품과는 비교되어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6조파경도(六祖破鏡圖)〉와 한 짝을 이룬 그림이지만 내용과 구도 면에서 차이가 있어 혹 명대(明代)에 다시 그려진 모본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양해가 그린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는 필법만 논하자면 선화로서의 풍미는 덜할지라도 화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앙상한 가지와 결연한 석가여래의 모습에서 선의 정신이 바로 드러나 있다.(그림 8) 다른 선화에서 추구하고 있는 일격의 기운은 없지만 인물의 표현과 채색을 비롯한 그림의 품격은 남송대 강남에서 그려진 불화와 맥을 같이한다.

화면을 채운 수많은 붓질은 초지(初志)로 향한 석가여래의 눈빛에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림 전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펄럭이는 가사장삼과 두 손을 모은 모습으로 깨달음의 실천을 지향하는 부처임을 보여주고 있다. 석가여래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깎아 세운 절벽을 배경삼아 서 있으니 배경으로 치자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고목들은 이미 그가 오온(五蘊)을 뛰어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징표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화면 전체를 구획한 절벽은 두 번째 마음과의 타협을 일체 배제하고 있는 날카로운 정신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화는 승려(禪師)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으로서 선사들의 수행의 정취를 만족시키며 주로 불교(선종)의 인물이나 고사를 다룬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선화는 선종의 종지를 드러내고 있는 그림이며 화풍상으로 볼 때 거칠거나 빠른 붓질, 선염과 발묵의 우연성으로 말미암아 활달함과 일격(逸格)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품격은 조사선에서의 간화선 수행법과 그 소통방법과 통해 있어 그 자체가 선의(禪意)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남송대 많은 지식인들은 선가의 암시적이면서도 함축적인 표현방법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 화원들까지도 그림 속에서 함축적이면서도 정확하고 적절하게 형사(形似) 이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중심적인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마원(馬遠 ; 1189년이전~1225년 이후 활동), 하규(夏珪;13세기 초엽 활동)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았던 화원들이었으나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있으면서도 절제의 미를 추구했던 작가이다.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 차가운 강물에 홀로 낚싯대를 드리우다>는 마원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림 9)
차가운 강가에 홀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은 자신의 배를 띄운 강물도 관심 없어 보이며, 그 낚싯대에 딸려 올라올 그 무엇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촌로가 배를 띄운 것은 낚시를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며, 낚싯대를 내린 것도 뭔가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허로운 강물 한가운데 배는 무심히 오가며 잔잔한 강물은 뱃전을 가늘게 쓰다듬고 있다. 세필로 그린 물결 몇 가닥이 큰 강물이 되어 화면 안에 가득 찼으며 그 중심에 있는 어부의 세심한 묘사로 그림은 순간적으로 많은 웅변을 들려준다. 허(虛)와 실(實), 즉 비움과 채움이 서로 상응(相應)하는 경지를 그림에서 추구하였던 것이다.

마원은 비록 궁정에서 활동하던 직업화가였으나, 당시를 대표하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남송의 문인들이 추구하였던 그림의 가치와 표현 방법들의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선화에서 드러난 선미(禪味)는 선화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 문인들의 취향에도 접근하였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남송대 선종은 그림과 시, 문인화와 선화 간의 소통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김현정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졸업. 상명대학교에서 <석가여래 설법도상의 연원과 전개>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국전통문화학교강사, 서울시문화재전문위원. 논저서에 《한국문화를 다시 본다》(공저) <대승경전설법도상의 도상적 연원에 대한 고찰> <성도전법륜도상의 도상적 연원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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