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1. 머리말 

인경스님
동방대학원대학교
명상치료학 교수
문화란 안팎으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다. 이쪽 골짜기의 물과 저쪽 골짜기의 물이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결국은 하나가 되어 강물로 흘러가듯이, 문화라는 것도 서로 뒤섞여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간다.

최근의 명상 붐은 사회적인 현상이지만, 외부의 자극 때문에 비롯된 부분이 있고, 불교 내부적 힘들에 의해서 진행된 부분도 있다. 명상 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사회적인 배경과 더불어서 불교계 내부의 대응이란 측면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어떤 문화가 유입되면 기존의 문화를 ‘자극’하고, 그에 따른 기존 문화의 ‘대응’이 뒤따르면서, 서로 충돌하여 ‘갈등’이 생겨난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철학적이거나 혹은 문화적인 논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가 대중에게 이해되고 다시 새로운 관점에 의해 통합되면서,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중요한 전환기에는 갈등과 더불어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논쟁들이 나타났다. 이것들을 살펴보는 일은 문화가 어떤 형식으로 흘러가고 발전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 준거틀이 될 수가 있다.

필자가 ‘명상 붐과 불교계의 대응’이란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고, 글쓰기에서 고민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자극과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명상과 관련된 불교계(종단, 학계, 관련 단체들)의 동향을 개별적으로 조사하고 그들의 행적들을 기술해갈 것인가, 아니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개인 내러티브적으로 고찰해갈 것인가? 전자는 직접적으로 불교종단, 학계, 관련 단체들을 방문하고 실제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많은 자료와 더불어서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필자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최근에 질적 연구 방법으로 개인적인 내러티브적 접근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주관적인 측면이 드러나면서 객관성이 약해지는 위험도 있지만, 반면에 현장감을 주면서 사회적인 현상 속에서 개인적인 경험 내용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하는 장점도 있다. 여기서 내러티브적 접근이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직, 간접으로 개인이 경험한 문화적 갈등, 혹은 논쟁을 중심으로 불교명상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필자는 명상이 유입되는 시기(1970년대), 대중화의 시기(1990년대),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화의 시기(2010년대)로 구별하여 서술할 것이다. 이들 각각의 시기에 존재했던 논쟁들을 재검토하는 것은 아니고, 논쟁에 나타난 자극과 대응이라는 문화적 변화 과정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필자가 특정한 시대적 분위기 안에 살면서, 또한 그 영향을 받으면서 느끼고, 걸어왔던 명상수행에 관한 개인적 내러티브이다.  
     
2. 명상의 유입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 돈점 논쟁

명상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마음의 고요와 통찰을 개발하고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방법, 혹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탈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정의한다면, 명상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모든 문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된 인간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명상을 문화현상으로서 이해하고 특별하게 불교적인 관점으로 제한해서 이해한다면, 명상의 유입은 불교가 전래한 삼국시대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명상수행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것은 돈점 논쟁이 아닌가 한다. 돈점 논쟁은 전통적 선종 내부의 문제 같지만, 멀리 보면 인도적 전통과 동북아의 전통이 만나서 이루어진 해탈과 깨달음에 관한 논쟁이다. 인도적 명상수행이 점진적 측면[漸修]이라면, 동북아의 명상전통은 급진적인 측면[頓悟]을 대변한다. 이들 양자를 통합한 수행이론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통찰의 깨달음과 점차적인 성숙의 변증법은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적인 본성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1) 인도 명상의 유입

명상은 해방 이후, 6·25전쟁과 4·19, 5·16 군사 쿠데타 등의 혼란기를 접고, 정권이 안정되면서 1970년대 경제적인 성장을 급속하게 이루는 시기에 들어왔다. 이때는 서구 다양한 문화가 물밀 듯이 유입된 시기로서, 명상은 이런 분위기와 함께 들어왔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내륙의 중국을 통해서 육지로 왔다면, 현재에는 서구 특히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인도의 요가명상이다. 서구에서는 1970년대에 활발하게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면서 요가는 폭넓게 전파되었다. 서구에서 명상문화는 영국의 록그룹인 비틀스가 요가수행을 수용하면서 일반에게 알려졌고, 특히 미국의 히피문화와 결합되면서 정신건강법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가는 영적 수행이라는 본래적인 요소보다는 몸매를 가꾸고 건강을 증진하는 미국적 실용적 의미로 변환되었다. 이런 특성은 국내의 상황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한국요가협회가 1970년대에 창립된 이후로 우후죽순처럼 전국적으로 많은 요가원이 생겨났다. 2000년 이후부터는 동사무소나 문화센터, 사람이 모이는 조그만 아파트 공간에서도 요가는 진행되고 있다.

요가 다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명상은 초월명상 TM(Transcendental Meditation)이다. 인도의 베다와 힌두교 전통에 이론적 기초를 둔 초월명상은 만트라(Mantra)와 더불어서 본래의 자기에 대한 각성을 중시한다. 또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나 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 등의 명상에 관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1982년 국내에 소개된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란 책은 필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무렵에 김정빈의 《단(丹)》이란 소설이 1984년 크게 히트를 하면서 한국적 의미의 명상을 찾는 노력도 일어났다. 이런 결과로 단학과 단전호흡이란 이름으로 많은 수행센터가 생겨나서 명상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필자의 대학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사회의 주요과제였다. 대학가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고 새로운 관점의 카를 마르크스적 역사인식 서적이 스터디그룹을 통해서 신입생들에게 교육되었다. 필자는 당시에 솔직하게 갈등이 있었다. 강의실에는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고 현실의 민주화에 대한 토론들과 함께, 정신적으로는 항상 이상세계를 향한 동경으로 이들 명상서적을 탐독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때에 대학을 다녔던 분들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충분하게 공감할 것이다. 이런 갈등에서 필자는 현실 역사적 문제보다는 명상적 세계에 더 끌렸음을 고백한다.

당시에 송광사를 비롯한 전통사찰에서 젊은 세대를 위한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여름수련회를 마련하였다. 이런 부분은 서구 물질문화로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시대적 분위기에 ‘대응’하는 하나의 좋은 방편이었다고 본다. 필자가 불교명상에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수련회에서 비롯되었다. 필자는 19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구산 스님께서 이끄는 송광사 수련회를 다녀온 이후로 항상 마음속에서는 ‘무엇이 나인가?’ 이뭐꼬 화두가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방황하던 필자에게 이 화두는 순식간에 마음을 가득 채워 버렸다.  

이 시기는 필자에게 전통적인 수행법인 간화선과 함께 동시에 새롭게 유입된 인도적 명상이 내면에 유입되어 점차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고, 이것들은 개인적인 가치와 삶의 방향에 아주 깊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늘 미안함과 함께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이었다. 명상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필자에게 민주화 운동은 내면에서 통합되지 않는 채로, 서로 다른 문화처럼 어울리지 못한 떠도는 과제였다.

2) 돈점 논쟁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법문은 1981년 한국 사회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회적 화두였다. 민주화 문제로 한참 투쟁하는 진영, 혹은 진보 지식인들은 이 법문을 현실 문제에 무관심한 불교계의 대표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사회와 소통되지 않는 언구라고,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했고, 불교를 구세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명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영에서는 통쾌한 발언이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극단적으로 갈등하는 사회를 통합하는 언구였고, 따라서 불교계의 대사회적인 대응이었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아무튼 이 법문은 강의실과 술자리에서도 논쟁의 주제가 되는 충격과 같은 모티브, 어떤 신선한 영적인 어떤 메시지를 주었다.

현대사에서 돈점 논쟁은 불교계 내부에서는 일어나서 사회적인 이슈가 된 대표적인 논쟁이다. 당시에 종정이던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되는 보조지눌 국사의 ‘돈오점수’ 수행론을 비판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침묵하던 불교학계는 1987년 보조사상연구원이 개원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돈오와 점수의 문제는 1990년 중반까지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 회자되었다. 불교계 내부의 논쟁이 왜, 일반 사회에서도 관심을 끌게 되었을까?

돈점 논쟁은 사실 깨달음 이후 번뇌의 존재 여부가 핵심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돈점(頓漸)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순식간에 깨닫는 것인가, 아니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가?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사실상 시민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짧은 시간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성취이다. 경제적인 부분과 함께 정치적인 자유도 쟁취한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돈오를 이룬 것이다. 물론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지만, 현대사에서 해방 이후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여전히 남겨진 문제가 있다. 가야 할 길[漸修]이 있는 듯하다.

돈오처럼, 짧은 기간에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정치적 성공과 함께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불교계의 돈점 논쟁은 우리의 이런 모습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간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부를 위해서 정치적 자유를 희생하였다. 하지만 성장한 시민의식은 정치적인 자유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다. 돈점 논쟁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새로운 정치적 환경과 경제적인 혜택에서 정신적 여유를 가지면서, 이제는 영적 웰빙, 행복 체험에 대한 소박한 욕구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돈점 논쟁은 필자에게는 학문적인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간화선이라는 명상수행에 대한 이해가 가로놓여 있었다. 불교명상으로서 돈오와 점수의 전통에 대한 역사적인 원류를 고찰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근본적으로 어떻게 여기 나에게까지 흘러왔는지의 역사적인 이해와 한국 간화선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이고, 그리고 현대에서 그 쟁점이 무엇인지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되었다.
           
3. 명상의 대중화
  ―1990년대, 위빠사나와 간화선 논쟁

위빠사나 수행을 필자는 1980년대 후반에 수련회에서 처음 접하였고, 1991년에는 고엔카의 위빠사나 수행을 소개하는 안내서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를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많은 수행자들과 일반인들은 직접 남방에 가서 수행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위빠사나 명상을 대중에게 소개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이 점차 대중화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기존 수행법을 비판하면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은 곧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위빠사나는 남방의 수행 전통이고 간화선은 북방을 대변하는 명상수행이다. 분석과 직관, 점진적 접근과 급진적 방법, 경전중시와 경전 내려놓기, 이런 논쟁은 상당하게 유익한 논쟁이고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중요한 통과의례와 같은 절차였다. 본질적으로 명상수행의 방법 혹은 인간의 본성과 깨달음에 관계된 점에서 돈점 논쟁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은 불교계의 현실적인 대응에 관한 시대적 문제의식과도 연결된 사안이었다.

1) IMF 금융위기

제도적 관점에서 불교계의 중요한 변화는 1996년 정권유착에서 벗어나 개혁 바람이 불면서 새롭게 출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총무원장과 주요 본사주지에 대한 선거제도의 도입은 해방 이후에 정화운동과 함께 가장 큰 내부의 변혁이었다. 또한 효과적으로 대사회적인 책무를 다하기 위한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이 3원 체제가 출범하였다. 정권유착에서 벗어나 종단이 스스로를 개혁하면서 전문적인 그룹이 새롭게 출범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1980년대에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인식과 투쟁의 경험이 있던 젊은 세대들이 불교 내부로 유입되면서, 불교계 내부의 권위적인 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동력으로 작용한 측면이 매우 크다. 물론 선거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도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고 제도가 개선되면서 안정적으로 대중의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큰 변화는 1997년에 터진 금융위기이다. 자유로운 민주화와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었지만, 고속 성장을 이끌었던 기업과 정치권의 유착은 IMF와 함께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것은 방만한 정경유착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기업에 대한 윤리경영, 대외적 개방에 대한 요구가 더욱 거세지게 하였다. IMF는 경제적인 위기였지만 문화 전반에 대한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사람들에게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2) 위빠사나와 간화선 논쟁

이런 사회적인 자극은 불교계에서는 수행의 ‘효과성’에 대한 논쟁으로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이다. 남방에서 유입된 위빠사나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그들은 기존 수행론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여갔다. 위빠사나는 보다 쉽고 현실적으로 더 유용하다는 논지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간화선은 어렵고 비현실적이다고 비판한다. 위빠사나는 점검이 있지만, 간화선은 점검하는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런 논의를 보면 IMF 이후로 기업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와 더불어서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처럼, 수행에서도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수행과 계율을 점검하고, 감독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위빠사나는 1970, 80년대에 소개가 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강력하게 대중에게 어필되었다. 특히 필자가 느끼기에는 1997년 IMF 이후로 위빠사나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2000년 이후에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은 학술적 논쟁뿐만 아니라, 불교계 신문과 《불교평론》 등에서 자주 다루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또한 초기불교에 근거한 위빠사나가 단지 열풍이 아닌 구체적인 공식 단체로서 법인화되고, 여기저기에서 위빠사나 선원이 개설되고, 남방의 선지식들이 초대되어서 법회를 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일상화되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다.    

3) 간화선 진영의 대응

간화선은 한국 전통적인 수행체계이고, 조계종의 근간을 이루는 수행덕목이다. 하지만 1970년 이후 2000년까지 30년 동안 새로운 명상 방법들이 유입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놓이게 되었다. 간화선 전통을 계승한 이들에게 들이닥친 비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인도 전통 《베다》 문헌에 기초한 힌두교적 가르침과의 구별이다. 1987년에 간행된 마하리시(Maharish)의 《나는 누구인가》는 본래적 자기나 참된 자기로서 진아(眞我)를 찾는 명상법으로,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진화되는 한국 사회에 뜻밖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 전통적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힌두교적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본래적 자기’나 ‘참된 자기’란 번역 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돈을 야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무아와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이들은 대승불교나 간화선자들의 가르침을 비불교적 요소라고 비판하곤 했다. 이런 유형의 비판은 위빠사나 진영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두 번째는 현실 속에서 간화선의 수행이 무겁고 어렵다는 일반 대중의 호소 문제이다. 위빠사나는 관찰 가능한 마음의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을 관찰하면 쉽게 그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고, 그것들에 어떤 실체 없음을 통찰할 수가 있다. 하지만 간화선에서 말하는 본성, 본래면목, 성품 등은 무엇을 말하는지 ‘의심을 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의심이 잘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의심이 잡히지 않고, 관찰이 어렵다 보니, 답답해진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간화선은 과거의 동어반복을 넘어서, 좀 더 친절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셋째는 윤리적인 문제이다. 간화선자들은 깨달음만을 중시할 뿐, 사회적인 책임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소홀하다는 윤리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종교의 세속화 혹은 타락은 종교계가 직면한 오랜 역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검소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간화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화살이 함께 돌아간 부분도 있다.

사실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간화선 진영은 일방적으로 내몰렸지만, 한편으로는 비판에 직면한 간화선 수행자들은 대응을 모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반성과 함께 결집하는 효과도 주었다. 이런 도전에 대한 간화선자들의 대응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우선 선원의 수좌들을 중심으로 ‘간화선의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조계종 교육원과 수좌회가 중심이 되어서 지침서 《간화선―조계종 수행의 길》(2005년)을 간행했다. 이것은 그동안의 침묵하는 관례를 깨고 대중에게 한 발짝 다가가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간화선 수행을 대표하는 전국선원 수좌회는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인 대응을 목적으로 2012년에 법인화되어 공식 단체가 되었다. 이런 부분은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간화선의 대사회적 정체성과 함께 무소유행을 실천하는 수좌회의 복지 문제를 확립하려는 노력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현장에서도 간화선 수행을 보다 구체적이고 쉽게 접근하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현장에서 실행되고 상당한 성과도 얻어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계종 포교원에서 간화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안국선원이나 정토회의 간화선과 관련된 프로그램은 많은 대중이 참여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1990년대 이후로 위빠사나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확산되어 갈수록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은 필자에게 가장 자주 지속적으로 느껴온 문화적 갈등 요소였다. 승가 내부에서도 여기저기서 갈등을 목격했고, 또한 재가자 그룹에서도 쉽게 목격되는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중시하는 이들이 과도하게 대승불교와 간화선을 비판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주도권 다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반 사회의 명상 붐에 대한 기존 불교계의 ‘대응’하는 방식은 명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명상을 비불교나 외도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대체로 기성세대는 명상을 애써 외면했지만 젊은 세대는 새로운 사회현상에 대해서 적극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필자의 경우는 오래전부터 서구에서 전래된 명상법에 대해서 익숙한 관계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존의 수행법, 간화선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간화선을 명상으로부터 독립시켜서 ‘구분’하기보다는 명상의 ‘일부’, 한 형태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우선적으로 간화선의 발생과 더불어서 역사적인 전통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통해서 새롭게 시도하였다. 이를테면 공안과 화두를 구분하면서 당송 대에 성립된 과거의 공안, 선문답으로 회귀가 아니라, 항상 화두는 지금 여기 현실에 기반하여 의심되고 질문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시에 초기불교에 기반한 위빠사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간화선의 체계로 통합하는 방식을 모색하였다. 필자는 현장에서 간화선을 지도하면서 초기불교의 경전에 기초해서 간화선을 지도하면 보다 쉽게 대중이 수용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4. 명상의 토착화
  ―2010년대, 상담과 심리치료에 활용

급격한 정보화 사회로의 이동과 함께 명상 붐이 확산될수록 현실문제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했다. 이런 시대적 요청은 내부적으로는 전통적인 수련회가 템플스테이로 확대되고, 승가교육의 개혁으로 이어졌으며, 외부적으로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새로운 분야에 응용되면서 불교명상의 사회적 역할 확대(청소년문제, 사회복지)로 연결되었다.

1) 템플스테이와 승가교육 개혁

2000년대 이후로 불교계에서 가장 큰 성과는 템플스테이와 승가교육의 혁신이 아닌가 한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맞이하여 외국인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내국인에게는 사찰문화 체험이지만, 외국에서는 성공적인 세계 5대 관광 상품으로 크게 호평이 이어졌다. 시작된 지 10년이 지나면서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참여했을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사찰의 문화체험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재가 다양해지고, 특히 명상수련과 힐링 문화를 체험하는 중요한 소통의 공간이 되었다. 템플스테이는 불교계의 잠재적인 힘과 현실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했다.

승가교육의 혁신은 그 중요성이 외부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매우 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1987년 이후로 승가교육의 혁신은 논의가 이어져 온 문제이다. 당시에는 기존 세대의 반대로 조선시대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적으로 계승된 과목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름만 ‘강원’에서 ‘승가대학’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2010년 교육원을 중심으로 공청회를 거쳐서 승가교육의 핵심인 교육과정을 현대화시키고 무엇보다도 현실 속에서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새로운 승가상을 정립하고, 시대에 부응하는 유능한 승려를 양성한다는 목표에 걸맞게 그동안 강조해온 한문 중심의 불교 경전과 어록 등의 과목을 축소하고, 불교철학과 역사를 담고, 외국어 학습 및 현실에서 대중교화를 위한 상담심리와 같은 과목 등을 강화한 점이 그 특징이다.   

2) 사띠 논쟁

사띠(sati) 논쟁은 2차에 걸쳐서 일어났다. 그동안 성장해온 초기불교 전공자들과 대중적인 성공에 따른 위빠사나 수행에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 제기이다. 2000년에 일어난 제1차 사띠 논쟁은 수행론에 관한 것으로, 일상의 삶에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당한 수준의 선정 힘에 의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 중심이다. 반면에 2차 논쟁은 2010년에 있었던 사띠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지만, 실제로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맥락에서 발생한, 새로운 문화의 수용과 대응에 관한 대중적 논의였다. 

먼저 사띠 수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3禪]의 선정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의하면 사띠 수행을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선정의 힘이 필요하기에 범부의 수준에서는 온전하게 수행할 수 없다. 반면에 이런 관점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사띠는 일상의 삶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띠가 일정한 수준의 선정의 힘을 전제한다면, 수행을 너무나 고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명상을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쟁은 현학적인 논의 같지만, 불교명상이 현장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사띠 수행은 물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사띠 수행은 선정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중화에 따른 명상수행의 통념화 혹은 개념화에 따른 반성적 성격이 강하다.

3) 상담과 심리치료의 활용

명상의 상담과 심리치료에 활용은 미국에서 1990년대에 시작되고, 2000년 이후에는 국내에 유입되면서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이 영역은 불교계보다는 상담학과 심리학계, 혹은 의학계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필자는 2000년에 심리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불교명상이 심리치료와 같은 현실 속에서 매우 유용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해방 이후 불교학은 일본의 영향 아래 문헌학적 접근이 대세를 이루었고, 이런 접근은 현실대응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되어 온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던 그때, 명상의 새로운 분야에의 활용은 필자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2010년에 사띠의 번역(마음챙김인가, 알아차림인가) 문제로 2차 사띠 논쟁이 발생하였다. 외형적으로는 명상의 핵심 개념인 사띠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와 연결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불교명상이 심리치료 분야에 활용될 때,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띠(sati)는 불교명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인데, 이것이 유럽의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 Awareness로, 미국 심리학(인지행동치료)에서는 mindfulness로 번역되었다. 인지행동 심리학자들이 심리치료에서 mindfulness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사띠(sati)’보다는 오히려 ‘위빠사나(vipassanā)’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은 서구 심리학, 특히 미국의 심리학계에서 인지행동주의 전통에서 명상을 수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서구적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전략은 고통은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통제적이고 관리적 입장을 선택한다. 이것은 인지행동치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불교적 명상의 관점에 접목되면서 고통은 제거하기보다는 수용되어야 하며, 증상은 통제보다는 존재하는 그대로 통찰하는[vipassanā] 상담이나 치료적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명상에 기반한 치료 개입 프로그램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임상에서 그 효과성이 증명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떤 학자는 제3의 물결이라고 구별해서 부른다.

이런 논쟁은 불교명상의 활용에 관한 논의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전통적 문헌적 관점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유용성의 분야로 돌렸다. 또한 이것은 불교명상이 이웃 학문 영역인 심리학과 결합되면서 ‘명상심리치료’ 혹은 ‘명상상담’과 같은 새로운 학문영역을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새로운 분야는 대학과 다양한 전문학회로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구체적으로 대학에서는 명상과 관련된 학과(명상상담, 불교상담심리)가 설치되고 대학원에서는 전공분야(명상학, 명상심리)가 생겨났으며, 명상과 관련된 연구소나 학회(명상상담(치료)학회, 불교심리치료학회, 명상치유학회)가 설립되었다. 이제 명상은 단순한 대중적 명상 붐이 아니라, 기존문화와 융합되어 토착화되고, 연구되면서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전문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6. 결론 및 논의

본고는 ‘명상 붐과 불교계의 대응’이란 주제에 대해서 자극과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명상의 유입기(1970년대), 대중화(1990년대), 토착화(2010년대)라는 시기로 구분하여 그 역동성을 기술하였다. 명상의 ‘유입기’에는 인도명상, 요가명상, 초월명상의 유입을 언급했고 내부적 논쟁은 돈점 논쟁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명상의 ‘대중화’ 시기에는 요가와 더불어서 위빠사나의 확산을 언급했고 내부적 논쟁으로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논쟁을 언급했다. 마지막 명상의 ‘토착화’ 시기에는 2차에 걸친 사띠 논쟁과 함께 상담과 심리치료에의 활용과 더불어서 전문화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했다.

여기서는 앞으로 몇 가지의 과제를 언급함으로써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첫째, 방법론의 문제이다. 여기서 취한 기술 방식은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내러티브적인 방식을 취하였다. 전통적인 문헌 연구는 연구자와 연구의 대상(문헌)이 엄격하게 분리되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라는 사회적인 현상은 문헌이나 실험연구처럼 통제가 가능하지 않고,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문화 속에서 함께 숨 쉬는 연구자는 문화라는 맥락 안에 존재하기에, 양자는 서로 분리되거나 객관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기술하려는 대상과 연구자는 서로 뒤섞여 있고, 상호작용하는 연기적 관계로 묶여 있다. 이 점은 연구방법론으로서 앞으로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둘째, 명상 붐과 기존 종교와의 관계이다. 명상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시대적인 스트레스 문제와 아픔에 대한 치유적인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종교에 대한 효용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산업화가 되면서 종교는 급격하게 세속화되었다. 하지만 이제 정보화시대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적 가치는 희석되고 있다. 단순한 믿음의 강조는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중이 명상에 깊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전통적인 종교가 현실문제에 직접적으로 응답을 하지 못한 까닭이다.

셋째, 인간의 본성, 본질, 성품의 문제이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힐링 문화는 새로운 사조로서 중요한 흐름이지만, 힐링이 마음 산업이라면서 산업화되고 값싼 기분전환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이것은 오래가지 못한 거품으로서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명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이 현실적인 문제와 연결될 때는 전문화 되어야 하고, 나아가서 본질적으로는 근본적인 본성, 깨달음과 연결되어야 생명력을 유지해갈 것이라고 본다. ■

 

 인경 
동방대학원대학교 명상치료학 교수.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하여 송광사 전통강원을 졸업하고 중강 역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몽산덕이(蒙山德異) 선사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술로 《몽산덕이와 고려후기 간화선사상 연구》 《화엄교학과 간화선의 만남》 《현재 이 순간에 머물기》 등이 있다. 현재 한국명상치료학회 회장, 명상상담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