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1. 들어가는 말: 논의 범위

박재현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이 글은 불교 수행이 현대에 들어 성행하고 있는 명상문화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다. 이는 명상과 불교 수행의 관계를 차이점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되짚어보자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불교 수행과 명상의 차별성을 부각하며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바, 이를 두고 불교 수행과 명상은 관계가 없다거나 혹은 이 둘은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명상과 불교가 만나는 접점은 당연 힐링(healing)이다. ‘열풍’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불교계의 여러 인사들이 힐링 대열에 앞장서고 있다. 심리치료 혹은 마음치료에 심리학적 치료방법론 못지않게 불교 수행법이 효과가 있다는 보고서와 논문은 국내외에서 이미 차고 넘친다. 힐링과 불교의 접목은, 그 초기에는 주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과 서구 심리학이 서로의 영역을 조심스럽게 넘겨다보는 수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 후 힐링이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얻고 퍼져 나가면서 분야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불교가 힐링 속으로 뛰어드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불교학 전통에서는 서로 접점을 찾기 어려울 만치 상이한 이론과 사상들이 힐링 속에서 비로소 편안해졌고, 전혀 다른 역사적 전통과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종교 수행법과 명상 수행법들도 힐링이라는 한 지점으로 집합하고 있다. 이제 힐링 속에서 명상과 불교 수행법은 구별할 수 없을 만치 혼재되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불교 수행과 명상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논의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있다. 명상은 종교와 심리치료 분야는 물론이고 예술과 음식 등 다방면에 걸쳐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고 그 개념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명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자체가 매우 곤혹스럽다. 명상을 거론하는 사람치고 이 물음에 한 마디씩 거들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이들의 설명 내용은 공감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을지언정, 학술적으로 따져 묻기는 곤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설명 내용이나 방식이 문헌이나 객관적 연구방법론에 근거하기보다는 대체로 당사자의 체험을 근거로 비학술적인 용어를 통해 발언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명상은 마치 토끼 뿔 같아서 그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마치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는 것 같아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명상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명상이라고 할 것인가’를 따져 물어서 뭔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내기에는 애초부터 무망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명상의 목적과 지향점 즉 ‘왜 명상을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명상의 정체성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이 물음에 대해 어렵지 않게 얻어낸 결론은 ‘치유(혹은 치료)’와 ‘행복’이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거론되는 명상에서 이 두 가지가 제외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법 역시 2,500년을 넘어서는 시간의 퇴적과 인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공간적 방대함이 논의를 어렵게 한다. 불교 수행은 시공간의 차이와 사회적 환경과 조건의 차이, 그리고 어쩌면 개별 인간의 습성의 차이에 따라 연속과 단절을 보이며 때로는 유사하고 때로는 상이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이것이다’라고 확정 지어 말하기 어렵다.

마음(혹은 심리나 의식이라 해도 무방하다)에 대한 불교이론 역시 그러해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본다’는 식의 설명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유효하거나 참일 뿐이다. 결국 불교의 수행법 전체를 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논문 형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고, 본 연구자의 능력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논의 범위를 불교 수행법 가운데 선(禪) 수행에 한정하고자 한다.

2. 만해가 보는 선과 명상

선과 명상을 변별력 있게 설명한 문헌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명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별로 오래된 용어가 아니며, 한자문화권의 고대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제강점기의 문헌에서 선과 명상에 대해 기술한 글이 보이는데, 한용운의 〈선과 인생〉이 그것이다. 만해는 선과 명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禪)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을 일종의 종교적 행사로만 아는 것은 오해다. 선은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冥想)도 아니요, 심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마음을 닦는 것, 즉 정신 수양에 대해서는 불교의 선만 있을 뿐 아니라, 유교에도 있고 예수교에도 있으니, 유교에는 맹가(孟軻)의 구방심(求放心)과 송유(宋儒)의 존양(存養)이 그것이요, 예수교에는 예수의 요르단 하변(河邊)에서 40일간 침획명상(沈劃冥想)한 것이 그것일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의 방식이 다소 다를 뿐이다. ……인생관으로 보아서, 인격적으로 보아서 사람은 피동되지 않는 것을 참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만해는 먼저 선을 불교에 한정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권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말함으로써, 선의 외연을 특정인에서 인간 일반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冥想)도 아니요, 심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라고 한 말을 근거로 볼 때, 신앙이나 학술 연구 혹은 고원한 명상은 특정인들의 전유물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선의 외연을 이렇게 인간 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는 이유는 목적론적 관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선의 목적을 정신수양 즉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동되지 않는 인간’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 즉 참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선은 불교라는 종교적 특징보다는 인간 일반의 정신수양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어서 만해는 인간 일반에 적용되는 정신수양법의 예로 예수교의 침획명상이나 맹자의 구방심, 성리학의 존양을 들고 있다. 이것들이 모두 내용과 방식을 가리키는 말만 조금 다를 뿐, 정신수양이라는 목적에는 모두 부합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정신수양이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결국 선이란 불교에서 사용하는 정신수양을 가리키는 용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해의 생각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의 만해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선과 여러 가지 정신 수양법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선 이외의 다른 정신 수양법은 이 목적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정신 수양법들은 ‘피동되지 않는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실효성과 구체성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교(佛敎)를 믿습니다. 아주 일심(一心)으로 불교를 지지합니다. 그것은 불교가 이러한 것이 되는 까닭입니다. 불교는 그 신앙이 자신적(自信的)입니다. 다른 어떤 교회와 같이 신앙의 대상이 다른 무엇−예(例)하면 신이라거나 상제(上帝)거나−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자아(自我)라는 거기에 있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자아라함은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과 물을 통해서의 자아입니다. 즉 사람 사람의 오성(悟性)은 우주만유(宇宙萬有)를 자기화할 수 있는 동시에 자기가 역시 우주 만유화 할 수 있는 것이외다. 이 속에 불교의 신앙이 있습니다. 고로 불교의 신앙은 다른 데 비하여 예속적이 아니외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해는 선이 정신수양이라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다른 수양법과 구별되지 않지만, 실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변별력과 차별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른 정신수양법은 피동되지 않는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예속적이거나 실효성이 적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만해의 관점이 얼마만 한 타당성과 유효성을 갖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선과 명상의 관계를 살피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만해의 관점에 따르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을 목적으로 한다는 전제 아래서 선과 명상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동되지 않는 완전한 인격의 완성이라는 목적에 끝내 부합하고야 마는 것은 선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과 명상은 멀어진다. 만해가 말한 피동되지 않는 참사람을 선 수행의 지향점으로 볼 수 있다면, ‘치유’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의 각종 명상법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지는 저마다 돌이켜 생각해 판단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3. 수행과 치료의 착시현상

선(禪)과 명상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안내자(혹은 지도자)의 위상과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선에서는 선사(禪師)라고 부른다. 안내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마음 전환과 관련된 어떤 안내 혹은 지도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명상과 선은 일단 유사해 보인다. 특히 마스터(master)라는 영어 표현은 명상 안내자는 물론이고 선사를 지칭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마스터라는 표현 속에서 명상과 수행은 구별되지 않고, 안내자와 선사 역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명상 안내자와 선사, 양자를 두고 보았을 때 분명한 차이도 있다. 안내 혹은 지도 행위에 대한 반대급부 즉 비용의 문제이다. 명상 안내 행위에 반대급부가 따르는 것은 명상이 일종의 치료 행위임을 보여주는 실물적인 근거이다. 비록 치유라는 말과 혼재하여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명상은 심적 문제 상황을 완화해 주는 치료를 목적으로 하며, 그 대가를 받는 치료 행위이다. 다른 진료과목들이 육체적 질환을 주로 다루는 것에 비해 명상을 통한 심리치료는 심인성 질환을 다룬다는 치료 영역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치료와 치유라는 개념은 특히 명상 분야에서 혼용되고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여 명확히 정의하는 경우는 별로 발견할 수 없다. 서구권의 저작이나 연구성과를 번역하는 경우 큐어(cure)나 힐링(healing)은 치유로 트리트먼트(treatment)나 테라피(theraphy)는 치료로 번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또한 그리 선명하지는 않다. 이 두 개념이 혼재하는 데는 학자들의 불성실 때문이 아니라 법적인 문제가 본질적인 것 같다.

법률용어로 치료란, “주관적으로 치료의 목적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의술(醫術)의 법칙에 맞추어 행하여지는 신체 침해 행위”를 말한다. 국내법에 의하면 치료는 의사자격증 소지자에 한해서, 그리고 객관적인 의술의 법칙에 따라야만 인정된다. 따라서 명상이 객관적인 의술의 법칙으로 인정되기 전에, 또 명상 안내자에게 의사자격증이 부여되기 전에는 ‘치료’라고 하면 불법 의료행위에 해당한다.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치유는 치료라고 내놓고 말할 수 없는 고육지책처럼 보인다.

명상 안내에는 반대급부가 따르고 그것은 사실상의 치료일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엄연히 의료 상거래행위이고, 상거래 행위는 부가가치가 발생하지 않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치료라는 상품이 생산되기까지 소요된 이자, 지대, 임금 등은 물론이고 적정 이윤까지 세밀히 계산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각종 명상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에게 비용을 부과하고 그 일부 혹은 전부가 안내자에게 지급된다. 단순한 차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불교 수행과 명상의 차이를 파악하는 데 속되 보이지만 본질적인 문제이다.

명상이 치료의 성격을 갖는 데 비해서, 선 수행은 앞서 만해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피동되지 않는 참사람을 구현하기 하기 위한 인간 교육의 특징을 내포한다. 또 명상 안내자가 치료자의 성격을 갖는 데 비해서, 선의 선사는 스승 즉 교사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면 명상 치료자는 인생의 멘토나 정신적 지도자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명상치료 과정을 수행(修行)이라는 불교용어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 사마타나 위빠사나 혹은 지관(止觀)이라는 불교 용어를 응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명상은 불교 수행과 유사한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불교 수행은 본래 치료나 치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차법(遮法)은 비구(니) 즉 불교 수행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를 심문하는 절차이다. 약 20여 가지 항목에 걸쳐 해당 사항이 있는지 여부를 가린다. 전향자, 외도, 중병인, 관사(관리), 범죄자, 부채자, 노예, 20세가 되지 않은 자, 부모의 허가를 얻지 못한 자, 황문(거세자 및 동성애자), 적주자(가짜 비구), 축생, 오역을 범한 자, 비구니를 더럽힌 자, 양성구유자, 신체장애자 및 병자 등은 출가 수행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자격 요건이 승가 공동체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마련된 것인지, 아니면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마련된 것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육체적 질환과 심인성 정신질환(psychogenic psychosis)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에서 문제점을 노출한 이들조차도 출가에서부터 엄격히 제한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차법에 근거해서 봐도 심리치료 대상자와 수행자는 엄격히 다를 수밖에 없다.

치료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전제는 병리상태 즉 이상 상황이다. 명상이 치유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심적 병리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심리치료가 의료 분야의 한 영역으로 시행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치료의 반대급부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정당하다. 서구의 명상 안내자들이나 명상 관련 서적에서는 명상 입문자들을 클라이언트(client) 즉 고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명상을 통한 심리 치료행위를 수행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명상 안내자의 역할은 선 수행에서 선사의 역할과는 다르다. 명상은 교육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치료행위이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호오(好惡)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의 문제이다.

4. 고통과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선(禪)과 명상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다음으로 따져 볼 것은 수행(치료)의 대상이 되는 고통이다. 고통은 불교와 명상에서 똑같이 비중을 두는 개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이라는 개념이 다소 추상적인 데 비해서, 명상에서는 고통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스트레스를 들고 있다. 스트레스는 물리학과 공학 분야의 용어로 출발했지만, 이후 의학 분야에 적용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특히 심리적 고통 상황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부각되고 있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있다.

스트레스의 요인은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으로 크게 양분될 것인데, 이 가운데 어떤 부분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관련 학설도 나뉜다.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의학 분야에 처음 적용한 셀리에(Hans Selye, 1907~1982)의 일반적응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 이론은 스트레스의 객관적 양상 즉 외적 요인에 주목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는 스트레스를, 비특이적인 자극(stressor)에 당면한 생체가 그 자극 종류에 무관하게 일으키는 일련의 개체보호 반응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라자루스(Richard S. Lazarus, 1922~2002)는 인지적 평가(cognitive appraisal)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개인의 자원(resources)을 혹사하거나(taxing) 초과하고(exceeding) 그의 안녕감(well-being)을 위태롭게 하는 환경과의 특정한 관계(particular re-lationship)”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대처 과정에 따라 다르고 대처 과정은 인지 과정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개인의 지각과 인지 과정에 주목했다.

또 홈스(Thomas H. Holmes)와 라헤(Richard H. Rahe)가 보는 스트레스는 라자루스보다는 셀리에의 관점에 가깝다. 이들이 발표한 스트레스 지수는 스트레스의 요인을 계량화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표에 따르면, 성인의 경우 배우자 등 가족의 사망(Death of a spouse/ 100, Death of a close family member/ 63)이 주로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이혼과 실업(Divorce/ 73, Dismissal from work/ 47) 등이 상위를 차지한다. 이 지표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 요인들을 정량화함으로써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스트레스의 원인을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으로 나눠봤을 때, 어느 쪽을 관리해야 스트레스 완화 내지는 치료에 본질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선뜻 결정하기 어렵다. 현대의 명상치료는 대개 내적 요인의 관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과적으로 외적 요인을 사실상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침묵함으로써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적 요인이 과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외적 요인의 발생 빈도나 강도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현대의 명상이 고통(스트레스)의 원인을 주로 내적 요인에서 찾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이 구조적인 문제에 침묵하고 내적 요인의 관리에 집중하는 태도는 병인(病因)을 알면서도 병증(病症)만 치료하는 태도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다[離苦得樂]는 불교의 메시지는 행복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명상과 충분히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최근 들어 불교계에서도 행복론이 고조되고 있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불교의 행복론은 대개 초기불전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흔히 거론되는 《행복경(Mahāmaṅgala-sutta)》과 《자애경(Metta-Sutta)》 등이 불교 경전 가운데서도 초기 경전에 해당된다. 이 경전에서 행복을 암시하는 개념들이 과연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행복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고득락의 락(樂)이 명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부합하는지 조심스럽게 되짚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사 초기불교이론에 근거한 이고득락이 명상의 행복론에 부합한다손 치더라도, 대승불교와 선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리인 공(空) 이론에 근거해서 볼 때, 원인과 목적 사이에는 어떠한 결정적 인과관계도 부정된다. 따라서 수행하면 행복해진다는 가설에 내포된 수행과 행복 사이의 인과관계 역시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한 행위’와 ‘행복’ 사이의 인과관계를 전제로 하는 명상 역시 대승의 논리체계 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선불교에 이르면 수행과 행복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선불교 문헌에서는 행복과 관련된 언급 자체를 찾아볼 수 없다. 단적인 예로, 1,700여 개에 이른다고 알려진 공안 가운데 등장인물이 행복해졌다거나 심리적 안녕감을 얻었다는 대목은 찾기 어렵다. 행복감보다는 오히려 살벌한 긴장감으로 점철될 뿐이다.
중국불교사에서 수행론과 관련해서 엄밀한 이론적 접근과 성과를 남긴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규봉종밀이다. 그는 교학불교와 선불교를 종횡으로 오가며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도서(都序)》에서 불교 수행을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분류하였다.

① 외도선(外道禪): 둘로 나누는 생각을 가지고(帶異計), 나아지는 것은 기꺼워하고 못해지는 것은 꺼려서(欣上壓下) 수행하는 것.
② 범부선(凡夫禪): 인과관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正信因果) 기꺼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을 가지고서(以欣厭) 수행하는 것.
③ 소승선(小乘禪): 자아가 공함을 알고(悟我空) 치우친 진리관(偏真之理)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
④ 대승선(大乘禪): 자아와 대상이 모두 공함을 알고(悟我法二空) 그런 다음에 드러난 진리(所顯真理)에 의거하거 수행하는 것.
⑤ 최상승선(最上乘禪): 자신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없으며,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있어서 부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

종밀이 제시한 분류 기준을 살펴보면 선 수행은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그리고 명상에서 통용되는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범주를 아무리 여유 있게 잡아도 범부선 이상을 상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사회적 맥락의 행복은 만족감과 불만족감 즉 기꺼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 수행을 기준으로 볼 때, 불교 수행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불교 수행론 전체를 염두에 두고 봐도, 수행하면 행복해진다는 가설은 절반이 안 되는 진실이다.

불교의 고통론은 스트레스라는 심리적 고통 상황보다는 생로병사라는 실존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부르짖는 선(禪)에서도 일관된다. 명상치료에서 말하는 고통이 스트레스로 대표되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고통론이나 행복론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5. 선은 치유하는가

고통에서 행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치유라고 할 수 있다. 불교용어로는 수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치유에 대한 문제 역시 명상과 선의 관계를 살피는 데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문제이다. 다양한 명상 심리치유 프로그램이 실재하고, 그 치유 효과 또한 양적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제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상을 하니 뇌파가 달라졌다거나 신체에서 나타나는 어떤 수치에 변화가 생겼다거나 하는 통계치가 명상의 치유 효과를 증명하는 자료로 곧잘 제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자료가 명상의 치유 효과를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 환자의 인후통(咽喉痛)에 진통제를 처방하고 발열에 해열제를 처방하고 기침에 진해제를 처방하면, 수치상으로는 분명 증상이 완화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치상의 결과는 감기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는 대증요법(symptomatic treatment)일 뿐 본질적인 치유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상의 치유 효과를 증명하는 양적 연구결과는 공교롭게도 그 치유 과정이 대증요법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명상이 원인요법에 가깝다면 과학적 통계를 도출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치유 방법과 완치 사이에 경과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정 짓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적 연구를 통해 명상의 치유 효과를 증명할 수 없다면, 원리적(혹은 이론적)으로라도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을 통한 심리치유에서 가장 흔하게 상정되는 심리적 문제 상황은 트라우마(trauma)다. 명상 안내자들은 명상을 통해 트라우마가 극복되거나 치유되는 것처럼 상정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에서는 과연 트라우마가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까?

근본적 트라우마는 프로이트가 ‘출생 트라우마’(birth-trauma)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트라우마는 인간이 출생이라는 경험에 직면하면서 겪는 최초의 상실(loss)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렇게 해서 트라우마는 일종의 콤플렉스들을 구성하여, 평생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며 주체(subject)로서의 인간존재의 구성에 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에서 기인된 근원적인 불안과 우울은 인간이라면 회피할 수도 없고 회피해서도 안 된다. 삶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상처들은 근본적인 트라우마에 의미가 덧붙여진 것들이기에 온전히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인들은 너무 쉬운 치유를 꿈꾼다. ……자기반성을 멈추고 암시를 통해 스스로를 달래며 트라우마의 중핵에 자리 잡은 주체의 정체와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탓일 수도 있다. 치유나 힐링이라고 이름 붙여진 여러 방법은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서 복잡한 콤플렉스로 구성된 인간의 마음을 쉽게 치유하려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인 건강성이란 없으며, 이상적인 허구다. 긍정이라는 가치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타자(the Other)가 이미 견고하게 세워놓은 질서와 위계에 어떻게 편입하여 지배적인 위치를 얻을 것인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트라우마의 치유 같은 것은 없다.

위에서 인용한 논지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게 트라우마는 본래적인 것으로, 애당초 치유의 대상도 아니며 치유될 수도 없다. 트라우마의 치유를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것이다.

선 수행에서는 이론적(혹은 원리적)으로 정신분석학과는 정 반대의 노선을 취한다. 근본적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것이 인도 불교이론에서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선 수행에서는 이 근본무명과 정면으로 대적한다. 이를 공언한 한 마디가 바로 돈(頓)이다. 돈은 인간(중생)의 본래 완전성(부처)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돈의 형이상학은 근본 트라우마인 무명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에 대적한다.

선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가진 오해 중 하나는, 선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은 선이 아니다. 수행이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다면 돈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인간은 근본무명의 존재가 아니라 본래 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선 수행에서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애쓰지 않는 것 혹은 힘을 덜어내는 것 즉 생력(省力)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애쓰는 것은 힘씀 즉 득력(得力)이다. 그래서 선의 종장(宗匠)들은, “만약 먼지 한 터럭이라도 힘으로 지탱하려고 들면 바로 삿된 법이지 결코 부처의 법은 아니다.”라고 경책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에서는 수행(치유)이라는 행위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수행은 인간의 중생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중생성이 전제로 깔리면 깨침(부처)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선의 관점이다. 명상을 통한 치유가 내담자의 불완전성(환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과 명상의 접점은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다. 

6. 명상은 단독자 됨을 피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마음(혹은 의식)이다. 마음이 명상과 선 수행 모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에서 묵조(黙照)나 회광반조(廻光返照)를 말할 때 그 비춤의 대상은 늘 마음이다. 명상으로 번역되는 메디테이션(meditaion) 역시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라틴어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나 메디타티오(meditatio)에 만나게 되는데, 그 의미 역시 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이나 어떤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상태를 뜻한다.

명상에서 이 마음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약(藥)의 영어 표현인 메디슨(medicine)이 명상과 어원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명상과 치유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치유는 다분히 서구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명상을 통한 치유는 그 어원상 신에게 귀의하여 그의 품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신비한 치유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교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 밀교(tantra)나 정토 계열의 수행법과 그 맥락상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치유 과정의 비밀스러움이나 절대자의 구원을 희구하는 목적의식이 특히 유사하다.

최근 들어 명상이 심리학을 넘어 영성(靈性, spirituality)과 소명(召命, calling)으로 나아가는 현상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어원에서 보듯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명상은 그 태동에서부터 신성이나 영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치유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모든 인간은 신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이 전제되지 않으면 비밀스러움은 유지될 수 없고, 치유나 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단독자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의식을 모조리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부분의 명상법이 안으로, 안으로 되짚어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명상에 깊이 빠져들수록 사회적 관계를 도외시하거나 외면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명상의 힘이고 또한 한계이다.

명상은, 인간은 끝내 사회적일 수밖에 없고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그의 실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대해 대개 침묵한다.

주체는 항상 특정한 사회구조적 맥락에 놓여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놓인 사회적 맥락과 분리하여 규정될 수 없다. 이런 상식을 치유담론이 망각할 때 이들 담론은 공허한 자기 수양론의 변종이 된다. 치유담론 문제는 자본주의의 작동메커니즘, 사회경제적 관계를 도외시한 채 사회를 단지 개인들의 집합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치유를 논하기 위해서는 왜 사람들이 고통받는지를 개별 시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맺는 사회관계의 분석을 통해서 해명해야 한다. ……치유담론의 공과를 검토할 때 주의할 것은 치유담론이 사용하는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이다. 예컨대 치유담론이 많이 사용하는 개념인 마음, 영혼, 자기 성찰, 자유로움 등이 그렇다. 이들 개념을 추상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이들 개념을 사용하는가?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해야 한다. ……자본―정치―공권력―법원이 맞물려 돌아가는 살인기계. 문제는 이 살인기계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이다. 치유담론은 (무)의식적으로 “살인기계”의 냉혹한 작동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구조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고통이 신의 품 안에서 덜어질 수 있는지는 학술적으로 따질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설사 ‘나’의 고통이 덜어진다고 하더라도, 아직 신의 품에 안기지 못했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 수많은 ‘나들’은 여전히 대책 없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명상이 인간 개인의 단독자 됨을 요구하는 데 비해, 선 수행에서는 비밀스러움이나 구원의 맥락이 확인되지 않는다. 선 수행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내맡길 신의 품이 없다. 그래서 흔히 자력(自力) 신앙이라고 한다. 선에서도 끊임없이 마음을 말하고 안으로, 안으로 되돌아볼 것을 요구하지만, 그때의 마음은 단독자로서의 신성이나 영성이 아니다.

선의 마음은 “중생이 아프니 곧 내가 아프다”로 발설되는 그 마음이다. 선 수행 과정을 상징하는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이 입전수수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인도불교의 수행론에 비해 선 수행은 사회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이는 불교 수행론의 중국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선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선사들에게서 강렬한 사회참여 의식이 발견된다. “현실의 옳지 못함을 부수고 옳음을 드러내는 것이 간화선의 요체”인 것이다.

치유문화가 번성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불황과 우울증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방증인 셈이다. 명상 담론은 고통의 원인과 해결에 관련된 모든 책임을 단독자인 개인에게 돌리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고통일지라도, 명상치유는 각 개인이 알아서 치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명상을 통한 치유는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안심(위안)의 기제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한 채 문제의 해결책을 개인적 자기 성찰, 태도, 마음가짐으로 돌리는 공허한 자기계발론식의 치유 담론은, 어쨌든 선은 아니다.

7. 나가는 말

이 글에서는 선 수행과 명상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불교의 여타 수행법에 대해서는 논외로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논문은 명상과 불교 수행의 관계를 차별성을 부각하며 접근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불교 수행과 명상은 관계가 없다거나 이 둘은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읽혀서는 안될 것이다.

명상을 통해 심리적 고통이나 병리상태가 치유되고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분명 좋은 일이다. 다만, 명상이 치유라면 필연적으로 치유자와 피치유자 사이에 주종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주종관계는 지속될수록 강화되고, 주종관계가 강화될수록 피치유자는 더욱 종속되고 나약해진다. 이것이 모든 치료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치료는 그 특성상 주도하거나 지배하려 한다. 때로는 순응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자율적 권리도 침해하려”들기 때문이다.

치유와 행복이 목적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이 병들어 있고 불행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전제가 없으면 치유와 행복이 목적으로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자신의 중생성을 안타깝게 여기고 깨닫기 위해 애쓰는 것은 분명 장한 일이다.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 그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으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박수쳐 줄 일이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선은 이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 정면으로 대적한다. 이런 식의 인식론적 전제는 중생을 더욱 중생스럽게 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전환을 모색했다. 불성과 돈오는 중생의 본래 완결성을 전제로 하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의 결과물이다.

돈오의 인간관에서 중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조리 부처다. 남김없이 다 부처이니 목적태로 설정할 것이 따로 없고, 목적이 없으니 그것을 얻거나 거기에 이르기 위해 애쓸 이유도 없다. 심지어 그런 일체의 애쓰는 짓은 다 옳지 못하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공언한다. 돈오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치유를 모색하는 등의 행위는 이미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병들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한, 치유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선사 경허는 말했다. 중생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속내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끝내 중생이고야 만다고. 경허가 보았을 때, 깨달음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패배주의자이거나 회의주의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는 단순히 경허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대승불교 특히 돈오를 중심으로 하는 선불교의 수행론적 맥락과 지향점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관점이다.

치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명상의 논리와, 일체의 추구하는 행위는 모두 미망(迷妄)을 양산할 뿐이라고 보는 선의 논리 사이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은 아직 깊고 멀어 보인다. 선 수행과 명상의 접점은 아직은 희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접점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접점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다는 사실에 있다. ■

 

박재현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서울대학교대학원 철학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이고,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과 《깨달음의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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