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1. 머리말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의 고통과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을 던져놓고 우리는 그때의 사회가 어떻게 정의된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되묻게 된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사회는 소사이어티(society)의 번역어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다시 시민사회(civil society)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21세기 현대 한국사회가 시민사회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문민화와 시장질서라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건이 외적으로는 갖춰져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던져진 질문은 다시 21세기 한국 시민사회를 전제로 해서 그 구성원들인 한국인들 개개인의 고통과는 구별될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이 물음은 사회철학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고, 좀 더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사회윤리의 주된 물음이 되기도 한다. 사회윤리(social ethics)는 개인윤리(individual ethics)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서양윤리학사에서 등장해서 주로 사회구조와 제도의 도덕성 문제와 집단 책임 문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 출발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 문제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는 집단의 책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법학에서는 법인(法人)이라는 개념을 동해서 이미 그 책임의 주체 설정이 이루어져 있던 반면에, 도덕적 책임 영역에서는 그 주체 문제가 애매성과 모호성에서 모두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집단 또는 공동체의 도덕 문제 자체가 논외로 다루어져야 하는 불편한 결과와 직면해야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재벌기업이 도덕적 문제를 포함하는 특정 사건의 주범이 되었을 경우에 그 기업이라는 법인체에 벌금 등을 부과함으로써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결국 더 이상은 문제 삼을 수 없는 상황과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그 구성원들 개인과는 차별화되는 집단 또는 공동체의 도덕적 책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다른 논의의 장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 논의의 과정을 통해서 역할 도덕성(role morality)이나 상대적으로 ‘독립된 사회적 차원’을 문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주제로 삼고자 하는 명상(瞑想, mediation)과 사회적 고통 사이의 관계성 문제는 우선 이러한 집단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윤리 문제, 즉 사회윤리적 쟁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도덕 또는 윤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외연은 물론 내포까지도 달라지는 다원성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고 때로 명상이 관습적 도덕의 차원을 극복하는 일까지 포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윤리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명상의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상과 윤리 사이의 이러한 관련성은 최근 윤리학 논의의 중심이 이성(理性, reason)에서 공감(共感, empathy)으로 옮겨오고 있다는 점에서 부각될 수 있다. 공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일차적으로 의미하고, 그것이 윤리의 출발점을 이뤄야 한다는 공감윤리학의 주장은 명상을 통한 사회적 고통의 감소 또는 치유라는 목표 달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 논의는 이 문제에 집중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공감의 윤리학자들이 도덕적 능력의 핵심으로 강조하는 공감 능력을 명상을 통해서 길러줌으로써 명상자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서 타자와 사회적 차원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고통을 치유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더 나아가 이러한 맥락은 불교 명상의 차별성, 즉 공성(空性)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근거한 자비행의 연결이라는 차원에서 좀 더 명료하게 부각될 수 있다.

2. 고통과 공감의 윤리학

1) 삶과 고통 문제

고통 문제는 동서양 사상사에서 오랜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타마 붓다의 고(苦)에 관한 주목이 그 대표적인 경우지만, 서양의 경우에도 에피쿠로스 학파에 의해 고통이 본격적으로 철학과 윤리학의 주제로 들어온 이후로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일’이 인간의 본능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면서 개인적 차원의 결정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윤리적 선택의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고통은 우선 육체로부터 비롯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어떤 점에서 고통은 육체에서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정신 또는 마음의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몸과 마음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그 관계 양상에 주목해온 심리철학자들은 그 관계를 수반(隨伴) 등의 개념을 활용하여 정의하고자 노력해왔다. 확실한 사실은 몸과 마음이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관계를 매개하는 뇌의 활동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연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깊은 연계성을 염두에 두면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이 온전히 분리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의 고통이 곧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마음의 고통은 다시 몸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런 고통은 우리 삶의 곳곳에 편재해 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편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고통 또한 언제 어떻게 내 삶에 파고들지 알 수 없다. 이런 고통에 대해 서양의 주류 철학은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강영안은 비판한다. 고통에 대해 다루는 경우조차도 고통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심으로 고통을 단지 설명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가 서양철학사에서 고통 문제에 관심을 보인 에피쿠로스나 신정론(神正論)에도 유념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런 비판은 충분히 수용될 만하다고 판단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 duhkha)는 이러한 서양 윤리학사의 고통 개념에 비해 훨씬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과 탐진치와 같은 정신적 고통으로 나뉘기도 하고, 자신의 심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고(內苦)와 도적이나 천재지변과 같이 외부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외고(外苦)로 구분되기도 한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이러한 고통이나 번뇌 또한 자성을 갖고 있지 않아 번뇌가 곧 깨달음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불교의 고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해 집착함으로써 겪게 되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해소하는 길은 그러한 실상, 곧 공성(空性)을 깨침과 동시에 그 공성으로 이어진 존재자들에 대해 자비의 눈길과 손길을 던지는 일뿐이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은 일상적 삶의 국면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심각한 고통 속에 빠지는 순간보다는 작은 즐거움 같은 쾌락을 맛보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견디는 시간이 더 많음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삶은 곧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사학적 차원의 과장이거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범하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불교 또는 붓다가 ‘삶은 곧 고통이다.’라고 말했다고 교과서는 강조하고 있지만, 이 명제는 최소한 무명(無明)의 휘장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상적 과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21세기 한국의 상황이 이전에 비해 고통 문제를 상당 부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사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자살 같은 개인적 차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피로사회’라든가 ‘허기사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규정짓고자 하는 노력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한국인들이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직면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경쟁의 터널과 일상화되는 무력감과 좌절감, 그것을 넘어서서 아예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일정한 무관심을 전제로 해서 무감각하게 전개되는 일상들이 한국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신음으로 현재와 같은 휴식과 치유에 대한 관심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고통의 문제를 껴안아야 한다는 사실은 확실한 듯하다. 그 방식은 가능하다면 삶의 중심 과제로 고통 문제를 다루면서도 과장과 위악의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2) 고통과 공감의 윤리

고통은 일차적으로 한 주체가 느끼는 내면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고통을 보고 느끼는 상대방의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호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 고통에 대한 공감이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인간의 공감 능력에 대해서는 맹자의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 이야기나 고타마 붓다의 자비행(慈悲行)에 전제된 동체(同體)로서의 관계 설정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랜 역사 속에서 주목해왔지만, 최근의 공감 논의는 특히 그것이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의 영역에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특성을 지닌다.

최근의 공감에 관한 논의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적 차원의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보살피도록 이끄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실천론적 차원의 질문이다. 물론 이 두 질문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물음을 대체적으로 공유하면서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공감 관련 논의는 공감 개념 자체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내면 상태를 아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보이는 뇌의 반응’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기’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공감에 관한 정의 중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대표적인 정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기’이다. 자비 중에서도 특히 비(悲)와 관련이 깊은 이러한 정의는 공감과 고통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와 연결된다. 공감은 물론 다른 사람의 고통에만 반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 부각된 이유는 아마도 고통이 지니는 절박성과 강도 때문으로 보인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반응 중에서 고통만큼 강렬한 것은 많지 않다. 특히 그것은 몸과 마음의 깊은 연계성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이제 윤리학에서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동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디지털 문명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타자의 고통을 디지털화함으로써 공감의 범위를 현저하게 축소시킨 것이다. 인터넷 게임 등을 통해서 인간과 동물을 포함하는 타자의 고통을 기호화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공감 능력을 지속적으로 앗아가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문명의 핵심 문제 중 하나로 ‘공감의 부재’를 꼽고 있는 폴 에얼릭 등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기분과 경험을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자라면 모두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피터 싱어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다른 존재자’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자에 대한 공감의 의무는 의무론적 관점에서 선의지를 갖고 있는 도덕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부여된 칸트적 정언명법(定言命法)의 범주 안에 있다. 이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선한 유일한 것인 ‘선의지’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는 존재자에 대해서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존엄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그 선의지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할 경우에 이 명법(命法)의 존재 근거 또한 동시에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의지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이익에 호소해볼 수도 있고, 그것에 근거한 호혜성의 윤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라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전제는 때로 이익 자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 공감의 출현에 의해 반증 가능성의 원리에 직면해 논파될 가능성이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이 고통받을 때에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가운데 어떤 한 사람만이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이기성에 근거한 호혜성의 윤리는 최소한 윤리적 원칙으로서의 자격은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공감의 문제에 대해 인식론과 실천론을 통합하는 관점을 보여온 불교윤리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공감에 관한 최근의 논의에서 부각되고 있는 두 가지 질문, 즉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문제와 그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보살피도록 이끄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불교윤리는 무명(無明)에서의 깨침과 그 깨침에 근거한 자비행(慈悲行)이라는 대안을 갖고 있다. 인식론과 실천론이 분리되지 않은 채 총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 이르면 인간을 포함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자신의 연기성(緣起性)에 대한 자각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고 그러한 자각은 곧 자비행의 근거로 작동한다는 것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그 자각의 과정에서 우리는 불교적 명상이라는 실천 방법과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3. 명상을 통한 사회적 고통의 해소는 가능한가

1) 명상을 통한 개인 고통의 해소

명상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한자경은 명상을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 이전까지의 제한된 경험적 나를 초월하는 체험’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스스로의 정신력에 의해 에고(ego)를 벗어나 신과 자연, 우주와 하나가 되는 초월의 경험이 곧 명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명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으로 상실감과 절박감,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믿음 등 세 가지를 들면서 그것들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대의심(大疑心)과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명상은 불교와 같은 특정 종교를 전제로 해서 확산되어 왔지만, 현대에 와서는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마음공부의 과정과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인 명상법이라고 규정하면서 소개하고자 하는 콘필드(J. Kornfield)는 이 명상법이 불교도가 되거나 불교의 의례를 따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 모두가 고요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보다 충만한 사랑으로 깨어날 수 있고 위빠사나 명상도 그러한 내면의 힘을 지지하고 그 힘이 삶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명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과 그것을 통해 마음의 평온 또는 고통의 해소를 의도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서 명상을 마음공부의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명상은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실천하는 마음공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목적은 마음의 평온 또는 마음 고통의 해소이다. 그런데 불교 명상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명상의 목적에 더해서 다르마의 깨침을 통한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영지(靈知)의 일부이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그 둘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마음이 계발된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욕망이 제거된다.
비구들이여, 위빠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통찰지(洞察智)가 계발된다. 통찰지가 계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무명(無明)이 제거된다.
탐욕에 오염된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무명에 오염된 통찰지는 계발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제거되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이 제거되어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이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대표되는 불교 명상은 탐욕과 무명을 제거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나 마음의 평온을 목적으로 삼는 일반적인 명상법과는 차별화된다. 그렇지만 불교 명상을 통해서 스트레스 해소나 마음의 평온을 얻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점이나 일반 명상의 경우에도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명상이 일차적으로는 스트레스 해소 같은 마음의 평온을 얻는 심리적인 지향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다르마의 깨침을 통한 해탈을 얻고자 하는 수행 론적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상을 통한 고통의 해소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통찰지를 가져 안으로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고 있으며,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며 머물고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며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을 관찰한다.

고타마 붓다가 강조한 명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통찰지를 갖고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한 바탕 위에서 몸과 음식, 온 세상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면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관찰하는 일’로 구체화됨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각의 상황에 맞게 구체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이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붓다는 진정한 공부는 학습이 아닌 명상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수행승이여, 세상 수행승들이 가르침들, 즉 경과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을 학습한다. 그는 그 가르침을 학습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고 홀로 있는 것을 피하여 안으로 마음의 멈춤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이여, 그는 학습한 자이지,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는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가르침의 명상은 학습한 대로 가르치는 일도 아니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암송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숙고하고 사유하고 정신으로 관찰하는 것도 아니다. 붓다가 강조하는 명상의 핵심은 ‘홀로 있는 것을 피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의 멈춤에 드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붓다는 나무 아래 빈집에 들어 기꺼이 ‘홀로 있음’을 택해 선정(禪定)을 닦고 방일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서 괴로움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사성제이고, 사성제에 이르는 수행법이 곧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요약되는 멈춤과 통찰의 불교 명상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명상을 통해 고통은 원천적으로 해소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2) 사회적 고통의 본질과 불교 사회윤리 문제

개인의 고통이 불교 명상을 통해 원천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 사회적 고통의 영역으로 확장될 단계에 와 있다. 사회적 고통은 개인의 고통과 연결돼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고 남아 있는 사회적 차원의 고통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윤리학 영역에서 사회윤리학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된 바 있는 이러한 사회적 차원은 대체로 사회구조와 제도를 전제로 하는 개인의 역할 도덕성 문제와 집단 또는 공동체 자체의 책임주체 문제로 나뉘어 받아들여져 왔다.

다시 말해 사회적 차원의 도덕 문제에 대한 책임은 그 사회구조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은 개인들의 역할 도덕성으로 귀속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사회가 집단이나 공동체 자체의 존재성에 근거해서 책임의 주체 자체가 되어 직접 책임을 떠맡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왔다.

이런 사회윤리적 맥락에서 보면 사회적 고통은 사회 자체가 주체가 느끼는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맥락은 하나의 사회가 고통을 느끼는 감각적 주체는 아니지만, 사회를 고통의 주체로 설정하는 일이 관념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다시 말해서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맥락의 고통이 일정한 독자성 또는 고유성을 지니면서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독자성 또는 고유성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 구성원들과의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사유를 통해 사회적 고통의 본질이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연기성의 기반 위에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불교 존재론에 따르면, 개별화된 존재자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의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고립된 존재자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한 개인의 고립된 고통 또한 있을 수 없다. 그 고통은 다른 존재자들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곧 타자의 고통이기도 하다.

보살(菩薩)은 이러한 연기성과 공성(空性)을 깨친 후에 열반에 들지 않고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중생들의 고통을 끝까지 해소하고자 하는 원을 세운 후에 이를 실천하는 자이다. 즉 존재론적 무자성의 깨침을 일상의 윤리적 행위에서 직접 적용하고자 하는 대승윤리의 실천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의 윤리는 자신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미 극복해버린 고통도 자신과 이어져 있는 모든 중생의 고통이 온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실천행의 지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기영은 불교 사회윤리가 세간(世間. loka) 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조율해가느냐의 문제임을 강조하면서 결국 불교 사회윤리란 ‘사회인으로서의 한 개인이 내면적 지혜와 외부적 자비의 활동을 일치시키는 일’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사회윤리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윤리 문제를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서구적 맥락의 사회윤리관에 따르면, 이러한 이기영의 불교 사회윤리 정의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기영의 사회윤리는 세간 속에 사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문제 해결의 지점에 이르면 개인의 지혜와 자비라는 대안으로 환원하고 마는 한계를 노출한다는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개인주의적 관점이나 집단주의적 관점이 갖는 근원적인 한계에 대해 비판해볼 수 있다. 개인과 집단 또는 사회의 관계가 그 중 어느 하나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고립성과 개별성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확실한가 하는 비판이다.

개인과 집단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은 개념상으로 독립성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 상황 속에서 그것들은 서로를 전제로 해서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불교적 사유구조 속에서 무명(無明)의 굴레 속에서 사는 개인을 전제로 할 경우 자신이 속한 집단 또는 사회와의 불가피한 연계성을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깨침의 전제 속에서 그것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한계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별개의 차원으로 보고자 하는 니부어(N. Niebuhr) 등의 사회윤리관은 인식론적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불교 사회윤리는 한 사회에서 함께 사는 개인들의 고통 문제에 대한 보살윤리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고통의 뿌리인 공업(共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해소하고자 하는 자비행이라는 실천을 지향하는 윤리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사회윤리의 맥락 속에서 지혜를 얻기 위한 불교 명상은 동시에 자비행(慈悲行)으로 가기 위한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기반을 쌓아가는 노력의 과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3) 명상을 통한 사회적 고통의 해소 방안         

재물을 위해 사람을 때리지 마라. 우바새가 계를 받고도 재물을 위해 고용인이나 다른 이를 때리거나 험악한 욕설을 하면 우바새는 뜻을 잃는 죄가 되니, 참회하지 않으면 타락하게 된다. ……(중략)…….
사고파는 데 필요한 말이나 저울을 공평하게 하라. 우바새가 계를 받고도 생활을 위하여 장사하면서 물건을 팔 적에 한번 값을 정했거든 그대로 팔라. 계량하는 말과 저울은 고르게 해야 하니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이 우바새는 뜻을 잃는 죄가 되니, 참회하지 않으면 타락하게 된다.

여래가 설하는 보살 둘 중 하나인 재가보살인 우바새를 위한 계를 설한 위의 경전에서 붓다는 재물을 모으고 사고파는 일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계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회적 고통을 주제로 삼고 있는 우리의 논의 속에서 이 계율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고통이 주로 민주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정치경제 구조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돈으로 대표되는 재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돈을 모으는 방법 중에서 가장 일반화된 방법이 바로 장사 또는 사업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사업은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이거나 누군가 만들어놓은 물건을 유통시켜 판매하는 판매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사업의 과정에 기계 부속품처럼 편입되어 하루하루를 소모하여 받는 월급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다.

이런 일상 속에서 최소한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물과 관련된 계율을 지키는 일이 개인적 차원의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재물을 위해 자신이 고용한 사람을 때리거나 험악한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더욱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평한 말이나 저울을 저버리는 일은 더 흔한 세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이 계율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속 갈애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 자신과 연기적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 자체를 행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계율 준수는 그 자체로 불교 공부의 세 축인 삼학(三學)의 출발점을 이루고, 이 계행(戒行)은 명상으로 상징되는 선정(禪定)이나 경전공부로 상징되는 지혜(智慧)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 명상은 이와 같이 삼학의 세 축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명상과는 차별화된다. 계행은 역으로 삶의 무상함에 대한 통찰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알아차리기 위한 선정은 멈춤과 통찰이라는 불교 명상의 과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가르침을 듣고[聞] 그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思] 체득하는[修] 세 가지 지혜[三慧]로 이어지면서 깨침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서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과 실천의 연계성을 연기(緣起)와 공(空)이라는 사회현상의 본질과 연결지으면서 사회적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을 찾아 해소시키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고통은 탐욕을 근간으로 삼아 이기성과 고립성을 강화하는 사회체제로부터 비롯된다.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자유시장경제의 틀로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과 풍요라는 외적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면적으로는 행복지수가 현저히 낮아져 삶의 의미상실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환경오염과 핵전쟁으로 상징되는 지구 공동체의 종말 위협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명상은 이러한 사회구조와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고 주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자칫 개인적 고통의 치유라는 환상 또는 착각을 심어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는 ‘힐링(healing) 열풍’은 자칫 상업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곧 소멸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고는 불교 명상 또는 힐링이 본래의 연기적 기반을 상실한 채 고립된 개인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진행될 경우에 현실화될 수밖에 없는 적절한 경고이다.
불교 명상이 다른 명상과 차별화될 수 있는 핵심적인 지점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 곧바로 자신과 연기적 관계 속에 있는 타자는 물론 가족과 국가, 지구공동체라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고통에 대한 성찰과 연민, 그리고 자비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불교 사회윤리적 정언명법의 논리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단순히 분리된 자신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춘다거나 자신의 심리적 평안을 얻는 데에서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불교 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불교 명상은 개인적 고통에 대한 성찰과 치유는 물론 그 고통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연기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 우리가 함께 짓는 공업(共業)에 대한 자각과 자비행까지 포함해야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4. 맺음말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대표되는 불교 명상은 깨침을 통한 열반을 목적으로 삼아 전개되는 수행과정에서 지계행(持戒行)과 지혜행(智慧行)이라는 다른 두 축과 연결되어 있는 삼학(三學)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명상과 차별화된다. 이러한 차별성을 전제하고 나면 불교 명상은 개인적 차원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사회적 고통의 해소를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진다. 만약 그러한 자각을 하지 못한 채 불교 명상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는 무명(無明)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불교 명상의 특성을 알고 실제 명상에 임해서 사회적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복잡성과 유동성으로 인해 그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고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자칫 ‘자비행’이라는 공허한 구호에 매달리거나 다시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에만 관심을 갖게 될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 또한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 사회과학의 시각이 연기성 또는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개별성을 토대로 하는 개인주의적 패러다임, 아니면 집단이나 공동체의 실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아서 해결 방안의 모색이 해소가 아니라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에 유의하면서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尊)이라는 불교적 삶의 지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불교 명상이 전개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과 사회 또는 공동체 사이의 연기성에 충분히 유념하면서도 개인 또는 공동체 어느 것으로도 온전히 환원되지 않고 자신 삶의 의미를 찾아갈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 가능성의 범위 안에는 끝없는 탐욕의 확산과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피로와 허기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으로서의 불교 명상’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따뜻한 공감과 배려문화의 확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전주교대 교수 역임.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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