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명상 붐 어떻게 볼 것인가

서언

허우성
경희대 교수
십악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오는 용어로서, 우리와 같은 중생[puth-ujjana]이 쉽게 범하는 열 가지 종류의 악행[akusala]을 가리킨다. 살생, 도절(盜竊), 음란, 기망(欺妄), 양설, 악구(惡口), 기어(綺語), 간탐(慳貪), 질투, 사견(邪見)이 그것들이다. 도절은 훔치는 것이다. 기망은 거짓말이고, 양설은 이간질, 악구는 욕설, 기어는 꾸민 말, 그리고 간탐은 인색과 탐욕이다.

우리가 사람을 죽이기는 어렵지만 다른 생명은 잘 먹는다. 소유하고 낭비하고 때로는 훔친다. 음란하기 쉽고 거짓말도 잘한다. 화가 나면 욕설도 한다. 사람이 십악을 동시에 모두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섹스, 거짓말, 폭행과 살인처럼 떼를 지어 올 때가 많다. 우리는 흔히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십악을 적당히 허용하면서 ‘마음 편히’ 살아간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중생들 중 소수의 사람들이 이런 편의주의를 참지 못하고, 계율을 지키고 명상 수련을 함으로써 십악을 전부 없애고 진리와 평화의 삶을 얻었다. 하지만 그 전통이 도중에 잊혔다. 전통 회복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불교가 되었고 그 중심에 부처가 있었다.

우리 시대의 ‘세계적인’ 명상가 틱낫한(1926~  ) 스님은 명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만물이 그러하듯 부처도 항상 변화하고 진화한다’고, 그리고 ‘싯다르타 시대의 고통과 우리 시대의 고통은 다르다’고도 말했다. 이 시대의 고통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는 이런 대자대비의 시대 인식은 틱낫한을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틱낫한은 개인 구원과 전체 구원이 둘이 아닌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간디가 있었고, 달라이 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인도 문명에 뿌리를 둔 그들은 시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에 적극 대처했다. 틱낫한에게는 베트남 전쟁, 달라이 라마에게는 인도로의 망명, 간디에게는 식민지 상태와 인도 사회의 분열이 각각 시대의 고통이었다.

1. 사문의 출현과 십악의 극복

일종의 역사철학을 담고 있는 장아함의 《소연경(小緣經)》은 부처와 그 제자들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다소 신화적인 언어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도덕의 타락과 회복에 있었다. 《소연경》은 인간이 짝을 짓고, 성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집과 방을 만들었지만, 음욕이 더욱 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으로 생산물은 저질이 되었고 양도 감소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삶의 질을 떨어트렸다. 《소연경》은 이어서 왕과 사문이 출현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얘기는 먹을거리를 둘러싼 인간의 나태와 탐욕, 그리고 경쟁적인 축적에 관한 것이다. 축적이 시작된 시점은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 얘기는 이렇다. 중생들은 한때 저절로 난 멥쌀을 두고 처음에는 필요한 만큼만 거둬서 먹다가 약은 꾀[힐혜(黠慧)]를 부려서 서로 경쟁적으로 축적하고, 멥쌀의 질이 떨어지고 마침내 그마저 나지 않게 되었다. 약은 꾀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이지만 모두에게 닥쳐올 장기적인 결과에는 어둡다. 먹을 것이 없어지자 이에 당황한 중생들은 토지를 사유화하기로 했는데, 소유권이 생긴 다음에는 남의 벼를 훔치는 자가 나타났다. 훔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중생들은 왕을 뽑아서 이런 다툼을 다스리게 하고[治理] 대신 쌀을 모아서 주었다. 왕의 임무는 바른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부처의 출현 이전에 이미 가정생활 자체를 문제로 본 아주 특이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집이란 큰 걱정거리다. 집이란 독한 가시다. 나는 이제 이 사는 집을 버리고 혼자 산림에 들어가 고요히 도를 닦으리라.’ 하고. 이 창조적 소수들은 집을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 고요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릇을 들고 마을로 들어가 밥을 빌어먹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다 기꺼이 공양하고 기뻐했다. 여기에 비로소 브라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할 당시의 브라만은 선(jhāna)을 버리고 환속하여 책(gantha)정도나 외는 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살림을 잘 경영하여 많은 재보를 모은 사람들은 바이샤였고, 중생 중에 기교가 많아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수드라였다. 여기에 앞서 말한 치리의 왕 곧 크샤트리아 계급까지 포함하면 사성 계급이 된다. 이들은 모두 집을 짓고 방안에서 음욕을 즐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십악을 쉽게 범하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선행을 베푼다고 해도 죽음과 재생, 그리고 재사(再死)를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제5종이 사문인데, 크샤트리아뿐만 아니라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 가운데서도 세속 생활에서 겪는 십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출신성분을 초월하여 자기의 법을 버리고 출가한 자, 그가 바로 사문이다. 사문의 특성은 계율과 선정이다. 오직 출가하여 선정을 하면서(jhāyati) 청정한 생활로써 십악을 피하고, 금생에 완전하게 해탈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인과율은 주로 개인의 심신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인데 《소연경》의 인과율은 역사에 적용된 것으로 중생의 타락사를 보여준다. 타락의 연유는 오욕락(五慾樂)에 대한 집착과 경쟁적인 축적이었다. 그런데 타락의 과정은 사문의 등장으로 비로소 역전되었고 십악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었다. 적어도 《소연경》에 따르면, 계율과 선정 중심의 자기 훈련을 가르치는 불교의 기원은 부처의 출현 이전에 있었고, 부처와 제자들은 잊힌 계율과 선의 전통을 회복한 자들이었다.

2. 명상의 깊이와 넓이

틱낫한은 이 시대의 명상(meditation)이라면 깊고 넓어야 한다고 보았다. 먼저 아래의 인용을 보자.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명상을 수행하면, 우리는 우리의 공포, 절망, 망각을 초월할 수 있다. 명상은 도피가 아니라, 마음챙김(mindfulness)과 집중으로써 실재(reality)를 바라보는 용기이다. 명상은 우리의 생존, 우리의 평화, 우리의 보호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사실, 우리의 고통의 토대에는 잘못된 지각과 잘못된 관점이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관점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하다. 우리의 세계는 지혜와 통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명상의 대상을 찾아서 외부로 나갈 필요가 없다. 명상의 대상은 일상생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제안한 길은 그대 스스로를 돕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그 길은 더욱 깊이 봄으로써 증오, 두려움, 폭력의 근저에 있는 관념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의 집단적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이다.

먼저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서 명상해야 하는가?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또는 승단이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명상해야 한다. 틱낫한에게 마음챙김과 집중은 명상의 수단이다. 명상의 대상은 무엇일까? 인류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고통 일체이다. 공포, 절망, 망각, 증오, 두려움, 폭력의 근저를 이루는 잘못된 지각과 잘못된 관념 일체, 그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 일체이다. 고통은 실재이지 결코 허망한 것(vitatham)이 아니다. 명상은 누구를 변화시키려는가? 나, 우리, 국민, 정부이다. 의식의 집단적인 변화가 최종 목표이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명상한다는 것, 공존의 본성(interbeing nat-ure), 한 사람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연결된다는 것은 모두 같은 말이다. 공존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회교도와 기독교도, 힌두교도와 회교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자매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전쟁을 하지 않을 것, 서로 욕하고 착취하고 목숨을 빼앗는 행동을 멈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위대한 깨달음(the great awakening)이다.” 틱낫한에게 명상은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볼 정도로 깊어야 하고, 인류의 평화와 지구의 생명을 지킬 정도로 넓어야 한다. 내가 ‘내가 아닌 것의 총합’이라면 깊이와 넓이 역시 둘이 아니다. 지구를 구할 깨달음이라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다.

1) 깊게 보자

명상은 먼저 자기의 내면을 보는 기술이다. 명상은 자신의 눈과 귀로 들어오는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을 잘 처리하여, 탐욕이나 증오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을 막아준다. 부정적인 감정은 흔히 의식 수준 아래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십이연기의 일부로 볼 수 있는 촉-수-욕망/분노로 이어지는 다음 경로는 성향(anusaya, 隨眠)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증지부경전》 III, 285)

촉에서 오는 느낌이나 감정[受]에는 낙수, 고수, 불고불낙수가 있다. 불쾌한 감정[苦受]이 분노의 성향[진에수면]을 일으키는 인과 연쇄(連鎖)를 살펴보자. 층간 소음 분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은 그 좋은 사례이다. ‘살인자’는 이미 수개월 동안 소음의 고통을 겪어왔다. 그런데 바로 지금 또다시 위층 사람이 소음이나 진동을 만든다. 이를 즉각 인지하고 거의 동시에 불쾌감의 고통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며 화를 내고, 위층으로 올라가 욕설하며 준비된 칼로 사람을 죽였다. 이 살인자의 마음과 몸에서 일어난 소음의 인지―불쾌감―분노―살인행위로 이어지는 경로는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요한슨의 말대로 “성향이 인간의 본성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명상 수련의 목표는 인과 연쇄의 초기 단계에 개입하여서 분노라는 성향이나 본성이 발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불쾌한 소음’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적절히 반응할 뿐이다.
다음 대화는 부처와 아난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느낌에서 출발하여 온갖 종류의 악행으로까지 진행하는 인과적 연쇄를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vedan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가,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pariyesanā)가,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lābha)이, 획득을 조건으로 판별(vinicchaya)이,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욕탐, chanda-rāga)이,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이,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pariggaha)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macchariya)이,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ārakkha)가, 수호를 조건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호가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수호다.

이는 느낌에서 갈애로, 갈애에서 추구로, 획득, 판별, 욕망, 탐착, 소유, 인색, 수호를 거쳐서 마침내 몽둥이를 드는 데까지 나가는 인과 연쇄이다. 좋은 느낌이 생기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나 물건을 갖고 싶어진다. 그리고 소유하고 수호하는 일에는 흔히 폭력이 동원된다. 오욕락의 대표격인 성적 쾌락[樂受]의 추구가 성폭행을 거쳐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은 이런 인과 연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소유와 소비, 경쟁을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초기불교 경전이 인과 연쇄를 반복해서 제시한 의도는 분명하다. 우리 내부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인과 연쇄를 의식화함으로써 그 연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뇌과학자들이 사용하는 모듈성[modularity]이란 용어를 빌린다면, 불교의 인과율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위를 낳는 모듈성을 극복하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수백억 개의 뉴런이 전문화된 국소 회로로 조직되어 특정 기능을 수행한다. 이 국소 회로가 모듈(module)이다.

우리 뇌는 모듈 군집으로, 모듈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사람은 외부에 자극이 오면 그때마다 일일이 의식하면서 대응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거의 자동적으로 모듈이 활성화된다. 우리가 뱀을 보고 좀 더 빠르게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적인 뇌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 인지신경과학자이면서, 분리뇌 환자 연구자로 유명한 가자니가는 모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듈은 모두 “자동적으로, 비밀리에, 의식 수준 아래에서 작동한다(working automatically, under cover, below the level of consciousness).” 묘듈에 의한 뇌의 활동이 바로 모듈성이다.

가자니가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비의식적 과정(nonconscious processes)을 요구한다. 성공을 위한 이 티켓은 빠르고 자동적이다. 의식적 과정은 비싸다. 시간이 많이 들뿐 아니라 기억력도 많이 필요하다. 반면에 무의식적 과정(unconscious processes)은 빠르고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두뇌 운용법을 배웠는데, 그것이 모듈성으로 정착되었다. 그렇다면 탐욕과 분노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경제적인 반응이지만, 무의식적 과정의 결과라면 그것들은 무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텐진 가쵸 달라이 라마(1935~ )가 말한 ‘감정적 자각(emotional awareness)’이란 개념은 흥미롭다. ‘마음과생명연구소’가 설립된 1990년 이래 마음과 뇌 등에 대해 서양 과학자들과 대화를 지속해 온 달라이 라마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파괴적인 감정의 반응을 알아차려서 미리 차단하는 것을 ‘감정적 자각’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 인용은 초기의 경전을 연상시킨다. 

파괴적 감정의 엄습을 일종의 인과 연쇄(a kind of causal chain)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연쇄는 외부 자극에 의해 시작되며 우리의 행위적 반응으로 끝나게 된다. 감정적 자각의 목적은 이러한 순간적인 과정에 우리의 주의(attention)나 마음챙김을 가져오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 과정을 좀 조절하려는 것이다.

이 인과 연쇄를 의식화하면 “우리 자신을 붙들어서(catching our-selves) 그 과정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과정에 더욱 익숙해지면 감정적 자각은 더욱 깊어지고, “그 인과 연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종적인 목적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잠재우거나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인과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출발점을 인지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인과설의 목표이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인과적 설명은 묘듈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촉−수−욕망/분노의 경로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불교적 인과론은 “자기 숙고적 의식(self-reflective consciousness)” “생각에 대한 생각” 또는 “자기 자신의 정신활동에 대한 자각”으로 이해되는 메타인식(metacognition)에 근거하고 있다. 동물에게 메타인식이 있다고 해도, 그 차원에서는 인간과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십이연기는 그렇다면 최고 수준의 메타인식으로 초대이다. 즉 자신의 갖가지 신체적 심리적 움직임-2천여 년 전 당시 최선의 언어로 그 움직임을 분절함으로써 그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함하여-에 대한 메타인식으로 초대이다. 십이연기의 출발점인 무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무명은 없어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은 인간만이 가진 고도의 메타인식 능력에 기초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한까지 계발(啓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마음챙김은 그 간단한 사례이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명상에 대해 과학적인 관심이 고조된 것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볼 수 있는 불교의 능력을 인정한 때문일 것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라는 프로그램이 미 의료계에 도입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깊이 들여다보기’라는 불교식 수행의 효과에 대해, 미국 심리학의 원조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주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MBSR 같은 것은 21세기 정신과학 분야에서 이뤄진 동서 융합의 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2) 넓게 보자

명상은 세상을 넓게 봐야 한다. 한 개인의 고통이 전 인류의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자신을 제외한, 수많은 인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자기 속에 세계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 이런 넓이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의 하나는 말과 글이다.

달라이 라마는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한다. 그는 새벽 3시 반쯤 일어나, 몇 시간 동안 마음수련과 명상을 한 다음 영국 공영방송 BBC의 국제 뉴스를 듣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계속 접촉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가 여러 해 동안 실천해온 일상”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공유한 세계(shared world)를 알고 싶어 한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 윤리를 말하면서 ‘개인 차원’의 윤리와 그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의 윤리를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런 구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을 간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2008년 시작된 세계적 경제 위기가 소수의 탐욕에서 시작되었지만 수백만 명의 사람에 악영향을 주었던 사례였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지구적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 삶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우리 행동이 지구적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더 큰 인류 공동체에 최선의 이익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이익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반면 오로지 우리 자신의 내면 개발(inner development)에만 집중하고 세계의 더 큰 문제들을 소홀히 하거나, 그것들을 자각했다고 하더라도 문제 해결에 냉담하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어떤 것을 간과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냉담함은 그 자체로 이기심의 한 형태이다. 우리가 윤리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당연히 세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지구적 책임감의 원리이며,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에 접근하는 내 가르침의 핵심이다.

달라이 라마는 여기에서 틱낫한처럼 연기적 사유를 상호의존성의 원리로 이해하면서, 문제가 전 지구적으로 얽혀 있다고 본다. 환경파괴, 테러, 종족간의 폭력 등의 세계의 문제가 있는데도 자신의 내면 개발에만 열중하는 선 수행자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세계의 문제를 자각했다고 해도 해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학자들은 냉혈한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는 이기적 소승교가 되고 만다.

3. 오계를 명상하자

틱낫한은 부처의 진화와 이 시대의 고통에 맞춰서, 오계를 혁신적으로 확장하여 명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확장된 오계는《우리가 가진 세상》(The World We Have)에 나오는데, 마음챙김의 대상이 된다. 좀 길지만 그대로 소개한다. 그는 먼저 불살생계를 ‘제1 마음챙김 훈련(the mindfulness training)’이라고 한다.

생명의 파괴가 초래하는 고통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비를 기르기를 약속한다.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과 광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울 것을 약속한다. 나는 결코 살생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살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의 생각이나 나의 삶의 방식에서 벌어지는 살생을 결단코 지원하지 않겠다.

틱낫한은 생명의 범주에 사람만이 아니라 동식물, 광물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그의 연기론의 폭을 짐작하게 한다.

불투도(不偸盜)를 “제2 마음챙김 훈련”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착취, 사회적 부정의, 도둑질, 억압으로 인한 고통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애를 기르기를 약속하고, 사람, 동식물, 광물 모두의 웰빙을 위한 길을 닦아 나가기를 약속한다. 내 시간, 기운, 더불어 내 물질적인 자산까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나는 관대함을 수련할 것이다. 나는 결코 남의 것을 훔치거나 소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소유물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몰면서까지, 그리고 지구에 있는 다른 종을 고통으로 내몰면서까지 이윤을 얻는 것은 막을 것이다.

고통을 주는 것으로 도둑질 앞에 착취, 사회적 부정의, 억압을 둠으로써 틱낫한은 구조적 폭력이란 개념을 널리 유포시킨 평화학자 요한 갈퉁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착취와 억압이 주는 고통을 자각하는 일과 자애심을 양성하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불사음(不邪淫)을 “제3 마음챙김 훈련”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확장한다.

삿된 성행위 때문에 벌어지는 고통을 자각하면서 나는 나의 책임감을 기르기를 약속하고, 개인과 개인 사이, 연인 사이, 가족과 사회 속에서 안전과 고결함을 보호하는 길을 배우기를 약속한다. 나는 결코 사랑이 없거나 장기간의 약속이 없는 성관계는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나와 상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서약과 남의 서약까지 존중할 것을 다짐한다. 어린이들을 성적 학대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삿된 성행위로 인해 연인들과 가족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나의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이다. 

이 세 번째 훈련에 성적 학대로부터 어린이를 지킨다는 내용이 확장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보인다.
불망어를 “제4 마음챙김 훈련”이라 부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심코 뱉은 말과 타인에게 경청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고통을 자각하면서 나는 사랑을 담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말도 깊이 경청할 것을 약속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고, 그들에게서 고통을 덜어 주도록 할 것이다. 말이 행복이나 고통을 만든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신감과 기쁨,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말로써 진실만을 말할 것을 다짐한다. 확실하지 않은 뉴스는 퍼뜨리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분열이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말이거나 가족이나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을 삼갈 것이다. 아무리 조그마한 갈등이라도 화해시키고 해결하는 데 온갖 노력을 쏟을 것을 다짐한다.

확장된 불망어 계율은 십악 중에 말과 관련된 것들 즉 거짓말, 양설, 욕설, 꾸민 말 등을 개별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말을 하겠다는 것은 욕설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며 확실하지 않은 뉴스,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삼가는 태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분열이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양설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바로 통한다. 진실에의 서약에는 남을 속이려는 꾸민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도 들어있을 것이다. 대신 진실, 자비, 경청, 화해를 위한 말만 하게 되어 있다. 

불음주는 “제5의 마음챙김 훈련”의 대상이 된다.

마음을 똑바로 차리지 못한 소비에서 오는 고통을 자각하면서, 나는 나와 가족, 사회를 위해서 마음을 차려, 먹고, 마시고, 소비함으로써,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건강을 기르기를 약속한다. 내 몸과 의식, 그리고 내 가족과 사회의, 집단적인 몸과 의식 속에 평화, 웰빙, 기쁨을 보존할 수 있는 것만을 섭취하겠다. 나는 결코 알코올이나 다른 어떤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음료들은 사용하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리고 나는 결코 독소가 들어 있는 음식이나 기타 섭취물, 예를 들어 특정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잡지, 책, 영화, 대담 같은 것도 섭취하지 않기를 다짐한다. 이런 독소로 내 몸과 의식을 손상시키는 것은 조상님, 부모, 사회, 미래의 자손들까지 배신하는 것이다. 나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바른 섭생을 수련한다. 그래서 나와 이 사회 속에 있는 폭력, 두려움, 화, 미망을 바꿔 나갈 것이다. 올바른 음식 섭취가 자기 변화와 사회 변화를 위해서 중대한 일임을 이해한다.

틱낫한은 불음주 계율을 확장하여 마음을 챙겨서 적절하게 소비해야 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영화 같은 갖가지 매체들이 공급하는 자극적인 내용도 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평화와 기쁨을 해치므로 금지 대상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거나 마시거나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소비하여서 몸과 마음을 망치는가?

다섯 개의 마음챙김 훈련은 자기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 변화까지를 목표를 하고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오계를 확장하고 있고, 이런 확장은 참여불교의 기초가 된다.

십악은 범하기 쉽고 오계의 실천은 어렵다. 음란하기도 쉽고 거짓말도 쉽게 한다. 섹스, 거짓말, 폭력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십악은 모든 인간 사회에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진화심리학자가 증언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의 언어구애(verbal courtship)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짝을 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며, “언어는 성적 과시(sexual display)를 위해서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어를 진화시킨 가장 강력한 동기의 중의 하나는 짝을 고르는 일이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은 강력한 성적 과시의 힘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를 유혹할 때 참말만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섹스와 무관한 거짓말도 많다. 분리뇌 연구로 유명한 가자니가에 따르면, 인간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성향을 타고 태어났고, 그 성향의 중심부는 좌뇌이다. 분리뇌 환자는 뇌의 한쪽 반구에서 어떤 자극을 받아도 다른 쪽의 반구가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다. 가자니가는 한 분리뇌 환자에게 ‘웃어라’라는 단어가 적힌 카드를 보여줌으로써(물론 이 경우 가자니가는 그 단어가 환자의 우뇌에만 보이도록 하는 장치를 사용했다.) 환자의 우뇌가 환자에게 웃으라고 지시했다. 환자가 웃자 가자니가는 왜 웃는지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당신들 정말 재미있네요!”라고. 이렇게 엉뚱하고 창조적인 좌뇌를, 가자니가는 ‘좌뇌 해석자(the left-brain interpreter)’ 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자(a know-It-All)’로 부르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언어, 지적 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좌뇌 해석자는 다른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을 한다. 들어오는 정보를 모두 받아들여 이해가 될 법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비록 완전히 틀린 것일지라도 말이다.” 가자니가에 따르면, 좌뇌 해석자의 이런 창조력 때문에 그리고 상대방이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속임수의 온상”이다. 최근 국내의 각 지자체가 만들어 내는 문화 유적지 관련 ‘스토리 텔링’이 얼마나 정직한지가 궁금하다. 이렇게 십악은 탐진치의 아누사야라는 불교어가 의미하고, 진화심리학자가 설명한 대로 뿌리가 아주 깊어서 오계의 실천은 어렵다. 

4. 개인의 죽음과 현대문명의 종말을 명상하자

틱낫한에게 현대문명의 성격도 깊은 성찰의 대상이다. 그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거나 착취해야 하는 문명은 건강한 문명”이 아니라고 한다. 건강한 문명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교육, 직장, 음식, 주거,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세계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

무상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죽는다. 틱낫한은 그 원리에 따라 우리의 문명도 죽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문명은 하나의 문명일 뿐이다. 그것은 또 다른 문명(another civilization)이 일어날 공간을 주기 위해서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수많은 문명이 이미 왔다 갔다. 지구 온난화는 우리의 현 문명의 죽음을 보여주는 초기 증상의 하나이다. 우리가 과소비를 멈출 수 없다면 이 문명의 죽음은 분명히 더 빨리 올 것이다. 잠시 멈추고 마음챙김을 한다면, 우리는 이 과정을 늦출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문명의 최종적인 죽음(eventual death)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의 죽음을 수용하듯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불생불멸의 본성임을 우리가 깊이 안다면 이[문명의 죽음]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어서 문명의 죽음을 호흡 명상의 주제로 삼자고 한다.

숨은 들이쉬며, 나는 이 문명이 죽어가고 있음을 안다. 숨은 내쉬며, 이 문명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명이 죽어간다고 한다. 우리가 과소비를 멈출 수 있다면 그 죽음을 늦출 수는 있지만 피할 수는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 죽음을 수용하고 분노, 부정, 절망이 아니라 평화의 마음으로, 기술을 잘만 활용하면 “우리의 지구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전혀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이어지듯이, 비록 현대문명이 끝난다고 해도 또 다른 문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5. 인도의 성자는 다 비슷하다: 자기 훈련과 간디의 문명비판

개인의 고통과 시대의 고통이 둘이 아니라고 보고, 현대문명과 일상적인 생활방식을 비판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 사람으로 틱낫한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그중 하나다. 그가 독립운동의 동지들에게 권유한 계율에는 생활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문명에 대한 간디 비판의 핵심은 《힌드 스와라즈》(1909)에 나온다. 그는 여기에서 현대문명, 산업사회, 그리고 경쟁적이며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현대문명이 그 목표를 육신의 행복 증진에 두고 있다고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보로 오인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간디는 도덕도 종교도 없는 현대문명을 힌두교가 “암흑시대(Black Age)”로 부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진정한 문명은 무엇인가? 문명은 “인간에게 의무의 길을 지시해 주는 행동양식입니다. 의무 수행과 도덕 준수는 서로 맞바꿀 수 있는 말입니다. 도덕을 준수한다 함은 곧 우리 마음과 정염에 대한 지배력을 얻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압니다.” 마음과 정염의 통제를 통하여 얻게 되는 자기 이해, 이것이 간디에게 진정한 문명의 목표였다.

간디의 문명비판은 진리·독립·제국주의·영구평화·불살생 등에 대한 그의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간디는 진리(satya)가 비폭력, 청정행(brahmacharya), 훔치지 않기, 그리고 다른 덕목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현대문명이 사람에게 번영과 부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사치와 자기탐닉에 대한 갈망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통제 불가능한 경쟁력을 풀어놓았다고 간디는 보았다. 이 문명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규모의 불평등·억압·폭력을 낳았다는 것이다.

간디는 아슈람에 거주하는 동지들에게 엄격한 서약을 요구했다. 간디에게 자아실현은 나라와 세계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그 봉사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서약은 필수적이다. 진리, 비폭력, 청정행, 미각의 통제, 훔치지 않기[不偸盜], 무소유(또는 가난), 육체노동, 스와데시, 무외(無畏), 불가촉 제도의 폐지, 관용이 그 서약의 내용이다.

진리, 비폭력, 청정행, 불투도, 미각의 통제, 관용은 그 내용에서 틱낫한의 확장된 오계와 아주 비슷하고, 천민제도의 폐지와 스와데시는 간디의 시대가 특별히 요구한 것이다. 간디는 서약을 준수함으로써만 폭력을 줄일 수 있고, 비폭력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엄격한 자기 훈련을 요구한 점, 그리고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믿었다는 점에서, 간디는 부처를 닮았고, 틱낫한과 달라이 라마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6. 시민 중생의 십악

《소연경》에서 말한 중생은 오늘날 누구를 가리킬까? 시민이다. 민주주의의 도래는 하나의 진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는 시민이, 자기 훈련을 해서 십악을 감소시킨 것이 없다면 시민이라고 해서 스스로 자랑할 것이 뭐 있겠는가? 그래서 시민 중생이다.

우리 사회에도 십악은 넘쳐난다. 언론은 날마다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를 쏟아낸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지만,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9,939건으로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9,838건에서 2010년 180,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헤럴드경제〉 2012. 3. 15). 영국 경찰이 2009~2010년 10만 명당 강력범죄 발생률을 국가별로 분석한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국 중 살인은 6위, 강간은 11위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은 살인 33위, 강간은 34위로 안전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살인은 멕시코가 월등하게 1위였고, 미국은 3위였다(〈중앙일보〉 2012. 6. 1).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위증과 무고(誣告) 역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가 있는데, 한국은 거짓말 공화국이란 말인가?

우리의 법률이 정한 범죄들은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고, 거짓말이 심하면 사기죄가 되며,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불량식품의 4대 악 척결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최근 정부는 대선 공약을 국정과제로 구체화하여 감축 목표를 정해 추진한다고 한다. 한국은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저 4대 악은 모두 십악의 일부가 아닌가? 풍광이 좋은 전국의 명산에 사찰과 불교문화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1천만 불교도는 그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십악을 줄이는 데 뭐 기여한 바가 있을까?

결어: 뭐! 명상으로 십악을 극복한다고

일부의 사람들이 명상한다고 해서 살인, 음란, 거짓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정치와 사법당국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십악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다면 오계를 명상하는 편이 낫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명상은 십악을 범해도 ‘마음 편히’ 살게 해줄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면 악의 극복은 더 쉬워진다.

명상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증오나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나온 마음챙김이나 사마디(집중)는 침팬지 등 인간 이외의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행위로 보인다. 그림을 그리는 침팬지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명상하는 침팬지를 들어본 적은 없다.

자기 내면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찌 불교의 명상뿐이겠는가? 다른 종교와 철학 전통에도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고, 기도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서구의 학자들조차 인정했듯이, 명상은 자기 성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고, 불교도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일 것이다.

시대의 고통이 달라지면 명상의 대상도 달라진다. 일본 강점기에 한용운이 시조에서, 산에서 참선하는 선사보다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장군을 더 칭송한 것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는 개인적인 평안보다는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더 중시했고, 현대문명을 세력의 원천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일본에 요구한 적도 있다. 한용운이 떠나간 지 이미 70년, 불교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하므로 주변 국가 간의 세력 관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자대비한 소수의 불교도들에 의해 21세기의 명상은 더욱 진화했다. 이제 명상의 대상은 지구의 고통이다. 명상은 긴장의 이완, 부정적 감정의 제거, 자비심의 배양을 통해서 개인을 개조해야 하고, 전쟁과 테러, 환경파괴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도록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시대의 선어록(禪語錄)과 화두를 포기해야 할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이다. 고통은 현실 안에 있지 어록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고통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다. 불교는 시대의 고통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 바로 이런 진리를 틱낫한과 달라이 라마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현대문명의 종말도 명상하라. 죽음에 대한 명상이 우리를 한없이 겸허하게 하고 필요한 것만 추려내게 하듯이, 문명의 종말에 대한 명상은 일상의 자유, 생활습관, 정치경제 제도, 문화 등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집단적인 각성도 줄 수 있다.

《소연경》에서 탐욕과 경쟁은 주변 환경을 황폐하게 했다. 이제 그것들이 현대문명 자체를 위협한다고 한다. 지구 윤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명상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냉담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승단이 현대문명의 종말까지를 명상하고 행동할 때, 시민들은 존경할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서양문명의 세례를 크게 받은 이 땅의 진보적 합리주의자들은 문명종말론자들을 쉽게 무시할 것이다. 현대문명의 종말론은 수많은 고전을 만들어 냈고 과학과 기술을 낳은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고대 인도 사상에서 나온 당신네의 종말론은 엄살이나 넋두리가 아닌가? 성향이나 본성을 거슬러 어려운 고행을 하느니 차라리 십악을 좀 견디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도 남의 것은 아니다. ■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얼굴 :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철학과현실》 편집위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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