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예술, 눈을 맞추다

1. TV부처와 눈부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가운데 <TV부처>가 있다. 부처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 모니터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형상이다. 소재는 부처상과 텔레비전뿐이고 구도도 단순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비디오 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의미를 던진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모니터 뒤편에 비디오카메라를 장치하였다. <TV부처>는 비디오의 폐쇄회로를 이용한 단일채널 방식의 설치작품이 된다. 모니터는 부처를 영상 안에 담고, 부처는 그 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삼매경에 든 구도다. 이 순간 부처와 텔레비전, 마음과 테크놀로지, 동양과 서양은 대화를 나누고 원융(圓融)을 이룬다. 먼저 텔레비전 카메라는 부처를 잡아 자기 영상 안에 담는다.

그는 말한다.
“이봐, 부처씨! 나는, 다시 말해 서양의 20세기 테크놀로지는 당신마저도 포착해 버렸네. 이제 카메라가 사냥하는 리얼타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네.”

부처는 답한다.
“어이, Mr. TV! 우리 속담에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인다 했네. 자네가 나를 포착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 들어간 것일세. 물화(物化, reification)와 소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자네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러자 텔레비전은 말한다.

“나는 포착한 모든 것을 이미지로 바꾸어 버린단 말이야. 당신 또한 내 사각형 모니터에 갇혀 실상(實相)은 사라지고 한갓 이미지로 변해 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당신 모습을 잘 보게나.”

부처는 답한다.
“자네, 아직도 모르고 있는가? 이미지 저 너머의 실상을 직시하게. 서양의 20세기 테크놀로지 안에도 불성(佛性)이 있음을 넌지시 알리라고 내가 그리 자리한 것이란 사실을.”

다시 텔레비전이 묻는다.
“텔레비전에도 불성이 있는가?”

부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명상에 잠긴다.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보인다. 이를 ‘눈부처’라 한다. 우선 형상이 부처와 같다. 그러나 이런 용어가 붙은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다. 내 모습 속에 숨어 있는 부처, 곧 내가 아닌 타자, 자연, 나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비록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차가운 현대 과학기술이 부처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21세기 대중예술에서 과연 불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21세기 오늘의 대중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눈부처’를 찾을 수 있을까? 21세기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한 대중예술을 방편으로 삼아 불교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물화와 소외의 심화, 갈등과 폭력의 일상화 등 현대 문명의 위기로부터 대중을 구제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대중문화 및 예술이론을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출발점이다.

2. 대중문화 옹호론과 진속불이(眞俗不二)

연극에 비하여 영화가, 소설에 비하여 텔레비전 드라마가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지식사회의 인식이다. 연극배우는 예술가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시키지만 영화배우나 탤런트에 대해서는 주저한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뒤섞은 공연을 하여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열린 음악회’를 서울대에서 열고자 했을 때 서울대 음대 교수들은 저질 음악회를 서울대에서 열 수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들은 대중예술 종사자들을 ‘딴따라’라며 경멸한다. ‘대중문화·예술=저질’이란 등식은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 깊다.

보수주의자(협의로 말하면 예술 엘리트주의자)들은 고전작품만이 인격을 도야하고 더 건전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대중들은 저질 폭력물과 선정적인 영화를 보며 사랑, 섹스, 물욕, 증오와 폭력 등 말초신경적이고 감각적인 만족만 추구한다고 폄하한다. T. S. 엘리어트는 인류 공통의 숭고한 문화유산을 보호, 전승해 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적인 엘리트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중사회가 어떠한 도덕적 규범도, 보편적으로 수용된 윤리적 규약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대중문화는 귀족이 쌓아온 고상한 전통을 무너뜨리고 야만주의로 퇴행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사고에는 미와 예술, 문화, 대중에 대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반면 에드워드 쉴즈 같은 이는 대중문화를 옹호한다. 이들이 옹호하는 가장 큰 근거는 두 가지이다. 대중문화가 문화의 민주화와 대중의 교양 함양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엘리트들만이 왕궁 등 특정 장소에 모여 베토벤의 교향곡을 감상하며 고급문화에 얽힌 담론들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원하는 이는 LP, CD, 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베토벤의 교향곡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단행본, 잡지, 인터넷을 통하여 베토벤 등 고급예술에 얽힌 이야기와 비평을 접할 수 있다. 대중들도 카페에서, 호프집에서, 선술집에서 고급예술에 관련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렇게 고급예술을 접하고 그에 관한 담론들을 공유하는 사이에 대중들은 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하고 심미안을 넓히고 이해력을 기른다.

그 예술에 담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도덕적 메시지들을 수용하면서 대중들은 교양을 갖추고 도덕적 수양을 한다. 이처럼 대중문화는 개인 정신을 부각시키고 고양시켰으며 인간과 주변 사회에 대한 이해력을 확대시키고 각 개인들의 인지적, 감상적, 도덕적 수용능력을 확장시켰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오감과 취향에 만족을 주는 쾌락을 대중문화를 통하여 향유하게 되었으며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더욱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몇몇 진보적인 학자들은 대중이 교육을 통해 엘리트 못지않은 심미안과 창조력을 갖게 되어 고급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불교의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쉴즈 등의 대중문화·예술론 또한 이분법과 엘리트주의, 특히 계몽적인 자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티끌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3계라 부르는 것이고 그 3계의 마음을 일컬어 다른 경계라는 것이다.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며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1)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주체인 나〔我〕나 대상인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든 다른 존재이든 이보다 위에 서서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나 계몽의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보다 높이 깨달아서, 그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보살행은 내가 그보다 높이 서서 나의 불성(佛性)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無明)에 휩싸여 욕계(欲界), 색계(色界), 유계(有界)의 3계의 경계를 지어 세계의 실체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 유리창만 닦으면 맑은 하늘이 드러나듯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佛性)이 스스로 드러나니 그 먼지만 닦아내면 된다. 그러니 중생과 엘리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 엘리트와 대중은 둘이 아니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세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야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다. 또 이에 이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원효의 표현대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를 만들고 금반지를 녹여 다시 금덩이를 만들지만 둘은 모두 금으로 하나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엘리트와 대중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愚衆)이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의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 집단이다.

우리는 어린이가 피카소의 그림을 제대로 해석하고, 광주 비엔날레와 같은 고급예술의 경연장에서 촌로(村老)가 평론가 이상으로 작품해석을 한 예들을 알고 있다. 이처럼 대중은 대중문화에 의해 호명당해 형성된 거짓 주체이자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 얻은 의미를 실천하는 참 주체이기도 하다.

대중문화가 저질이고 야만이라는 것도 이분법적 편견이다. 중생과 부처, 주체와 대상 사이가 서열도 대립도 없이 평등한 것처럼 대중과 엘리트, 작가와 독자, 나와 타자라는 것도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니다. 우리 몸에는 대중다움과 엘리트다움이 공존한다. 엘리트라도 속물이 되어 말초적인 향락에 탐닉하여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 순간 대중이요, 대중이라도 감각적인 만족을 넘어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순간 엘리트다. 대중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읽기와 쓰기 능력을 통하여 텍스트를 올바로, 비판적으로 읽고 쓰는 순간 엘리트요, 엘리트도 텍스트의 외피나 허상이 던진 의미에 얽매여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대중이다.

3. 통속성·일상성과 즉신성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나 노벨상을 받은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남이 창조하거나 흉내내지 못한 독창성이 있다. 우선 인물들은 이제까지 어느 작품에서도 보지 못한 특별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엮어내는 사건은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들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상투성에 대한 반역, 낯설게 하기’가 고급예술 작품의 최소한의 요건이다.

반면에 대중예술은 일상성과 통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왜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주부는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고 있는가? 왜 최불암이나 김혜자, 이순재나 나문희처럼 그리 잘나지 않고 평범한 탤런트가 오래도록 팬들의 사랑을 받는가? 텔레비전은 안방과 거실에 놓여 대중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대중들은 텔레비전 시청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텔레비전에서도 일상의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고급예술이 일상성을 넘어선 독창성을 추구한다면, 텔레비전은 일상성을 추구한다. 희곡 작가나 연극 연출가가 미학적으로 완성미가 높은 작품을 제작하려 한다면 텔레비전의 감독들은 일상성을 잘 구현하여 시청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극적 완성도가 높은 프로그램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체험할 수 있는 삶을 그린 <전원일기> <한 지붕 세 가족> 등이 수년간 장기적인 방영을 하였고, 이 대열에 <거침없이 하이킥>이 합류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속성의 미적 범주를 박성봉의 논의를 따라 성의 관능성, 폭력의 선정성, 몽상의 환상성, 웃음의 해학성, 눈물의 감상성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보자.2) ‘쭉쭉빵빵한’ 미인과 멋진 꽃미남이 행하는 섹스 장면은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성적 욕망을 증대시킨다. 포르노를 보고 자극 받은 청소년이 실제 그 행위를 흉내내거나 강간 등의 범죄를 행하였다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건이다.

자동차가 산산조각이 나고 걸쭉한 피가 흐르는 선정적인 폭력 장면은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을 조장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인공인 백인 남성이 악당인 유색인종, 제3세계 민중을 상대로 폭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대중들은 미국이 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드라마에서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 모르는 사이에 가부장주의적 폭력을 용인하게 된다. 심지어 몇몇은 이를 자신의 문화로 수용하여 모방하기도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법의 세계, 환상적인 몽상은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며 더 나아가 현실을 조작한다.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하며 우리 삶에서 구체성을 제거한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다가 길에 쓰러져 피를 흘리건 말건 황홀한 마법의 세계에 빠져 있게 하는 것, 국회에서 어떤 악법이 통과되었든 말든 말 그대로 신경을 끄게 하는 것, 자본가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든 그가 만든 이미지에 취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환상의 주요한 기능이다. 환상은 즐거운 도피이다.

대중문화의 희극성, 특히 텔레비전의 코미디는 우리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가고 현실의 모순을 은폐한다. 우리는 웃고 즐기면서 사이비 행복에 빠진다. 우리는 웃는 가운데 삶에 대한 성찰을 방기한다. 웃으면서 우리의 불행,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리게 된다.

서로 지극한 사랑을 나누었던 주인공이 죽거나 이별을 할 때, 선한 주인공이 비극의 상황에 놓일 때 대중들은 눈물을 흘린다. 감상성은 이성적 판단을 유보시키고 정감에 치우친 대응을 하도록 한다. 감상성은 현실과 치열한 대결을 정서적 반응으로 치환한다.3)

이처럼 일상성과 통속성은 곧 저질인가? 예술의 미는 천상 저 너머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불교는 아니라고 답한다. 주지하듯, 밀교는 《법화경》의 일생성불(一生成佛) 사상을 계승하여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을 편다.

지금의 이 진언문보살(眞言門菩薩)이 만약 법칙(法則)을 어기지 않고 방편(方便)을 수행한다면, 이 생(生)에서 무진장엄(無盡莊嚴)의 가지경계(加持境界)를 보게 되며 단지 현전(現前)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지(佛地)를 뛰어넘어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아지려고 하면 또한 거기에도 이를 수 있느니라.4)

중생이 밀교를 방편으로 삼아 수행하면 부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받아 부처와 하나가 되는 무진장엄의 경지에 들어가며, 부모로부터 받은 현신(現身)을 가지고 곧바로 대일여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밀교를 신앙한 신라인들을 보면, 고승대덕뿐만 아니라 노힐부득과 달달박박과 같은 평범한 양인(良人), 욱면과 같은 노비 신분의 중생도 바로 부처가 되었다.

일체 세계, 현재의 모든 여래(如來)·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은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에 통달하셨다. 이 여래들은 모든 분별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면서도 방편바라밀의 힘으로 인하여 무위(無爲)로써 유위(有爲)를 드러낸다. 중생을 위해 전전하여 상응하시면서 법계에 두루 몸을 시현(示現)하여 법을 보게 하여 안락에 머물게 하고 환희심을 발하게 하며, 혹은 장수토록 하고 오욕(五欲)을 즐기며 스스로 즐거워하여, 부처님 세존께 공양하게 한다.5)

모든 여래는 방편바라밀에 통달하여 모든 실체의 본성이 공임을 알면서도 방편을 통하여, 말로 하면 진여실체가 아니지만 의어(義語)를 방편으로 삼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듯, 무로 유, 무위로써 유위를 드러낸다. 여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에 직접 나타나시어 불법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고 환희심을 발하게 함은 물론 삶의 즐거움, 오욕의 향락, 장수의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런 이승의 행복과 환락을 누린 중생들은 스스로 세존께 공양으로 보답한다. 이처럼 깨달음과 일상의 즐거움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경주의 서악에 오르면 좌우의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의 발은 지상에서 떨어져 있는데, 유독 아미타불의 발만 지상에 붙어 있는 삼존불상이 있다. 내세를 지향한 아미타불이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극락과 이승, 성스러운 세계와 현실은 둘이 아니다.

신라의 부처들은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나중에는 땅에서 솟아오른다.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인의 얼굴을 한 부처들을 만날 수 있다. 500여 미터에 불과한 산에 100여 개가 넘는 절터가 있는 것은 신라인이 그곳을 바로 불국토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말 선승 충지(쪾쪾: 1226~1292)도 선시 <이행검의 시에 답하며(答李公行儉)>에서 “그 발 밑 서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불국토의 은유)”이라고 노래하였다.6) 밥 먹고 물 마시고 잠자고 배설하는 바로 그 평상에 도(道)가 있다는 것은 선가(禪家)에서는 너무도 평범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속성과 일상성이 곧바로 저질인 것은 아니다. 통속성은 미적 쾌(快)나 성취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인간의 진지한 측면만을 감싸안음으로써 우리의 통속적인 측면을 못 본 척한다면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완벽함을 자만하는 것이고, 만일 인간의 통속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우리의 진지한 측면을 무시한다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셈이 될 것이다. 통속적인 것은 진지한 것의 빛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고, 진지한 것은 통속적인 것의 빛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7)

통속성이 곧 저질은 아니며 대중들은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문화를 소비하지 않는다. 흥행의 보증수표들, 즉 폭력과 섹스, 희극적 재미를 두루 섞은 대중 드라마나 영화 가운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엄청난 광고에도 불구하고 80~90%의 신제품들은 실패한다. 또한 많은 영화들이 그 수익 면에서 광고비조차 건지지 못한다.8) 대중들은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문화를 소비하지 않는다.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라도 나름대로 미학이 있고 대중들은 이 미학에 따라 통속적인 것을 선택한다.

또 대중예술이 시장원리에 따라 하나의 상품으로 통용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성과 예술성을 결합하여 수천 만 명 이상의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대중들은 <쥐라기 공원>과 <원초적 본능>과 <친구>처럼 상업성이 강한 영화에만 몰리는 것이 아니라, <서편제> <JSA> <박하사탕> <왕의 남자> <괴물>처럼 예술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거나 의미가 충실한 텍스트에도 환호를 보낸다.

지금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은 전통의 예술에 기초해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일 뿐이다. 그들이 자신의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통속성’으로 매도하였을 뿐이다. 이런 견해는 서양의 비평가들이 자신들에게 낯선 동양의 예술을 야만으로 간주한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편견일 뿐이다. 대중들은 기존의 미학이나 이론과 다른 눈으로 대중문화를 향유한다. 또 이곳에서는 실패한 영화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이는 대중문화라는 텍스트가 맥락에 따라 달리 수용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통속성 곧 성의 관능성, 폭력의 선정성, 몽상의 환상성, 웃음의 해학성, 눈물의 감상성에 대해 이곳이 바로 불국토이고 일상이 바로 도(道)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미학적 견해를 펼 수 있다.

성의 관능성: 수용의 면에서 볼 때 포르노물을 보면서 모든 독자가 섹스 욕구를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역사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은 성과 정치의 관계를 읽기도 하고, 존재론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은 존재의 상실에 따른 성적 일탈을 읽어내며, 표현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은 영상의 아름다움이나 서사구조의 완결성에 주목한다. 어떤 이는 포르노물의 남자 주인공과 같이 가부장주의의 시각에서 여성의 몸을 감상하고 여성의 성을 마음껏 유린하는 반면에, 어떤 독자들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주인공 남성의 시선을, 더 나아가 텍스트에 담긴 가부장주의를 비판한다.

포르노물이 이럴진대 대중들은 좀더 정교하게 구성된 대중문화 텍스트들에 대해서는 더욱 다양한 의미를 구성한다. 욕망 또한 악이 아니다. 아무리 도덕성이 강하고 정조 관념이 강한 사람도 이성으로 억압하고 있을 뿐이지 아내나 남편 이외의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성적 상상을 한다. 문명이 성적 욕망의 억압을 전제로 세워졌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억압이 느슨해진 조선조 후기에 에로티시즘적인 사설시조가 쏟아져 나온 것에서 보듯 성적 욕망의 해방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점점 오이디푸스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의 관능적인 탐색은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한다. 욕망은 절대악이 아니다. 욕망은 신기루이지만, 이는 또 인간의 모든 실천과 창조력의 원동력이다. 욕애와 무유애, 곧 육체적 욕망과 명예, 권력, 소유 등은 버려야 할 욕망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개체를 존속시키려는 욕망인 유애, 타인과 관계하여 공존하려는 욕망, 소유에서 존재, 일상에서 영원을 지향하는 욕망은 버려야 할 욕망들이 아니다. 극도의 고행과 극단의 쾌락을 모두 지양하고 중도에 서려고 한 것이 붓다의 태도다. 욕망이 없다면 인류가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걸작의 예술품도, 인류를 악에서 선, 억압에서 자유로 이끈 혁명적 실천도 없다.

폭력의 선정성: 대중문화 속의 선정적인 폭력은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을 대리만족을 통해 체험하고 발산하게 하여 오히려 폭력을 줄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행하는 폭력은 명백한 선이 명약관화한 악에게 행하는 것이기에 대중들은 이를 보고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항해 싸우는가를 명확하게 인지함으로써 보편적인 권력의지를 대리적으로 만족시킨다.

우리는 대중예술이 제공하는 폭력의 선정성 체험을 통하여 삶과 죽음 사이의 투쟁을 의식적으로 차단한 문화의 질서 속으로 이를 끌어넣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추구하면서, 설령 그러한 질서의 법칙들이 매우 황당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일종의 죽음과 재생이라는 주술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 내면의 원시성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 죽음의 불안, 근거가 불확실한 죄의식 등을 대중예술에 나타난 구체적인 폭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9)

몽상적인 환상성: 환상 또한 마찬가지다. 환상은 즐거운 일탈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어느 작품보다도 처절하게 인간 소외를 드러내어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소설이 ‘현실성을 갖는 허구’란 고정관념을 깨고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환상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환상은 억압된 욕망을 표출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어머니와 밤새 그 짓을 하고 싶어”란 가사를 담고 있는 로큰롤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통한다. 이 신화는 인간의 숨겨진, 근친상간의 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욕망은 아버지 뒤의 법과 질서, 규율, 권위 등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창조적) 환상은 현실을 전복한다. 환상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질서 밖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콩쥐팥쥐》나 《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돌아보게 한다. 똥과 방귀, 소변, 생식기 등에 관한 동화나 민담은 엘리트 문화에 가려졌던 추(醜)의 세계의 질박한 아름다움과 열린 텍스트를 드러낸다.

골무에서 절구에 이르기까지 일상 도구에 대한 환상은 귀족들의 숭고한 미의식에 감추어졌던 민중의 구체적 삶의 세계를 보여준다. 《홍길동전》처럼, 환상은 법과 질서를 어긴 영웅들의 이야기를 꾸미고 현실에 대립적인 이상세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환상은 언급되지도 않던 문화, 보이지도 않던 문화를 추적한다. 즉, 침묵하고 있던 문화, 보이지 않게 만든 문화, 가려졌던 문화, ‘부재’하게 만든 문화를 추적하고 법과 질서, 기존의 가치관을 조롱하고 의도적으로 이에서 일탈하고 현존 질서 밖의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전복한다.10)

웃음의 해학성: 탈춤의 해학이 양반과 봉건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듯, 웃음은 진지하고 엄숙한 것을 비틀어 기존의 권위를 깬다. 우리가 “참 우습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부조리한 복수일 수 있으며,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자기 희화화일 수도 있다. 코미디는 항상 우리 가운데 남보다 더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일깨워준다. 또한 우리보다 더 잘난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는 확실한 사실로 우리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11)

눈물의 감상성: 대중들은 어린 시절 어떠한 배려도 없이 폭력이나 경멸, 또는 모든 종류의 굴욕 등에 노출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자신의 자아를 떠올리며 자기 중심적으로 슬퍼한다. 감상성은 우리가 일상의 무미건조한 모든 비감상적인 것들 사이에서 늘 가슴에 품고 싶은 가치들을 암시하는 오래 묵은 감정의 현을 건드린다.12) 대중들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사랑의 이별, 선한 자의 고통, 정의로운 자의 의연한 죽음 등의 순간이다.

대중들은 악당의 고통이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름다울수록, 선할수록, 정의로울수록 눈물의 강도는 크다. 이는 감상성이 사랑, 미, 선, 정의 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영혼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감상성이 일어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을 하려는 이들의 이별, 선한 자의 고통, 정의로운 자의 죽음 등 세계의 부조리가 야기되는 순간이다. 이는 감상성이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말한다. 비극적 현실을 보고 흘리는 눈물은 사랑, 미, 선, 정의를 지향하려는 대중 안의 영혼이 반응하는 것이자 선한 자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분노의 대응이다.13)

4. 대중예술의 창작 및 수용원리와 체용상의 논리

독자는 주체의 의도대로 현실을 떠올리고 해석하는가? 작가와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인가?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자신이 의도한 모든 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없으며, 적극적 독자일수록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서 ‘기대의 지평’을 무너뜨리고 작품을 해독하고 감상하며 미적 만족을 한다.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떠나 의미를 드러낸다.

작품은 작가의 사물에 대한 번득이는 감수성, 천재적인 영감, 현실을 통찰하는 의식과 또 이 모든 것을 언어기호를 빌어 텍스트로 짜내는 기법 등이 종합하여 빚어진 완결체가 아니다. 연주되지 않은 악보는 공책에 불과한 것처럼 독자를 만나 실현되지 않은 작품은 텍스트가 아니라 종이책에 불과하다. 작가가 행한 것은 텍스트에 인쇄된 검은 활자 글씨에 불과하며 글자 사이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문학은 독백적으로 텍스트의 초시간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기념물이 아니라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복합체이다.14)

대중문화 텍스트가 대중을 만나 수용될 때 작가, 텍스트, 작품이 생산된 맥락과 대중이 수용하는 맥락, 수용자로서 대중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의미가 생산되고 미(美)가 형성된다. 수용자는 다양한 세계관과 이념을 가지고 텍스트를 해독하며,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이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세계관과 그 하위체계라 할 사상과 이념, 이데올로기, 사회문화 구조가 서로 역동적인 작용을 하는 가운데 그 틀 속에 있는 인간 주체가 어떻게 세계와의 분열에 맞서 세계를 의미화하며 이를 어떤 체계에 따라 약호화하여 텍스트를 만들었는가, 또 수용자는 어떤 세계관과 어떤 이념을 가지고 텍스트를 해독하는가에 대하여 텍스트를 해명해야 한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언술을 예로 들면, 기본 의미는 이 문장을 사전적 의미대로 해석하여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별〔星〕이 반짝였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문맥 의미는 앞 뒤 문맥을 살펴 “절망에 잠긴 내 눈 앞 하늘에서 천체의 일종인 별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벼랑이 (달빛 등에) 드러났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표현 의미는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눈물이 반짝였다.”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나의 눈 가장자리에 더 큰 장애가 나타났다.”이며, 역사적 의미는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장군이 보였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별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인기 연예인이 나타났다.”이다.

존재론적 의미는 “절망에 잠겼던 내가 희망을 품었다.” “절망에 잠긴 내 앞에 신과 인간, 성스러운 세계와 속된 세계의 중개자가 나타났다.”이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간단한 문장이 이렇게 독자들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이보다 정교하게 구성된 대중문화 텍스트는 더욱 다양하게 복잡한 의미들을 던진다. 수용자로서 독자는 텍스트에 담긴 메시지를 감지할 뿐만 아니라 약호 꾸러미에 의해 변용되어 낯설어진 세계에 대해 미적 쾌(快)를 느끼게 된다.15)

우리는 창작자의 의도나 미적 수준을 떠나 걸작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조선조 막사발은 일본의 도예가들에게 국보급의 예술품이다. 아낙들이 쓰다 남은 헝겊 조각을 엮은 조각보는 모딜리아니 이상의 미적 아름다움을 갖는 미술품이다. 주름진 얼굴을 가리려 화장을 짙게 하고 막걸리 한 잔에 설움처럼 토해내는 시골 주막의 늙은 작부의 <동백 아가씨>에서 어떤 명작 못지않은 사랑의 진실과 삶의 애환을 읽어낼 수 있다.

5일장을 돌아다니다가 보자기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잡동사니 가운데에서 발견한, 소주 한 병 값이 아쉬운 촌로가 투박한 손으로 깎은 목각인형에서 고급미술관에 놓인 조각상 이상의 감동으로 몸을 떨 때가 있다. 3류 영화를 보고 진지한 사랑을 반추하고 지나온 삶을 성찰할 수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주몽>을 보면서 고구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하얀 거탑>에서 권력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해 반추하며, <서울 1945>를 시청하면서 식민지 모순과 분단모순의 구체적 실상,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삶과 사랑에 미치는 영향과 부조리, 비극에 대하여 여느 분단 소설 이상의 인식과 성찰을 할 수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론이나 체용상(體用相)론을 응용하면, 서양의 수용미학 이론이나 상호텍스트성 이론을 넘어서는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불일불이론으로 보면 작가와 독자의 이분법이 무너진다. 작가는 텍스트를 쓰는 자이고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자이니 둘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작가와 독자는 둘도 아니다.

작가 안에 독자가 들어와 있다.16)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읽은 수많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한다. 그러기에 작가가 새로 창조한 텍스트에는 기존의 수많은 텍스트가 이미 담겨 있다. 작가는 또 자신의 정체성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독자를 상정하고 독자의 정체성에 맞추어 구성하고 기술하기에 독자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독자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독자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코드, 취향 등을 고려하며 글을 쓴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눈부처처럼 독자 안에 이미 작가가 들어와 있다. 독자는 자신의 정체성대로 해석하기보다 작가의 정체성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는 작가나 감독의 의도, 세계관, 예술관, 이데올로기 등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혹은 역사주의 비평가식으로 작가나 감독이 작품에 남긴 글을 비롯하여 작가나 감독에 대한 세간의 비평 등 그에 대한 모든 자료와 정보를 종합하여 작가를 구성한 다음 그 입장에서 텍스트를 해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적극적인 독자는 단지 글을 읽는 것을 넘어서서 글을 다시 쓰는 자이기에 작가다.

그는 작가를 넘어서서 비판적 읽기를 하거나 자신이 작가의 입장이 되어 텍스트를 다시 구성한다. 그러기에 독자 또한 작가이다.

체용상의 논리를 응용하면 대중예술의 창작과 수용과 텍스트의 관계를 하나로 아울러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입의분(立義分>에서 마명(馬鳴)은 일심(一心)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누고 진여문에 체대(體大), 생멸문에 용대(用大)와 상대(相大)를 두어 일심이문삼대(一心二門三大)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법(一切法)이 진여평등(眞如平等)하여 더하고 덜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이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을 구족(具足)한 까닭이요,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능히 일체(一切)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착한 인과(因果)를 낳는 까닭이다.17)

체(體)는 증감(增減)은 물론 늘 변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生〕 것도 뒤에서 멸하는〔滅〕 것도 아니어서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상락아정(常樂我淨), 청량불변자재(淸?不變自在)의 뜻이 있는, 모든 분별을 여읜 것이다. 여래장 중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의 상(相)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상대(相大)의 뜻이며, 또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용대(用大)의 뜻이다. 다음으로 진여가 일으킨 염상(染相)을 상(相)이라 이름하고 진여가 일으킨 정용(淨用)을 용(用)이라 한다.

체용상의 관계를 쉽게 비유를 통해 풀이해보자. 우리는 사물의 실상과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나무의 작용과 기능, 나무와 풀 등의 차이와 관계를 통해 나무의 본질을 유추한다. 이처럼 체(體)는 용(用: 우리말로 ‘짓’)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용을 통해 드러난 체가 바로 현대 철학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이데아, 혹은 실체이다.(이를 나는 體2, 몸이라 명명한다.) 용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아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를 수도 없는 체가 바로 일심(一心), 도(道), ?이(diff큖rance)이다.(이를 나는 體1, ‘참’이라 명명한다.)

몇몇 원숭이가 직립을 하고 손을 쓰면서 손이 발달하고 뇌가 점점 커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을 갖는 것처럼, 용(用)은 상(相: 우리말로 ‘품’)을 만든다.18) 뇌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진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와 다른, 인간의 특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상이 체를 담는다. 이처럼 체는 용을 통하여 드러나고 용은 상을 만들며 상은 체를 담고 체는 또다시 용을 낳는다. 체와 용과 상은 영겁순환에 놓인다. 일심(一心)이 이문(二門)으로 나누어지고 이문은 화쟁(和諍)의 방편을 통하여 다시 일심의 체로 돌아가고 이는 다시 이문으로 갈린다.

작가와 독자, 텍스트의 관계를 화쟁의 체상용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 작가는 진리〔體〕를 쓰는 행위〔用〕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쓰는 과정에서 작가가 의식한 진리〔體2. 몸〕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진리〔體1, 참〕가 뒤섞이며 텍스트〔相〕를 만든다. 작가가 만든 다양한 텍스트는 진리〔體〕를 담는다. 독자는 주어진 맥락(context)에서 독서행위〔用〕를 통해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몸, 體2] 및 진리〔참, 體1〕를 드러낸다. 독자는 해석을 통해 텍스트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텍스트, 혹은 현전(現前) 텍스트〔품, 相〕를 만든다.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 텍스트는 각각 체(體)를 품는다. 이 영겁 순환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는 중중무진으로 확대된다.

이처럼 의미나 미는 작품 자체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수용자와 작품이 관계하는 그 가운데 의미가 만들어지고 미가 발생한다. 낯익은 대지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 ‘기대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미의 세계에 노니는 황홀감에 떨게 하는 것, 기존의 낡은 코드, 읽기방식을 깨고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창출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낯설게 읽기’의 진면목이다. 우리는 ‘낯설게 읽기’를 통해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영화 등에서 의미를 캐고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낯설게 읽기’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곧 상투성으로 전락한다. ‘낯설게 읽기’로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낯설게 읽어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하더라도 언어기호로 말하는 순간 이는 세계를 왜곡시키게 되어 있다.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 이를 통하여 숨은 세계를 보여주지만 이것도 독자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곧 상투적 의미가 되어 다른 숨은 의미를 감춘다.

대상을 낯설게 읽는 순간 그것은 이미 낡은 의미가 된다.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해체하여 낯설게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재현의 위기론과 화엄연기론

현사회가 디지털 사회로 변화하면서 가상현실(hyper-reality)이 삶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만든 가상세계는 이미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산업화 시대엔 아무리 가상이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에 와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씨엔엔(CNN)을 통해 중계된 미국의 이라크 폭격 장면을 보고 대중들은 어느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매트릭스>는 이제 영화만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현실에 나타난다. 가상 섹스, 가상 여행은 이미 상용화 단계이다. 유비쿼터스는 현실과 가상은 물론, 인간과 기계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다. 가상이 현실과 자리를 바꾸고 있다.

이처럼 판타지, 환상, 해체, 매트릭스, 시뮬라시옹, 가상현실(virtual realities) 등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2003년에 구체화한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론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여, 21세기에 들어 낱말은 지시 대상을 상실하였고 이미지는 현실에 전혀 닻을 내리지 않으며 미디어는 점점 더 자기 지시적이 되었으며 그 결과는 하이퍼 리얼리티와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재현의 위기론 또한 불교를 응용하면 서구의 이론을 넘어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세 가지, 곧 ‘지금 여기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일과 사물’ ‘실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원본에 해당하는 무엇’으로 본다. 그러나 재현의 위기론, 혹은 불교에서 보면 이 세 관점은 모두 무너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이라는 시간인데 현재에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 있다. 의상(義湘)은 말한다.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어라.
구세(九世),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相卽)하여
어지러이 뒤섞이는 일 없이 따로 떨어져 이루었어라.19)

구세라는 것은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를 말한다.20) 필자가 지금 이 순간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 있다고 치자. 그 순간은 인연(因緣)에 따라 구세가 한 순간에 겹쳐진 때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낙산사 터에 관음보살이 상주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세운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모든 중생들이 관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통해 구제를 받을 어느 날이다.

현재의 과거는 의상의 행적과 사상을 좇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홍련암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의상의 화엄을 되새기는 바로 이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이 순간 의상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재해석함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로는 낙산사에 관음보살이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낙산사에서 다시 의상의 사상과 실천을 떠올리는바로 그 순간이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를 의상 대사의 말씀과 실천의 행적에 담겨 있는 진리가 인연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이다.

찰나의 순간은 다른 순간들과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글을 쓰거나 읽으며 잠깐 의상을 떠올리고 그의 사상과 행적을 반추하듯 찰나의 순간에도 무한한 시간이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내일 이 장소에 다시 와서 의상을 떠올린다 해도 그것은 차이를 갖는다. 차이를 갖지만 의상의 사상과 행적에서 찾을 수 있는 진리로 인하여 하나로 통한다. 구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도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며, 구세 십세가 서로 서로 부합하되 아무런 뒤섞임 없이 떨어져 따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존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실은 재현이 되먹임(feedback)하는 장이다. “물질적으로 생존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재현이 작용하고 있다.”21) 농사를 짓는 집단은 작년, 또는 그 전에 농사를 지었던 일을 재현하면서 오늘 씨를 뿌리고 모를 내고 거둔다. 지금 행해지는 학회, 결혼식, 시험, 장례식, 선거, 전쟁 등의 사건 또한 과거의 사건과 의례에 대한 재현을 통해 기획되고 실천된다. 과거의 현실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의 재현 없이 현실은 없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다양한 현재를 선택한다. 자신이 그리는 자신과 인류의 미래상에 따라 오늘 반전시위에 참여하거나 불참한다. 이처럼 현실을 형성하는, 현재의 선택과 행위, 실천에 미래가 겹쳐 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다양한 이본(異本)을 갖는다. 그리고 이 이본들의 차이가 주체들의 다양한 삶을 형성한다. 나아가 이 이본들에 따라 미래는 다양한 현재를 펼친다.

현실이란 있는 듯 없다. 우리는 가상과 환상은 추상적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반면에 현실은 구체적이고 존재하는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공유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현실은 ‘스쳐 지나가 버린 사건’에 불과하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주체조차도 텍스트를 통해 현실을 반추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은 텍스트를 통해 재현되고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현실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은 사라지고 해석만이 남는다.

‘실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또한 인식틀이 만든 허상이거나 존재 중심의 사유, 곧 근대성의 환상이다. 우리는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식틀, 범주, 또는 참조체계에 따라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틀, 범주, 참조체계는 철학자가 만들어 놓은 ‘흐르는 물 위에 선 굳건한 개념의 건축물,’ 또는 권력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다. 현실은 인간이 자신의 형식으로 질서를 부여하고 주관적으로 해석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본이 원본을 대체하고 가상이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결정한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22)라고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형성된 이미지대로 사랑을 하고 일상을 영위한다. 군대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전략과 전술을 수정하고, 여론조사를 해보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자를 교체한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를, 모본이 원본을, 가상이 현실을,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세상에 이미 우리는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현실은 없다. 연기(緣起)만 있다. 상상계가 상상적 해결로 이루어지는 텍스트라면 실재계는 재현 불가능한 역사, 언어로는 이를 수 없는 공허(空虛)이다. 불교적 사유로 보면 삼라만상 일체가 허상이다. 남는 것은 연기(緣起)일 뿐이다. 현실이란 근원적으로 허상이고 집착이다. 하지만 연기의 사유로 보면 나는 타인인 동시에 나이며, 주체는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다. 현실은 허상이지만 연기를 드러내는 것은 실상(實相)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나와 내가 무한한 연관 속에 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연기를 드러내면 그 텍스트는 현실에 담긴 진리를 비춰준다. 그러므로 연기론에 따라 현실을 ‘지금 여기에서 존재들이 현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을 위해 세계와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연기(緣起)를 깨달아 화해하기도 하면서 사건을 만드는 장(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럴 때 재현을 전적으로 부정하여 재현의 위기를 운운할 필요는 없다.23)

 

6. 맺음말―걸인의 모습을 한 부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부처가 가난한 자나 걸인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는데 이를 왕과 스님, 양인들이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여러 편 실려 있다. 테레사 수녀 또한 “우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길 때 신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로 오셨는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중예술은 한 마디로 말하여 ‘걸인의 모습을 한 부처’이다. 대중예술의 상품화와 이로 인한 역기능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끊임없이 저항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공부와 열정에 따라 얼마든지 대중예술 텍스트 속에서, 텔레비전 모니터와 영화 스크린 속에서 부처를 만날 수 있다.

테레사 효과라는 말이 있다. 테레사 수녀처럼 타인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장면만 보아도, 그의 전기만 읽어도,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선해지고 신체의 면역력이 증대된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실제로 하버드 의대에서 실험한 결과다. 배우 박중훈은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찍고서 치유의 경험을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어디 박중훈뿐이랴.

그 영화를 본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타인을 향한 조건 없는 희생과 봉사의 의미를 되새겼고 분노와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에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삶으로 대전환을 이루었으리라. 완성도나 작품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꽤 많은 이들이 한껏 웃는 도중에 살짝 눈부처를 만났으리라. 누가 대중예술을 쓰레기라 하는가.

누가 대중예술을 폐기처분하려 하는가. 일상이 도(道)이듯,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통속성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 대중이 곧 부처이듯, 우리가 무명만 걷어내면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아니 그것을 시청하는 내 안에서 언제든 부처를 만날 수 있다.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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