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현 역주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

불법을 찾아 고행길을 떠난 사람들

글로벌콘텐츠, 2012년 2월, 1,704쪽, 110,000원
왜 집을 떠나 여행을 할까? 길이 거기 있으니까? 이건 너무 진부하다. 무언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를 알고 문명교류를 이해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렇다면 천축국(天竺國)으로 떠난 법현, 현장, 혜초 스님은 어떤 목적에서 여행을 떠났을까? 그들을 통칭해서 천축구법승(天竺求法僧)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법을 구하기 위해서 떠난 모양이다. 법, 그게 천축에 가면 정말 있었을까?

있기야 했겠지만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는 불교의 전성시대가 지나 그들이 찾는 법은 경전의 형태로 유적의 형태로 전설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그 험난한 길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남겼다. 이들이 남긴 여행의 기록은 불법보다는 역사로 남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 길을 찾아간 이는 그 후에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들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길을 20세기가 끝날 무렵 찾아간 이가 있다. 티베트 문화전문가 다정 김규현 선생이다. 다정 거사, 그는 어떤 연유에서 여행을 떠난 걸까? 불법과 그림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아 중국을 떠돌고 티베트를 떠돌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둔황 막고굴에서 혜초 스님을 만나고, 티베트 사원에서 만다라와 탕카를 보고, 이시쿨 호수의 졸본아타에서는 환웅 할배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파미르 횡단로인 와칸주랑(Wakhan Corridor)을 횡단하며 앞서 간 선배 여행자의 기록을 꼼꼼히 확인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혜초 스님의 입적지인 오대산 건원보리사를 찾아냈다. 또 한국 최고의 티베트 전문가가 되어 티베트의 문화를 올바로 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또한 그는 한민족의 시원을 사마르칸트, 이시쿨 호수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졸본아타의 동점 루트를 따라 만주벌판을 유랑하고 있다. 그의 몸속에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어선지 노마드(Nomad)의 별을 따라 지금도 계속 여행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지침이 되는 별이 바로 금성이고 샛별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 설산을 넘어

천축구법승들이 실크로드에서 만난 첫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사막의 모래바람이다. 그 모래바람에 홀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이들은 그것을 악귀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동진의 승려 법현(法顯, 334~420)은 399년 장안을 출발, 천축으로 향한다. 둔황의 양관이나 옥문관을 지나면 본격적인 사막이 시작되는데, 이들은 그곳을 사하(沙河, Kum Darya)라고 불렀다. 현재의 고비 사막과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이다. 이곳에는 새도 없고 짐승도 없다.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이곳으로 사람이 지나갔음을 알려준다.

법현은 그러한 역경과 고난을 물리치고 누란(樓蘭)과 선선(鄯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한 달여 재충전하고, 다시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 Taklamakan) 사막 북쪽으로 길을 떠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이들에게 더 큰 시련이다. 보름을 걸려 오이(烏夷, 옌치)에 도착하고, 여기서 2개월여를 머문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 우전(于闐, 호탄)으로 향한다. 중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이 연이어 있고, 행로는 험난하기 이를 데 없어 그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기를 한 달 5일 만에 법현은 우전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3개월을 머문다.

법현의 다음 목적지는 갈차국(竭叉國)으로 알려진 타슈구르칸이다. 중간에 자합국(子合國)과 어마국(於摩國)을 지난다. 이들 나라는 산속에 있고 추운 나라여서 곡식과 초목 그리고 과실이 상당히 다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총령(蔥嶺)을 넘으려면 다시 한 달이 걸린다. 총령은 범어로 파미르(Pamir)이고, 페르시아어로 바미둔야(Bam-i-dunya)이다. 파미르는 황야라는 뜻이고, 바미둔야는 평평한 지붕이라는 뜻이다. 파미르는 실제로 힌두쿠시, 카라코람, 천산산맥에 둘러싸인 세계의 지붕이다. 법현을 비롯한 수많은 구법승이 중국에서 세계의 지붕을 넘어 천축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총령의 산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다. 또한 독룡(毒龍)이 있어 만약 그가 노하면 혹독한 바람과 눈비를 토하여 모래와 자갈 그리고 돌이 날아다닌다. 사람이 이때를 만나면 한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산을 설산(雪山)이라 부른다.
—제3권 《불국기》 61쪽

북천축에서 불교를 전파한 왕들을 만나고

총령을 넘어야 북천축에 이를 수 있다. 북천축에서 구법승들은 인더스 강 변의 스와트 계곡을 따라 내려와 페샤와르, 간다라, 탁실라에 들른다. 페샤와르는 아무다리아 강에서 시작한 쿠샨 왕조(기원후 30~375)가 인더스 강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3대 카니슈카 왕(100~126)에 이르러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제4차 불전결집을 통해 대승불교를 열었고,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카니슈카는 부처의 이미지를 32개 이미지로 제작하도록 했으며, 부처상이 들어간 동전을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리고 불교미술의 양대 산맥이었던 간다라 미술과 마투라 미술을 장려해 종교에 철학과 예술을 더하게 했다. 이것은 헬레니즘과 결합한 간다라 불상과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은 마투라 불상의 전성시대를 가져왔다. 그는 페샤와르에 카니슈카 탑을 세웠는데, 발굴 결과 지름이 87m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페샤와르(弗樓沙國)를 지나간 법현은 이 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옛날 부처님이 제자들과 이 나라를 여행할 때 아난에게 말했다. ‘내가 열반에 든 후 여기에 카니슈카라는 국왕이 여기에 탑을 세울 것이다.’ 후에 카니슈카 왕이 출현하여 세상을 유람할 때 제석천이 그 뜻을 북돋우려고 소치는 목동으로 변해 길가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왕이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느냐?’ 목동이 대답하길 ‘탑을 쌓고 있습니다.’ 이에 ‘크게 좋은 일이로다’ 하면서 목동이 만든 탑 위에 탑을 세우니 높이가 40여 장이고 여러 가지 보배로 장식하였다.
—제3권 《불국기》 71-72쪽

간다라는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불상을 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22년 찬드라 굽타가 인도를 최초로 통일해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2~185)를 세웠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3대 아쇼카 왕(기원전 273~232)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불탑을 세웠을 뿐 아니라, 산치와 보드가야에 거대한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제3차 불전 결집을 통해 불교의 통일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과 딸을 남쪽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를 전해줬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등 서아시아로 불교를 전파했다. 그 결과 불교가 간다라 지방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 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간다라 미술이 생겨나게 되었다. 간다라 미술 중 대표적인 것이 불상의 제작이다. 이때부터 불교는 탑과 부처라는 가시적인 형상과 함께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탁실라는 간다라에서 7일을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카슈미르의 중심도시로 법현은 축찰시라, 현장은 달차시라국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4개의 탑이 있는데, 그중 두 개의 탑이 더 유명하다. 하나는 부처가 전생에 보살로 있을 때 자기 머리를 보시했다고 해서 생겨난 탑이다. 다른 하나는 아쇼카 왕이 자신의 태자인 쿠날라를 위해 세운 탑이다. 쿠날라가 계모의 모략으로 인해 눈을 파내는 형벌을 당하게 되었고, 그것을 알게 된 아쇼카 왕이 왕비를 처벌하고 눈이 파인 곳에 탑을 세웠다. 그런데 눈먼 사람이 이 탑에 기원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현장은 기록하고 있다. 

중천축 땅에서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이곳을 지난 다음 구법승들은 소설산(小雪山, 힌두쿠시 산)을 넘어 부처님의 법이 생겨난 중천국으로 들어간다. 소설산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눈으로 덮여있다. 찬바람이 거칠게 불어대는 소설산에서 법현은 도반인 혜경(慧景)이 흰 거품을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나는 도저히 다시 살아나기 어렵겠어요. 빨리 가시오. 머뭇대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일행을 재촉한다.

법현은 다시 길을 재촉해 마투라(摩頭羅)에 이른다. 마투라에서 동쪽으로 갠지스 강이 흐르며, 그 주변에 불교의 4대 성지 등 중천국의 도시들이 산재해 있다. 법현이 인도를 방문하던 시절에는 인도 여러 나라 국왕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난 현장의 시대에는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마투라는 쿠샨 왕조로부터 굽타 왕조에 이르기까지 불상을 중심으로 한 마투라 미술을 꽃피웠다.

법현과 현장은 이제 부처님의 법과 흔적을 찾아 갠지스 강을 따라 내려간다. 먼저 스라바스티(舍衛城)에 이른다. 스라바스티에는 석가모니가 25년 동안 머물며 명상하고 설법했던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가 있다. 기원정사에는 7층의 가람이 있었으나, 법현이 찾았을 때는 이미 불타 없어지고 98개의 가람만이 존재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카필라바스투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향으로 법현은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이라 불렀고, 현장은 겁비라벌솔도국(劫比羅伐窣堵國)이라 불렀다. 성의 동쪽 오십 리에 룸비니라는 정반왕(Suddhodana)의 정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그의 아내 마야부인이 고타마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법현은 석가모니 부처의 출생지 룸비니를 성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석가세존이 항상 선정에 들었던 네 곳을 더 신성시한다. 그 첫째는 깨달음을 얻은 곳, 보드가야다. 둘째는 처음 법륜을 굴린 곳으로 사르나트이다. 셋째는 설법하고 논쟁하고 외도를 굴복시킨 곳으로 라지기르(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다. 넷째는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을 하고 내려온 곳으로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상카시아다. 그러나 지금은 불교의 4대 성지로 출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를 꼽고 있다.

법현과 현장은 카필라 성에 이어 석가모니가 입적한 쿠시나가르를 찾아간다. 당시 제자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것을 기뻐하면서도, 노가 되고 등불이 되어줄 선생이 사라진 것을 슬퍼했다고 한다. “생사의 넓은 바다를 이제 누가 노를 저어 건네줄 것이며, 무명의 길고 긴 밤에 누가 등불이 되어 주겠는가?” 그러고 나서 라지기르의 죽림정사를 찾아간다. 이곳은 또한 석가세존의 열반 후 500아라한이 최초로 경전을 결집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부처님의 법은 깨달음으로부터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보드가야(伽耶城)다. 이곳에는 보리수 나무, 수자타 여인이 태자에게 우유죽을 공양한 곳, 부처님이 결가부좌하고 수도한 굴, 깨달음을 얻은 곳에 세워진 마하보디 대탑, 성도 후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았던 곳 등이 있다.

부처님의 법과 흔적을 찾아가는 구법승의 발걸음은 바라나시로 이어진다. 바라나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사르나트의 녹야원정사(鹿野園精舍)가 있다. 이곳에서 석가세존이 최초로 법륜을 굴려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였다. 그들은 고행을 포기하고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득도할 수 있었다. 구법승들은 이처럼 부처님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깨달음을 얻고 또 법을 찾아 나갔다. 이제 그들은 깨달음과 함께 법을 담은 경전을 구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 길도 역시 고행의 연속이었다. 법현이 육로로 출발해 해로로 돌아왔고, 현장은 육로로 떠나 육로로 돌아왔으며, 혜초는 해로로 떠나 육로로 돌아왔다.

다시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로

이들 스님이 천축을 오고 가면서 남긴 기록을 다정 김규현 선생이 5권의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로 묶어냈다. 이 총서는 발로 뛰면서 현장을 확인한 다정 거사의 노력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지난 20년간 중국, 티베트, 파미르 고원, 인도를 답사하며 책과 현장을 일일이 대조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는 수년간 홍천강 수리재에 들어앉아 번역을 하고, 해설과 역주를 붙이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역사비평본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총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1500년 전 고전에 시대정신(Zeitgeist)을 담아 21세기 한국어로 번역했다. 시대정신 그것은 고전을 새롭게 되살리는 길이다. 둘째 고전여행기를 전집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비평본으로 만들었다. 역사비평본이란 해설을 붙이고 각주를 달고 연구 결과를 종합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 셋째 이들 여행기에 나오는 모든 지명을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지명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한자와 영문 표기를 부가하였다. 다정 선생은 이것을 지명의 코드화라고 말한다. 넷째 지도와 도표 그리고 사진을 넣어 현장감을 살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만들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파라미터 역할을 한다.

그가 지도화와 지명의 코드화를 추구한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이 총서가 실크로드 여행의 가이드북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는 과거의 고전여행기를 미래지향적 테마 여행의 텍스트로 만들었다. 이 책은 실크로드의 큰 축인 인도와 서역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유라시아 로드로 그 영역을 확대하도록 자극한다. 필자는 고전여행기의 번역과 역주라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패러다임의 역작을 만들어냈다. ■

 

이상기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비교문학과 대우교수.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저서로 《라인에서 엘베까지. 통일 독일의 문화와 사회》 《괴테, 불멸의 사랑》 역서로 《날씨가 역사를 만든다》 등이 있다. 현재 〈오마이뉴스〉에 문화와 기행, 예술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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