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냐나스리미뜨라의 언어철학

1. 서론

불교 철학사에서 산스크리트 논서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헌 해석을 위한 주석적 성격이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논서에서 이전의 다른 논서들에 대한 명확한 논평으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그 주장들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불분명하고 때로는 모호하기까지 한 이러한 현상들은 특히 근본논서로 역사적으로 존중되어 왔던 논서들에 대한 주석서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이와 같은 전통에서, 인도불교 철학자들은 자신의 논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

첫째, 그들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논리적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스스로 의존하는 근본논서들의 결론과 상충하지 않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인도철학사에서 두 번째 목적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록 혁신적인 철학자일지라도, 그 학파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논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매우 새롭고 독창적인 사유나 논리를 전개할 경우에도 마치 전통적인 근본논서들에서 동일한 논의가 암묵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서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현대의 학자들은 개별 철학자들의 사상을 논의할 경우에도, 대단히 새롭고 혁신적인 측면들을 단순히 광범위한 문헌 주석적인 전통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전반적으로 주석서들과 주석서를 다시 주석한 논서들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간과하고, 하나의 독립된 논서로 논의하지 않고 근본논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불교 인식논리학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에게 두드러진다.

불교언어철학의 핵심 이론인 배제(apoha)이론에 대한 논의에서 현대 학자들은 오직 디그나가(Dign칊ga, c.480~540)와 다르마끼르띠(Dharmak칕rti, c.600~660)가 저술한 근본논서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결과적으로 학자들은 후기 논사들의 논서들을 단순히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 (J쁭칊na-5큦r칕mitra, c.975)의 논서 중에서 ‘배제에 대한 논의(Apohaprakaran.a)’는 전통주의적 흐름과 혁신적 경향이 잘 융합되어 드러난다.

기존의 학자들이 단순히 전통주의라고 이해하였던 여러 측면들은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혁신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방법이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지성사적 전통에서, ‘재정비’와 ‘체계화’는 혁신을 통하여 종합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르마끼르띠의 주장을 재정비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다르마끼르띠는 주장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결코 동의하지도 않을 것 같은 대단히 혁신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제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결지(adhyavas칊ya)’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또한 그는 ‘가탁(vyavasth칊)’이론을 제시하여 다르마끼르띠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중요한 여러 범주들을 상대화하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불교인식론에서 전통적으로 근본 원리라고 강조되었던 여러 측면들의 중요성을 일정 부분 상쇄시키고 있다.

2. 불교인식론에서 배제(排除)이론

배제이론은 현상세계에서 보편적 사물은 실재하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인식론의 주창자인 디그나가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되었으며, 불교의 추론과 언어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이다. 디그나가는 전체 철학적 사유를, 개별상은 지각(pratyaks.a)의 대상이며 보편상은 추론(anum칊na)과 언어의 대상이라는, 배타적으로 이분되는 대상의 차이에 근거하여 구성한다. 두 종류의 대상들 중에서 보편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개별상에 근거하여 개념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독립성이 없다. 보편상은 오직 ‘배제’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으며, 구체적 기능인 추론이나 언어활동은 인식자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소’라고 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소’를 지칭할 수 있다. ‘소’가 가진 모든 실재적인 속성들, 보다 정확하게는 모든 ‘소 아닌 속성들’의 배제를 통하여, ‘소’라는 개념을 확정하는 ‘부정적인 정의’가 가능하다. 비록 디그나가가 추론과 언어만이 오직 개념적으로 구성된 보편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그는 어떻게 이 이론이 실질적으로 인식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게 ‘어떻게 개념적으로 구성된 보편에 대한 인식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문제는 디그나가 이후의 불교철학자들에게 논의의 핵심이 되었다.

디그나가보다 500년 후의 논사인,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디그나가의 배제이론에 근거하여 그 논의를 발전시켰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인식자의 언어활동은 두 종류의 대상 모두와 관련 있지만, 두 대상은 서로 다른 형태로 관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가 ‘결지’라고 이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대상들이 현현되고 개별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하게 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결지’의 과정은 비록 개별적인 사물들이 인식에 현전하지 않을지라도, 추론과 언어활동과 같이 의식의 개념적 상태가 인식자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과 관련되어 행위하도록 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를 몰고 와라”는 명령을 듣게 되면, 일반화된 소의 형상(칊k칊ra)을 마음에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소’를 몰고 와야만 하며, ‘소의 형상’을 몰고 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명령을 듣고 이해하고, 마음에서 분별하는 ‘소’는 실질적으로 몰고 올 수 있는 구체적인 ‘소’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추론과 언어적 표현의 경우에 대상은 두 가지 형태이다.

형상은 우리의 의식에 현현되며, 개별적인 것들은 비록 의식에 현전하지 않을지라도, 결지의 과정에서 인식행위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결지의 과정은 의식에 현현하는 보편상과 인식 행위가 구체적으로 의존하는 개별상들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배제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지의 과정이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철학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역할을 할지라도 이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사유는 아니다.

3. 결지(決智)에 대한 다르마끼르띠의 이론

다르마끼르띠는 불교인식론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결지(決智, adhyavas칊ya)’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그는 결지는 추론이나 언어적 활동에서 형성되는 보편에 근거하여, 개별적 대상에 대해서 행위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디그나가와 동일하게 다르마끼르띠는 올바른 인식의 수단으로 지각과 추론 두 종류만을 인정한다. 지각은 개별상을, 추론은 보편상을 대상으로 취한다.

다르마끼르띠의 정의에서 인식의 정당성의 기준은 ‘대상에 대한 목적 성취’(arthakriy칊)에 근거한다. 구체적으로 특정한 행위가 원칙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기대치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할 수 있는 한 그 인식은 정당하다(pram칊n.a). 다시 말하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유도하는 대상에 대한 기대치의 범위 내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저 멀리에 있는 항아리의 ‘물’을 보고, 목마름을 해소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치로 그 항아리에 접근하게 되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우리는 어떤 장애물로 인하여 그 항아리에 접근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비록 항아리의 ‘물’에 접근하지 못할지라도, ‘물’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물’이 담겨 있는 항아리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그 항아리에 접근하였을 때 오직 ‘물’이 아니라 모래만을 발견하게 된다면 ‘물’에 대한 그 인식은 정당하지 않다.

인식의 정당성은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우리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대상에 대한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기대치가 구체적인 실례에 부합하는가는 관계없다. 그 이유는 오직 개별상만이 실직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인식자가 개별적인 대상들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할 경우에만 인식의 정당성은 가능하다. 따라서 지각과 추론 두 경우 모두 다 이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추론은 오직 보편상만이 그 대상이다.

그렇다면 다르마끼르띠는 ‘어떻게 추론에 대한 인식이 실질적인 효과를 가진 개별상으로 인식자를 유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결지’의 과정이라고 대답한다. 곧 추론의 과정은 인식에 현현하는 대상과 인식행위가 의존하는 대상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그곳에 ‘불이 현재 존재한다’고 추론할 경우 그 ‘불’은 인식에 현전하는 실직적인 효력을 가진 개별적인 실재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불’에 대한 인식이 인식자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산으로 가게 할 수 있고, 구체적인 ‘불’을 발견하게 할 수도 있다. 다르마끼르띠는 이 과정을 ‘체계화된 오류의 동일화’라고 이름한다. 실질적인 효력을 위한 추론은 오류인 ‘불’의 개념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서 행위하는 과정이다. 다르마끼르띠는 추론이 오류이면서도 어떻게 인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비록 오류일지라도 대상과 관련된 속성인 경우에 그 속성에서 일탈하지 않으므로 정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속성의 현현이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그 대상의 결지로부터 인식의 정당성이 있기 때문이다.2)

다르마끼르띠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예시를 제시한다.

‘황금의 빛’을 보고 황금이라고 생각하고, ‘등불의 빛’을 보고 황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두 경우 모두 사유의 오류라고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효력에 있어서는 구분이 있다. 이와 같이 추론과 오류의 형태가 대상과 상응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실질적인 효력과의 부합에 있어서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당성이 있다.3)

인식자는 ‘보석의 빛’을 보고 ‘보석’을 얻기 위해서, 그 빛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정확히 ‘보석’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보석이나 등불 주변에 반영되는 ‘불빛’을 보았을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실질적으로 보석을 본 것이 아니므로, ‘보석’에 대한 인식은 오류이다.

그러나 만약 간접적인 ‘불빛’이 실제로 ‘보석’으로부터 발생한 경우라면, 그 인식자는 결국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최초에 보석의 빛을 보고 보석이라고 추론한 인식은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인식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기대한 대상에 대한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시킨다. 이와 같이 추론은 대상이 실재하지 않을지라도, 인식자가 그 기대치에 부합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실질적인 효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한 추론의 과정을 다르마끼르띠는 ‘결지’라고 이름한다.

다르마끼르띠가 ‘결지’를 설명할 때, 그 본질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오류임을 강조한다. 언어는 단일성이 결여된 대상에 통일된 형상을 부여하기 위한 오류적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비록 오류의 형태이고,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한 ‘단일한 형상’을 결정할 수 있게 한다. 오류의 인식은 실재하는 개별적 사물의 본성과는 다르게 대상들을 결지할 수 있다. 비록 언어가 대상의 개별적 실재가 아닌 대상을 취할지라도, 실재하는 대상과 완전히 구별되는 별개 대상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식자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불교인식론에서 개별상들은 유일하며, 다른 어떤 것들과도 공통된 속성들을 공유하지 않으므로, 개별적 사물들 사이에 실재적인 유사성은 없다. 그러나 ‘소’라고 지칭하는 경우와 같이, 언어는 개별상들과는 구분되는 임의로 부과된 단일하고 보편적인 ‘소’라는 형상을 구성한다. 우리는 ‘소’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마치 하나의 구체적 대상으로서 ‘소’가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일반화된 소의 형상을 생각한다.

‘소’라는 보편적 개념이 개별적인 실재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따라서 추론은 완전히 구분되는 특수성에 실재하는 유사성을 부가하는 과정이 반드시 개입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오류이다. 여기에서 ‘결지’는 인식에 내면적으로 일반화된 형상의 ‘소’를 개별적 ‘소’의 존재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잘못된 동일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다르마끼르띠는 오직 ‘소’의 속성이 아닌 모든 것들을 제외하는 ‘타의 배제’(他의 排除, anyavy칊vr.tti)만이 언어가 대상을 지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다르마끼르띠는 단순히 분별(分別, vikalpa)을 언급하기 위하여 ‘결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분별한 형상은 ‘오류적으로 동일화’되는 과정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결지’를 도입한다. 비록 결지는 오류의 과정이지만 보석의 불빛과 같이 직접적인 인식은 아닐지라도, 인식자로 하여금 실재하는 사물에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인식은 오직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경우에만 정당하기 때문에 분별의 정당성은 결지의 과정에서 밝혀진다. 추론이 다른 모든 분별들과 동일하게 본질적으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결지의 과정을 통하여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실재하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타당한 인식 방법으로 인정된다. 결지의 과정에서 실재하는 구체적인 대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분별은 인식으로서 타당하며, 그렇지 못한 분별은 바른 인식이 아니다.

바른 인식의 기준은 실질적인 효력을 성취할 수 있는 정당성이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구분에 근거한다. 보편상은 개별상에 대한 이해 이후에 발생하는 분별에 의해서만 파악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다. 다르마끼르띠의 정의에서, 인식의 정당성은 곧 ‘실질적인 효력’을 의미하며, 오직 개별적인 대상만이 그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개별상은 인식이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대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기억은 배제에 의해서 분류된 동일한 대상과 같이 대상에 대한 지각의 다음 찰나에 발생하므로 새로운 개별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며, 인식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다르마끼르띠는 지각의 다음 찰나에 발생하는 ‘분별’과 실질적인 효력을 초래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이해로서 ‘추론’을 구분한다. 올바른 인식의 유일한 근거인 정당성은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실재하는 개별 사물에 근거해서 행위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인식의 정당성은 인식자로 하여금 그러한 대상들과 관계하도록 한다. 지각은 실재하는 개별상이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실재하는 개별상이 현전하지 않는 분별은 결지를 통하여 실재하는 개별 사물들과 간접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분별을 추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별 중에서도 인식자가 실재하는 사물과 관계하지 않는 것들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다르마끼르띠는 지각의 바로 다음 찰나에 발생하는 분별은 인식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이 분별은 바로 전 찰나에 이미 지각에 의해서 파악된 대상에 대한 분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식자가 개별적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사물과 접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당한 인식이다. 지각과 추론은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인식자가 실재하는 개별 사물과 접촉할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별은 인식자가 실재하는 사물을 결지의 과정을 통하여 오직 간접적으로만 관계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결지’의 의미는 보다 정확하게 ‘지각으로는 관계할 수 없는 대상’을 분별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형상을 구성하는 ‘잘못된 동일화’의 과정이다.

4.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인식 대상과 범주의 상대화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타당한 인식 대상을, ‘파악되는 것’과, ‘결지되어지는 것’으로 구분하여 두 종류만을 인정한다. 지각의 대상에 대해서 ‘포섭관계의 분석(Vy칊pticarc칊)’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파악되어지는 것’과 ‘결지되어지는 것’의 구분 때문에, 타당한 인식의 두 가지 형태는 두 가지 대상, 보편상과 특수상 모두를 취한다. 인식 과정에서 현현되는 것이 파악되는 것이며, 인식 과정에서 대상은 결지되는 것이다. 지각의 경우에 파악되어지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보편상이다. 그러나 추론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4)

타당한 인식의 두 가지 형태인 지각과 추론은 개별상과 보편상 두 종류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인식 과정에서 현현되는 것이 ‘파악되어지는 것’이며, 인식 과정에서 대상이 작용하는 것이 ‘결지의 과정’이다. 지각에서 파악되어지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어지는 것은 보편상이다. 이 구분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원칙적으로 마음과는 독립된 별개의 외부대상은 없다고 단정한다. 마음, 즉 심리적 작용과는 독립된 개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삼계(三界)가 오직 식(識)뿐이다.”라고 단언한다.5)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추론과 지각을 구분하는 기준인 실재하는 대상과 개념적으로 형성된 대상의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개별상은 지각의 대상이며, 보편상은 추론의 대상이라고 배타적으로 구분하던 전통적 분류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모든 파악되어진 대상은 무분별이며, 모든 결지되어진 대상은 분별이다. 그는 ‘결지’와 ‘분별’을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분별’과 ‘결지’는 동일한 사물을 지칭한다. ‘분별’이라는 용어는 언어와 관련되고, ‘결지’라는 용어는 인식에서 아직 파악되어지지 않은 대상과 관련된 행위와 상응한다.6)

결지되어지는 모든 것은 분별이며, 아직 결지되지 않은 모든 상태는 무분별이다. 비록 추론의 대상일지라도, 아직 결지되어지지 않은 대상은 무분별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모든 인식 대상을 ‘파악되어지는 것’으로서의 무분별(無分別)과 ‘결지되어지는 것’으로서의 분별(分別)이라는 배타적인 두 범주로 분류한다. 이와 같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분류는 불교인식론의 전통에서 매우 독특한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불교인식론은 지각의 대상인 실재하는 개별상과 추론의 대상인 개념적인 보편상의 존재론적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타당한 인식의 대상에 대한 재개념화와 재분류 과정을 통해 개별상과 보편상이라는 개념을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이들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의 구분을 해체한다. 즉 인식에 현현(顯現)하는 대상, 그 자체로는 개별상도 보편상도 아니다. 오직 결지라는 후속되는 행위에 의해서 개별상 또는 보편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보편상의 특징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의 동일성으로 구성된 형상이 모든 개별적 특수로부터 구분될지라도, 분별을 통해서 특수가 구성될 때 ‘보편’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형상 자체는 의식의 형상으로서 다른 곳에서도 다시 발생할 수 있으므로, 개별상에 속하는 보편이 아니다.7)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설명에 따르면, 보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단순히 의식에 생겨나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존재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개별적인 것들과 관련 있다. 그러나 개별상과 관련된 후속적인 형상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인식의 형상으로서 하나의 형상이 의식에 반영될 때, 우리는 그것을 지각한다. 그 지각의 형상은 보편상이 아니라 개별상이다. 인식 과정에서 형상이 반영될 때, 그것은 의식에 인지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속에서 하나의 형상으로서 불은 단지 의식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자. 단일하고, 찰나적인 하나의 형상이 ‘불’이라는 의식의 형상으로서 보편의 한 종류로서 우리에게 인지된다. 따라서 하나의 형상은 그것에 후속하는 마음 작용에 의존하여, 개별상이 되거나 보편상이 된다. 만약 형상이 하나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개별상과 관련된다면, 이것은 개별상들과 관계하는 보편상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형상으로서만 그 형상을 반추한다면, 오직 한 종류로서 하나의 보편과 관계하는 개별상이다. 그러므로 “지각에서 파악하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보편상이다.

그러나 추론의 경우에는 반대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지각의 과정에서, 첫 단계에 발생하는 형상은 개별상이기 때문에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개별상이다. 동일한 논리로, 추론의 첫 단계에 발생하는 형상은 보편상이기 때문에 파악된 대상이 아니라, 추론을 위해 파악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보편상이다. 처음 의식에 발생하는 형상은 오직 다음 찰나의 결지의 과정에 의해서 보편상과 특수상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개별상과 보편상은 존재론적인 범주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형상은 후속되는 분별 과정을 통하여, 개별상과 보편상으로 구분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불교인식론의 다른 기본적인 개념들도 이와 같이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상대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은 존재론적인 분류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행위자의 행위(pravrtti)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행위’를 육체적, 언어적, 심리적인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즉 행위는 단순히 외부의 후속하는 심리적 대상과 관련된 육체적 행위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후속되는 인식 대상뿐만 아니라 의식의 형상에 직접 관여하는 언어적 심리적 행위도 포함한다.

의식의 형상은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 없이도, 우리는 그 형상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형상은 언어적 심리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서 비록 심리적 대상일지라도 그것이 행위의 대상인 한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외계에 존재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언어적 행위란 의미론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른 불교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진제(眞諦)의 세계와 속제(俗諦)의 세계로 이중적으로 구분한다. 즉 진제적 진리의 세계에서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는 속제적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가 긍정 혹은 부정적인 의미의 언어로 표현할 경우에도, 존재를 확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언제나 외계의 범주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의식의 형상이나 외계의 대상에 대한 진실한 확정은 없다. 속제적 진리의 경우일지라도 의식의 형상은 확정될 수 없으며, 오직 외계에 대한 확정이 있을 뿐이다. 진실로 자증지(自證智)의 대상인 의식의 형상은 언어에 의해서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확정은 무용하며, 부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8)

예를 들면, “여기에 나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무의 존재에 대해서 확정하든, “여기에 나무가 없다.”고 표현함으로써 존재를 부정하든, ‘나무’라는 단어는 의식에 반영된 형상으로서 나무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의식에 반영된 형상으로서 나무는 ‘나무’라는 단어를 듣거나 이해하는 경우에만 현현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중복되는 과정이지,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과정은 무의미하다. 다른 한편 의미론적으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분별의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는 외계의 대상은 실질적으로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이 인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겠는가?9)

외계에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는 의식에 반영되지 않으므로 긍정이나 부정이 불가능하다. 결국 의식에 인지되지 않는 것, 즉 형상이 아닌 것은 그 자체로 긍정도 부정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외계 대상인 나무는 ‘나무’라는 표현에 의해서 지시되는 결지에 의한 가탁(假託, vyavasth칊pita)과 같이,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오직 결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어떤 상황에서, 분별에 근거한 의식의 형상은 오직 분별로 인하여 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10)

오직 속제적 진리의 입장에서만 외부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듯이, 심리적인 형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대상을 긍정 또는 부정하는 심리적인 형상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이론에서는 외부적인 행위이다. 개별상과 보편상에 대한 구분과 마찬가지로 ‘외재(外在)’라는 개념이 대상을 존재론의 범주에서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대상과 관련된 우리의 의식에 의존한다. 대상이 오직 결지되어지는 경우에만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5.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가탁(假託)이론

가탁이론은 불교인식론에서 배제(排除)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언어는 실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것들의 배제(any칊poha)를 언급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불교인식론의 기본적인 언어철학 이론을 ‘배제에 대한 논의(Apohaprakarana)’에서 다룬다. 이 논의는 배제이론에 대해 예상되는 두 가지 반론을 상정하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현상학적 반론이다. 언어나 추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직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일 뿐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부정의 형태는 직접적인 우리의 경험과 모순된다. 우리는 언어나 추론으로 긍정적인 통일성(vidhi)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 긍정은 만약 의식의 행위가 단순히 부정할 뿐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반론한다.

두 번째 반론은 문헌 해석에 근거한 반론이다. 다르마끼르띠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비존재(非存在)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르마끼르띠는 긍정적인 통일성의 구성할 수 있는 인과관계(因果關係)와 자성(自性)이라는 세 가지 범주에서 추론을 구분한다. 따라서 추론이 오직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모든 추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종류의 반론을 제기하고 대론자는 “어떻게 당신이 언어와 추론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 배제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11)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추론이나 언어 이론에서 배제는 단지 조건적으로 채택된 입장, 즉 가탁(假託)이다. 이 의미는 ‘배제가 일차적으로 언어의 대상 등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하는가라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선 외계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언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존재에서는 배제는 외계 대상을 한정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외계 대상 중에서, 하나는 결지로 인해서 대상이 조건적으로 채택되고, 다른 하나는 표현되는 형상으로 인해서 대상이 조건적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그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것이 이 논서의 핵심이다.12)

이와 같이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대답은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진리라고 승인하기 곤란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추론과 언어적 인식의 내용은 단순한 부정이라는 설명은 반대론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추론에 대한 세 가지 구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대론자들이 반론하는 것은 불교도들이 실제로 채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단순히 ‘가탁’에 대한 반론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쉽게 불교도들은 ‘배제이론’만이 추론이나 언어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불교도들이 진실로 취하는 입장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견해에 따르면,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은 위의 게송의 의미처럼, 대상은 속제적 범주에서 오직 두 종류, 외계의 대상과 언어를 듣고 의식에 현현하는 형상만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결지의 과정에서 의미론적인 가치가 생겨나며 행위를 위한 대상이다. 비록 의식에 대상이 현현하지 않을지라도 의식이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향하게끔 한다.

후자의 경우는 대상이 비록 행위를 유도하지는 않을지라도, 의식에 현현하는 한에서 의미론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어떤 일정한 환경에서 가탁은 이들 대상들에 대해서 전자나 후자를 취하는 언어 의미론이다. 그러나 진제적 입장에서는 이것들은 언어의 의미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최종적으로 진제적 진리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관점에서 성공적인 언어적 행위가 가능한지, 심지의 비존재의 경우에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가탁’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속제적 입장에서 언어적 인식의 내용은 반드시 긍정과 부정의 요소 모두로 구성된 복잡한 형태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상의 언어적 경험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긍정적인 대상은 반드시 언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차적인 부정적 의미의 배제는 긍정적인 요소들을 제한하는 한정자로서 표현된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해서 행위할 수 있다. 반면, 오직 부적절한 것으로부터 적절한 것을 구분하는 행위, 적절한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배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배제이론을 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배제이론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세부적인 반론은 계속된다.

언어 의미론의 경우 긍정적인 전체성, 통사적으로 언어를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가? 혹은 그렇지 않다면, 지각을 언급할 때 그 대상으로서 다른 것에 대한 배제를 취한다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적 결론에 도달하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13)

반론자는 다시 지각과 추론의 구분을 문제시 한다. 다르마끼르띠의 주장에 따르면, 지각의 대상은 무분별 의식이 대상이며 배제와 함께 분별적 의식으로 다음 찰나에 발생한다. 그리고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 있어서 최소한 이 다음 찰나의 의식은 지각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결지된 대상으로서 지각의 두 대상 중의 하나이다. 지각에 근거한 행위는 분별되어가는 다른 대상들과 차별화되는 긍정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배제이론이 추론과 지각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고 문제시 한다.

각각의 경우 모두 긍정적으로 의식의 대상은 필수적으로 배제와 상응하게 된다. 따라서 반대론자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을 지각은 긍정적인 형태를, 추론은 오직 배제의 형태로 대상을 취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반박한다. 만약 긍정적인 형태로 실재하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다면, 동일한 형태로 추론도 실재하는 긍정적인 대상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만일 언어나 추론은 타의 배제(他의 排除)로써만 대상에 관여하고, 추론의 대상은 오직 배제뿐이라고 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지각의 대상도 배제라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리에 의존하여, 가탁은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어떠한 행위에서 실질적인 상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아’나 ‘사물의 생성’이라는 개념들의 예시와 동일하게 ‘구성된 것’이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오직 이전의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의 속성이다. 방편적 진리에 의존하여, 원인에 선행하는 결과〔因中有果〕라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비존재(非存在)로부터의 생성’이라는 가탁(假託)에 의지한 설명이 있다. 또는 상속이라는 개념적 구성에 의존하여 멸(滅)과 생성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논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개인이 행위의 결과를 경험할 수 있음을 속제적 입장에서 설명한다.14)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가탁(假託)이론을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라고 발전시켜서 논리를 전개한다. 곧 가탁이론은 엄밀하게 말하면 진리가 아니라, 타당한 목적을 위한 최소한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예시로써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힌다. ‘비존재에서 대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는 아니지만, ‘원인에 결과가 존재한다’는 상키야학파의 잘못된 이론을 논파하기 위하여 그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생성은 오직 존재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물은 이전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범위에서만 한정된다. 우리가 ‘항아리가 생겨났다’라고 언급하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항아리가 지금 현재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항아리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이 생겨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부분적으로 진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업(業)이론에서도, 미래에 우리는 현재의 행위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실제로 업이론에서 어느 누구도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불교는 자아의 존재는 ‘심(心)의 상속(相續)’이라고 개념적으로 정의한다. ‘하얀 거짓말’이란 현재의 행위가 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에서 오류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번 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전 행위의 모든 결과는 아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가탁이론을 ‘현재의 경우’에 적용한다.

언어적 표현이 대상으로서 긍정적인 형태의 단일성을 취한다는 것은 가탁과 동일한 의미이다. 비록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의식이 있을지라도, 배제에 있어서 언어적 표현이 오직 긍정적인 실제로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반대론자들의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분별의 의식이 세속적으로 가탁된다. 그러므로 언어 표현은 반드시 긍정적인 실체로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제만이 언어 표현의 일차적 의미라는 견해에서, ‘우선 외계의 대상은 언어로 일차적으로 표현된다’는 주장처럼 보다 긍정적인 실체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의 경우는 이와 같은 일치가 불가능하므로 가탁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15)

불교인식론에서 “배제는 언어와 추론으로 표현된다.”는 견해는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또 다른 ‘하얀 거짓말’이다. 부분적인 진리로서, 언어와 추론은 우리로 하여금 배제에 의존하지 않고는 행위를 위한 적절한 대상에게로 효과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향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인 실체만이 표현되고 추론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은 그 거짓말 자체를 하얀 거짓말로 만든다.

그러나 만약 오류적으로 이런 가탁의 이론을 개별적으로 채택하면, 배제에 한정되어 긍정적인 실체들 또한 표현되고 추론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탁이론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가 지각을 추론과는 별개인 것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추론의 대상은 배제이고, 지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배제만이 지각의 대상이라는 가탁이론을 고수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다. 지각과 추론은 긍정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를 취할 수 있다. 둘의 차이점은 그와 같은 측면의 차이가 아니라, 수사학적인 문맥에서 기인한다.

불교인식론에서 기본 개념들을 구분하기 위한 설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은, 그것들이 지시하는 사물의 의미가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용되고 논의되는 상황의 문맥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분별과 결지의 구분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다르마끼르띠가 대상을 설명할 때, 그 용어들을 대조의 관점에서 사용한 반면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실로 ‘분별(分別)’‘결지(決智)’는 동일한 의미이다. 분별은 언어나 그와 유사한 것들과 결합이며, 결지는 파악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행위의 적절성과 관련된다.16)

즈냐나스리미뜨라에 따르면, ‘분별’이란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심리적인 형상이 언어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경우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소’라는 대상을 사유하면, ‘소’라는 단어에 대한 기억과 유사한 경우이다. 그러나 ‘결지’는 마치 행위를 위한 대상인 것처럼 심리적 형상을 처리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가 설명하고 있듯이, 사유는 행위의 일종이기 때문에 ‘분별’은 일반적으로 ‘결지’의 다름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분별로 이해되는 대상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이, 이 경우 〔사유〕는 언어와 결합하여 이해된다. 이것은 외계 대상에 대한 부분적 형상과 같이 단어의 형상도 의식에 현현한다. 그러므로 ‘결지’로부터 분별이 가탁되어진 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질적인 의미에 차이가 아니라, “대상의 이해라는 범위 내에서, 그것에 대한 명칭의 차이로 이해된다.”라는 조건적인 결지를 확정하기 위해서이다.17)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서, 분별과 결지라는 용어의 구분은 그것들을 언급하는 인식의 과정에서의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하여 문맥적 상황에서 부여된 기능상의 차이이다. 언어를 습득할 때, 개념적으로 이해되는 대상은 언어와 결합하여 지칭되며, 우리는 대상에 대한 분별적 이해와 그것에 따른 이름과의 결합은 하나로서 동일하다고 믿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오류적인 믿음은 다르마끼르띠를 비롯한 불교인식론자들에게 대상에 대한 분별과 결지는 구분되는 과정인 것처럼 설명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이제 지각과 추론의 구분에 이 가탁이론을 적용시킨다.

동일한 이유로, 실질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의 마음은 분별에 대한 집착으로, 무분별이라는 한정자는 지각으로 〔다르마끼르띠와 디그나가에 의해서〕 정의되며, 그들의 논서에서 결지에 의한 분별적 의식에 근거하여, ‘분별’과 ‘결지’의 구분이 있다.18)

이와 같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다. ‘지각은 무분별’이라는 불교인식론의 근본 주장은 그 자체가 ‘하얀 거짓말’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는 지각과 추론은 모두 무분별과 분별적 대상을 취할 수 있으므로, 지각의 과정이 무분별에 한정되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장,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인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 진리이며, 이름하여 지각이 그와 같다는 의미는 지각의 첫 번째 찰나에 파악된 무분별적 대상이 무분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가 주장한 ‘지각은 무분별’이라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진리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 가능한 네 가지 대상의 범주, 지각과 추론이 각각 파악되어지는 것과 결지되는 것들 중에서, 지각에서 파악되어진 대상만이 무분별만이, 언어적 표현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다른 세 종류와는 구분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또한 지각의 결지의 대상은 분별이지만, 반드시 언어적 표현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언어적 표현으로 파악된 대상은 무분별일지라도 최소한 형식적으로 언어와 결합하며, 반면 언어적 추론의 결지의 대상은 반드시 분별적이며 언어와 결합한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분별적 언어 표현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들 세 가지 대상들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부분적인 진리’의 이해는 실용적인 경향을 취하는 사람들의 철학적인 이해를 위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가탁이론은 철학적 견지에서는 논리적 사유를 위해서, 그리고 불교 지성사에서 논서들에 대한 문헌 해석을 위한 근본적인 믿음을 위해서 요구되는 주석적 전통이라는 두 가지 목적 모두를 충족시켜 주는 매우 유용한 이론이며 수단이다. 이 이론은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동시에, 독특하면서도 불교 지성사에서 두드러진 자신의 철학적인 견해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논의의 결론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보다 구체적으로 가탁이 불교 인식론의 전통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배제이론과 연관되어 지각과 추론을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어의 대상으로서 가탁이론을 요약한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결지(決智)의 과정에서 외계의 대상이 되며, 현현(顯現)에 의해서 심리적 형상이 된다.19)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가탁이론을 설명한다.

〔반론〕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대상의 두 종류 모두를 통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제의 이론이 ‘모든 사물들의 속성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할 수 있겠는가?

〔답론〕 “그것(두 가지 입장)은 모두 가탁이론이다.” 사물은 단순히 결지나 현현에 의해서 가탁되며, 마음에서는 다른 목적과 결합한다. 그러므로 조건적인 요소들을 구분하기 위해, 외계의 대상은 단지 가탁이며, 궁극적 실재에서는 오직 개별상만이 다른 것들로부터 배제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동일하게, 모든 외계의 대상을 규정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로부터 배제된 형상은 분별적 인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반론〕 그러나 당신이 하나 혹은 다른 것이 대상이라고 할 때, 그 의도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그 의도는 다른 것에 의해서 부정될 뿐이다.

〔반론〕 그러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그러나 진실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실용적인 사람은 진실로 알려진 대상, 즉 지각과 같이 대상에 대한 믿음으로 유도하는 결지에 의해 배제되는 현현에 관여한다. 왜냐하면 결지의 과정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 기능이 결여된 현현은 행위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대상으로써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잔디밭을 지나는 경우나, 신기루의 물과 같이. 결지는 현현과 분리될 수 없다. 마치 물에 가탁된 것과 같이. 그러므로, 행위를 위한 대상이 성립될 경우에는, 결지나 현현이 부재(不在)는 불가능하다. 두 과정의 현전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하나가 구분된다는 의미는 대상의 성립을 위하여 단순히 세속적으로 이해된다.20)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들은 엄격하게 말해서 모두 현현과 결지가 요구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결지가 없는 현현은 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대상의 현재가 아니다. 예를 들면, 잔디밭을 걸을 때,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잔디에 대한 감각적 지각이 있다고 상정해보자. 비록 그 감각적 촉각이 잔디를 느낀다고 할지라도 ‘잔디가 있다’라고 결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신기루’라는 결지는 적절하지 못한 결지이기 때문에, 이에 의존하는 행위는 기대했던 결과를 초래할 수 없다.

이 경우 행위를 성공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현이 없는 결지에는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다. 신기루의 예시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만약 태양 빛에 반사된 모래의 현현이 ‘물이 있다’라는 결지를 이끈다면, 현현과 결지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적 성취를 위한 대상, 즉 ‘태양빛이 있다’라는 결지와 ‘태양빛의 현현’ 혹은 ‘물이 있다’는 결지와 ‘물의 현현’이 현존하지 않는다.

특히 후자의 두 경우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태양빛이나 물로써 대상을 단언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그것들이 세속적인 입장에서 대상으로 묘사될 수 있을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여전히 대상이 아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이와 같은 관점을 추론의 공식에도 적용한다.

인식의 과정에서 현현하지 않거나 결지되지 않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말’이 ‘소’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과 같이. 그리고 개별상은 언어적 표현 가능한 인식에 현현하지 않으며, 의식적 형상은 언어적 인식에서 결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필수적인 요수는 결여된다. 필수적인 관계는 현현과 인식의 대상이 결지되어진 상태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이 추론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21)

어떤 것이 인식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에 현현하여야 하며 결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두 조건들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대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소’를 인식하는 경우에 현현하지도 않고 결지되지도 않는 ‘말’은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추론에서 현현되는 것은 심리적 형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개별상이다. 이것은 각각 두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만을 충족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비록 행위의 측면에서, 사물이 현현에 의해 단순히 행위의 대상인 것처럼 간주될지라도, 각각의 행위들은 결지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현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습관적인 행위는 이전의 결지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행위가 없을 경우에는 결지도 없다.”는 한정이 필요하다.22)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습관적으로 행위하는 경우, 그 행위는 언제나 현현과 결지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공이 우리 앞으로 날아온다면, 어떤 결지의 과정 없이 현현에 의존하여 그 공을 피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에 따르면, 이와 같은 행위는 오직 이전의 결지의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행위를 지배하는 습관은 그 형상이 현현되기 이전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적절한 결지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비록 결지의 과정 없이도 형상에 반응하는 순수한 습관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전의 결지의 결과이다. 따라서 현현과 결지의 과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대상을 규정한다면 반론자는 즈냐나스리미뜨라가 규정한 대상의 범주는 인식과정에서 의식에 어떤 형태로도 대상을 규정지울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라고 문제시 한다.

〔반론〕 그러나 지각의 경우에 파악되어진 찰나(刹那)의 결지가 아니라, 오히려 상속(相續)의 결지가 있으며, 이것은 상속의 형상이 아니다. 따라서 찰나와 상속에서 현현과 결지가 가능하지 않은데, 어떻게 지각에서 대상이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배제이론은 추론을 위한 것이다. 현현과 결지의 양자에 존재의 속성으로서 대상은 타당한 인식의 도구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의 대상에 대한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은 오직 현현이나 결지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을 소유할 때에만 가능하다. 또한 그 대상들이 외계에 존재하든지, 의식에 내재하든지 표현될 수 있다.23)

다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서 구분되는 지각과 추론의 대응적 관계에 주목한다. 언어적 표현의 인식으로서, 지각은 우리에게 파악된 순간이 현현하는 것이며, 결지는 외계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행위의 모두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현현과 결지는 아니다. 따라서 반대론자는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정의에서 지각의 경우에 대상은 성립할 수 없다고 반론한다. 언어적 표현은 추론에 한정되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견해에 따르면 대상은 불가능하다.

불교인식론에서는 지각과 추론만이 오직 타당한 인식수단으로 인정되므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정의는 타당한 인식수단을 정의할 수 없으며, 타당한 인식이 알려질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므로 반대론자들은 어떤 것이 현현되거나 결지되어야만 대상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진실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오히려 내재하는 형상과 외계대상은 모두 지각과 추론의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답론〕 사물이 실재하는 상태에 대하여 가탁이론을 설한다. 현현과 결지는 모두 존재의 속성으로 대상성이 있다. 단지 세속적으로 구체적으로 대상에 관계하는 사람과의 가설적인 관계에서 ‘사물은 실재한다’라고 한다. 구제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에게 대상은 각각의 찰나는 단절되지 않으며, 오직 그 사람이 찰나를 구분하는 경우에만 단절된다. 지각에서는 두 경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오류는 없다.24)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왜 반대론자의 반론이 타당하지 않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각은 진실로 대상이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으로써 대상의 범주가 보다 덜 제한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설명한다. 어떤 하나의 정의가 유용하고 적절하기 위하여, 어떤 것이 진실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실재하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비록 궁극적인 실재에서 그와 같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인식의 정의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찰나의 대상이 현현하고, 그 대상이 지속적으로 상속되어 후속하는 행위가 그 대상을 취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정에서 동일성을 유지된다고 믿는 일반 세속의 사람들에게 비록 궁극적으로 진제의 입장에서 지각은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속제적으로 두 대상, 비분별적인 것(파악된 순간)과 분별적인 것(결지된 상속의 순간)으로 구분된다는 설명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의 두 대상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견지에서 철학적으로 가탁되어진 것으로 일반인을 위한 낮은 단계의 방편이다.

만약 “세속의 일반 사람들을 위하여, 지각되는 것과 분별되어지는 것, 예를 들어 ‘불’이라는 결지는 하나의 동일성의 형태로 현현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분명히 오류이다.”고 반론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불’이라는 결지에는 다른 것들이 현현한다는 기억 때문이 아니라, 결지된 불의 현현이 오류라는 범주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각에서 사물이 현현함을 증명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분별적 현현과는 다르다. 분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현은 지각에서 발생하는 현현과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의 형태를 달리함으로 사물의 현현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탁이 있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실제는 없다.”25)


반론자들은 세속의 일반인들은 지각에서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구분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이 비록 부분적인 진리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일반인들이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지각되는 대상의 시각적인 형상에 차이가 있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면, 이전에 보았던 ‘불’이 대한 경험이 기억이나 상상 속에서 분별의 형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과 같은 ‘불’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지금 여기에서 현전하지 않아도 이전에 경험한 ‘불’에 대한 기억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다’고 하는 ‘불’은 실제로 우리 앞에 시각적으로 현전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전의 경험에 기초하여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지각은 ‘파악되는 것’과 ‘결지되는 대상’들 간의 차이를 현상적으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적 구분은 지각되는 대상이 의식에서 개념적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와 추론에서는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우리가 추론하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서 지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언어와 추론은 또한 지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반론하는 반론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불교 인식론이 역사적으로 지각을 설명할 때 마치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하는지 그 이유를 증명한다. 또한 실재하는 대상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적 정당성은 언어와 추론에 적용되지 않으므로, 지각에 대한 정의와 관계없이 언어와 추론은 실재하는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불교인식론의 지성사에서 지각과 추론에 대한 이론을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들은 동일하게 다른 모든 주장들에도 적용될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배제에 대한 논의’에서 설명하는 언어와 추론에 대한 모든 주장의 핵심은 결국 지각이 진리라는 것이다. 지각에서 결지된 대상은 행위를 위한 외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의식에 현전하는 대상은 외계의 사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구성된 형상이다. 지각이나 지각에 기초한 행위들은 의식에 현전하는 유용성과 행위성 모두를 내포하는 대상이 미리 상정되어 있다. 그리고 외계의 대상을 활용할 수 있는 심리적 형상은 행위할 수 있으므로 마치 언어와 추론이 실재하는 대상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지각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6. 결론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가탁이론은 서론에서 제기한 문헌학적 해석과 철학적 사유의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목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토대이다. 이 이론은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다르마끼르띠학파의 논서 전통을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기존의 논서들에서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탁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르마끼르띠의 사유 전통에서 논의되었던 이론들을 재구성하고 재사유할 수 있는 유연성과 동시에 일관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이론은 매우 혁신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결론이다.

결론적으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르마끼르띠가 설명한 모든 것이 논리적이라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그가 지지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논서의 전통과의 관계에서는 문제시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가탁이론’을 논의함에 있어서 기존에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에 대한 해석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정 부분의 해석에서 주석자 내지는 그 해석자의 주장이 궁극적으로 논서의 원저자가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가탁’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가탁이론에서 포함하고 있는 부분적 진실은 누구를 위하여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설명되고 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또한 어떤 특정한 주장이 무엇 때문에 특정한 상황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해석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즈냐나스미뜨라의 논의 방법은 불교인식론의 논서들에 대한 단순히 문헌 주석적인 해석이나, 철학적인 사유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성사도 함께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방법의 균형적인 조합에 의해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전통주의자이면서도 혁신주의자라고 스스로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르마끼르띠의 논서들을 다양하게 직접 인용하여 전통적인 배제이론들을 정당화하면서도 다르마끼르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 혁신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현대학자들이 제시하였듯이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배제이론은 단순히 다르마끼르띠의 이론들을 재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다르마끼르띠의 논서를 인용하는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구체적인 동기와 직접적인 목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논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도하고 있지를 핵심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접근 방식은 단순히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논서를 해석하는 것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불교인식론의 전통과 산스크리뜨 논서들에 대한 이해로 확대되어야 한다. 산스크리뜨로 쓰여진 철학 논서들이 어떻게 왜 그와 같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연구는 단순히 표면적인 분석과 이해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특정 논서에서 하나의 주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뿐만 아니라, 왜 그 저자가 그 주장을 그와 같은 방법이나 입장에서 어떤 청중들을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각각의 사상가들을 독립된 논서의 저자로 간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비록 그 저자가 정교하게 전개되고 있는 논서와 철학적 전통의 계승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할지라도 그의 주장이 기존의 전통적 논서에서 기술된 주장들의 재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만 가정할 이유는 없다.

분명히 그들의 견해는 계승자로서의 입장과 혁신자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논서의 주석들을 연구할 때 이러한 고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논서의 주석이나 재주석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것들이 철학적으로는 창조적인 사유가 결여되고 오직 근본 논서의 본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는 신뢰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만을 고려하는 문헌학적인 접근 방식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혁신적인 철학적 사유들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논서들은 이러한 이해에 바탕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

 성청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플로리다대학 종교학과 박사과정에서 불교 인식논리학을 전공 중이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