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말문 열기

한국불교의례의 최고(最古) 자료로는 9세기 일본의 도당 구법승 엔닌이 《입당구법순례기》에서 전하는 신라적산원의 강경의식인데, 이조차도 신라 본토에서의 의례가 아닌, 당나라 산동 적산법화원의 것이다. 잘 알려졌듯이 불교가 국교로 신봉됐던 고려시대에는 국가 주도 불교의례만도 80여 종 1천여 회 이상 거행되었다. 그러나 의례의 명칭은 전해지고 있으나 의례의 구체적인 설행 대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의문(儀文)들은 전해지지 않아 한국불교의례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는 데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 가령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의례의 하나인 ‘수륙재의문(水陸齋儀文)’인 ‘수륙의문’이 11세기에 국내에 전해졌고, 14세기에는 ‘찬요’나 ‘촬요’라고 하는 약본(略本)들이 간행되었다고 하지만, 전해지고 있는 실제 의문은 15세기 이후의 본이다. ‘영산재의문(靈山齎儀文)’도 《진언권공》(1496)에 합편된 ‘작법절차’가 최고본에 가깝다. 현재 한국불교의 의례자료를 집성한 《한국불교의례자료총서》(전 4집)에 탑재된 의례 70여 편은 대부분 여말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례의 형성과정과 특성 등을 밀도 있게 탐색할 수 있는 시기는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고작 6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의례는 생물체와 같다. 의례 형성과정을 탐색하는 현재에도 한국불교의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서 의례라고 전제할지라도 논의의 범주는 지엽적이거나 필자의 주된 관심에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발행 《통일법요집》(2003)에는 일용의식, 상용의식, 제반의식, 전문의식 법회라는 대분류 아래 적지 않은 단위 의례가 한국불교의례로 제시돼 있으나, 이 글에서는 한국불교에서 행해졌으며 현재도 행해지고 있다고 보이는, 일상의 시식의례와 공양의례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한국불교에도 근본불교 시기부터 시행된 포살, 자자, 수계와 같은 수행 의례가 없지 않지만 출가와 재가가 함께 참여하여 신앙의 대상에 공양하거나 일체 유무형의 존재에 대해 음식을 베풀고 불교의 교설을 들려주어 동참 대중이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두 의례야말로 보편적인 종교의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통일법요집》 소재 ‘관음시식’과 ‘삼보통청’을 현행 한국불교 시식과 공양의례의 저본으로 삼고 현행 두 의례의 유래와 형성과정을, 이전의 《진언권공》 《청문》(1529) 《증수선교시식의문》(16C, 이하 《선교시식》) 《권공제반문》(1574) 《운수단가사》(1627) 《영산대회작법절차》(1634) 《범음집》(1721) 《작법귀감》(1826) 《대각교의식》(1927) 《석문의범》(1935) 《신편증주석문의범》(1982) 등에서 세부의식의 추이를 중심으로 그 과정의 특성과 문제, 그 연유 등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시식의례: ‘관음시식’

유래와 형성과정

시식의례(施食儀禮)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불교 일반에서 말하는 시식의례는 ‘구병시식’ ‘관음시식’ ‘화엄시식’ ‘전시식’과 같이 영적 존재에게 진언 등으로 음식을 변화하게 해 베푸는 의례이지만 일반적인 시식의 연원은 보시에 있기 때문이다. 보시는 초기불교의 재가자나 대승불교의 출·재가 수행자들이 행해야 할 첫째 수행과목이다. 재가 불교도가 승려들에게 올리는 제일 보시품은 음식이며 음식을 보시하므로 시식이라고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영적 존재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을 시식이라고 하고, 스님들께 올리는 음식을 베푸는 것을 재(齋, 점심)라고 하다가 지금은 공양이라고 한다. 음식을 베푸는 것은 같지만 음식을 받는 대상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의 시식은 편의상 영적 존재에게 음식을 베푸는 행위에 한정한다.

시식의례는, 아난 존자가 아귀에게 음식을 베풀고 수명을 연장받았다는 《불설구발염구아귀다라니경》 등의 경전에 근거한다. ‘3일 뒤 명이 다해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아귀들의 말을 들은 아난은 부처님께 사실을 아뢰어 ‘일체위력다라니(뒤에 변식진언이라 불림)’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법식대로 실행하여 아귀들에게 시식을 하고 아귀를 위해 삼보에 공양을 올려 수명을 연장한다. 시식의례는 이렇게 아난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못 생기고 굶주린 염구아귀들에게 다라니의 위력에 의지하여 음식을 베풀어 고통을 면하게 해 주고 천상에 나게 하는 시식의례는 염구시식, 구병시식과 같은 형태로 설행되거나, ‘수륙재회’의 형태로 보급되었다.

중국 양나라 무제에 의해 6세기 초에 처음으로 설행되었다는 수륙재회는 전형적인 시식의례였는데, 당송(唐宋)을 거치면서 제사의례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고려 초 10세기에는 한국에도 도입되어 설행되기 시작했다. 1395년 조선 태조는 왕조 교체로 희생된 왕씨들을 위해 개성의 관음굴, 삼척의 삼화사, 남해의 견암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매년 정례화하였으며, 1397년에는 왕실의 선대 조상을 위해 서울 진관사에 수륙사(水陸社)를 세워 국행수륙재를 열었다. 이후 ‘기신재(忌晨齋)’로 설행되던 수륙재는 존속하여 숭불하려는 왕실 일부의 뜻보다, 폐지하여 억불하려는 유신(儒臣)들의 강한 의지로 말미암아 국행의례의 자격을 잃고 내부 의례로 존속되고 있다.

국행의례였던 수륙재에 비해 ‘시식의문’에 의거한 일반적인 시식의례는 내부 의례의 성격이 짙은데, 하위의 영적 존재들을 청해 음식을 베푸는 순수한 시식의례이다. 국내 전승되고 있는 시식의문은 원의 몽산덕이(蒙山德異)가 주를 붙인 《선교시식》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다. 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안변 석왕사의 《권공제반문》이나 《작법귀감》 등 종합의례 서적에 편재된 ‘시식의문’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나 차례와 의문의 출입이 있다. 시식의문의 대략적인 구조는 시식의 대상을 청해[召請] 시식을 하고[施食] 봉송하는[奉送] 3단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 다시 소청은 창혼과 청혼으로, 시식은 변식(變食)과 시식(施食)으로, 봉송의 왕생은 정토업, 보례삼보, 행보, 봉송, 회향의 아홉 과정으로 세분할 수 있다. 앞의 제 의례 의문에 나타난 각 의문의 변화 양상은 형성과정이 단순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데 시식의례의 각 과정의 차이와 형성과정 추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거불의 확장: 거불은 거염불명(擧念佛名)의 약칭으로 당해 의식의 주불보살의 명호를 칭명하고 인사하며, 칭명하여 의식의 증명으로 삼는 서두 의식이다. 《권공제반문》에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성(三聖)을 칭명하고 있고 이것은 이후 《작법귀감》에도 이어지고 있다. 《석문의범》에는 원통교주 관세음보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원통회상 불보살이 칭명되며, 현행 《통일법요집》의 ‘관음시식’에는 아미타불, 관음세지 양대보살, 접인망령 인로왕보살이 칭명되고 있다.

둘째, 시식의 대상: 시식의 대상을 부르는 창혼과 대상을 청하는 청혼은 《선교시식》이나 20세기 초에 필사된 《범음집》 등에는 《통일법요집》의 그것과 같이 당일 특정 영가를 우선 청한다. 하지만 《작법귀감》 《석문의범》에는 명도귀계의 영가를 먼저 청하고 있다.

셋째, 지옥을 깨는 방법: 시식의 대상인 아귀들은 지옥에 있으므로 이들을 청하려면 먼저 지옥을 깨야 한다. 《통일법요집》에는 천수찬게 이하 천수주 파지옥게송 파지옥진언 해원결진언이 쓰이고 있는데 《선교시식》에는 ‘대방광불화엄경’이 칭명되고 있다.

넷째, 당구가피: 《통일법요집》에는 널리 청하는 보소청진언 이후에 나무상주시방불·법·승과 ‘대방광불화엄경’이 염송되고 《선교시식》에는 소청한 영가를 자리에 앉히고 행하며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지장왕보살, 아난 존자 등 시식의례와 인연 있는 성현이 칭명된다.

다섯째, 증명청 유무: 지옥의 아귀들을 청할 때 《선교시식》 《석문의범》에는 증명청이 있지만 《통일법요집》에는 《작법귀감》을 따라서인지 증명청이 없다.

여섯째, 수계의식: 《선교시식》이나 《권공제반문》 수륙재의문에는 청해 온 영적 존재에게 시식 이전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게 하는 수계를 하고, 지장보살 멸정업다라니,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개인후진언, 삼매야계진언 등을 염송해 영적 존재의 정화를 하지만 《작법귀감》 《석문의범》에는 봉송 직전에 수계의식만을 행하고 있다. 《통일법요집》에는 이마저 행하지 않는다.

일곱째, 사다라니 염송: 하위의 존재들을 위해 부처님의 위신력과 진언의 힘으로 음식을 변화시키는 ‘사다라니’는 《선교시식》 이래 각 7편이 염송돼 왔다고 보이나 《통일법요집》에는 각 3번 염송하고 있다. 시식 인연경전이나 의궤에는 상중하의 변공가지(變供加持)를 위해 21편, 14편, 7편 염송으로 차등되었으나 《통일법요집》에는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다.

여덟째, 칭양성호: 재시 법시와 더불어 시식에서 행하는 무외시의 칭양성호는 《선교시식》 《권공제반문》에는 7여래가 칭명되지만 《작법귀감》 《석문의범》 《통일법요집》에는 5여래가 칭명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수륙재의문과 구병시식에서는 7여래가 칭명된다.

아홉째, 법시의 순서: 법시(法施)를 하기 이전에 《선교시식》과 《권공제반문》에는 수륙재처럼 참회와 사홍서원의 발원이 선행된 후 《법화경》 게송과 12인연의 순관 역관이 설해진다. 《작법귀감》에는 여래십호 반야게 법화게가 《석문의범》과 《통일법요집》에는 반야게 여래십호, 법화게, 열반게가 법시로 베풀어지고 있다.

열째, 봉송방법: 《선교시식》 《권공제반문》에는 법시가 끝나면 반야심경과 왕생다라니로 봉송을 마치고 있지만 《작법귀감》 《석문의범》 《통일법요집》에는 장엄염불의 정토업이 행해지며 제법 긴 봉송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특성과 문제

위에서 16세기 간행 《선교시식》과 《권공제반문》 19세기 간행 《작법귀감》, 20세기 초에 간행된 《석문의범》 그리고 현대의 《통일법요집》 소재 관음시식을 통해 시식의례의 형성과정 추이를 개괄하였다. 현행 시식의례로 정착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거불과 법시 등을 중심으로 한국불교 시식의례의 형성과정의 특성과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시식의례의 첫 장면으로 당해 의례의 주불[신]을 칭명하는 거불이 변형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6세기 《권공제반문》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극락 3성(聖) 칭명은 19세기 《작법귀감》에까지 이어졌지만, 근대의 《석문의범》에 이르면 원통회상 관세음보살과 불보살로 구체화되고 한정되었다. 이후 현대에는 ‘대령’의 거불이었던 인로왕보살의 칭명이 관음시식의 거불로 합편되고 이 과정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관음세지, 양대보살이라고 합편돼 3칭으로 정착되었다.

관음시식 등 현재 거의 모든 시식의례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법귀감》에서는 인로왕보살은 대령의 거불로 3칭 되었다. 그렇다면 극락 3성을 칭명하는 시식의 거불에 왜 대령의 거불이었던 인로왕보살이 추가됐을까. 관음시식은 구병시식, 화엄시식 등과 같이 거불로 시작해서 영적 존재를 초청해서 공양을 베풀고 보내는 일체의 의식이 다 갖춰져 완결된 의식이다. 그럼에도 《통일법요집》에는 ‘천도재’ ‘49재’라고 하여 ‘시련, 재대령, 관욕, 신중작법, 거량, 설법의식, 불공(지장청), 중단퇴공, 관음시식’의 차례가 제시돼 있다. 49재와 같은 천도재를 이렇게 봉행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관음시식에는 영적 존재를 부르는 의식이 있는데, 그 의식의 앞에 시련이니 재대령과 같은 영적 존재를 모시거나 대면하는 의식을 봉행하라고 하는가. 《통일법요집》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 같은 차례는 현재 한국불교의 일반적인 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시식》이나 《권공제반문》의 시식의문은 현재의 관음시식처럼 대소(大小) 광략(廣略)은 있을지라도 완결성에는 하자가 없음에도, 관음시식 이전에 선행 의식을 시설한다. 아마도 이는 ‘수륙재’ ‘영산재’와 같은 대재의 국행의례 때 하나하나의 의식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설행하던 관습이 시식의례에 합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인다. 시식의례의 구성은 청하고 음식을 베풀고 보내는 순서로 하위의 세부 의식이 수반된다. 예를 들면 《선교시식》과 《권공제반문》의 시식의문에서는 별도의 영적 존재를 깨끗하게 목욕하게 하는 관욕의식이 있지 않고, 지장보살 멸정업다라니나 관세음보살멸업장진언 등으로 정화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관음시식에는 관욕 의식도 별도의 정화 의식이 없으니, 대재에서 행하는 관욕을 행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영적 존재를 대면하는 대령을 시설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완결성이 있는 시식의문의 시식의례에 대재의 형식이 채용되는 과정에서 현행 관음시식에는 오히려 일반 시식의례에서 갖춰야 할 정화의식이나 수계의식 등이 탈락되거나 차례가 바뀌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례의 통합과 축소, 그리고 견기이작(見機而作)이라는 상황 논리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시식의례에 보이는 사상사적인 변화의 하나는 법시(法施)라고 할 수 있다. 시식이라고 하지만 무외시와 법시가 베풀어지는데 《선교시식》과 《권공제반문》에는 12인연과 《금강경》의 두 게송이 법시로 시설되었다. 그렇지만 《작법귀감》에는 여래십호와 반야게송과 법화게송이 설해지며 《석문의범》의 관음시식에는 《열반경》게송이 더해지고 반야게송과 여래십호의 위치가 도치되었는데 《통일법요집》의 관음시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제법의 실상을 밝혀 주는 법시는 시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법회에 동참한 일체 존재들에게 제법의 실상을 알려 주기 위해 12인연의 순관과 역관 및 12인연 진언과 법화경 게송이 설해지고 있는 수륙재와 달리 《선교시식》과 《권공제반문》에는 12인연과 《반야경》의 게송이 함께 설해진다. 그렇지만 《작법귀감》에 와서는 반야, 법화게송이 양립되었으나 《석문의범》에 와서는 열반게송이 추가되어 반야, 법화, 열반의 세 게송으로 법시를 완성하고 있다. 이는 선종적인 시식의문과 법화적인 수륙의문의 조화 위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한국불교의 원융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현행 시식의례에서 개선돼야 할 점은 무엇일까. 의례의 대상이 한없이 늘어나는 것은 대승불교의 구제사상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시식의례의 성격이 분명해질 필요는 있다. 시식이 불특정 다수의 영적 존재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특정 영가의 시식(제사 같은 성격)이 우선인지를 분명히 하고 소청해야 한다. 또 지나치게 상황논리에 의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수 있지만, 청하고 시식하고 보내는 평범한 구조이므로 순서는 명확해야 한다. 가령 무외시, 재시, 법시를 받기 전에 부처님이 누구라고 일러주는 삼귀의계의 수계를 봉송 끝에 행하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 수륙재의 경우 사사귀정 편이 후반부에 시설되고 있지만 법시로 행하는 관행게송보다는 선행한다.

시련, 대령 등의 과정으로 봉행되는 천도재의 시식이라고 해서 그 근본 구조가 다를 수 없으므로 시련, 대령을 하였을 때 행하는 시식은 중첩을 피해 전후가 명료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또 아귀계의 지옥을 파하고 그곳의 아귀들을 청할 때 증명의 성현으로 청하는 면연귀왕과 하리데모를 청하는 증명청은 아무리 시간이 짧아도 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힘이 없어 곧바로 도량에 이르지 못하고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의 하나하나는 그 생성 연유와 명분이 있다. 그 연유에 따라 행해져야 하고 내가 지금 정성을 다해서 청하면 바로 이 자리에 이르러 법공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관상(觀想)해야 한다. 시식의례는 몸으로 수인을 짓고 입으로 진언을 외우고 마음으로 관상하는 삼업으로 행해져야 하는데 《선교시식》을 제외하고 삼업과 관상에 대한 주석이 없지만, 《작법귀감》의 찬자 백파긍선 스님은 “시식하는 법사가 관력(觀力)이 없으면 종일토록 진언을 염송해도 마음에 힘만 허비할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2. 공양의례: ‘삼보통청’

유래와 형성과정

공양의례(供養儀禮)는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나 지금이나 재가신도 신행덕목의 하나이다. 신앙의 대상인 불법승 삼보를 청해 모시고 공양을 올리는 공양의례의 대표적인 한국불교 의례로 ‘삼보통청(三寶通請)’이 있다. 이 장에서는 현재의 ‘삼보통청의문’을 중심으로 하여 이전의 현재의 의문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전해지고 있는 한국불교의 가장 오래된 공양의식 의문은 ‘진언권공’ ‘작법절차’ ‘삼단시식문’이 합편된 《진언권공》이다. 이곳에 실린 세 의식은 15세기 이후 한국불교 의례의 전모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진언권공’은 진언으로 공양을 권하는 의식으로 사시마지와 같은 일용 의식이라고 보이며, ‘작법절차’는 ‘공양문’이라는 표제어와 같이 후대에 일반화된 영산재의문이며, ‘삼단시식문’은 수륙재의문이다. 그러므로 진언권공과 작법절차에서 《통일법요집》 소재 삼보통청까지 변화돼 온 주요 구문의 추이를 개괄해 보면 한국불교 공양의례의 형성과정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공양의례의 기본구조에 대해 필자는 《청문》 등에 제시된 ‘소청’ ‘헌좌’ ‘공양’ ‘풍경’ ‘표백’의 다섯 단계의 기본 차례를 신뢰하며, 여기에 원성취진언의 수계발원과 회향의식 그리고 선행(先行)의 정근(정진)을 더해 8단계로 설명한다. 시식의례에서 살폈던 종합의례서 소재 공양의례는 이 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된다. 의례의 각 과정의 차이와 형성과정 추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거불과 소청: 현재 《통일법요집》에 실린 거불은 ‘나무불타부중광림법회’인데, 작법절차에는 당일 법회에 따라 칭명되는 법화, 화엄, 참경, 아미타, 지장 등 5종류의 거불로 변별되고 있다. 현재의 거불은 《작법귀감》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참고로 《석문의범》에 소개된 20종의 공양의례 거불에 불보살의 명호라고 하기 어려운 ‘광림법회’가 합칭되는 예는 삼보통청밖에 없다. 다음은 소청인데 《권공제반문》에는 불법승 삼위에 대해 별도로 나무일심봉청을 하고 있으며 《운수단가사》에는 불법승 삼보에 별도의 ‘일심봉청’이라는 술어를 부여하지 않고 있으나 법보와 승보에 줄을 바꾸고 있고 《작법귀감》에는 다른 문장으로 ‘나무일심봉청’을 삼편하고 있다. 현재의 청사 형태로 확립된 것은 《석문의범》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헌좌와 찬례: 청한 성현들에게 찬탄의 노래[가영]를 하며 고아일심귀명정례라고 하고 있지만 수륙재의문에는 헌좌 이후에 찬례삼보를 하고 있고, 수륙재나 영산재의 의문에는 다탕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권공제반문》에는 삼청을 할 때마다 가영을 하지만 ‘고아일심귀명정례’는 하지 않고 헌좌 이후에 다탕을 올린다. 《작법귀감》에 현재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수륙재의문’ ‘찬요’나 ‘촬요’의 헌좌, 게송, 말구, 말언은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상위는 ‘회작자타성불인(廻作自他成佛因)’, 중위는 ‘속원해탈보리과(速圓解脫菩提果)’라고 하여 상위와 중위의 말언을 연결하면 ‘인과(因果)’가 되어 상위와 중위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작법절차’ 이래 상위의 말구는 《권공제반문》 등에는 ‘회작자타성불도(廻作自他成佛道)’와 함께 혼기(混記)되다가 현재의 ‘자타일시성불도’로 정착됐다.

셋째, 공양의식의 추이: 공양의식은 공양을 변화하게 하는 변공(變供)과 공양을 올리는 공양으로 나뉠 수 있다. 변공 관련 추이로 《작법귀감》에만 해도 상위의 공양을 위한 진언변공 다라니들은 37(21)편이 염송되었다고 보이나 《통일법요집》에는 3번 염송으로 그친다. 음식물을 질적 양적으로 변화하도록 하는 진언으로 상위의 불격을 가진 이들을 위해서는 《진언권공》에는 변식진언, 출생공양진언, 정식진언이 활용되나 《석문의범》 《대각교의식》 《신편증주 석문의범》에는 ‘변식진언 감로수진언 수륙관진언 유해진언 출생공양진언 정식진언 운심공양진언’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통일법요집》에는 ‘변식진언 감로수진언 수륜관진언 유해진언’의 사다라니로 정리되었다. 《작법귀감》에는 별도로 ‘변식진언 출생공양진언 정식진언’을 간략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의미 있는 의견이 제시돼 있다. 공양의식으로는 《통일법요집》에는 7정례 예참공양과 8정례 예참공양이 제시돼 있지만 《석문의범》에는 운심공양진언과 보공양진언이 공양으로 행해지며 《작법귀감》과 그 이전 의식에는 전통의 가지공양으로 육법공양과 불법승 삼보에 대해 공양하고 있다.

넷째, 원성취진언의 발원: 원을 성취하는 진언인데 《통일법요집》 등에는 앞에 별도의 원이 없다. 《운수단가사》에만 해도 보공양진언 이후에 곧바로 경전을 염송하는 ‘풍경’을 진행하는데 《작법귀감》에는 능엄주 염송 이후 원성취진언과 보궐진언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수륙재’의문의 하단의식에는 원성취진언 앞에 사홍서원의 발원이 존치돼 있다.

다섯째, 보궐진언의 보궐: 《작법귀감》 이후 원성취진언과 보궐진언이 연이어 등장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러나 《오종범음집》에는 “《법화경》을 다 염송하지 못할 때 보궐주와 수경게송을 염하라”고 하고 있다. 수륙재와 영산재의 경우에는 《법화경》 염송을 주로 하며, 보궐진언 앞에서 현재도 능엄주 등 사대주 등이 염송되는 법회를 볼 수 있지만 《통일법요집》에는 전후 어떤 진언이나 경전을 염송하라는 지문이나 흔적이 없다.

여섯째, 축원의 확장: 《작법귀감》에만 해도 3계수귀의례(三稽首歸依禮) 축원과 당일 법회에 재주, 출가 대중인 참선자, 염불자, 간경자의 축원이 이뤄지고, 이어 동업대중의 축원이 정교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석문의범》에 이르면 축원이 일반화되어 공양축원에 자리하지 않고 별도로 편집되며 그 축원의 차서가 잘 보이지 않는다. 《통일법요집》에 이르면 재자축원과 출가대중으로 보이는 동참재자 축원, 법계 불자 축원이 시설된다.

특성과 문제

지면 관계상 공양의례를 사시마지와 특별한 날에 행하는 삼보통청 공양의례를 구분해 논의하지 못하지만, 구분하는 것이 적합하다. 그것은 매일 사시에 올리는 마지는 모셔 놓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고, 널리 일체 삼보를 청해 공양 올리는 삼보통청은 대상을 별도로 청하는 의례이므로 그 형식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언권공》이 모셔 놓은 분께 올리는 공양의례라고 한다면 《진언권공》의 작법절차나 영산재나 수륙재는 상단에 모시는 부처님을 별도로 청해 모시고 행하는 공양의례로 구분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추이를 통해 공양의례의 형성과정의 특성과 문제, 개선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 여타 공양의례의 거불과 달리 삼보통청의 거불에는 왜 ‘광림법회’가 있는가. 《영산대회작법절차》에서 이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다. 유치 이후 삼정례의 청을 할 때의 청사(請詞)는 “일심예청 나무진허공 편법계 시방상주 일체불타야중(나무 허공계를 다하고 법계에 두루 하시는 시방에 항상 머무시는 일체의 불타야중을 일심으로 절하며 청합니다)” 하며 대중은 모두 “유원자비 광림법회(자비로 법회에 광림하소서)”를 하는데, 이렇게 청하는 것을 ‘대례청(大禮請)’이라 한다. ‘소례단불청(小禮單佛請)’은 ‘곧[則]’ 봉청게송에 이어 “나무불타부중광림법회”를 하고 바로 헌좌게송과 진언을 염송한다.

그렇다면 언제 소례로 간단하게 삼보를 청하는가. ‘대불청’을 한 다음날 사시(巳時)에 공양을 올릴 때 행한다고 같은 의례서에 합편된 ‘지반문작법절차’에는 협주돼 있다. 정리하면, “나무불타부중광림법회’는 ‘나무불타부중 유원자비광림법회(불타부중께 귀명하오니, 자비로 법회에 광림하소서)”라고 하는 약식 청사이다.

청사 형태인 거불을 하고 유치 청사를 진행하는 현행 삼보통청이 《작법귀감》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그렇게 행해졌다고 보인다. 거불은 영산재에서 행해지는 6거불이나 당해 법회의 본존으로 봉행해지는 것이 옳다. ‘거불성’이라는 영산의 범패 음악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7일 수륙, 3일 영산 등 대형의 국가 의례에서 첫날, 다음날이라는 상황에 따라 행해진 거불이고 소리였다고 보인다. 하나 지금은 당일 두어 시간 봉행되는 삼보통청에서도 변별되지 않고 그대로 거행되고 있다. 시급히 수정되고 시정돼야 할 의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자리를 드려 앉으시기를[獻座] 청하기 전에 가영을 행하고 있는데, 초청하면서 찬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가영을 하고 ‘고아일심귀명정례’라고 하고 있다. 의문처럼 정례(頂禮), 머리를 땅에 대는 절을 올려야 하나 그렇지 않고 있다. 정례라는 대사처럼 그렇게 행할 때 삼업의 예법이 된다. 청사를 하며 대중이 함께 ‘향화청’ 하고 가영이 등장하는 것은 《권공제반문》에 나타나지만 ‘고아일심귀명정례’를 하지 않으며, 중위의 신중을 청할 때, 청하고 가영을 하고 상위의 삼보께 보례를 하고 이후에 자리에 안치하고[獻座安位] 있을 뿐이다. 정례를 하는 경우 대체로 수륙의문에는 ‘찬례삼보’라 하여 헌좌 이후에 행한다. 자리에 앉으시고 나서 차를 올리며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형성과정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자리를 바치는 게송의 말구, 말언이 상단과 중단의 역할을 설명해주는데 이는 한국불교의례의 철학과 문예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상단의 부처님들은 ‘자타의 성불을 인(因)을 돌이켜 지으시고’ 중단의 신중님들은 ‘해탈 보리의 과(果)를 속히 원만히 해 주시라는 것’을 상단과 중단의 헌좌게송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 수륙의문에서는 보이나 중국의 《수륙의궤회본》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셋째, 앞에서 언급됐던 형성의 추이는 의례의 축소와 합편 과정에 일어난다. 정성을 다해 공양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나의 공양이 질적 양적으로 변화돼야 일체 삼보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는데, 진언의 가지에 의지한다. 이 의식을 진언변공, 가지변공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의식 진언의 공능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된 의식으로 《현밀원통성불심요집》의 ‘공불이생의(供佛利生儀)’가 있다. 이곳에는 삼보에 공양하고자 하면 보례진언 7편, 정법계진언 21편, 변식진언 21편, 출생공양진언 21편을, 중위의 존재에게 공양하고자 하면 변식진언 14편을, 하위의 존재를 제도하고자 하면 변식진언 7편을 염송하고 하고 있다. 이는 《진언권공》의 행법과 같다. 상위의 삼보에게 공양할 때는 사다라니 진언이 활용되지 않는다. 수륙의문 가운데 ‘결수문’이라고도 불리는 ‘촬요’에는 상위의 삼보에게 올리는 공양을 가지할 때는 이 방법대로 행해지지만, 같은 수륙의문이라도 ‘중례문’이라고도 불리는 ‘찬요’에는 현재 《통일법요집》에서와 같이 사다라니로 변공을 위한 가지를 하고 있다. ‘지반문’에는 변공의 가지진언으로 변식진언과 감로수진언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수륙의궤회본》과 같다. 또 공양의 경우에도 삼보를 청했으므로 삼보에게 3정례공양을 올리지만 《통일법요집》에는 예불의 7정례를 본뜬 7정례 예참공양을 행하고 있으며, 소예참②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3정례의 소청과 7정례의 공양으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넷째, ‘사홍서원’을 발원하고 그 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원성취진언이 염송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작법귀감》에는 발원은 사라지고 진언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되어 이곳의 발원이 ‘축원의 성취’라고 하는 억설이 있게 되었다. 현교의 발원과 밀교의 발원이 함께 행해지는 의례를 ‘현밀의궤’라고 하는데, 현밀의궤의 구조를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삼귀의’든 ‘사홍서원’이든 행하고 원성취진언을 해야 한다.

다섯째, 보궐진언의 경우도 원성취진언과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현재도 일부에서는 보궐진언 앞에서 사대주를 염송한다. 전통적인 공양 의식에서 이곳에는 경전을 염송하는 ‘풍경’ 자리이다. 부처님 재세 시라면 공양을 드신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공양과 현대법회를 일원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오종범음집》의 협주 설명이나 《영산대회작법절차》의 설법과 경전 염송을 염두에 두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리라. 경전 염송을 다 못해 염송하는 진언이 보궐진언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에서는 ‘혹시 공양이 빠졌거나’ ‘설법에서 꼭 해야 할 내용이 빠졌을까 염려돼’ 행하는 진언이라는 설명을 한다. 억설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보공양진언’의 공능에 대한 신심의 부족이라 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그럴듯하지만, 생성 연유로 볼 때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 영산회나 수륙회에서 《법화경》 독송이 일반화되고 《법화경》 7권을 매일 1권씩 독송하므로 나머지 부분은 독송하지 않는다. 이때 보궐진언을 염송하여 법회를 마치게 된다.

여섯째, 축원은 현장성이 지나치게 수용된 측면이 강하다. 축원의 차서와 축원의 대상이 명료하였지만 《석문의범》 이후 현대에는 지나치게 비체계적이었는데 《통일법요집》에는 비교적 체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축원의 대상이 설판재자, 출가 수행자, 재가 동참대중, 법계 축원의 형태로 더욱 정치하게 보완될 필요가 있다.

글말 닫기

《통일법요집》 소재 ‘관음시식’과 ‘삼보통청’을 한국불교의 시식과 공양의례로 잠정하고 형성과정과 특성 및 문제 등을 간략히 살폈다. 이른 시기부터 동일한 모습도 있고, 부분적으로 변형되거나 탈락돼 왔으므로 어느 한 시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됐다고 하기 어렵다. 삼보통청의 예참의식은 《통일법요집》에 처음 나타났다. 시식의례의 저본으로 삼은 관음시식은 《석문의범》에서, 공양의례의 모본으로 삼은 삼보통청은 《작법귀감》에서부터 그 의례의 명칭과 의문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므로 의례의 기본구조는 일찍부터 유지돼 왔지만 현재와 유사한 모습으로 형성된 시기는 19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식이나 공양의례는 국가 또는 재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설행되었으므로 수요에 따른 유연한 변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상황에 맞게 의례를 설행한다고 해서 전문 의례 스님들은, ‘상황을 봐서 짓는다’는 ‘견기이작(見機而作)’을 금과옥조로 받든다. 물론 이때 짓는다는 것은 소리와 춤 등을 짓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상황에 맞추어 크게 또는 작게, 넓게 아니면 간략하게 의례를 봉행하는 것이다. 이를 ‘대소(大小)’ ‘광략(廣略)’이라고 한다. 적어도 근현대 이전에는 현실적 수요에 따라 대소와 광략으로 의례가 자유자재로 설행되었다고 보이지만 근현대로 이행되는 과정에 이와 같은 행법이 전승되지 못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영산재와 청사가 있는 거불의 경우, 자세하고 크게 할 때는 간략히 하는 의례를 하지 말아야 함에도 그대로 행하여 청하는 의식이 중복되고 있다.

둘째, 상중하단을 구별해 행하던 진언권공의 진언이나 염송 편수가 동일해져 변별되지 않고 있다.

셋째, 완결된 관음시식에 시련 대령 설법 등을 편제하거나 완결 의식인 진언권공이나 예참이 완결 의식인 삼보통청에 편입되는 등 의식 회편 과정에 ① 큰 재식의 둘째 날에 행하는 거불을 모든 날에 행하거나, ② 모신 성인이 자리에 앉으시기도 전에 정례한다고 하고 하지 않거나, ③ 시식 이전에 행해야 할 수계를 봉송 때 행하거나 빼버림으로써, 거듭 청하거나 모순되거나 예법과 의식 순서에 적합하지 않은 등 여러 문제가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불교 일반은 이에 대해 별 저항 없이 수용하고 있으며, 믿음과 관습 전통 현실이라는 공고한 벽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의례의 문제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믿음’과 ‘관행’으로 의례가 행해지므로 하루아침에 시정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해서 의례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전환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시식과 공양의례의 핵심은 보시에 있다. 보시의 첫째인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공양, 시식, 재(齋)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오백 명의 스님께 재[공양]을 올리는 《목련경》의 ‘오백승재’ 사례와, ‘예수재’ ‘추천재’ ‘칠칠재’ ‘수륙재’ ‘영산재’ ‘천도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추천[追薦]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재’는 (사시에) 점심[齋食] 공양 올리는 원 개념에서 벗어나 영적 존재를 천도하는 의식의 명칭과 의미로 변해 버렸다. 스님께 올리는 순수한 공양이 효행으로 승화된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보시바라밀의 실천이라는 의미는 그만큼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

 

이성운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박사). 조계종 한글법요집·표준법요집 편찬연구위원, 조계종 의례위윈회 실무위원, 동아시아불교의례문화연구소 연구실장 등 역임. 현재 《한국불교전서》 역주 증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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