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1. 종교에서 의례((儀禮, ritual)의 중요성

“원시 종교는 관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기보다 춤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다.”

인류학자 마레트(R. R. Marett)는 원시종교의 특징을 위와 같이 묘사하였다. 이 글을 통해 마레트는 원시종교에서 관념적 요소보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요소가 우세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의 말은 종교에서 인간의 몸(body) 자체의 ‘충동적 활동성’을 강조하고, 종교에서 의례가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명한 성당이나 사원 등을 방문해보면 종교인들은 모두 일정한 정형화된 행위를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이다. 의례는 예배, 기도, 절, 식사, 기도문의 암송, 몸을 씻는 행위, 땅에 엎드리기, 손뼉 치기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서, 이러한 일련의 행위 과정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표현양식을 말한다.

마레트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언어나 관념과 마찬가지로 여러 모양의 자세와 동작, 위치 설정 등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의례는 ‘몸을 통한 상징적 행위이자 의미전달의 수단’인 것이다. 의례는 인간이 자기가 믿고 행하는 것을 어떻게 몸으로 상징화시키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몸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몸을 통해 자기가 지향하는 어떤 세계를 구현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고대인이나 원시인들과는 달리 종교를 관념 또는 사상과 믿음의 체계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관념 지향성 때문에 종교에서 의례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의례에 대한 잘못된 통설이다. 콤스톡(Comstock)은 다음과 같이 의례에 대한 선입견을 비판하면서 의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의례는 순전히 이차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 신앙이나 도그마의 관념적 형태에서 이미 분명히, 또는 완전하게 나타난 일종의 상징적 의미표현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의례란 필요하다면 별로 중대한 손실이 없이도 생략되어 버릴 수 도 있는 하나의 장식적인 몸짓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말이나 이야기와 같이 언어로 표현된 가르침은 그에 대응하는 의례에 의하여 뒷받침됨으로써만 진실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다시 기억하고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콤스톡에 의하면 의례는 인간의 문화현상 가운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의례에 대하여 상세하게 관찰하지 않고서는 문화와 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의례연구자 벨(C. Bell) 역시 의례가 ‘교리나 믿음보다 종교에 더 가까이 있는 유형의 증거물이자, 교리적 믿음이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물음과 상관없이 종교의 역동성을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속신앙이나 가신신앙과 같은 민간신앙을 돌아보더라도 의례의 중요성은 쉽게 알 수 있다. 무속이나 가신신앙 등은 자연발생적 종교로서 창교자나 교리, 경전 등이 갖춰져 있지 않다. 그들은 교리나 사상 등의 사변적 체계보다 대부분 굿이나 고사, 비손(손 비빔) 등의 의례행위를 통해 종교로서 기능하고 전승되어 왔다. 따라서 종교에서 행위, 행동, 그리고 의도적인 활동 등이 관념적 요소들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함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의 기초는 의례라고” 볼 수 있으며, “의례는 다른 매개체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경험들을 상징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따라서 월리스(A. Wallac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의례이다. 의례는 곧 종교가 활동하는 면이며, 종교를 칼에 비유한다면 의례는 칼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신념은, 그 내용을 낭송하는 것이 의례의 한 부분일 수 있고 또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의례가 될 수도 있지만, 원래는 의례 행위의 에너지를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해석하고 또 그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종교가 목적하는 바를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의례이다.

요아킴 바흐(Wach)에 의하면 대부분의 종교는 종교 경험의 표현으로서 이론적 표현(theoretical expression), 실천적 표현(practical ex-pression), 사회적 표현(sociological expression)이라는 세 가지 양태를 지니고 있다. 이론적 표현이란 신화나 상징으로부터 체계화된 교리에 이르는 지적(知的) 표현을, 실천적 표현이란 종교 경험이 행동으로 표현될 때 생겨나는 예배, 의례, 기도, 봉사 등을, 사회적 표현이란 종교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를 말한다. 이 가운데 실천적 표현인 의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다른 어떤 수단들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하였다.

의례에 주목한 것은 뒤르켕(E. Durkeim)도 마찬가지이다. 뒤르켕은 종교의 요소를 믿음체계, 의식(儀式)체계, 사회조직 등 세 가지로 분류하고,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종교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중에서도 의식과 공동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종교의 가치가 신앙인이 종교를 통해서 인생의 시련을 견디거나 극복하기 위한 힘을 얻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데, 신자가 믿음의 경험적 입증으로 간주하는 기쁨, 내적 평화, 평온, 열성을 맛보는 길을 의례라고 보았다. 따라서 의례는 믿음의 외형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창조하고 또 주기적으로 재창조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뒤르켕에 의하면 의례는 종교의 내용에 깊은 의미와 활력을 주며, 종교가 목적하는 바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이와 같이 종교에서 의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의례는 몸의 상징적 행위와 몸짓을 통해 신화나 교리의 관념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종교는 의례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완결)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의례의 정의

본래 의례(ritual)라는 말은 라틴어 ‘ritus’에서 온 것으로, ‘성스러운 관습’을 의미했던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전통을 통해서 그 성격이 고착된 행위의 형식 일체’를 가리키지만, 종교 연구에서 사용될 때는 전통적인 종교 행위를 가리킨다. 보통 제의(cultus)나 예배(worship) 등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ritual은 종교적 행위(re-ligious activities)를, ceremony는 세속적 연행(secular performance)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종교에서 의례로 부르는 것들에는 예배(worship), 기도(prayer), 순례(pilgrimage), 희생제의(sacrifice), 통과의례(rites of passage) 등이 있다. 명상(meditation)과 같은 수행의 성격을 지닌 것은 통상 의례라고 부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의례의 범위에 넣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례 성립의 두 조건은 ‘반복성(反復性, repetition)’과 ‘정형성(定型性, pattern)’이다. 만일 어떤 행위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또 그 반복이 정형화된 형태로 실행된다면 그것은 일단 가장 기본적인 ‘의례’의 성립요건을 만족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례는 “형식에 따라 의식을 실제로 행하는 것이며, 보통 특정한 시기에 똑같은 방법으로 반복된다.”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의례학자 필그림(Pilgrim)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반적인 ‘의례(ritual)’와 ‘종교의례(religious ritual)’를 구별하고 종교의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만일 의례가 어떤 고정된 형식(pattern)을 가지고 반복(repeat)되는 행위를 일컫는다면, 반드시 종교적 범주에 들지는 않는 것들, 즉 정치·사회·문화적 행사(ceremony, event)나 음악회, 빈번한 모임(party) 등도 의례의 범주에 들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적 의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그것이 해당 종교인에게 궁극적인 의미에서 ‘가치, 의미, 신성성, 중요성’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종교의례란 우주의 본질적 구조(essential structures of the universe)와 존재의 범례적 양태(paradigmatic modes of being)에 관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례란 ‘참된 실재(實在), 참으로 성스러운 것’과 관계되어 반복되는 행위이다.

결론적으로 필그림은 “(종교)의례란 보통 반복되는 어떤 특정한 전형적 말과 몸짓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언어(complex language of paradigmatic word & gesture)”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N. Smart)도 의례를 ‘언어의 수행적 사용(축복, 찬양, 저주, 봉헌, 정화 등)과 그와 함께 행동의 정형화된 패턴이 수반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례의 정의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의례는 일정한 형식 혹은 유형을 가진 행위이다. 의례에는 자기가 따라야 할 신성한 모델, 역사적으로 권위가 인정된 행동 양식이 주어져 있다. 이 모델에 부합된 행동을 해야만 바른 의례 행위이고, 의미 있는 행위이며, 의례의 힘과 효과가 보장된다는 암묵적 의미가 들어 있다.

둘째, 의례는 반복되는 것이다. 의례는 계속 반복하여 행함으로써 퇴락해가는 성스러움을 갱신하려는 노력이다. 의례가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힘의 회복이 단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의례의 효과는 단 한 번에 완결되지 않을 수 있다. 믿음의 완성을 위해 정기적으로 예배나 기도, 수행이 필요한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또 어떤 행위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이 반복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 의례는 ‘몸’을 통한 상징적 표현 양태이다. 일반적으로 의례는 행동 또는 육체적 행위(a behavioural or bodily activity)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슬람의 기도자가 무릎을 꿇는 육체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흔히 종교를 인간 내면의 정신, 사상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종교에는 몸으로 나타내는 많은 외적 형태들이 있다. 전형적인 종교의례는 몸짓(gesture)을 필요로 하며, 그 행위를 통해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고 또 강화시킨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보이지 않는 실재를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이시키기도 하는 강력한 몸짓이다.

이처럼 특정하고도 반복되는 행위로서 의례는 일상의 다른 활동들과 구별된다. 의례의 목적과 의도는 우리의 삶을 성화하며 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의례가 힘과 효력, 창조성을 지닌 행위, 참된 것, 의미 있는 것, 필수적인 것이 되는 이유가 있다.

3. 종교의례의 유형과 성격

그렇다면 각 종교에서 반복성과 정형성을 가지고 실천되는 의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전통적으로 의례라고 불러온 것들은 사실 그 범위가 방대하며, 그들은 또 종교의 실천적 차원과 신화, 교리, 경험적 차원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을 모두 일일이 열거해 살펴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의례의 종류로는 예배, 기도, 순례, 희생제의, 단식, 통과의례 등이 있다. 이들 의례에 대한 유형화를 살펴보고 의례의 기능과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의례 시기에 의한 네 가지 유형

종교의례의 유형은 나누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그 하나의 방법은 의례가 시행되는 시기를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의례의 네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첫째, 생태적, 자연적 순환주기(natural-cycle)와 관계된 의례가 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신년행사, 제야의례, 입춘의례, 추수감사절, 수렵의례 등을 들 수 있다. 이 유형의 하나인 종교적 신년행사의 대표적 예는 고대 바빌론의 우주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시〉가 매해 신년제를 통해 12일 동안 낭송되며 그 신화 속의 신들의 싸움이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정기적,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의례지만 자연적인 우주의 순환주기와는 다른 의례들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각 종교전통의 성스러운 달력(sacred calendar)에 의한 의례로서, 유대, 기독교, 불교와 같은 종교들의 기념일(오순절, 유월절, 부활절, 초파일, 우란분재)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삶의 주기(human-cycle)에 부합된 의례들이 있다. 이것은 아널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이 말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탄생과 성장, 결혼과 죽음, 사후의 운명과 관련된 의례들(할례, 성년식, 결혼식, 상·장례 등)이다. 종교는 한 인간의 삶의 과정과 관련된 많은 의례를 발전시켜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의 관혼상제(冠婚喪祭)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비주기적인 위기의례(crisis ritual)가 있다. 이것은 반복은 되지만 정형화된 주기를 따르지 않고 당시의 필요에 따라서 행하는 의례이다. 점복, 예언, 치병의례, 기우제, 정화의례, 희생제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희생제의는 가장 대표적인 위기의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희생제의에 관해서는 타일러(E. B. Tylor)의 예물설(禮物說, the gift theory), 로버트슨 스미스(R. Smith)의 교제설(交際說, the communion theory) 등이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종교의례를 크게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이 유형은 불교의례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그 이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종교 경험에 의한 의례의 두 유형: 박티(bhakti)와 요가(yoga)

이 의례의 유형화는 종교 경험의 대표적 두 유형에 따라 종교의례 역시 두 개의 타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종교 경험(religious experiene)은 종교사의 꽃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종교의 발생과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교리, 윤리, 의례 등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의 복합적 전체 속에서도 핵심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루돌프 오토(R. Otto)는 모든 종교의 핵심적 종교 경험의 성격을 그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에서 묘사하면서, 그것의 특징을 ‘누미노스 경험(nu-minous experience)’이라고 표현하였다. 누미노스 경험은 공포와 경외감을 유발시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를 매혹시키는 신비(the holy as the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에 대한 경험이다.

이런 종교 경험의 성격에 자연히 따르는 인간의 반응은 예배(worship)이다. 즉 이런 종교 경험이 일어나는 곳에서 종교는 곧 예배이기도 하다. 예배가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성스러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며 성스러움에 대한 숭배(adoration)이기 때문이다. 오토에 의하면 종교의 핵심에 있는 예배는 누미노스에 대한 경건한 감정의 표현이다. 사실 모든 종교의 전형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신이나 신들에 대한 예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누미노스 경험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라는 오토의 견해에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니니안 스마트는 불교가 세계종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매우 독특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테라바다(Classical Theravada) 불교의 종교 경험 차원은 일반적인 유신론적 종교들과 매우 다르다고 한다. 테라바다불교가 종교사에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신이나 브라만과 같이 모든 것에 편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하여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을 정의한 문구인 “두렵고 떨리며 매혹적인 신비로서의 성스러움”은 테라바다불교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테라바다의 실천 체계는 의식의 집중(concentration)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순수의식(purified consciou-sness)의 체득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라바다의 순수의식 경험에는 유신론적 종교에서의 피조물 감정(creature-feeling)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sense of awe), 또는 어떤 종교적 대상에 대한 매혹(fascination)의 느낌도 없다. 거기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소멸되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스마트는 종교 경험의 두 종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에는 두 개의 주요 경험의 축이 있다(two main poles of experience in religion). 첫째는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에서 묘사한 바와 같은 누미노스적인 성스러움의 경험(the numinous experience of the holy)이 있다. 그것은 절대 타자(the Other)에 대한 ‘두렵고 떨리며 매혹되는 신비’이다. 둘째는 외부에 절대 타자를 상정하지 않는 관상적 또는 신비 경험(the contemplative or mystical experience)이 있으며, 이것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이 후자의 신비 경험은 인도 전통, 특히 불교에서 명상을 통해 순수한 의식상태에 도달하는 경험에 해당한다. 이때 수행자는 일종의 순수한 축복과 통찰력을 얻고 왜곡된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종종 이러한 상태는 불이(不二, non-dual)의 상태로 묘사된다.

관조나 명상의 과정에서 겪는 신비 경험은 종종 비이원론적이나, 누미노스 경험은 대부분 이원론적이다. 신비 경험은 고요하지만 누미노스 경험은 역동적이고 소란스럽다. 신비 경험은 모든 상(像)을 초월하지만 누미노스 경험은 보통 인격적인 신과의 만남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비 경험은 소위 숭배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숭배나 예배라는 관념은 없다.

여기서 묘사하는 신비 경험은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모든 차이를 초월하고, 일상적인 대상으로서 세계가 사라지는 초탈과 평정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마트는 오토가 정의한 ‘성스러움’ 즉 ‘누미노스 경험’을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 대신 그가 제안하는 것은 세계의 종교 경험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의례에도 구분이 필요한 기본적인 두 유형이 있음을 제안한다. 즉 예배의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진 ‘대상 지향적 의례(focused ritual)’와 ‘자기제어 의례(harnessing ritual)’, 또는 ‘요가의례(yogic ritual)’의 두 유형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자는 박티(bhakti)이며, 후자는 요가(yoga)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스마트는 종교의 의례에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스마트의 불교의례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불교의 핵심의례(main ritual)는 예배가 아니라 명상(meditation)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의례는 유신론적 성격의 예배 차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예배가 핵심 의례라면, 불교의 경우는 명상수행 혹은 불교의 전통 용어로서 선정(dhyāna)이 가장 중요한 핵심 의례라는 것이 스마트 주장의 요지이다. 그는 보통 명상을 ‘의례’로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명상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 형식(patterned character)과 그 안에 내포된 종교적 요소 등을 고려하면 당연히 의례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의 의례 구조는 그리 간단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스마트의 두 번째 견해에서 나타난다. 그는 불교의 경우, 유신론적 종교의 핵심의례인 ‘예배’, 즉 박티신앙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불교의례에는 이 두 가지 의례가 다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테라바다불교의 후기적 양상과 마하야나불교(大乘佛敎)는 많은 불보살 및 신중(神衆) 들을 통한 박티신앙을 전개시켰다. 즉 불교는 불교사의 전개와 더불어 박티신앙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첨가되었던 것이다. 비록 부처와 보살은 유신론적 종교에서의 신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순수 명상체험을 향한 종교적 목적 이외의 다른 대상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스마트는 ‘브라만교에서 시작된 신에 대한 봉헌적 신앙(devotionism)이 후기 인도 전통에서 불교와 힌두교를 통해 공히 박티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본래 숭배나 예배의 대상이 없었던 불교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견 상반돼 보이는 의례의 이 두 가지 양상이 함께 존재하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스마트는 이 두 개의 종교 경험과 의례의 양상이 반드시 서로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둘 사이의 조화를 시도한다. 오히려 그 두 유형 안에는 서로 닮은 점도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두 ‘우주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단지 그 방향이 밖으로 향했는지 안으로 향했는지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이 지닌 두 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사에는 이 둘을 결합한 복합적 종교, 또는 이 두 개의 경험이 다 계발되는 종교들이 또 있다고 한다.

마하야나불교에는 부처와 보살들을 향한 박티신앙과 그보다 더 높은 형태인 영적 삶(spiritual life)으로 이끄는 명상(contemplation)이 둘 다 자명하게 나타난다. 샹카라의 불이론(Non-Dualism)에서도 요가에 바탕을 둔 지혜의 길(jnana)과 이슈바라(Isvara)를 향한 보다 낮은 길인 박티신앙이 나타난다. 중세 기독교의 예배에서도 신앙심과 관상생활이 결합되었다. 그 두 개의 축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보이며, 그들은 그 경험의 차이와 실천유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의례의 두 가지의 유형론과 그 둘의 조화에 대한 견해는 불교의 의례의 성격과 구조, 의미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불교는 사상적, 철학적 요소, 도덕적이고 수행적인 성격은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신화적, 의례적 차원은 약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의례적 차원이 약하다는 인식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명상수행이 의례의 범위에 드는지에 대한 의문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명상 이외의 의례들은 기껏해야 ‘방편’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그런 인식에 일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에는 명상 이외에도 많은 의례가 존재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 경험에 기초한 이 두 개의 의례의 유형론을 통해 앞으로 불교의례의 구조와 성격에 대해 깊이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4. 의례의 의미와 기능

앞의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례는 “반복되는 어떤 특정한 전형적 말과 몸짓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언어(complex language of par-adigmatic word & gesture)”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정의에 따른다면 의례는 다음과 같은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무엇보다 의례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됨(humanity)을 완성하는 길이다. 범례적 행위(paradigmatic gesture)로서 의례를 규정한다면, 그것은 의례가 우리의 삶 속에 분명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삶 속에 궁극적인 성스러움과 힘,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범례적이라는 것(Being paradigmatic)은 그것이 옳고, 바르며,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례는 참이며, 힘 있는 것이며, 효과적인 것이며, 실재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종교가 그처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의례를 지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례는 그런 의례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리면, 의례는 우리 인간의 “(순수한) 존재를 위한 갈망”일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성스럽고 파괴 불가능한 시간에 침잠해야 하는 필요성”을 드러내 보인다. 의례를 통해 인간은 ‘참으로 인간이 되는 길(a Way to be fully human)’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진실한 종교의례는 하나의 ‘구원의 사건(salvation event)’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례는 사물들을 새롭게 하고,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전하고도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의 구체적 안내자로서 의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불교의 일상 예불과 선정 수행, 유대교의 일주일 주기로 지켜지는 안식일 예배(Shabbat), 이슬람의 매일의 다섯 번의 기도 등은 다 이러한 종교의례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의례의 사회통합적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는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떤 집단 또는 무리의 결속과 통합을 성취하는 데 기여한다. 종교 또는 세계관은 상호관계를 맺는 많은 사람을 통해서 유지된다. 의례는 개인적으로도 진행될 수 있지만 그 의례를 둘러싼 종교적 진리는 타인과의 교감과 동의를 통해 정당화된다. 세계관의 지속에는 사람들의 집단적 참여와 집단적 긍정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측면을 잘 설명한 사람이 뒤르켕이다.

뒤르켕은 종교를 하나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로 파악했으며, 어떤 사람의 개인적 심리 속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가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와 연대를 성화(聖化)하는 일련의 관념과 실천들이며, 의례는 집단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기회를 제공하고, 실제로 공동체를 표현하는 성스러운 이미지들을 투사함으로써 열정적인 긴장, 곧 ‘흥분(effervescence)’ 감정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개인들은 그 속에서 자기 자신들보다 더 큰 ‘어떤 것’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더 큰 실재, 곧 ‘공동체’에 대한 지각과 일치하게 된다고 한다. 뒤르켕은 이렇게 의례가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사회에 결속시키는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종교들의 의례 속에서 표출되는 일치감의 정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식일 전통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도 그들을 하나의 유대공동체로 묶어줄 수 있었던 의례의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역시 모슬렘 집단의 동질의식과 통합성 강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인 ‘살라트’의 의무는 그 빈번한 빈도수에서 보이듯, 모슬렘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매우 강력한 의례 체계라 할 수 있다. 특히 일 년에 한 번,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 메카순례의 정교화된 체계는 전 세계의 모슬렘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다음의 언급이 이러한 사실을 잘 요약해 준다.

세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을 메카에서 만난다는 것, 그리고 이슬람 최대의 성역에서 그들과 함께 의례를 행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모슬렘들 사이의 일체감을 강화시켜 준다”

5. 불교의례의 미래

지금까지 의례는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고유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종교는 관념과 사상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각 종교의 특징에 따라 의례가 보다 덜 중요하고, 덜 발달해온 종교가 있다. 그러나 의례가 전혀 없는 종교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불교 역시 교리와 사상만큼 의례가 중요하며, 불교의 정신은 의례를 통해 완성된다는 시각이 더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여러 종교의 의례 면모를 다 살펴보지 못했지만, 유대교, 이슬람, 힌두교, 유교와 같은 종교들을 의례를 제외하고 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논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그친다면 그들 종교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불교의 경우, 세계종교사에서 독특한 종교적 세계관과 종교 경험의 특징이 존재하는 만큼 다른 종교들과 유사한 방식의 의례 체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불교만의 특징과 개성이 잘 표현되고,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진리 체계가 잘 구현되는 의례의 정립이 필요하다. 특히 불교의 의례에는 명상수행과 예배, 혹은 요가와 박티라는 두 개의 의례 유형이 공존하며, 그 둘은 조화로울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둘의 공존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스마트의 견해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 ■



송현주 /
순천향대학교 교수. 이화여대 불문과,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저로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근대한국불교 개혁운동에서 의례의 문제: 한용운, 이능화, 권상노, 백용성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과 《세계 종교사 입문》 《한국문화와 종교적 다양성: 갈등을 넘어서》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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