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추안 중국 사회과학원

 

편집자
* 이 원고는 2007년 3월 30~31일, (사)한국불교연구원과 북경대학교 종교연구소가 북경대학교에서 공동개최한 ‘한·중 불교교류 세미나(中·韓 佛敎交流 學術?討會)’에서 사회과학원에 재직중인 고령의 황심천(?心川) 선생이 발표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근대 시기 한중 불교교류에 학술보고서로서는 첫 번째 성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한국불교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본 지면에 소개한다.

1. 서언

중한 양국은 우호적 관계를 지속해온 이웃나라이며, 양국의 문화교류에 있어서는 불교가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다. 양국의 불교 교류는 서진(西晋)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당(隋唐)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 당시에 당나라에 공부하거나 견학하러 온 신라 승려는 무려 117인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쓴 《隋唐時期中與朝鮮半島佛敎的交流一新羅來華佛僧侶考(隋唐 시기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 교류-중국에 온 신라 불교 승려에 대한 고찰)》이란 글에 언급하였다.

송나라 이후 양국의 불교문화교류가 지속되는데, 의상과 의천은 모두 양국 불교문화교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고, 송나라 조정은 천태 일경(逸經)을 받기 위해 고려에 사절을 파견했다. 원대에 이르러 고려의 공예가들이 중국에 와서 경을 쓰는 작업을 했다. 명청 이후 불교 왕래가 계속되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유(儒)ㆍ석(釋)ㆍ도(道)의 삼교사상은 이미 고려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근대에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이겼지만 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여 중한양국 불교계의 왕래가 점점 줄어들었다. 심지어 중국 외진 곳에 사는 불교신자들은 한국의 불교가 인도의 불교처럼 없어진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당시의 간행물에 게재된 글을 보면, 장족(藏族) 불교 신자들은 영국이 티베트를 병탄하는 망상에 용감하게 맞서기를 요구하면서, “장족과 중국의 청년들은 본래 있었던 불교를 어리석게 고수하지 않기를 바라니, 자립할 수 있는 방침을 구하여, 인도와 한국의 전철을 본보기로 삼아 그 뒤를 밟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국토를 잃은 인도와 한국의 민족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방법이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중한양국의 불교계는 여전히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있었고, 특히 20세기 초반에 양국의 민중들은 일본의 침략에 직면해서, 공동으로 민족 독립과 국토의 해방을 목적으로 양국 인민의 우의를 더욱 더 긴밀하게 유지하려고 하였다.


2. 근대 한국불교 사료의 목록

옛 중국 전적에는 한국불교에 관한 사료가 많이 실려 있다. 그중에는 중국 불교신자의 기록도 있고, 신라와 고려의 불교신자가 기록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한국불교에 관한 사료는 찾아보기 힘든데, 그 원인은 바로 전문적인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간행된 잡지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간행물들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중한양국의 불교교류에 관한 연구는 줄곧 양국 학술계의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최근에는 민국불교간행물문헌집성(民國佛敎刊物文獻集成이 출판되어 양국 간의 불교교류에 관한 자료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그 동안 수집한 민국 시기 간행된 불교잡지에 게재된 한국불교에 관한 자료목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민국(民國) 시기 간행물에 게재된 한국불교 자료 목록

번호
잡지명
간기
제목
작자
권수
페이지수
1
世界佛敎居士林林刊
第二十七期
朝鮮佛敎會及會之成立  
143
70
2
世界佛敎居士林林刊新佛敎 第十六期 在?朝鮮佛敎徒歡迎詞  
142
123
3

新佛敎

一九二零年
第一期
朝鮮佛敎徒之宣言 N. S
7
368
4
中國佛敎會公報 一九二八年
第五六期

朝鮮佛敎大會攝影

 

 

20

79
5

 

威音

一九二九年
五月 第十期
朝鮮京城之唯一佛敎專門學校之設置  

 

31

475
6

 

威音

一九二九年
七月 第十四期
朝鮮佛敎普及會之成立  

 

32

130
7

 

威音

一九二九年
三月 第二十四期
朝鮮創立佛敎普及會  

 

33

585
8
佛敎月刊 一九四○年
第一卷 第六期
朝鮮佛敎文化킒美術年表緖引 子規
95
178
9

學訊月刊

一九五四年
第八卷 第二期
自朝鮮歸來

明法少宏

 


103
279
10

 

學訊月刊

一九五四年
第八卷 第四期
參加朝鮮人民訪華團來我國訪問  
103
318
11

 

南瀛佛敎

第七卷第 四號 朝鮮高僧傳
林秋梧
103
318
12

中道

第四十六號 朝鮮禪敎小史

李添春

124
104
13

中道

第四十七號
朝鮮禪敎小史

李添春

124
120
14

中道

第六十九號 支那及朝鮮佛敎視察行程報告  
124
357
15

 

四川佛敎旬刊

一九二四年
六月 第肆號
朝鮮古佛出現

好?愧生

128
17
16

 

世界佛敎居士林林刊

第十六期 西湖高麗寺中韓佛敎紀念道場壽備啓  
142
146
17

 

佛化旬刊

一九二六年
第九十期
藏人?以印韓爲鑑

仁云

17
350
18

 

佛化隧刊

一九三○年
第十八期
爲日本侵華問題告台韓日四千万佛敎民衆書 釋太虛
28
309
19

 

海潮音

 

  己巳十月由中國佛敎會推派出席朝鮮佛敎大會同日華佛敎聯絡員水野梅曉先生及江蘇金山仁山法師五日在?啓程沿途口占俚句數首?后

圓 瑛

 

 

 

 

174
325
20
    在?朝鮮佛敎徒歡迎  
142
123
21
    在?韓國佛敎徒歡迎太虛法師攝影  
16
76
22
    在?韓國佛敎徒歡迎太虛法師攝影  
166
510
23
    自朝鮮歸來  
103
279
24
海潮音   恭祝朝鮮佛敎大會詞
圓 瑛
174
325
25
海潮音   爲沈陽事件告台?朝鮮日本四千万佛敎民万衆書 太 虛
179
265
26
海潮音   朝鮮道中

燕咫材

168
323
27
海潮音   朝鮮佛敎刊行會上太虛法師書  
163
364
28
海潮音   朝鮮京城書事

燕咫材

168
323
29
海潮音   朝鮮民族解放問題

中央日報

172
271
30
海潮音   朝鮮平北妙香山普賢寺工作經驗  
168
459
31
海潮音   朝鮮鄭潤海講師來書

鄭潤海

190
555
32
海潮音   圓瑛仁山二法師參加朝鮮佛敎大會  
174
311
33
海潮音   朝鮮佛敎大會
 
124
146
34
海潮音   西湖高麗寺重建發愿文

玉慧觀

166
516
35
海潮音   在?韓國佛敎徒歡迎太虛法師攝影

玉慧觀

167
6
36
海潮音   韓日佛化雁報

 

168
429
37
海潮音   韓國外交部長何素昻專誠拜訪太虛大師不遇題  
201
448
38
海潮音   題王梧生戶曹所藏韓人金醉堂詩卷二首  
182
366
39
海潮音   高麗版大藏經之沿革

玉慧觀

168
93
40
    唐賢首國師致新羅義湘國師書跋

寐 ?

48
31
41
微妙聲 第七期 唯識新羅學 蒙文通
85
97

이상은《민국불교간행물문헌집성(民國佛敎刊物文獻集成》152종의 간행물에서 찾을 수 있는 41건의 자료이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것은 이 152종의 간행물은 결코 완전히 구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어떤 간행물은 단지 일부의 간기만 수록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아마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될 것이다.

그밖에 필자가 아는 바에 의하면《민국불교간행물문헌집성(民國佛敎刊物文獻集成)》의 속편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고, 지금까지 발견된 간행물은 257종에 달한다. 동시에 완전히 수집되지 못한 간행물에 대해서도 보충작업을 하고 있으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미 완전히 보충된 간행물은 70종이다. 속편작업을 하고 다시 출판된 후에는 당연히 새로운 자료를 더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근대 한국불교 사료에 대한 일차적 귀납 및 분석

이상 41가지의 자료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학술적인 것으로 《조선고승전(朝鮮高僧傳)》, 《조선선교소사(朝鮮禪敎小史)》와《유식신라학(唯識新羅學)》등이 있다.

둘째, 신문보도로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의 성립>, <조선 경성(京城) 유일의 불교전문학교 설치>와<타이쉬(太虛)를 환영하는 상하이 거주 한국불교도로 성황을 이루다(在?韓國佛敎徒主歡迎太虛之盛況)>와 같은 것이 있다.

셋째, 몇몇 승려의 정치적 발언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하여 특별히 타이완·조선·일본 불교신도들에게 고하는 민중서(爲日本侵華韓國告台韓日四千万佛敎民衆書)> 등이 있다. 넷째, 19번과 37번 등 일종의 감상문이다. 다섯째, 기부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 《서호 고려사 중건 발원문(西湖高麗寺重建發願文)》 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중한 사진들로서 <타이쉬법사를 환영한 상하이 거주 한국불교도 기념 촬영(在?韓國佛敎徒歡迎太虛法師攝影)> 등이 있다.

민국시기의 간행물에 게재된 신문보도형의 글은 길지는 않지만 한국불교의 현황을 반영하였고, 당시의 중국인들이 한국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불교는 조선 말기 이후부터, 그리고 중국의 불교는 청말민초(淸末民初)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양국 불교계 모두에게 개혁이 필요했다. <조선불교보급회의 성립(朝鮮佛敎普及會之成立)>에서 기록하기를 “조선 전국 불교계의 유명인사 이윤용(李允用) 등은 그 나라 불교 현 상황의 쇠락함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혼신의 힘으로 불교 진흥을 도모하여 전국 불교계의 명사를 망라해서 ‘조선불교보급회’를 성립시켰다. 대중들은 남작 이윤용을 회장으로, 이원석(李元錫)을 부회장으로 추대하고, 더불어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기요무라 게이고(淸浦奎吾) 키나베 코우지(木邊孝慈) 야마시마 겐유(山下現有) 가요 세이신(加藤精神) 키타노(北野元峰) 아키노 코우도우(秋野孝道) 등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불교 보급 방법의 시행을 착수하였는데 먼저 일반 가정에 불단을 안치하는 것을 힘써 도모하고 더불어 관음경 백만 부를 인쇄하여 그 나라 독실한 불자들에게 두루 보내었다.

현재 부회장 이원석은 제반 일체를 준비하기 위해 동경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이 회는 앞서의 사항을 진행하는 것 외에 강연, 영상, 글 등을 진행시켜 불교정신의 홍보 및 사상의 선양에 힘을 쓰고 있다.”고 했다. 조선불교대회에서는 “10월 11일부터 3일간 경성 박람회 개막 중에 조선 불교도에 의해 조선불교대회가 근정전에서 개창되었는데 그 목적은 국내 불교도의 화목한 교류을 도모함이고, 조선불교의 보급을 촉진하기 위함이며, 이를 빌려 한반도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중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그 연구사항은 ‘조선불교의 부흥 방법’을 가지고서 주안점으로 하고, 첫째 날과 둘째 날에 각 부서장과 31본산 주지들이 강연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불교가 흥성하지 못하여 중한 양국이 모두 인재가 부족함에 직면해서는, 중국 불교계는 계속해서 불교 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왔고, 한국 불교계도 이 방면에서 노력을 하였다. <조선 경성 유일의 불교전문학교 설치(朝鮮佛敎京城之唯一佛敎專問學校之設置)>에서는 “조선 경성 내의 불교 전수학교는 법정 규정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하였으므로 개명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라고 하였다. 재단의 재산은 60만 원에서 지금 다시 40만 원이 증가하여 100만 원의 재단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불교 부흥의 인재를 양성하고, 불교의 교육 목적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의 승격은 사실상 평소의 기원이 달성된 것이다. 교장은 백양사의 송종헌(宋宗憲) 씨가 되었는데, 조선불교계의 손꼽히는 대덕이다. 교무주임은 에다 토시오(江山俊雄) 씨가 되었고, 기타 교수와 강사가 30여 인이 있다. 그 가운데 3분지 2는 조선인이고 나머지는 일본인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신도들이 심지어 한국 가사의 양식〔制式〕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서 중국의 가사로 바꾸기를 원했다. 이는 <한국 승려, 중국 가사를 채용하다(韓僧采用華袈裟)>에서 “불교중앙교무원은 최근 경성에 중앙선학원을 설립하고 백학명 선사를 도사(導師)로 모시자, 선을 배우고자 모여드는 지원자가 수백 인이었다. 올 여름에 안거 좌선을 하려고 하는데, 조선 불교잡지의 주필인 권상노 법사는 조선에 본래 있던 가사가 너무 짧아 형식적으로 단정하지 못하므로 중국식 가사를 채택하여 바라봄을 장엄하게 할 요량으로 최근 이미 상하이 법원사무처에 서한을 보내 대신 구매를 부탁하였다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니 한국의 불교는 여전히 중국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불교의 진흥은 양국 불교계의 공동된 희망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조선이 일본 치하에 있었고 중국도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하에 있었다. 조선에 관한 소식은 대부분 양 국민이 공동적으로 국가독립과 민족해방을 요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의 불교신자가 중국의 불교 간행물에서 <조선불교도선언(朝鮮佛敎徒宣言)>을 발표하였다. “간절히 선서하기를 우리는 한국에서의 일본 통치를 절대적으로 배척하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절대적으로 주장한다.” 중국의 타이쉬 대사가 ‘9·18(九一八)’ 사건 이후 특별히 타이완, 조선과 일본 불교신도들에게 고민총서(古民叢書)를 발표하였다. 그는 각 지역의 민중들은 “마땅히 신속하게 일대화합을 이루어 보살의 대비 대무외의 신통력으로 일본군벌 정권에게 인과의 정법을 일깨워서 모든 법답지 않은 행동을 저지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의 불교신도들은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민족해방문제―불교교단의 대계획, 불행히도 일본인에게 발각(朝鮮民族解放問題-佛敎團之大計劃不幸爲日人發覺)》에서 “삼한의 민족이 남의 비박을 받아 연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죄수와 같다. 국내 뜻있는 인사들은 세계 조류의 충동으로 분분히 일어나 독립운동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일인의 방범이 엄격하여 수차 일어났다 엎어졌다 반복하였지만, 의외로 조선불교교단은 민족해방의 움직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전 조선 31본산의 승려 7천여 명은 재산 천여만 원을 모연하였다. 이 교단의 교무원은 1월 3일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총독부에서 반포한 종교법안을 반대하고 차후 일인의 감독을 받지 않기로 하였으며, 더불어 민족해방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혁명운동과 인도의 비협조운동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았다. 사전에 일본 밀정에게 발각되어 대회위원 권상노, 간부 도정적(都定鏑)·백성욱(白性郁)·김법린(金法麟)·김매자(金梅子) 등이 체포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매우 경황해 중대한 음모로 간주하여 주모자를 엄히 처벌하는 것 외에 전 조선의 7천여 명 승려들을 상대로 엄격한 조사를 하는 등 한 차례의 풍파가 지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불교교단의 새로운 지식인들은 일본이 중국에서의 위치가 점차 견고함을 잃어감에 따라 중국민중운동의 성적이 나날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조선민족해방의 호기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교포교라는 명목 하에 독립운동을 고무하였다. 한편으로 암암리에 호법단, 규찰대, 실행단 등을 조직하여 공작을 시작하였으나 불행히도 일이 누설되어 일인에게 발각되어 한 바탕 계획이 강물처럼 흘러버렸으니 안타깝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 승려 정당 수령으로 당선되다(韓僧當選政黨首領>에서는 “조선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洛山寺)에 한용운이라는 선승이 있는데 그는 현대 조선불교계 신승려운동의 일인자이다.

그는 〈불교유신론〉을 저술하여 전국 승려들의 환영을 받았다. 기미 3월 1일 조선민중은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그 때 한용운은 앞장서서 이 운동에 참여, 조선민족의 이름을 대표해 조선독립선언문을 발포하여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2년간 철창과 오랏줄에 묶이는 고통을 받았다. 그 뒤 7~8년간 낙산사에서 안거하면서 묵상에 잠기었다. 최근 산을 나와 경성에 출입하면서 신간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신간회는 조선에서 유일한 민족독립주의의 정당인데 겨우 한 사람의 가난한 승려가 엄연히 2천여만 한인을 대표하는 정당의 영수가 되었으니 위대하다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국시기의 불교 간행물에 게재된 이 소식들은 짧지만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이는 중국 불교신도들이 한국 불교신도들과 한국의 미래를 걱정해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중일전쟁 때 한국의 일부 교민들이 상하이(上海)에 체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나중에 충칭(重慶)으로 옮겼다. 중국에 체류한 한국 교민들은 계속 자신의 불교신앙을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신도들과 친밀한 우호관계를 형성하였다. 타이쉬 대사는 계속 상하이에 거주한 한국 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의 불교 개혁의 이상은 이들 한국 신도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다. 1930년에 타이쉬 대사가 상하이 공덕림(功德林)에서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이자 불교신도인 옥혜관(玉慧觀; 중국식 발음으로는 위후이관)의 귀의의식에 참석하였다. 옥혜관은 <상하이 거주 조선불교도 환영사(在?朝鮮佛敎徒歡迎詞)>에서 다음과 같이 격동되어 말했다.

    불기 1299년 순도(順道) 대사가 진으로부터 한국으로 건너와 불법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처럼 서역 무위의 도가 우리 동방 인연 있는 땅에 들어왔다. 삼한 12종파의 연혁은 중화에서 비롯되었고, 총림 9백 사찰의 시작은 신주에서 나왔다. 법유를 전하는 어진 어미, 심법을 전하는 도사는 모두 중국 역대의 고승대덕이었다. 그러나 참된 경계는 희박하고, 현묘한 나루터는 묘연하기만 하며, 깊기는 창해와 같고 넓기는 창공과 같으니, 지혜의 배는 어떻게 피안에 도달할 것이며 지혜의 마차는 그 경지를 찾지 못한다. 하물며 성인을 떠난 지 매우 오래되었고, 범속에 구애됨이 깊어지며, 약육강식의 진화된 학설은 더욱이 열등하고, 침략주의는 나라 곳곳에서 횡행하며, 정법은 어두우니, 만약 명철한 이가 세상에 나오고, 깨인 사람이 시대에 맞춰 높이 참된 종지를 연설하며, 널리 선근을 심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법시대의 중생을 구제하고 20세기 뜨거운 대중을 구원해 내리오. 오직 타이쉬 상인이 세계불교연합회를 노산에서 제창하고 불교교육을 신강에서 성대히 조직하며, 친히 동방을 돌며 법풍을 선양하고 남양을 순력하면서 불일을 다시금 빛나게 하였다. 동방의 문화는 이로써 중흥하고, 불교정파는 이로써 유신이 되니 발꿈치를 들어 기다릴 수 있고 기약한 날은 반드시 올 수 있다. 나는 타이쉬 상인의 거둠을 입어 문도로 받아들여졌으니 어떠한 행운이 이만 하고, 어떠한 영광이 이만 하리오. 오늘 삼가 상하이에서 한국의 불교도를 대표하여 정중히 환영을 표한다.
    타이쉬 상인과 중국 모든 거사의 충정으로 금후 중한불교가 옛 인연을 계속하여 새로운 결과를 맺게 되기를 보잘것없는 마음으로 축원하는 바이다.

    불기 2953년 11월 24일

    상하이에서 불교대표
    옥혜관(玉慧觀) 합장경백(合掌敬白)

한국 본토의 불교신도들도 타이쉬 대사의 인격과 그의 큰 뜻에 대한 흠모로 타이쉬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중한 양국의 문화교류를 간구하였다. <조선불경간행회에서 타이쉬 법사에게 드리는 글(朝鮮佛敎刊行會上太虛法師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숙계(肅啓)

    중국에서의 명성을 들은 지 이미 오래 지났건만, 지내는 곳이 각각 달라 한 번도 말씀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다만 스님께 바라옵건대, 불교를 위하여 대법을 널리 홍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수십 년 동안 삼한의 비전(秘傳)하는 불전 수천 종을 수집하였으니, 장차 간행하여 널리 유통시키고자 이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서원문을 보내드리니 부디 충만한 뜻을 내려 주시고, 방편을 가르쳐 주십시오.
    타이쉬 대사 예하께

    불기 2952년 6월 14일

    조선 경성부 낙원동 50번지 조선불경간행회 주무 겸 편찬원
    정황진 화남(和南)

그리고 <조선 정윤해 강사에게서 온 글(朝鮮鄭潤海講師來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숙계(肅啓)

    귀 대법사학덕(大法師學德)의 명성을 들은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서로 하늘과 땅 끝에 살고 있어서 해륙 만 리에서 한 번도 말씀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다만 머무시는 곳을 바라보고서 크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귀국과 우리 반도는 하나의 갈대처럼 물을 지니어 문화가 같이 굴러가는데 우리 불교가 서에서 동으로 건너온 후, 수많은 우리의 옛 고승 석덕들이 바다를 건너 유학하고 돌아와서 포교하고 중생을 제도하였으니, 한편으론 불은에 감사하고, 한편으론 귀국의 옛 고승들의 덕화홍은(德化弘恩)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5년 전에 제가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불교포교당 포교사를 맡고 있을 때, 잡지 〈대법뢰(大法雷)〉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귀국 상하이에서 우리의 옥관빈(玉觀彬) 거사의 소개로, 귀국의 대법사께서 무연자비(无緣慈悲)로써 우리 잡지사를 위해 특별히 대법회삼주송(大法雷三祝頌)을 내려 주시어 지금도 감복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몰래 보관하고 있는 고려의 백운화상 어록은 실로 천고의 진귀한 책입니다. 경성제국대학이 영인본을 요청하여 모두 해송(解頌) 2권을 얻었으니 귀 대법사께 보내드립니다. 중국과 조선의 옛 불교사 연구에 참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불기 2962년 4월 5일

    조선 평안북도 대본산 묘향산 보현사 본말사 불교전문 강원 강사 정윤해(鄭潤海)가 중화민국 고승 타이쉬 대법사 예하께 올립니다.

타이쉬 대사와 위안잉 등의 고승들은 한국의 불교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발전을 지지했다. 1930년 조선불교대회가 열리자, 중국불교회는 조선불교대회에 조회(照會)를 보냈는데, “귀회가 고려의 수도에서 개최되는데, 우리나라도 당연히 전례를 따라 대표를 선출하여 출석시키고자 하니, 이에 위안잉(圓瑛)과 런산(仁山) 두 대법사를 대표로 출석시키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소회(照會)를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위안잉은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사바세계 3000년 이래 대각이라고 불린 이가 누구인가 하면 오직 우리의 석가모니 한 분뿐이니, 본말무명(本末无明)을 깨뜨리고 권실지혜(權實智慧)를 얻으셨습니다. 크게 깨우치시고 구계(九界)를 초월하여 독존하시니 자비를 널리 떨치셨습니다. 오승(五乘)을 설하시고 널리 이롭게 하셨으며, 설법을 다하심에 이르러 열반에 드셨습니다. 책을 만들어 유통시키고자 삼장으로 나누고, 미혹한 세속에서 피안의 세계로 건네주는 귀중한 뗏목이 되셨으니, 실로 깊은 밤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분이십니다.

거슬러 올라가 한대로부터 불교가 서에서 들어와 진조에 이르러 자비로운 광명이 동쪽을 비추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학자가 처음에 현풍을 받아 깊은 뜻을 정밀히 연구하고, 불교를 믿고 해석하고 수행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대로 고승이 나오고, 승려들은 찬란한 문화를 전하였으며, 국사에 기록을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경사스러운 대회가 성대히 개최되어 상서로운 꽃이 흩날립니다. 위안잉과 런산 등은 삼가 중국 전체 불교도를 대표하여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우리 불교가 가르침을 내리신 지 거의 3,000년에 가까운데, 한대에 중국에 전래되고, 진대에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교화의 등불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법조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종파를 널리 떨치고 가르침을 설하시어 대대로 고승들이 있어 왔고, 여래의 사자가 되고 천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성상(性相)에 통달하고, 지혜와 자비를 널리 운용했습니다. 방편을 버리지 아니하고, 시기에 적절하게 따랐습니다. 말이나 글로 어리석은 사람을 크게 각성시키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제거하고 미혹함을 지도하였습니다. 선종ㆍ교종ㆍ율종ㆍ정토종ㆍ진언종 등의 제 종파가 각기 수단을 내어서 가풍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둘이 아니지만, 교화를 베푸는 데 있어서는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나라를 도와서 속인들을 인도하니 온 나라가 존경해서 따랐습니다. 이제 기사년에 대회를 성대히 개최함에 인재들이 모여서 다같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발전해 나가니 즐거운 일입니다. 원명한 불일(佛日)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위안잉(圓瑛)과 런산(仁山)이 조선불교대회에 참석해 부산 등 지역을 견학하였다. 이번 한국행은 위안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그는 한국의 일출 등 경관을 감탄하여 시를 읊었다. “부상에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불일도 떠올라서 태공을 빛내는구나. 선철이 남기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조계의 일맥은 동으로 흘러 왔구나〔扶桑涌出一輪紅,佛日升騰朗太空. 先哲遺言當記取, 曹溪一?水朝脈東〕.” 그는 이 시에서 그림 같은 한국의 경치를 노래하며 중한불교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4. 중한불교(中韓佛敎)를 연결시킨 중요한 인물, 옥혜관(玉慧觀)

근대 중한 양국 불교교류에 관한 자료를 볼 때 옥혜관(玉慧觀)이라는 이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발표된 한국과 관련된 불교 소식이나 글에서는 모두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한국불교에 관한 중국의 활동에도 참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근대 중한 양국 불교관계를 추진시킨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펑밍정(馮明政)이 《옥혜관선생약전(玉慧觀先生略歷)》을 써서 옥혜관의 상황을 소개하였다.2)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관빈(觀彬)이고 호는 혜관(慧觀)이다. 그의 선친은 중국 운남성 곤명에 적을 두고 있었고 조부는 종서(宗瑞)이며, 고려의 평양부에서 타관살이를 하며 정부 일에 종사하였다. 공은 1891년 1월 18일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총명함을 보여 그때부터 신동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성장함에 배움을 좋아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또한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어린나이에 사회에 이름을 떨치었다.

    한말 정난을 당하여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날로 들이닥쳤는데, 공은 그때 나이 16세였다. 의분이 가슴에 가득 차고 감개하여 혁명당에 투신하였으며, 의용을 일으켜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전하고 강연하였는데 말이 청산유수와 같아 대부분의 청중들이 놀라 감탄하였다. 19세 때, 영국인과 신문사를 경영하며 혁명을 고취시켰는데, 이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20세 때, 마침내 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에 들어갔는데, 옥중에 있는 5년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문학ㆍ종교ㆍ정치 등의 학문을 연구하여 심득을 얻었다. 특별히 사면되어 출옥한 후에 경제 분야에 종사하였는데, 은행을 설립하여 경리직을 맡아 보았고, 계속해서 임목공사를 설립하여 총경리가 되었다. 1919년, 한국인들이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선언으로 인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공은 즉시 배편으로 중국으로 건너와 광주의 동에 가서 쑨쭝산(孫中山) 총리와 시정을 담론하였고, 회교도를 지도하고자 하나의 유력한 단체를 만들어 중국혁명에 조력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회교사회가 옛 것에 얽매여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정치사상이 전혀 없어서, 부득이 상하이로 가서 한국에 거주하는 혁명당과 연락을 취하려고 했으나, 결국 정치적 견해가 합치되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에 미국인과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했다. 민국 16년, 타이쉬 대사와 협의하여 상하이에서 불법승원(佛法僧苑)을 설립하고 불교를 개량하였다. 민국 17년, 민국정부에 공문으로 청원하여 국적을 회복하고, 운남동향회의 회원과 화교연합회 회원이 되었고, 마침내 조국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국민공륜사(國民公論社)를 세워 정치잡지를 발간하였다. 한편으론 불교거사와 왕래하여 중국불교회 상무위원이 되었고, 쑨쭝산 선생의 삼민주의를 추모하여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상하이특별시 제2구 제21분부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민국 19년, 진옥장, 이성화, 양문영, 펑밍정, 백순연, 왕중림 등과 불자약엄(佛慈藥큱)을 조직하고 과학을 응용하여 국약(國藥)을 개량하였다. 새롭게 서장(西藏) 3로 39호에 문시부(門市部)를 확충하였고, 또한 진료소를 부설하여 병자를 보살폈다. 한편으론 사회사업에 노력하여, 상하이 제2특구 시민연합회 집행위원에 임명되었고, 국화위원회(國貨委員會) 위원, 갑북보위단동사(閘北保衛團董事), 국의공회(國픫公會) 회원 등의 직책에 제창되었다.

    공은 천성이 활달하고 정직했으며, 남 돕기를 좋아했고, 불행한 일을 보면 자기의 아픔처럼 생각했고, 근면하여 배우기를 좋아해 동서양의 서적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교제에도 민첩하여 어진 이를 공경하고 선비를 좋아하였으니,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이것이 공의 약력이다.

    불행히도 민국 22년 8월 1일 폭도에게 저격을 당하여 죽었으니, 그때 나이 42세였다. 아! 공처럼 열심히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 죽음에 있어서, 국난에 죽지 못하고 도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옥혜관은 사실상 조선에 태어난 중국인이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선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교(韓矯)라고 자처하였다. 그는 타이쉬 대사에게 귀의한 이후로 중한불교교류에 진력했다. 그는 오랫동안 상하이에 거주하며 중국 불교회의 상층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중국불교회에서 간행한 《해조음(海潮音)》의 사장직을 맡았기 때문에 한국 불교계에 관한 활동은 모두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한국 불교계의 소식을 게재한 《해조음(海潮音)》과 《세계불교거사림(世界佛敎居士林)》 등 잡지는 모두 중국 불교계의 주류 간행물이었으며, 여기에 실린 글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옥혜관은 한국불교에 관한 많은 글을 썼고 동시에 고려 의천이 항저우(杭州)에서 설립한 도량인 고려사(高麗寺)의 중건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고려사중건주비위원회위원(高麗寺重建籌備委員會委員)직을 맡았고 《중한불교기념도량 : 서호고려사중한불교기념도량주비계(中韓佛敎紀念道場:西湖高麗寺中韓佛敎紀念道場籌備啓)》라는 글을 써서 “오늘날 한국 불교도는 대각선사의 보은홍법(報恩弘法)의 유서를 삼가 받들어 고려사를 중건하려고 한다. 중한불교 전수 원류의 기념도량에 의지하기 위하여 특별히 혜관을 파견하여 상하이에서 준비하게 하고, 준비가 되자 공사를 착수하였다. 그때 중한 양국의 모든 불자와 신녀는 가르침을 받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다.”라고 전하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비록 나중에 중국 국적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한시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의 적극적인 선전 노력 때문에 한국불교는 중국 불교계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 타이쉬 대사 외에 상하이의 유명한 거사인 왕이팅(王一亭) 등의 사람도 옥혜관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가 살해당한 이후 상하이와 무한(武漢) 등 지역의 불교계가 모두 그를 위한 추도회를 열어 중국 불교계가 정직하고 신실한 불교신도를 잃었다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서거는 한국 불교계에 타격이 더 컸다. 그 후로는 중국불교 간행물에 더 이상 한국불교에 관한 소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점은 그가 중한불교교류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5. 결어

필자는 이상과 같이 근대 중국 민국시기의 불교 간행물에서 게재된 한국불교에 관한 자료 및 일부 인물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과거에는 전무했고 심지어 관련된 자료들도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주로 관련된 자료를 소개하고 향후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중국의 더 많은 자료들이 정리됨에 따라 근현대 중한양국의 불교교류는 연구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를 것이다. ■

황신추안
중국내 인도불교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수당시대의 중국과 조선의 교류 -신라승려고>를 편집하는 등 한 중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중국 사회과학원 동방문화연구센터 명예주임이자 한국연구센터 부이사장, 저서로 <인도철학사><인도 근현대 철학><인도 불교철학><동방불교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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