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승 저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이태승 저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존경하는 저자의 20여 년 연구 성과에 대한 서평을 쓴다? 이건 섶을 지고 타오르는 불로 뛰어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후회해도 늦은 것은 이미 쓰기로 약속을 했던 ‘과거형 시제’ 때문이다. 덕분에 티베트불교사 전반을 훑어보면서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을 숙독했으니, ‘서평 쓰기란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먼저 하게 된다. 필자는 용수의 사유, 그의 중관사상을 전공한 이래 티베트불교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쫑카빠 대사(1357~1419)의 후기 중관 주석서인 《지혜의 대해》까지 연대기에 따라 중관사상에 관련된 여러 원전과 논서들을 우리말로 옮기겠다는 원을 세운 바 있다. 그런 탓에 마주친 이 ‘서평 쓰기’는 결국 유식학까지 포함한 불교 사상사의 인도−중국 전통과 인도−티베트 전통을 아울러 살펴보는 ‘조감도’를 먼저 그려야 했다. 그리고 이 ‘조감도’를 볼 한국의 여러 독자들마저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 ‘섶을 지고 타오르는 불’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에도 중관사상을 다루는 여러 연구자들이 있지만 이미 20여 년 전에 용수의 《중론》 《회쟁론》 등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우리말로 옮긴 김성철 교수를 빼고는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마츠모토 시로의 《티베트불교 철학》을 우리말로 옮겼던 선행 작업 후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을 낸 저자를 빼고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응용불교’로 눈을 돌린 김성철 교수가 과거의 큰 족적 속에서 현대 한국 중관사상계의 상징이라면, 저자는 앞으로 올 그것을 앞장서서 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반드시 숙독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본다. 티베트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밀쌍수(顯密雙修)의 전통, 점수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논서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티베트불교철학》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연구》 등의 귀중한 책들도 같이 출판했으니 불교시대사의 이 시리즈에도 나름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은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 가운데 《이제분별론》과 《이제분별론세소》의 일어 번역본을 뺀 것으로 제4장까지, 그리고 이후 발표한 논문들을 추린 것으로 제10장까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7장 “《중관장엄론》의 형상설에 대하여”가 여러 논의들을 이해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이 되니, 제7장을 먼저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인도 후기 불교를 상징하는 샨타라크쉬타라는 이 대논사가 불교철학사의 여러 난점들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불교학자들이 반드시 숙지해야 할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특히 중국 전통에서 생경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도−티베트 불교철학의 이해를 위해 한 자 첨언하자면, 이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형상(形象, ākāra)’의 중요성이다. 티베트불교에서 정리한 교리사(둡타, grub mtha’, 宗義寶鬘) 전통에 따르자면 4종의 불교학파는 유부, 경량부, 유식파, 중관파로 나뉘는데 그 배경이 되는 것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인식자), 그리고 그 인식 작용의 그침 없는 작용, 즉 그 연기성을 설명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즉 외부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대상을 염두에 둔 것은 소승의 유부와 경량부이고 그것의 그침 없는 작용을 설명한 것은 대승의 두 학파인 유식파와 중관파다. 이 중관파는 또 ‘랑규빠(rang ryud pa, 자립논증파)’와 ‘텔귤와(thal ‘gyur ba, 귀류논증파)’로 나눠진다.

유부와 경량부의 특징은 인식 주체 밖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배경은 《구사론》에 따른 사물, 법(法, phenomena)에 대한 정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존재(有, bhāva)로, 항상하지 않음(無常)을 강조하는 불교의 특징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이 존재한다.’던 유부(Sarvāstivāda)는 그 대상, 즉 외경의 현상은 변하지만 근본물질(prakṛti) 자체는 불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호 결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무는 최소 물질이기에 상호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 즉 법으로 외화되는 순간 이와 같은 주장은 논파된다.(이 책에서는 ‘무형상지식론’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경량부는 위치가 고정된 상태로 머무는 근본물질 따위는 그릇된 가설이라며 그것이 특정 시점, 찰나지간 결합된 형태인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바로 이것이 인식 주체에 의해 파악된다고 봤다.(‘유형상지식론’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소승의 논의는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반영(인식 작용) 자체의 구분을 그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었던 논의이다. 사물에 대한 인식이 분절되는 상태, 이에 대한 극복이 곧 대승의 논의로, 시기적으로 보자면 최소한 용수의 중관사상이 앞서거나 평행선을 이룰 것이지만, 둡타의 전통은 유식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고 있다.

즉, ‘인식 주체에 의해 반영(顯現)’된 대상으로서 형상이란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 작용의 연기성의 그침, 분절 작용은 해소된다.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수차례 등장한다.

샨타라크쉬타는 무형상지식론(無形相知識論, anākārajñānavāda), 유형상지식론(有形相知識論, sākārajñānavāda), 유식설(唯識說)을 전개, 논란(논단의 오자?)하여 유식설도 형상의 인정 여부에 따라 형상진실론(形象眞實論, satyākāravāda), 형상허위론(形象虛僞論, alīkāravāda)으로 나누어 검토하고 있다.(pp.63-64.)

이것이 바로 중·후기 인도불교 사상사의 논쟁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인도−티베트 전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한문 경전권의 유상유식과 무상유식의 논쟁처럼 그렇게 간단한 성격이 아님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문 경전권의  상(相)에 대한 논쟁은 현장과 원측으로 대별되는 ‘마음에 비친 객관의 모습이 실재/허구라는 관점’에 대한 유식파 내부의 문제일 뿐이지만, 인도에서는 ‘형상진실’과 ‘형상허위’ 등으로 ‘마음에 비친 객관’, 즉 형상까지 내려오는 연기적 작용으로서의 인식 대상에 대한 후기 중관파를 포함한 당대 모든 불교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유식설은 대상을 식의 형상으로서 인정하는 유형상유식론의 입장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형상이 진실된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형상진실론(形相眞實論, satyākāravāda)과 형상허위론(形相虛僞論, alīkāravāda)으로 나누어진다. 즉 샨타라크쉬타는 그 형상에 대해서 보다 고찰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p.328.)

그리고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장엄론》의 결론은 “둘 다 틀렸다!”는 중관파의 입장으로 정리되는데(자세한 내용은 제7장 “《중관장엄론》의 형상설에 대하여” 참조), 이 지점에서 후기 인도불교사의 백미인 유식, 인명을 통한 중관사상의 정통성이 확립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바로 이와 같은 논의들이 정리(正理, 인명, 불교 논리학)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며, 저자가 주장하는 티베트불교 내의 유가행중관파로 알려진 샨타라크쉬타(725~783)와 경량중관파로도 알려진 그의 스승 즈냐나가르바(700~760)에 대한 오해다.(불교학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마 이것을 밝혀낸 것이 아닐까 한다.)

지난번 중앙승가대 주최의 ‘중관사상의 원류와 변용’에서도 ‘유가행중관파’라는 명칭에 대한 문제점을 함께 토론하며 ‘후기 중관파’로 그 명칭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 책의 샨타라크쉬타의 《이제론》 연구는 이것을 확정해 주는 좋은 자료다. 그럼에도 둡타 전통의 이해, 즉 티베트불교 교리사의 이해를 위해서 몇 자 첨언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내용과는 다른, 즉 어떤 방법론을 통해 티베트불교를 접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평자의 소견이다.(아마 이것은 티베트불교, 둡타 전통의 이해를 위한 변명이리라.)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티베트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통방통한 그 무엇으로 티베트불교를 대하려는 ‘우리 안’에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즉 티베트불교를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에 대한 지난한 ‘투쟁’이 필요하다. 이것은 저자의 지도교수이자 ‘친구’인 마츠모토 시로의 《티베트불교 철학》의 후기에서 언급한 바로 그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서평자는 저자와 언제나 같은 배를 타고 있다.

두 번째는 티베트의 현밀쌍수에 대한 전통의 이해로 이것은 세 번째인 둡타의 전통과도 맞물려 있다. 티베트불교는 불교 교학을 재배열하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둡타 전통이다. 그 핵심은 불교 교리를 계차별로, 그리고 중관파를 ‘랑규빠’와 ‘텔귤와’로 나누고 텔귤와를 더 높이 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샨타라크쉬타가 ‘후기 중관파’답게 당대 최고의 ‘논리’로써 이제론에 근거하여 《중관장엄론》을 짓고 중관파의 교의를 확립하였다지만 그것이 논리를 ‘승의의 영역에 둔’ 정리론자의 입장이라면 ‘랑귤와’, 즉 자립논증파가 되고 이에 대한 대치점인 월칭(600~650)으로 대별되는 ‘비판의 논리’ 즉 ‘텔귤와’가 최상의 논리로 간주된다면 샨타라크쉬타를 그 아래 위치 짓고자 하던 티베트 논사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

여기에서 총카파는 《중관론》과 《세소》의 작자가 동명 혹은 차명의 다른 인물이라고 거론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세소》의 저자가 ‘이제론’에서의 인용게송을 나가르주나의 것이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그것은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입중론》에 의해 명확히 틀리다는 것.(p.150.)

이 언급 자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윌칭의 논의를 근간으로 삼겠다는, 즉 ‘용수의 비판주의’를 계승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했을 때, 샨타라크쉬타의 정리론(인명)에 따른 해석이라는 그 방법론을 자립논증으로 보았던 티베트 논사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더 나아가 밀교에서 용수를 가우따마 붓다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전통에서, 연대기보다는 그 논리적 방법론을 염두에 둔 둡타의 위치 배열은 현밀쌍수의 가교가 되는 용수의 비판주의 입장을 공유할 수 있게 한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는 이 책이 담고자 하는 티베트 현교의 현미경적인 분석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에, 순전히 티베트불교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새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도불교의 중기 이후 여러 교학들이 더 이상 유입되지 않았던 중국불교의 전통만 받아들였던 한국불교의 태생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게 크다. 그 점에서 인도 후기 불교까지 흡수하고 그것을 교리적으로 가다듬었던 티베트불교가 현대 세계 불교학계의 연구 주제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의 교학 연구 또한 이와 같은 세계적인 추세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 《이제분별론》과 《이제분별론세소》의 역경을 마치고 출간 준비 중인 저자의 여러 역작들이 기대된다. 쁘라상기까(Prāsaṅgika), 즉 ‘텔귤와’가 귀류논증이 아니고 (이 문제를 여기에서 다루다간 서평이 아닌 논문이 될 것이다!) 티베트어 한글 표기법에서 격음, 경음 등을 구분해서 표기해야 하고, 게송은 4행 1구의 게송 형태로 옮겨야 한다는 등 서평자와 저자 사이에서 작은 물줄기가 갈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이미 저자는 저 앞에 서 있다.

그러고 보니 2013년 8월 말에 있을 예정인 달라이 라마의 한국인 법문은 티베트 전통에 남아 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원측소(疏) 《해심밀경》이다. 티베트 논사들이 어떻게 중국의 무상유식을 받아들이며 해석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이래저래 불교 교학의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시절 인연이 맞아 떨어지는 모양이다. 비록 (티베트) 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라 할지라도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을 읽으며 그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되새김질 할 수 있기를! ■

 

신상환 / 전 비스바 바라띠 대학 교수.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인도 비스바 바라띠(Visva-Bharati) 대학 인도·티베트학과 석사, 캘커타 대학 빠알리어과 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삼예 논쟁의 정치적 배경과 까마라쉬라의 수습차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문 대장경에서의 밀교의 자취〉 등과 저서로 《세계의 지붕, 자전거 타고 3만리》 《용수의 사유》 역서로 싸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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