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택 저 《불교와 불교학》

조성택 저
《불교와 불교학》

이 책은 19세기 유럽에서 시작한 근대학문으로서의 불교학이 동아시아 불교에 주었던 문화적 충격에서 시작하여, 이런 인식이 다시 동아시아 불교에 내면화되고 권력화(?)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조성택 교수는 근대 불교학이 가진 잠재적인 서구 중심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주체적 관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근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내용에 반영하면서 근대 불교학이 제시한 불교의 역사적 이해가 사실상 그들이 선입견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한국연구재단에서 진행했던 ‘석학인문강좌’를 위해 집필된 것으로, 일반 독자를 위한 불교학 강좌로서 기획된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전문 불교학도가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을 정도로 최근 학계의 발전된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여기서 논의되는 주제는 사실상 초기불교의 성격이나 텍스트의 구술성과 문자성, 대승의 기원과 같은 근대 불교학의 핵심적인 연구 분야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 사상이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번역을 둘러싸고 생겨났던 여러 문화사적 변혁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아울러 논의하고 있다. 이런 논점들은 모두 불교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체적으로 ‘무거운’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일반 독자들이 충분히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독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본서의 뛰어난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논지의 전개에서 상세한 논증 대신에 과감한 비약이 종종 출현하고 있고, 또한 중요한 결론을 제시할 경우에도 상세한 논증 대신에 저자의 주장만이 제시되어 있다고 보이는 등의 대가도 지불해야 했다. 물론 이런 어려움은 본서만이 가진 문제는 아닐 것이다.

본서는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유럽의 ‘불교’ 발견과 근대 불교학의 탄생〉, 2부는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적 형성과 그 전개〉, 3부는 〈근대 한국 불교와 근대 불교학〉이다. 그리고 이들 세 부분이 어떤 문제의식 아래 집필되었는가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어 전체 고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 에필로그 〈서구에서의 불교의 미래〉에서는 서구에서 불교의 수용 양태에 대해 간략하지만 인상적으로 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평자는 이하에서 이 책의 장절에 따라 내용을 소개하면서 아울러 간단히 소회를 적는 방식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1부의 1장 〈붓다란 누구인가, 그리고 불교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불교를 이성주의적 관점에 국한시켜 연구하려는 근대 불교학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불교의 철학사상이 명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평자도 저자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여기서 명상이란 용어가 단지 선정 명상(=사마타 수행)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찰 명상(= 비파사나 수행)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저자는 관찰 명상이 분석적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전통 불교에서 관찰 명상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전통 불교사상도 저자가 근대 불교학의 소산이라고 여기는 소위 ‘합리성’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또 실제 중시하고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저자는 나아가 붓다나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합리적인 틀로 규정하려는 현대 학자들의 태도를 빅토리아 시기의 불교 연구자들의 자기 투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근대 불교학의 경전 독법 역시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사성제를 예로 들어 성자의 진리로서 일상 경험적 차원에서 확인될 성질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사성제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풀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자의 네 가지 진리로 풀이될 수 있다는 노먼(Norman)의 지적은 분명 저자의 통찰을 지지할 것이다. 사성제가 일반인의 인식대상이 아니라 성자의 인식 영역이기 때문에 불교전통에서 진리에 대한 인식은 위계적인 것이지, 이성주의 철학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근대 불교학의 관점에 대한 비판 위에서 저자는 불전 독법으로서 ‘방법론적 불가지론’을 제안한다. 이는 “먼저 이성적 사유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用)과 그렇지 않은 영역(体)을 구분하고, 후자의 영역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방법론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다.”(71쪽). 저자는 이런 이항구조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기신론의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의언진여(依言眞如)의 구조를 갖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일 저자가 방법론적 불가지론을 기신론의 용어를 갖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저자가 비판하는 근대 불교학의 이성주의적 관점이 불교전통에서 아비달마의 철학적 태도와 비견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적어도 유부의 철학적 태도에 의거하는 한, 명확한 법상으로서 인식은 언설화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대 불교학의 이성주의적 태도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대승의 관점에서의 그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2장 〈인도 초기 불교사의 새로운 이해〉에서는 근대 불교학의 초기불교사에 대한 ‘재구성’이 가진 암묵적인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이를 불교적 시각에서 새롭게 재구성할 여지는 없는가를 모색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85쪽) 재구성을 위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즉 불교가 하나의 교단에서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었다는 전제와, 현존하는 여러 초기경전 사이의 내용 차이는 본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저자는 하나의 교단은 ‘본래 동일한’ 모본 텍스트를 가진 집단을 전제하며, 동일한 모본 텍스트는 하나의 ‘교단’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두 전제는 내용상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들 전제를 비판하기 위해 저자는 브라만교와 불교에서 구전전승의 차이와 텍스트에 대한 관념의 차이를 지적한다. 브라만교에서는 ‘구전전승’의 선결 요건인 ‘언어적 배타성’과 제도화된 ‘사회적 시스템’이 있었던 반면 불교에는 이것들이 없었다고 간주한다. 초기 인도불교사에 대한 저자의 깊은 관심과 방대한 독서는 이 부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불교와 브라만교 전통을 매우 이질적인 대립자로서만 바라볼 뿐, 이들이 같은 인도의 토양에서 발전한 사상체계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보인다. 사상적 측면에서 불교가 무아설 등의 독창적인 교리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불교의 이런 독창성이 브라만교가 사용했던 사상적 재료들을 배제하는 등의 배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기술로서 기억과 활력으로서 기억이라는 아스만의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을 인용하면서 이를 각기 브라만교와 불교의 방식과 대응시키면서 그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것 역시 불교가 전통 힌두적 관념이나 방법을 채용하면서도 이를 변용시켜 해석하고 사용했다는 증거로 간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전전승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어떤 통일적인 언어로 만들어진 텍스트의 존재가 요청되지만, 불교에 있어서는 산스크리트라는 표준어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불교 혼성 범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지역에서 특정한 토속어가 그 기능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통일적인 텍스트의 부재를 설하는 것보다 순리적인 설명이 아닐까? 나아가 불교에 구전전승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는 저자의 지적도 수긍하기 힘들다. 적어도 불교교단이 붓다 재세 시에 존재했다고 한다면, 왜 그런 제도화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저자는 브라만 집단이 구전전승에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양한 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많은 이질적인 브라만 집단들이 하나의 ‘동일한’ 전승을 유지했다는 생각이야말로 더 큰 ‘신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전승 사이에 불교보다 더 커다란 ‘차이’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장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초기 인도불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인 경전 편찬의 시기에 대해 다루면서 최초의 경전 편찬에 의해 어떤 모본 텍스트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기존의 근대 불교학의 해석을 거부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은−초기불교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그리고 최초의 편찬은 구술에 의한 편찬이 아니라 ‘문자’에 의한 편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 역시 구체적 논증 대신에 정황에 따른 추론적 설명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상 이는 인도문화에서 구술성이 가진 전달의 정확성에 대한 회의를 표시하는 일부 서구학자들의 견해와 닿아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성격을 ‘성전의 종교’가 아니라 ‘체험의 종교’라고 하더라도, 매뉴얼화된 붓다의 체험 없이, 즉 어떤 모본 역할을 하는 텍스트가 없는 상황에서 과연 불교적 정체성이 지속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나아가 삼장 중에서 논장을 가리키는 논모(論母, mātṛkā)가 원래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목록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또 그것들이 가장 오래된 경장보다 성립 시기가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브롱코스트(Bronkhorst)의 연구를 고려할 때, 이들 두 전제를 비판하는 저자의 주장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보다 유효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불교가 브라만교에서 사용된 방식을 교조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니라 이를 제한된 방식으로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라고 믿는다.

붓다가 이런 제한된 방식으로 브라만들의 관념을 채택한 것은 브라만 전통에서 전제하는 음성의 신비로운 능력을 저자가 90쪽에서 주장하듯이 초기불교가 전혀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만트라와 다라니의 사용이 애호되고 있는 대승은 제외하더라도, 초기 경전에서 붓다는 언어의 주술적 힘에 대해 완전히 배타적으로 부정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붓다는 뱀에 물린 제자에 대해 그가 모든 중생에 대해 자심을 계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뱀의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 다라니를 사용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의 주술적 힘에 대한 붓다의 태도는 그것의 작용력의 부인이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 목표와 핵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장 〈무불 시대의 붓다들〉에서 저자는 보살 관념의 등장과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면서, 범부 보살과 관련해 상제보살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있다. 상제보살은 소품반야경 계열의 문헌들에 포함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저자는 이들 문헌에 나타난 내러티브의 비교 분석을 통해 당시 인도불교계에서의 시대 인식과 붓다관의 변화를 읽어나고자 한다.

2부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적 형성과 그 전개〉에서 저자가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는 단순한 이식 과정이 아니었으며, 일방적인 전파가 아니라 상호적이며 교차적인 동화와 적응 그리고 변용을 통한 점진적이며 지속적인 과정이었다”(14쪽)는 점이다. 이런 저자의 지적에서 “상호적”이라는 표현에 대한 오독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저자의 설명에 충분히 찬의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같이 매우 발전된 문화에서 이질적인 타국의 문화는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음식이나 보석, 기술과 같은 ‘하부구조’와 관련된 문화적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이나 인간관과 같은 상부구조 수용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문제를 4장 〈경쟁하는 두 붓다〉에서 인도와 중국 및 한국에서 아미타 신앙과 미륵 신앙의 유행 차이와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두 신앙의 유행 차이를 당시 남북조 시대의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시키는 점이다. 즉 북방의 이민족 왕조가 미륵 신앙에 호소해서 ‘선출제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사용했다면, 수당과 같은 한민족의 왕조에서는 세속 왕권을 위협하지 않는 아미타 신앙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저자는 한국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친 요소로서 중국적 요소 이외에 중앙아시아 등 비중국적 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한국문화의 자기 정체성의 재인식을 위해 경청할 만한 지적이라고 믿는다.

5장 〈번역과 독창적 사유〉에서 한역의 경우를 통해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산스크리트어 등으로 작성된 불전의 번역이 특히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당시 중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를 설명하는 방법, 예컨대 인식론적, 의미론적, 존재론적 방식의 설명이 동아시아 문화에서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인도불교가 보여주는 세계와 가장 근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노장의 사상에 빗대어 불교사상을 이해하려는 소위 ‘격의적(格義的)’ 해석 방법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다.

저자는 일반 독자를 위해 이를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잘못된 번역의 몇 가지 예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그가 드는 예는 ‘무생법인(無生法忍)’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금강경》의 ‘중생상(衆生相)’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이런 예시와 설명이 단편적이고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자는 이를 일반화시켜서 번역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 불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인도불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결여 내지 오해가 오히려 동아시아 불교의 철저한 ‘자기화’를 가능케 한 것이라는 다소 급진적인 역설을 이끌어낸다. 저자는 동아시아 불교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해 경전의 번역을 생산과 번역된 문헌의 유통이란 측면에서 볼 것을 주문한다. 특히 유통의 측면에서 한역된 문헌이 인도적 맥락을 떠나 자체적으로 의미를 산출해 냈고 그것은 거의 재창조에 가까운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저자가 한문 불교체계 내에서만 그 의미구조가 이해되는 것의 예로서 드는 것은 소위 중국화된 불교학파로 말해지는 천태와 화엄, 선불교이다.

저자의 통찰에는 분명히 깊이 숙고해야 할 점이 있다고 보이며, 또 동아시아 불교의 독립된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환호를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가 번역 텍스트인 한문 경전을 중심으로 담론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환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한역으로 번역된 텍스트는 인도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번역 텍스트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서 독립된 텍스트로서 기능했다.”(14쪽)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불교란 단순히 인도불교에 대한 ‘동아시아적 이해와 변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한문 불교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서 천태와 화엄, 선불교를 거론한다. 저자의 주장이 함축하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평자로서 이런 거대담론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분명 번역된 인도 불전에 대한 오해와 오독이 중국화된 새로운 이해를 촉발시켰으리라는 지적은, 예를 들어 진제의 번역문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등을 통해 역사적으로도 근거를 제시할 여지가 있겠다. 그럼에도 이런 ‘오해’에 기반하여 그들의 사상을 전개한 불교사상가들이 원전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이런 오독의 가능성을 문헌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현장의 신역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문제는 그런 오독의 결과 새로운 동아시아 불교 전통이 생겨났다면,  ‘새로운’ 전통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점이다. 평자의 생각으로 그들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을 다만 ‘문화적’이라는 수사에 만족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자는 어떤 교학이든 그것은 경험이나 마음의 흐름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이론일 경우 당연히 마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학파들은 경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심층적인 체계 구축에 매진했다고 보인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수용한 한역 문헌에 대한 치밀한 연찬을 통해 붓다 경험의 감추어진 본질적 구조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2부의 전반적 서술을 읽으면서 평자는 불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문제에서 저자가 은연중에 동아시아 불교의 입장을 인도불교의 이해에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을 일미라든가 일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불교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14−15쪽)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시초에 초역사적 원형을 설정하려는 이런 태도 자체가 서구적 해석은 아니었던가? 적어도 인도불교 전통에서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초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대신에 오히려 상황의존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있음을 본다. 즉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청중과 그들의 이해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는 저자가 다루고 있는 네 가지 의지처를 설명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따라서 붓다 교설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이고, 이것이 아마 인도불교와 동아시아 불교를 근본적으로 구별시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 해석은 학파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학파들 간의 논쟁이 불가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텍스트의 교리적 역사적 형성이라든가 또는 다른 지역 불교 전통과의 상이점 등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15쪽)고 말하지만, 적어도 인도불교사가 보여주는 것은 그 차이점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의 역사라고 보인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저자가 가진 불교사의 이해가 동아시아 불교사의 시각을 주로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3부는 〈근대 한국 불교와 근대 불교학〉이다. 6장 〈근대 한국 불교사의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의 문제〉와 7장 〈탈근대 불교학을 위해서〉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 불교계의 여러 현상을 다로고 있다. 평자의 전공이나 관심 분야는 아니지만 현대 한국불교를 형성한 여러 역사적 단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독자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읽어 내려가면서 저자의 관점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서는 고대 인도에서 불교의 성격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인도불전의 한문 번역과 그 역사적 변화가 가진 의미에 대한 문화사적 해석을 거쳐 근대 한국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용과 해석과 관련된 역사적 문제들의 얼개를 일관된 시각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불교의 문화사적 성격을 해명하려는 이런 통시적 작업은 우리나라 불교학계에서 아마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보이며, 더욱 이를 자신의 시각에서 구체화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성택 교수의 학적 이해의 깊이와 축적의 넓이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들 다양하고 핵심적인 주제들을 한 권의 저작으로 다루면서 이를 일반 독자에게 일관되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데 이 책의 뛰어남이 있다.

평자는 그런 웅대한 시도가 세세한 점에서 보다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본서의 주제 중에서 흥미로운 몇 가지를 택해 그 내용을 요약하고 대안적 해석의 여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교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불교학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조성택 교수의 노고와 열정이 깊이 배어든 《불교와 불교학》을 음미하면서 일독하길 권한다. ■

 

안성두 / 서울대 철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 졸업, 독일 함부르크대 인도학과 석사·박사. 주요 논문으로 〈유가행파의 견도설1, 2〉 〈원측 해심밀경 티벳역의 성격과 의의〉 등과 저서로 《보성론》 외 다수. 불교평론 올해의논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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