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요즘은 시대적 화두의 하나가 정치쇄신, 정치발전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하여 우리 국민이 크게 식상하고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작년 대선 때는 기존 정당의 정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려는 안철수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한다. 정치쇄신, 정치발전이 시대적 화두이고 과제라면 도대체 정치쇄신, 정치발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푸는 데, 우리 불자들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니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정치발전이란

정치발전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 시대의 정치가 그 국가공동체가 당면한 국가적 국민적 과제를 보다 잘 풀어주는 정치가 될 때 우리는 정치가 발전했다고 한다. 국가적, 국민적 과제를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는 정치는 국민적 불만과 불신의 대상이 되고, 그 나라 정치는 후진적이라고 비판을 받는다. 우리 정치가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국가적 국민적 과제를 잘 풀어주는 정치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정치주체’가, 즉 정치지도자들이 그러한 시대적 국가적 문제를 잘 풀 능력과 의지와 품성을 가추고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러한 능력과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로 많이 나와야 한다. 다른 하나는 ‘정치제도’가 그러한 우수한 정치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 즉 그러한 우수한 정치지도자들이 양성될 수 있는 정당제도여야 하고, 우수한 지도자들이 투표를 통하여 당선될 수 있는 선거제도여야 한다. 또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에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의회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논의를 ‘정치주체’의 문제에 국한하여 정치발전의 문제를 다루도록 한다. 정치발전을 위해 어떠한 정당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 등의 필요한가 하는 정치발전과 정치제도의 문제는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오로지 정치주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정치주체의 문제는 실은 어떠한 자질과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그 나라 정치발전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환언하면 어떠한 가치와 이념과 소신을 가진, 어떠한 품성과 덕목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그 나라의 정치가 시대적 국민적 국가적 과제를 잘 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3. 정치주체의 변화

나는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정치발전이 가능하려면 우리나라 정치주체들, 즉 정치지도자들의 가치, 이념, 품성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권위주의적 우파(右派)정치의 유산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1960~70년대의 산업화시대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권위주의적 우파정치였다. 이 우파보수 정치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독선과 독점과 독식의 정치였다. 국민의 광범위한 민주적 참여는 배제한 엘리트들만의 정치였다. 다른 하나는 기득권에 안주하는 정치, 즉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정치였다. 이들은 산업화라는 국가 비전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고 산업화를 이룰 국가정책과 국가전략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은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부터 우파보수의 경직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화에 스스로를 쇄신해 나가는 우파의 개혁정신, 개혁보수의 정신이 점차 약해졌다. 우파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자유와 공동체’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해야 참다운 우파이고 보수임에도,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경향이 점차 증대했다. 즉 ‘가치보수’의 면이 약화되고 ‘이익보수’의 면이 강화되어 왔다.
왜 그랬을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파적 제도가 보수주의자들이 자기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치보수가 적은지 모른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파적 제도를 해방 후 건국헌법의 형태로 거의 공짜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앞으로 권위주의적 우파정치의 유산을 타파하는 철저한 보수혁신의 노력이 시대적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우파는 ‘독점적 독선적 이익보수’가 아니라 ‘통합적 개혁적 가치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보다 포용적이고 보다 따뜻한 그리고 보다 가치지향적인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지금의 새누리당의 조직과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여의도 정치에서 뛰어나와 당원과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둘째, 운동권적 좌파정치도 극복되어야 한다. 1980~90년대를 우리나라의 민주화 시대라고 한다면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정치는 운동권적 좌파정치가 지배하여 왔다. 이 좌파진보 정치도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분열과 대립과 갈등의 정치, 미움의 정치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정책 또는 국가전략 부재의 정치였다. 한마디로 구호와 선동의 정치였다. 구호로서 민주화는 있었으나 어떤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군사독재 타도의 깃발을 있었으나 타도 후 어떠한 나라를 만들 것인지, 즉 민주화시대 경제는 어떻게 발전시키고 복지는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 등 국가경영에 대한 비전과 전략 준비는 전혀 없었다. 국민을 민주 대 반(反)민주, 서울 대 지방,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대립시켜, 서로 갈등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키워나가는 진영적 전략전술에만 몰두하였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보면 1960~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류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목표하였다. 그러나 1980~9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국내에서 북을 추종하는 자생적 주체사상파가 등장함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의 헤게모니가 자유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종북을 주장하는 주사파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강성사회주의자로 넘어갔다. 그래서 진보좌파 정치에는 반체제적 성격이 격화되고, 그 결과 운동권적 분열과 증오의 정치, 국가운영과 국가전략의 부재의 정치가 고착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진보좌파 운동에서는 소위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리버럴(liberal)−미국식 리버럴(민주당) 내지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social democrat)−들이 설 땅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수적으로는 이들 합리적 리버럴 즉 합리적 진보가 절대다수이지만 지도력과 목소리는 항상 잘 조직화된 급진적 좌파가 압도했다.
이제는 이런 식의 운동권정치로는 더 이상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진보좌파의 과제는 어떻게 참된 진보, 즉 리버럴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헌법과 역사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급진좌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과 역사를 존중하는 ‘합리진보’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참된 진보의 가치인 ‘평등과 약자보호’를 정책화할 수 있는 ‘정책진보’를 만들 것인가이다. 이러한 합리적 정책적 진보를 만들기 위해 가장 급한 과제의 하나는 물론 어떻게 종북(從北)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정서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정리하는 지적 용기가 있어야, 우리나라의 진보좌파 운동이 합리적 진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수 있고, 집권의 길도 열릴 것이다.
셋째, 이제는 새로운 ‘선진통일의 정치주체’가 등장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선 앞에서 지적한 권위적 우파와 운동권적 좌파의 문제점을 극복한 새로운 정치주체가 등장해야 한다. 이 새로운 정치주체는 당연히 국민통합과 미래지향의 성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치주체가 가져야 할 특징 덕목은 아래와 같다.

①합리성과 정직성
정치적 주장과 정책내용이 합리적이고 정직해야 한다. 시대에 안 맞는 주장이나 국민을 일시적으로 속이는 주장은 국민이 빠르게 알아본다. 그래서 앞으로는 헛된 구호와 이미지보다 내용(정책과 인품)에 근거하여, 국민지지를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성장 없는 복지확대’나 ‘복지 없는 성장론’을 주장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안보 없는 평화논의’나 ‘통일을 외면하는 안보논의’는 장기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성철 스님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는데[不欺自心], 솔직히 우리 정치에서, 특히 정치인들의 정책구상에서 자기를 속이는 일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국민을 속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잘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쇼가 아니다. 민생안정과 국가발전이 목표이기 때문에 정책을 소중히 하여야 하고 따라서 정책 전문성과 합리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우선 듣기 좋은 인기영합적인 정책, 포퓰리즘적 정책만 양산하는 정치인들은 국민이 반드시 퇴출시킬 것이다. 

②포용성과 통합성
이제 더 이상 국민을 분열 대립시키는 데 골몰하거나 기득권의 독식에만 연연해서는 대한민국을 끌고 갈 수 없다. 한마디로 독선적 배타적이면 안 된다. 소통과 나눔과 국민동참이 필수이다. 또한 분열과 증오의 정치로는 더 이상 성공하는 정치를 만들지 못한다. 국민통합이 필수적이고 진정한 국민통합은 국가관 역사관 등 가치통합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의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국민통합을 이룰 수는 없다. 새로운 정치주체는 한층 더 균형적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확신, 헌법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지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다.

③세계성과 자주성
이제는 국제적 안목과 경륜을 가진 글로벌 리더가 나와야 국가경영에 성공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세계경영을 할 수 있어야 성공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반드시 자기 나라의 역사 전통문화에 무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자립과 자긍의 자세, 자주와 자강의 정신을 확실히 가진 정치지도자여야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이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중견국가(middle power)의 경우 더욱 그러한 자주독립 자강·자긍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통일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제적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이웃 4강을 잘 다루어 나가야 하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 정신을 확실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세계변화를 외면하는 닫힌 민족주의적 사고나 강대국에 무조건 추수하는 사대주의적 사고로는 21세기 국가경영에 성공할 수 없다.
요약하면 앞으로는 등장하여야 할 새로운 정치주체는 ‘합리적이고 포용적이며 세계적인 지도력을 가져야 하고 정직하고 통합적이며 자주적인 정치세력’이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떠한 세력이 새로운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주체가 될 것인가? 그 답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지금의 여당인 새누리당이 철저한 자기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주체로 거듭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확실한 자기쇄신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주체로 거듭날 수도 있다. 또한 만일 여당과 야당이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제3의 세력이 등장하여 새로운 정치주체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세력이 시대적 요구에 올바로 답하는가에 따라 앞으로 대한민국을 주도할 신정치세력이 결정될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주체가 등장하여 풀어야 할 국가과제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꿈인 ‘선진과 통일의 시대’를 여는 일이다. 1945년 해방 후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빠르게 뛰어온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나가야 할 길, 새로운 국가비전과 국가목표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선진화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이다. 이 둘을 합쳐 선진통일(先進統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선진화란 한마디로 부민덕국(富民德國)이 되는 것이다. 국민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선진일등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웃 나라들이 우리를 덕스러운 나라로 보는, 이웃 나라에 모범이 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러한 부민덕국의 나라를 만든 것인 선진화이다. 그리고 그 선진화가 반드시 통일을 함께 성공시켜 한반도 전체의 선진화가 되어야 진정으로 우리의 21세기 꿈은 이루어진다. 즉 한반도 전체를 통일된 세계 일류선진국으로 만드는 꿈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 선진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 우파정치, 운동권적인 좌파정치를 넘어서 합리적이고 통합적이며 세계적 비전과 역량을 가진 새로운 21세기 정치주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정치발전의 전제이다.


4. 불교의 역할

선진과 통일을 향한 정치발전을 위해 새로운 정치주체가 등장해야 하는데 그러한 새로운 정치주체가 등장하기 위하여 불교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아니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한 특별한 역할과 기여는 무엇일까? 우선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일반론을 간단히 정리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어떠한 가르침이 특히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종교와 정치
우선 종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인가? 종교와 정치는 어떤 관계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니 서로 상대에 대하여 관여하는 것−비판 내지 지지하고 혹은 직접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소위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이다. 종교는 정치에 입을 다물고 정치도 종교의 문제에 대해선 모르는 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과연 옳은 것인가?
부처님께서 21세기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바로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이 나라의 정치를 보시면서 무어라고 하실까? “불자들이여! 정치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니, 가능한 한 멀리하고, 오로지 참선 독경 기도만 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만일 이 시대 이 땅에 오셨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불자들이여 ‘마음개조(종교)’하면서 그 원력으로 ‘세계개조(정치)’를 하라”고. 환언하면 “참선 독경 기도하여 얻은 공력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워라. 그래서 중생이 안락한 공동체를 만들어라” 그리고 같은 이야기이나 “‘세계개조’를 하면서 그 원력의 힘으로 ‘마음개조’에도 힘써라.” 혹은 “밖으로는 세계를 개조하고 안으로는 마음을 개조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을까? 두 개를 함께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을 것이다. 분명 종교와 정치는 결코 둘이 아니라고−불이(不二)라고− 가르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부처님께서 지향하는 목표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너희는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보살이 되라’고 가르치셨고, 또한 부처님 안목에서 보면 세법(世法)과 불법(佛法)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속의 보살은 바로 세법속의 성왕(聖王)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를 내세워 정치를 외면하거나 정치를 내세워 불교를 멀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나는 마음개조를 하니 세계개조는 나의 관심이 아니라고 하거나 나는 세계개조를 하니 마음개조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불법이 아니다. 올바른 불교는 육조혜능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불이지교(不二之敎)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교분리라는 것은 사실은 올바른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소승적 견해이고 세속적 기준이다. 그것은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거나 종교가 정치를 이용하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주장이고 기준일 뿐이다. 최선이나 차선은 아니다. 중생의 구원을 생각하는 종교인이 중생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를 외면할 수 있는가? 동시에 국민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정치인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종교의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올바른 종교인이고 정치인인가? 아니다.
종교인도 정치에 대하여 발언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최소한 종교지도자의 교육(종교의 질 향상)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해야 한다. 종교인들도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해야 하고 정치인들도 올바른 종교정책−특히 성직자 교육정책−을 세우는 데는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행위자가 사심(邪心/ 私心)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종교인이 정치에 대해 발언해도 사심으로 하면 더 이상 종교인의 행동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지도자 교육에 정치가 관여해도 개인이나 특정단체의 이익을 위하여 관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정치도 올바른 종교정책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하나의 우려스러운 경향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즉 불교를 정치적 이념적 투쟁에 이용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불교의 교리나 사찰의 모임을 이용하여 이념적 정치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불교가 우리 사회의 보수 세력의 기득권에 영합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우리 불교의 일각에서 운동권 좌파정치의 흉내를 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역사학, 경제학, 등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소양을 갖추지도 않고, 아니 전문가들의 의견도 듣지도 않고, 국가정책과 나라경영에 대하여 혹은 남북관계나 국제관계에 대하여,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속설을 쉽게 주장하고 말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때로는 좌파적인 이념적 입장을 미리 정하고, 때로는 특정 정치세력과 연대하는 정파적 입장을 미리 세우고, 부처님의 말씀을 끌어내어 멋대로 견강부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지도적 위치의 성직자들이 그러한 언행을 하면 국민을 혼란시키고 국가와 역사를 오도하는 큰 해악이 된다. 일반 신도들은 성직자들의 주장은 시비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참으로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물론 성직자들도 정치적 발언을 하고 국가정책에 대하여 비판이나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과 지지를 사적 정치적 이해관계나, 특정이념과 정파적 입장에서 표출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불교 지도자들이라고 한다면, 좌나 우, 진보나 보수, 혹은 여와 야라는 차원을 몇 단계 뛰어넘어서는, 대한민국 전체를 아니 한반도 전체를 사랑하는 원력보살의 입장에서 발언해야 한다. 즉 불교적 비판과 지지여야지 이념적 내지 정파적 비판과 지지여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불교의 대중도(大中道) 사상에 기초한 정치적 비판과 지지가 행해져야 한다.
대중도란 무엇인가? 여기서 대중도란 단순한 기하학적 중간, 혹은 적당주의나 기회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도가 되려면 첫째는 좌와 우를 포용하면서도 좌와 우를 뛰어넘는 큰 정견[大正見]을 가져야 한다. 좌우를 버리지도 취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대중도가 되려면 둘째는 처해진 장소와 시간에 맞게−즉 시의(時宜)에 맞게− 옳은 것 즉 천하의 공의(公義)를 실천하는 대정행(大正行)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파독재가 성할 때는 좌에 서서 우를 비판하고 좌파선동이 과할 때는 우에 서서 좌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대중도이다. 적어도 불교의 정치참여는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한다. 권위적 보수나 운동권적 진보의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2) 국민통합과 원융의 가르침: 일심(一心)사상/불이(不二)사상
다음에는 부처님의 어떠한 가르침이 정치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보도록 하자. 우선 가르침 중에서 원융무애의 일심사상, 불이사상부터 시작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가 풀어야 할 국가적 시대적 과제의 하나는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푸는 데 불교의 가르침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은 지역으로 계층으로 세대로 그리고 여와 야로 크게 양분되고 양극화되어 있다. 이 양극화를 줄여나가려면 그래서 국민갈등과 분열을 줄여나가려면, 우선 세상을 원융하게 하나로 보고, 세계를 크게 하나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정견이 서야 한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단견(斷見)이 앞서서, 네 편 내 편 나누면, 국민통합은 결코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불교의 일심(一心)사상, 특히 원효 스님이 강조하신 일심사상이 국민통합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내용이나 표현을 달리하면 불교의 불이(不二)사상, 특히 《유마경》의 불이사상이 국민통합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을 하나의 꽃으로, 하나의 큰 생명공동체로 보는 일심사상과 개인과 국가, 개체와 전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이 우리 사회에 보다 넓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그만큼 우리 국민의 분열과 갈등은 사상적으로 치유되고 축소되어 나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 둘 사항이 있다. 원융일심이나 불이사상은 이 우주의 실체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존재론적이고 실체론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르침이다. 세상의 실제의 모습은 원융하게 하나로 되어 있지, 단절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체와 전체, 주관과 객관, 과거와 미래 등이 바로 일심사상과 불이사상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존재의 세계’ ‘실체의 세계’는 일심이고 불이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가치 도덕 윤리와 같은 ‘당위의 세계’나 법과 정부와 같이 인간이 설계한 ‘제도의 세계’에는 일심과 불이를 무조건 적용해서는 안 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생명과 반(反)생명, 합법과 불법, 민주와 독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등을 원융하게 보아, 불이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 즉 정의와 불의가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생명과 반생명이 차이가 없는 일심이라고 주장하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민주와 독재는 전혀 다른 것이고 합법과 불법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서 우리 불가의 일각에 사고의 혼란이 있는 것 같다. 북한의 체제와 남한의 체제가 본래 원융하고 불이이니 이 둘을 융합하여 서로 좋은 점을 찾아 중도적 체제를 만들어 보자는 주장이 간혹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과거에 문익환 목사께서 주장하신 바 있는 중간체제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틀린 이야기이다. 북의 수령 독재주의와 남의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원융이 될 수 없고 그래서 불이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조선공산당의 규약 간에는 원융과 불이가 가능하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불교의 원융과 일심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가끔 보이기 지적해 두고자 한다. 

3) 정책융합과 연기의 가르침-상호의존성
우리나라 정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무한투쟁의 정치이다. 모든 정책과제를 과도하게 양극화시키고 대립적으로 만들어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다 보면 정치투쟁은 쉽게 무한투쟁 내지 극한투쟁이 된다. 예컨대 좌파는 복지정책만을, 우파는 성장정책만을 주장한다고 서로가 상대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면서 공박한다. 그러면서 좌파는 자기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한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우파는 가진 자들의 정치세력이라고 공격한다. 반면에 우파는 자기들이야말로 나라 전체의 발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좌파는 어려운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야심가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장정책 없는 복지정책이 과연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할까? 반면에 복지 목표 없는 성장정책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필요한 것은 정책융합이다. 복지도 성장도 다 필요하다. 그 나라의 발전 수준에 따라 양자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적으로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국내외적 경제상황 그리고 발전단계 등−을 고려하여, 가장 바람직한 성장과 복지의 ‘최선의 정책융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논해야 하는데, 우리 정치는 그러한 정책적 고민은 하지 않는다. 성장과 복지를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정치싸움만을 극대화한다.
노사관계에 대한 여야 간의 정책대립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를 위한 정책과 기업을 위한 정책을 항상 양자택일인 것처럼 극단화, 양극화시켜 정책싸움을 한다. 노동자를 위한다고 무조건 임금을 높이면 기업의 도산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기업 발전을 위한다고 무조건 임금을 낮추면 노동자의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다. 결국 기업 없는 노동자가 있을 수 없고 노동자가 없는 기업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진정한 정책과제는 어떠한 수준의 임금이 노동자의 적정생활도 보장하고 기업의 적정발전도 이룰 수 있는가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여야 혹은 진보보수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적정수준의 임금조건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책경쟁은 하지 않고 친노동이냐 친기업이냐 하면서 극단적인 정치싸움에만 치중한다.
요즈음 문제 되는 경제의 민주화도 정답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가 아니라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다 중요하다’이다. 어떻게 상생의 관계를 만드느냐가 중요하지 어느 한 편을 들어 다른 편을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사관계도 친노동이냐 친기업이냐가 아니라 노동도 기업도 다 중요하다가 정답이다. 환경파괴 문제도 발전이냐 환경이냐가 아니라 발전도 환경도 중요하다고 인식해야 한다. 역사 발전의 문제도 산업화세력이냐 민주화세력이냐, 누가 더 역사적 기여가 많은가가 아니라 산업화세력도 민주화세력도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다 크게 기여한 세력이다가 정답이다.
심지어는 통일정책도 우리나라에서는 국내정치에 정파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여야 간의 정책대립과 갈등을 만들고, 나아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진보는 대북대화를 보수는 대북압박을 주장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서로 싸운다. 그러나 대화냐 압박이냐는 정책수단에 불과하지 않을까? 정책 목표는 북한의 변화이고 통일이다. 또한 그동안의 대북정책 역사를 보면 우리가 대화한다고 쉽게 북한이 바뀌지 않고, 우리가 압박한다고 북한이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야, 진보보수 모두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정책수단의 효과를 정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북한의 변화 나아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좀 더 효과적인 정책수단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정치에서는 국정과제에 대해 합리적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정책 문제를 쉽게 정치화하고 정파화하면서, 정치와 국민의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하는 경향이 크다. 나는 정치권이 부풀려 놓은 정책양극화, 국민양극화의 대립과 갈등을 풀어나가는 데 불교의 연기적 철학과 가르침이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나의 존재가 남의 존재와 연기적으로 상의상생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 누구나 자기를 독존적 절대적 존재로 고집할 수 없다. 성장의 목적이 복지에 있고 복지는 성장 없이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장과 복지는 서로서로 상의상생의 관계에 있는 것이 된다. 굳이 복지와 성장을 나누어 절대화시켜 서로 갈등, 대립하게 할 필요가 없다. 노와 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본래가 노는 사에 의존하고 사는 노에 의존하는 연기적 상의상생의 관계라면 구태여 노와 사를 물과 기름처럼 만들어 서로서로 무한투쟁, 극한투쟁을 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불교의 연기론을 받아들인다면, 복지이든 성장이든 혹은 노든 사든 결국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통하여 함께 발전하는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서로가 좀 더 겸손하게 서로의 상호의존성을 수용하게 되고, 나의 이익과 발전만 아니라 상대의 이익과 발전을 함께 고려하면서 공존공영의 길을 모색하여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불필요한 분열과 갈등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결국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주장하는 정책 내용도 자기뿐 아니라 상대의 이익과 발전도 함께 감안한 보다 훌륭한 정책 내용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으로 이타(利他)가 자리(自利)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가 이타적 자리의 길을 찾게 된다.
더구나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다. 21세기는 세상이 더욱 연기적으로 조직되어 가는 시대, 개인이든 국가든 지구촌 전체의 상호의존성이 크게 더 높아지는 시대이다. 그래서 연기적 세계관을 가진 국민은, 세계화시대에 성공하는 국내외 정책을 더 잘 만들 수 있다. 올바른 세계관에서 올바른 외교도 올바른 내치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적 세계관을 가진 국민과 국가는 세계화시대에 더 발전하는 국민이 될 수 있고 더 성공하는 국가를 만들 수 있다.

4) 위공(爲公) 정치인과 보살정신
오늘의 대한민국 정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정치가가 너무 많고 공덕(公德)을 추구하는 정치가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가적 국민적 과제를 보다 잘 풀어나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가들이 천하의 일들을 보고 다룰 때, 천하의 마음으로 보고 천하의 마음으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노자(老子)의 이천하 관천하(以天下 觀天下)이다. ‘천하로서 천하를 보라 천하의 마음으로 천하의 문제를 풀어라’이다. 그러면 천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백성의 마음이다. 백성의 마음 즉 백성의 소망, 기대 아픔 고통 그리고 백성의 이해관계에서−자기의 이해관계에서가 아니라− 나라의 일들 풀어나가라는 말이다.
또한 《예기(禮記)》를 보면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말이 나온다. 천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천하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를 하면서 천하위사(天下爲私)하는, 즉 정치를 자기이익을 위해서 하는 정치가가 너무 많으면 그 나라 정치는 시대적 국가적 국민적 과제를 푸는 데 실패한다. 
우리 사회를 볼 때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추구 동기가 개인적 욕심(권력욕)이나 사적 혹은 집단적 한(恨)에서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정치가 발전하려면 백성과 나라를 위하겠다는 강력한 원(願)에 기초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한 과제의 하나이다. 어떻게 하면 사리(私利)가 아니라 대의(大義) 내지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정치지도자가 더 많이 나오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위사(爲私)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위공(爲公)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불교가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원력보살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하셨는데, 부처님이 가르치신 원력보살의 모습 그 자체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위공의 정치지도자상이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한다. 중생의 문제가 곧 보살의 문제이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큰 원력을 세우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철저한 ‘이천하 관천하’의 마음이고 철저한 천하위공의 자세이다. 따라서 불교의 원력보살의 가르침이 넓게 퍼지면 퍼질수록 우리 사회에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5. 통일 시대와 불교의 역할

한반도에 통일의 기회가 가까이 오고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점차 북한은 중국화(中國化)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동북아에서는 갈등과 대립의 신냉전(new cold war)이 본격화되어, 한반도는 영구분단의 계곡으로 추락할 위험이 크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꿈인 선진화도 통일도 모두 실패하게 된다. 
통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과 북한의 동포들이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둘로 남아 따로따로 살겠다는 마음이 있는 한 통일은 어렵다. 우리가 하나가 되겠다는 마음만 확실하고 단호하면 이웃 4강들도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 내부이다. 한마디로 ’마음의 통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통일’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마음이 하나가 되는가? 마음이 하나가 되려면 우선 마음이 가는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남한 동포는 우리나라가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데 북한 동포는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믿으면 마음의 통일이 어렵다. 또한 남이든 북이든 한쪽 동포가 서로 따로따로 사는 것이 보다 좋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통일은 안 된다. 따라서 마음의 통일이 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통일 한반도를 독재국가로 만들 것인가, 민주국가를 만들 것인가? 시장경제를 지향할 것인가, 배급경제를 지향할 것인가? 국제사회와 교류하면서 사는 열린 사회를 만들 것인가, 외부와 문을 닫고 폐쇄적인 고립사회를 만들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남과 북의 동포 사이에 큰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역사와 전통과 언어와 문화를 같이하는, 같은 민족이고 동포이니 우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수천 년간 하나로 살던 민족이 분단된 것은 최근 수십 년의 일이다.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천지의 이치고 민족역사의 대의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비록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 우리 후손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자유롭게 왕래하면 살 수 있게 하겠다는 열렬한 서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우리 불교는 특히 두 번째의 마음의 일치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우리 민족 역사와 흥망과 성쇠를 함께해 온 종교이다. 그만큼 민족적이고 그만큼 통일지향적일 수 있다. 문제는 불교지도자들이 통일의 문제를 얼마나 절실한 과제로 느끼는가이다. 불교지도자들이 가지는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명의식의 중요하다.
과거 3국 시대가 있었고 이 3국을 신라가 통일했다. 당시 고구려가 무력 면에서는 신라보다 훨씬 앞섰었다. 경제 면에서는 백제가 신라보다 잘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군사력도 경제력도 약한 신라가 3국을 통일하였을까? 그 답은 신라만이 지도자와 백성이 하나가 되고, 승과 속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염원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화랑도, 황룡사 9층탑, 3한일통, 신라 세계중심사상 등등이 당시의 노력들이다. 이렇게 승속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기원하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3국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불교가 21세기 한반도의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우리나라 통일 과정에서 남과 북의 마음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면, 우리 사회에는 1945년 이후 남과 북의 분단, 1950년의 6·25 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분단과 대립의 심화 등으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받은 많은 사람이 있다. 통일 과정에서 이들의 아픔과 한(恨)을 대대적으로 해원(解寃)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 차원의 참회와 해원이 있어야 진정한 마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불교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본다. 다른 종교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절대적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이원론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를 주장하는 통합적 원융적 시각이 강하기 때문에 민족참회와 해원 사업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기대이다. 우리 불교가 지금부터 이 일을 적극 준비해야 한다.


6. 나가는 말: 공동체자유주의를 향하여

 앞으로 이 나라에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합리적 좌와 합리적 우−가 함께 추구할 큰 가치 내지 큰 이념은 무엇일까? 그 큰 가치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정책수단에서는 진보와 보수 간−좌와 우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공동의 큰 가치 이념 철학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남과 북이 마음의 통일을 이룩하려면 적어도 어떠한 통일한반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떠한 이념과 가치와 목표와 비전을 가진 통일한반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등에 대하여는 남과 북 사이에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요약하면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를 묶을 수 있는 이념과 가치, 남과 북 동포의 마음을 묶을 수 있는 철학과 사상은 무엇일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이 바로 공동체자유주의(Communitarian Liberal-ism)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자유주의라는 가치 이념 철학으로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를 묶고, 남과 북 동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공동체자유주의란 어떠한 이념 가치 철학인가?
공동체자유주의는 ①개인의 존엄, 창의, 자유를 국가나 개인의 발전과 행복의 원동력으로 본다. 그래서 정치제도 경제제도 등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하고 이를 최대한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②그러나 자유의 주체인 개개인이 개인적 자유만 강조하여 이기주의로 폭주하여 공동체의 약화나 피폐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시민적 자각과 시민적 덕성(공중도덕 등)의 함양을 통해,공동체의 가치, 연대, 책임을 자발적으로 소중히 하는 성숙한 자유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 ③여기서 자유의 주체인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할 공동체로서는 사회공동체, 역사공동체, 자연공동체 3가지가 있다. 사회공동체의 가치로는 가정 이웃 학교 직장 국가 등을 소중히 할 것을, 그리고 역사공동체의 가치로는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소중히 할 것을, 그리고 자연공동체의 가치로는 생명의 생태계와 그 순환을 소중히 할 것 등이 요구된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공동체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는 소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집단주의(collec-tivism)나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는 질적으로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는 집단이나 전체의 가치와 목표가 개인의 가치와 목표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체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강제적 폭력적 수단을 수시로 사용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강제하기보다는, 개개인 스스로의 도덕적 자각과 사회적 상호설득을 통해 개개인 스스로가 공동체적 가치 연대 책임을 존중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 목표의 실현수단이 기본적으로 설득과 교육이고, 개인의 자발적 성찰과 자각에 의존한다.
나는 이 공동체자유주의가 우리 국민을 통합하고 우리 민족을 통일할 수 있고, 동시에 우리 통일한반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이념이고 가치고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자유주의는 바로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연기적(緣起的) 자유주의’가 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이 바로 이 공동체자유주의 내지 연기적 자유주의라고 이해한다. 이 ‘공동체자유주의’는 단순한 추상적 이념 가치 원리가 아니라, 여기에서 우리나라가 지향하여야 할 국제관계 정치체제 경제질서 사회문화의 구체적 모습−제도와 정책의 모습−이 다 나올 수 있다.
앞으로 공동체자유주의 내지는 연기적 자유주의는 우리나라 국민통합의 원리, 민족통일의 원리, 국가발전의 원리가 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꿈인 선진화와 통일 즉 선진통일이 달성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통일한반도는 21세기 동북아에서 세계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668)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 약 1,200~300년간 중국의 변방속국으로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자존과 자긍과 자주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것이다. 더 이상 변방 속국이나 식민지가 아니라 동북아에서 중국, 통일한반도, 일본이 나란히 3극을 이루며, 상호존중과 호혜평등의 ‘신동북아시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꿈꾸는 21세기 통일한반도의 꿈이다. ■ 

 

박세일 /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법학과, 도쿄대학교 대학원, 코넬대학교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를 거쳐 제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등을 역임했다. 2011년 12월에는 선진통일당을, 2012년 2월 13일에는 국민생각을 창당해 대표직을 맡았다. 주요 저서로 《창조적세계화론》 《공동체자유주의》 《대한민국선진화전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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