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권력을 향한 치열했던 대선이 끝난 후, 유난히 ‘여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유명한 미래학자이자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21세기를 ‘여성의 세기’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예지력이 한국에서도 통한 것일까? 지난 18대 대선에서 총 7명의 후보 가운데 여성 후보가 4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여당은 84%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미혼의 여성후보를 선출했고, 그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세계 정치사에서 여성 대통령은 생소한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은 남편 사망 후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고, 필리핀의 아키노 여사 역시 남편의 암살로 미망인이 된 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역시 남편의 암살 후 정치에 입문한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이며,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은 초대 총리의 딸이었다. 성평등 수준이 높지 않은 국가에서 여성이 정치지도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 딸이라는 출신 배경, 가족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성평등 수준은 어떠한가? 2012년, 세계경제포럼(WEF)에 의하면 한국은 성평등 순위가 135개국 가운데 108위, 정치력지수 86위인 하위권이다. 아랍에미리트(107위)보다 성평등 수준이 낮았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9대(2012년) 15.7%(총 47명, 지역구 19명, 비례대표 28명)에 불과하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나마 당선자의 과반수 이상이 비례대표인 한국에서 ‘정치’ 영역은 여전히 여성이 진입하기 어려운 남성 영역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진입이 힘든 한국에서, 성평등 순위 108위인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이러한 현실을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최장기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여성으로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라면서, 한국 국민이 변화보다는 안정과 ‘엄마 같은’ 리더십을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처녀 여왕(Virgin Queen)이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다”라는 제목하에, 여성 대통령 등장으로 한국의 성평등 지수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해석했다. 프랑스의 AFP 통신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나온 박근혜’라는 기사에서 “여성의 승리라기보다는 강력한 특정 정치세력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외신의 눈에는 ‘독재자, 특정 정치인의 딸’이라는 출신성분이 성차를 초월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임을 보여주었다.
여성 대통령의 등장에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는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sex)였다.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 기간 동안 준비된 ‘여성’ 대통령임을 강조하며 스스로 여성임을 내세웠다. 그녀의 별명이었던 ‘선거의 여왕’도 섹스를 내세운 표현이다. 진보적 여성들은 그녀를 여성의 대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명예남성’으로 호명했다. 국회의원 기간 동안 한 번도 여성 권익을 위한 법안을 제출한 적도 없고, 성평등을 위해 정책을 제시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자는 섹스를 내세워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의 표심에 호소했고, 당내에서는 기존의 ‘여성성’ 대신 적극적, 냉철함, 이성적이라는 소위 ‘남성성’으로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확대했다. 물론 아버지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어머니의 자애로움이라는 정치적 자산도 활용했다. 섹스가 정치 전략의 중요한 매개로 작동하였고, 결과적으로는 남녀 모두의 대표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돌볼 가족이 없고, 재산을 물려줄 자녀가 없으며 국민이 내 유일한 가족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이며, 가족에 헌신하는 어머니처럼 국가를 다스리겠다.”는 그녀의 선거 공약은 섹스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선거 전략이었다. 사실 독신 출신인 그녀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의 비애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직장일이 늦게 끝나 유치원에 맡겨진 아이를 제시간에 데려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워본 적도 없다. 시가 식구들과의 시월드 갈등도, 명절증후군도 경험하지 못했다. 일반 여성들의 역할 모델이나 멘토로서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과반수의 한국 여성들은 여성후보를 선택한 것일까? 여성들에게는 그녀가 여성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후보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한국의 여성들은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때와 장소, 연령을 가리지 않고 성폭력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직장여성들은 승진 시 유리벽과 유리천장을 확인해야 했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고, 집안의 노인과 환자를 돌보는 무임금 돌봄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진보적 여성들에게는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동질감으로 여성후보를 지지한 현상은 성차별적인 한국사회에 대한 여성 집단적 저항의 지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섹스화된 여성 대통령은 위험하다. 양성평등으로 나아가는 오늘날, 포용·헌신·희생에 기반한 소위 ‘여성 특유의’ 리더십이나 ‘엄마 같은 리더십’처럼, 리더십조차 젠더화하는 현실도 경계해야 한다.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일정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여성문제가 우선순위나 관심사가 아닌 여성 대통령의 등장만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 그 결과 여성들이 그녀를 비판하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남성들의 비난 화살을 모든 여성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혹은 같은 여성이라는 공감대로 인해 적절한 비판이나 요구를 꺼릴 수도 있다. 만약 여성 대통령이 실패한다면 노련한 남성 정치지도자들은 실패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며 ‘여성이라서 어쩔 수 없어……’라며 열등하고 부정적인 여성관을 확산할 것이고, 그 역풍으로 인해 공적 영역에 여성의 진입이 축소되거나 여성 혐오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벌써 소통 부재, 밀실 인사, 권위적 등의 부정적인 비판 여론이 등장하고 있다. 일방적 전달과 상호 소통을 구별하지 못하고, 화합과 협력이 불통과 불화로 수렴되는 방식은 모두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철학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그녀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와 소통, 원칙과 신뢰가 통하는 성평등한 국가를 운영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섹스화된 여성 대통령을 보면서, 2017년 이후 여성의 위상이 벌써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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