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계율

1. 계율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계율(戒律)은 기본적으로 승가공동체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개념이다. 계율은 자율적인 마음속의 기준으로서 계(戒)와 승가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외적 규율로서 율(律)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고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과정에서 연계되고 통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재가자들을 포함하는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할 경우 계율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처음으로 성립된 오계는 승가와 재가를 아우르는 계율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계율은 단순히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외적 규율로서 율(律)의 경우 승가공동체와 같은 분명한 외연(外延)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로 승가공동체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임을 확인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 승가공동체 또한 재가공동체와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의 수행과정과 결과를 재가공동체들이 일정 부분 공유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한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사부대중공동체라는 개념은 성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경우 초기불교의 계율과 함께 보살계로 상징되는 대승계율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 사이의 관계가 조금 모호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사부대중공동체뿐만 아니라 일반대중과의 관계 설정도 중요한 과제이고, 이 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계율과 함께 계율이 본래 지향하는 계율정신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 계율정신은 세속의 윤리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접점이 된다. 계율의 확산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 논의에서는 그 점에 착안하여 주로 계율정신의 윤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렇게 논의의 방향을 잡아갈 경우 먼저 정리되어야 할 몇 가지 난점이 부각된다. 우선 계율은 불교라는 특정 종교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행위 규범이자 실천 기준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우선 불교계 안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한계성을 지닌다. 물론 계율이 ‘바람직한 행동’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는 보편성 영역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경계를 넘어설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는 점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단 계율은 사부대중공동체라는 불교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 조건을 확인하는 일은 그 경계를 확인함으로써 확장 가능성을 이론적 차원과 실천적 차원 모두에서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 요건이다.
그렇게 본다면 계율은 불교도로서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어떤 기준이라고 일단 정의해볼 수 있다. 이 어떤 ‘기준’은 불교도 개인의 내면에서 살아 작동할 수도 있고, 공동체 차원의 외적 규범으로 존재하면서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즉 계율은 우선적으로 승가와 재가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하는 외적 규범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구성원 개인의 내면세계에서 작동하는 준거이다. 이 두 형태의 계율은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공동체의 건전성을 유지하기도 하고 구성원의 삶의 방향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차원의 계율관이 우리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계율은 몇 가지 시선이 엉킨 복잡한 인식 대상으로 다가온다. 우선 그것은 주로 승가공동체에 제한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보살계와 같은 계율 일부가 재가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이라는 당위적 명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 구체적인 준수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주로 승가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한 측면이 있다. 두 번째는 선불교적 전통과 연계되는 것으로 승가공동체 안에서조차 계율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삼학(三學)의 기반을 이룬다는 사실을 경시하는 경향이다. 계율을 넘어서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경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우리 승가 전반의 범계(犯戒) 문제와도 긴밀한 연계성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계율을 바라보는 우리 현실의 시각은 계율과 불교윤리 사이의 관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계율은 그 자체로 윤리로서 특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율이 곧 불교윤리는 아니다. 불교윤리는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모색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와 실천 지침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윤리는 계율보다도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와의 접점 모색에서도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불교윤리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한편으로 계율의 문제도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불교계는 물론 모든 시민에게 의미 있는 지침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해석이나 재해석이 요청된다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불교공동체를 전제로 해서 성립된 계율이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불교의 기본 지향점과 만나면서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윤리로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이 이 논의의 목표이다.


2. 한국사회의 윤리적 좌표 상실과 불교윤리의 위상

1) 현대 한국사회의 쟁점으로서의 윤리 문제
‘현대 한국사회’는 그 내포와 외연이 불분명한 개념이지만, 대체로는 광복과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전제로 하는 시민사회 형성이 가능해진 20세기 중반 이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국사회를 일컫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이념을 기본 축으로 삼아 분단사회라는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하면서 이루어낸 경제성과와 민주화는 세계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이루어낸 성공적인 모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과정에서 전통에 근거한 연대의식을 상실했고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로는 모든 삶의 영역을 경쟁의 원리에 기반해 이끌어가야 하는 극심한 경쟁사회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된 물음과 대답을 모두 상실하는 결과를 떠안아야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교통사고율, 이혼율 등이 그것을 상징하는 수치들로 노출되어 있고, 그것은 단순한 수치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주변과 우리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한동안 관심사에서 밀려나 있던 가치나 윤리 같은 개념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적 전제 속에서 가치나 윤리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 개인의 선택 문제이다. 그런 전제 속에서 전통적 가치로서 관계의 윤리 문제는 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강한 비판 속에서 거부당하기도 했다. 특히 국민윤리로 상징되는 국가적 수준의 윤리 장려 정책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의 이념적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더 강한 반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세력의 집권 이후 그런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함께 가치나 윤리 문제가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우리 삶의 절박한 과제일 수 있다는 인식 또한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경쟁으로 인한 만성피로를 동반자로 삼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치 제는 먼저 쾌락과 쉼의 문제로 부각되곤 한다.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쉬고 싶다는 열망에 대하여 먼저 갖게 된 서구인들이 찾은 대안은 장기 휴가이다. 여름 한 철을 온전히 비워두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삶의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한 해를 견디는 그들의 모습을 부러워만 하던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그런 삶을 이상적으로 삶으로 그리면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온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는 지점이 있다는 것에서 생긴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이 인용문은 독일 사회에서 활동하는 한 한국인 학자의 현실 진단이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거의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만큼 닮아가고 있다. 현재 한국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망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 많은 자살자들이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관계망은 거의 훼손되어 버렸고, 일반인들의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점점 더 급속히 강화되는 추세라는 점이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현대 한국인들은 오히려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보다 더 메마른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사회로의 편입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들은 일본에서도 우리와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 유출 사고를 겪은 일본인들은 자신의 정부를 비롯한 세계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더 궁극적인 차원에서 삶의 의미 문제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과 돈을 추구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허황된 신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인데, 이제 이 상황 판단은 더 이상 일본이나 서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도 윤리 문제는 자살이나 학교 폭력, 가상공간에서의 무차별적 신상 폭로와 공격 등으로 구체화되면서 핵심적인 문제로 이미 오래전에 떠올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소비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이 통용되면서 여러 매체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그 신념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거나 그런 개인을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경우도 많다. 유명인들의 자살이나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자살에도 면역이 생겨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고, 그런 문제는 그들 개인의 문제일 뿐 내 문제는 아니라는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의도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리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삶의 의미 문제이다.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으면서 그 의미의 성격과 방향을 묻고 그 방향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윤리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규범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지만, 방향과 배치되는 경우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용기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비로소 윤리의 영역이 열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리는 그런 점에서 일상적 도덕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은 삶의 의미 문제와 결합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작동할 수 있다. 이 명제를 수용하고 나면 우리 사회의 윤리 문제는 더 이상 주변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삶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문제가 된다.

2) 불교윤리의 가능성과 현재적 위상
그렇다면 이런 한국사회의 윤리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불교윤리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먼저 불교윤리가 무엇인가 하는 개념 정의를 요구한다. 우리는 불교윤리가 계율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내포와 외연을 지닐 수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불교윤리는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의 기본 정신에 근거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와 실천 지침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윤리는 율장은 물론 다른 경전에서도 그 지침을 이끌어낼 수 있고, 단순한 계율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명윤리의 영역 같은 보다 구체적인 윤리적 논쟁의 장에서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상황적 추론을 통해 실천 지침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윤리적 논의가 확산되는 과정은 주로 의료윤리나 생명윤리, 정보윤리 같은 응용윤리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가 차원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좀 더 구체화된 응용윤리 논의는 공리주의와 법칙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윤리학의 기본 원리들을 응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의 도덕 정서에 맞는 주체적인 논의가 요구된다는 합의에 도달하기도 했다. 또 그리스도교와 불교로 대표되는 각 종교의 관점에서 실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청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에 비해 시기나 내용의 심도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불교의 경우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해오고 있다.
불교윤리를 불교의 기본 정신에 근거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윤리적 논의와 실천 지침으로 정의하고 나면, 우리는 불교의 기본 정신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논의로 다시 이끌려 들어간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지만, 삶의 연기성에 대한 통찰과 그것에 근거한 자비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라는 초기경전의 붓다의 지속적인 언급이나,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악행을 그친다.”는 대승불교의 윤리관이 모두 불교의 기본 정신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삶의 연기성에 대한 통찰은 수행의 모든 과정에서 목표이자 과정 그 자체로 삼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이자 결과가 곧 자비행(慈悲行)이다. 불교윤리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이러한 연기성 자각과 자비행은 그 자체로 윤리적 보편성을 지닌다. 삶의 연기성은 최소한의 분석과 관찰만으로도 검증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이고, 그것의 자각 또는 인식에 근거한 자비행은 윤리학의 황금율, 즉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윤리 규범으로서 보편성을 지닌다. 따라서 불교윤리의 윤리 또는 윤리학으로서 가능성은 이미 확인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불교윤리는 종교로서 불교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야 마땅한 권유의 도덕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닌 불교윤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 불교윤리는 대체로 종교로서 불교를 전제로 해서 성립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설문 문항에 대해서 가톨릭(27.1%), 불교(23.8%), 개신교(11.2%)로 대답한 2012년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의 설문 결과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불교는 가톨릭과 함께 한국의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불교윤리의 차원에서 주목해볼 만한 또 다른 경향을 한국의 종교로서 불교가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이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믿음을 얻기 위해 중점을 두어야 할 덕목’으로 도덕성과 청렴성, 공정성, 언행일치, 희생정신, 사회정의 실현, 관용성 등의 7개 덕목이 꼽혔다. 그중에서도 도덕성과 공정성, 언행일치는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종교라고 답변하지도 않은 기타 응답자들이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불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덕성과 공정성, 언행일치라는 덕목이 종교가 신뢰를 받는 데 필요한 덕목들이라는 답변 속에서 충분히 추적해볼 수 있는 사실이다.
불교윤리가 불교인들과 불교계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계와 불교인들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다면 그것이 확산될 가능성 또한 높아질 수 없다. 특히 강조되고 있는 ‘언행일치’에 주목해보면, 불교계를 비롯한 종교계가 언행일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특히 2012년에 있었던 승려도박 사건 같은 사태들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불교윤리의 위상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보편화 가능성에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일 뿐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어떻게 하면 그 위상을 보편화 가능성에 맞춰나갈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성격을 지닌다.


3. 계율의 연기적 맥락에 근거한 보편화 가능성 모색

1) 계율의 연기적 맥락에 대한 인식의 과제
불교 계율은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다는 우리의 기본 명제는 불교 수행자 개개인의 마음의 윤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수행자 개인의 마음은 타자와 공동체와의 의존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 계율은 그 출발점과 도착점이 수행자 개인이면서도 동시에 수행자와 연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다른 수행자, 수행 공동체는 물론 보살정신에 근거하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에까지 이어지는 포괄성을 지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교 계율이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해서 성립된다는 명제를 연기성을 전제로 해서 성립된다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계율의 연기성 맥락은 그 연기성을 철저히 자각함으로써 넘어서는 깨침의 지향을 동시에 전제한다는 점에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연기성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연기의 고리를 걸림 없이 넘나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이러한 차원은 화엄철학에서 무애(無碍)의 논리를 통해 잘 증명해 주었고, 보살계 사상을 통해서도 충분히 검증되었다. 그럼 초기불교의 계율에서는 어떠한가?
초기불교 계율을 상징하는 《사분율》을 보자. 《사분율》은 고타마 붓다가 자신의 제자들과 승가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면서 직면하게 된 여러 행위의 규칙들을 그 경중에 따라 제정하는 과정을 잘 담고 있다. 가장 무거운 범계 행위에 대해서는 승단에서 추방하는 바라이를 명하고, 그 다음 단계는 승단에 남는 것을 전제로 하여 참회의 정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범계자 개인과 승단의 청정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만약 비구가 음욕(淫慾)을 참지 못하는 부정한 행위를 했다면 이 비구는 바라이죄를 범한 것으로 우리와 함께 거주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가 결계를 하도록 하셨다.

이 첫 번째 계는 주지하다시피 본래 수제나 비구가 속가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가 전 아내였던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 자식을 얻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계는 후에 젊은 비구들이 주요 구성원들인 승단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범계 행위가 음욕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 적용이 다양화되고 확장되었다. 이때 범계의 대상은 승단 이외의 여성들일 수도 있고, 승단 내부의 다른 비구들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음욕을 참지 못하는 범계 행위를 한 비구는 더 이상 승단에 머물 수 없다는 석가세존의 엄격한 계율관은 그 비구 개인의 수행과정보다는 승가공동체의 유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연히 승가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열반이었다.
비구계와 비구니계에 대한 소개와 제정 경위를 담고 있는 계경(戒經)인 쁘라띠목차, 즉 바라제목차에 주목하는 불교윤리학자 프레비쉬(C.S. Prebish)는 《법구경》에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계율이 승가공동체 유지는 물론 그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수행과정을 인도해 왔다는 주장을 편다.

“인내심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금욕이고 열반은 최고의 목표이다.”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 “어떤 악한 일도 하지 말고 선을 얻고자 하며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켜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을 얻고자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모든 윤리에 공통으로 내재하여 있는 것으로 불교계율의 윤리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선악의 구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특성을 일종의 상황윤리적 특성으로 규정지어볼 수도 있지만, 상황윤리가 자칫 상황의존적인 상대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계율 문제에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은 사실상 해석의 문제일 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초기불교의 계율이 바라제목차의 예에서 살필 수 있는 것처럼 승가공동체의 존속과 유지, 발전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구성원들의 열반이라는 목표와 분리되어 버린다면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계율로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승계율의 경우에는 그런 기본 정신을 현전승가의 범위와 함께 사방승가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사부대중공동체로 확대해 재가자들의 깨침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확산된 것일 뿐이다.
계율의 이러한 특성과 함께 이 지점에서 붓다가 왜 그렇게 승가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관심을 두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왜냐하면 초기계율에서 붓다는 바라이죄라는 승단 추방죄를 설정하면서까지 승단의 유지와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승단으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깨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음에도 승단의 조직을 유지하고자 노력한 붓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출가수행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출현은 계급에 근거한 세습된 성직자 개념에서 탈피하여 차별 없는 수행의 장을 마련한 인류 역사의 아주 특별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단순한 계급철폐나 평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불교 고유의 관점, 즉 수평적이고 연기적인 삶의 형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행의 장으로서 승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붓다라는 스승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계급상의 서열이 없는 평등한 승가공동체는 그 평등성만큼 서로 인간으로서 모든 욕망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분출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생활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열반이라는 목표를 함께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재가자들과의 관계 설정에도 소홀할 수 없었다.
승가공동체의 계율은 그런 점에서 그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 각자의 수행을 연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규율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과의 연기적 관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토대였던 셈이다. 나의 깨침은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극제가 되었고, 대승불교에 오면 보다 적극적으로 깨침을 얻은 사람이 중생구제에 나서야 한다는 보살계 정신으로 정착하게 된 것을 해석해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계율은 초기 승가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소극적인 목적을 넘어서 사부대중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구제를 염원하는 보살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 기본 전제는 동체(同體)이고 그것의 구체화로 드러나는 윤리는 자비이다. 이 과정을 통해 계율은 연기성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맥락을 확보함으로써 보편윤리로서의 가능성을 확대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계율은 이러한 보편윤리의 특성을 어느 정도 발휘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내부에서부터 계율 자체가 재가공동체는 물론 승가공동체에서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불교는 그 윤리적 측면보다 정신적 휴식이나 쉼의 시공간으로서의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불교윤리의 핵심이 자비임에 틀림없지만, 일반 한국인들이 그 자비의 연기적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계율의 보편화라는 과제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공유할 필요성과 만나게 된다.

2) 우리 사회에서 계율의 보편화라는 과제
계율이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것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연기성(緣起性)을 근간으로 삼아 두 공동체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음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계율은 불교가 우리 역사 속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권력까지 확보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의 윤리를 내면화시키는 데까지 확산되었다. 조선의 성리학 이념 채택으로 인한 척불(斥佛)의 고난을 견디면서도 일반 백성의 가치관 속에 내면화된 자비의 윤리는 쉽게 제거되지 않았다.
문제는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서구적 가치관의 세례를 자비의 윤리를 비롯한 전통윤리가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가고 있는 데서 생겨났다. ‘철저하게 개별화되고 고립된 이기적인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인간상이 우리 모두의 것으로 알게 모르게 채택되면서 연기성과 관계성을 근간으로 삼아온 전통윤리적 가치관의 자리는 점점 더 협소해지는 과정을 함께 경험해왔다. 물론 그런 과정을 견디는 대가로 주어진 물질적 풍요와 민주화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할 수는 없지만, 21세기를 맞은 현시점에서 다른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특히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길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윤리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도덕적 위기가 현재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융성했다고 믿어져 왔던 고려 중기를 살아낸 지눌의 현실 진단을 들여다보면 그때가 과연 지금에 비해 더 나은 사회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돌아보면, 부처님의 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꾸미고 이익을 취하는 데 골몰하고 있으며, 풍진의 세상에 빠져들어 도는 닦지 않고 먹고 입는 것만 허비하고 있으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지만 무슨 덕이 되겠는가? 아! 삼계를 벗어나려 하지만 풍진을 끊는 실천행이 없으니, 헛되이 남자의 몸이 되었을 뿐 장부의 뜻은 없다. 위로는 도를 넓히는 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빚졌으니 진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 지눌은 이런 일로 탄식한 지 오래다.

물론 지눌의 시대는 현재 우리의 시대와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복잡성의 측면에서 훨씬 적고 단순한 사회였고, 그의 사회 진단과 탄식이 보다 엄격한 판단 준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수행자들의 태도나 계율 준수 측면에서 보면 근본에서는 현재와 다를 바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다른 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토대를 둔 지눌의 다음과 같은 대응책에서 드러난다.

임인년(1182) 정월 어느 날 수도 개경에 있는 보제사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를 하고 나서 동학 10여 명과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 “법회를 마친 후에는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은둔하여 함께 결사를 맺자. 항상 선정(禪定)을 익히고 지혜를 닦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예불하고 경을 읽으며 각자 소임을 정해 노동하고 울력을 하자. 인연에 따라 성품을 길러 평생을 넉넉하게 지내면서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고결한 실천행을 따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계율의 보편화와 확산은 바로 이러한 지눌의 결단과 실천행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계율은 승가공동체에서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범계는 지눌의 진단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한 계율 조목 자체를 어기는 것을 넘어서서 출가자의 본분을 상실한 바로 그 사실 자체이다. 그렇게 보면 문제 해결의 출발점도 승가공동체가 먼저 수행자로서 기본을 지키는 것이지만, 수행자들과 연기적 관계 속에 있으면서 그들의 뒷받침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정신도 유지해야 하는 재가공동체의 책임 또한 선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사부대중공동체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 계율의 현대화 또한 시급하지만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사분율》 중심의 초기불교 계율과 보살계 중심의 대승계율을 모두 수지하는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의 계율은 지나치게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계율정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할 정도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계율정신은 안옥선이 잘 정리한 것처럼 우리의 타고난 본성 속에 담겨 있는 욕심과 어리석음, 분노를 그치게 하는 자비의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계율전통을 면밀히 검토하여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계율과 승가공동체만을 위해 더 필요한 계율을 최소한으로 재구성한 다음에, 본래의 계율정신을 제대로 확립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계율의 보편성에 기반한 확산을 꾀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기본 전제이다.
이런 의미의 계율에 근거한 우리 시대의 불교윤리를 구축하는 일은 물론 또 하나의 과제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통용되는 청정한 지계정신을 배제한 불교윤리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할 뿐 실천적으로는 무의미한 정도를 넘어서 불교와 불교계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고 일정 부분 이런 현상과 이미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2012년 승려도박 사건’과 그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이 계율에 대한 조소와 함께 불교 자체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3) 불교윤리 논의와 실천행의 확산 방안
우리는 이 논의 안에서 불교윤리는 계율을 포함하여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와 실천지침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 속에서는 소소한 계율은 폐기해도 좋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커진다. 왜냐하면 계율 조목 하나하나에 주목하기보다는 계율 정신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열반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는 과정 자체가 모든 계율 조목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그 목표를 상실하는 것보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방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이미 선불교 전통의 막행막식 관행에서 충분히 드러난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위험성을 최소화하면서 계율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게 확산시킬 방안은 무엇일까? 논자는 그 방안의 출발점으로 계율의 보편화로서 불교윤리의 정착을 제안하고자 한다. 불교윤리는 불교를 전제로 하는 윤리라는 점에서 특수성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윤리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 가능하다.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측면은 이미 현대의 여러 윤리학자들 논의를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플래나간(O. Flanagan)은 불교윤리를 철학적 형이상학이 배제된 자연주의 윤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그는 현대 인식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자연주의를 전제로 할 경우에도 삶의 의미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철학적 과제임을 전제하면서, 그런 관점에서 보아도 붓다의 가르침은 충분한 답변을 줄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불교를 그는 ‘자연화된 불교(Buddhism naturalized)’라고 부르고자 한다.
불교를 철학적 형이상학이 배제된 철학이자 윤리로 해석하고자 하는 플래나간의 시도는 우선 ‘철학적 형이상학’에서 전제하고 있는 철학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철학적 형이상학을 이데아나 절대자를 전제로 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으로 이해할 경우 불교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지만, 철학을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할 경우 불교 또한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절대자에 대해서도 유일신의 맥락과는 다르지만, 이미 타력 신앙화된 불교전통 안에서는 상당 부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논의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불교가 굳이 그런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도 삶의 의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과학적 사유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본 전제 조건을 이룬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더릿츠(M. Siderits)는 무아론을 현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불교윤리 논의를 확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불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간주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무아론을 환원주의와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면서 불교윤리는 결국 열반을 목표로 삼아 현재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당위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굳이 윤회와 같은 종교적 기제를 동원하지 않아도 인간이 누구나 열반을 삶의 목표로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시더릿츠의 시도는 불교가 걸쳐 있는 종교와 철학이라는 외연(外延)을 불필요하게 축소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위험성에 유의하기만 한다면 불교윤리 자체의 보편성을 보다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불교윤리의 보편성은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종교로서 불교가 요구하는 신념(信念, belief)을 괄호 칠 수 있는 포용성이 그 확산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들을 참고로 하면서 이끌어낼 수 있는 불교윤리 논의와 실천의 확산 방안을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 시대의 삶의 의미 문제와 관련지으면서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제시하는 방안이다. 삶의 의미 상실 문제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전 인류가 직면한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심각한 문제다. 서구의 경우 오랜 시간 유지해왔던 이데아나 절대자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비서구의 경우도 자신의 전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행복 추구의 궤도에 무분별하게 합류함으로써 이중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시대에 철학마저 분과학문으로 위축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삶의 의미에 관한 가르침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 모두가 내몰려 있다. 불교는 우리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연주의를 포용하면서 삶의 의미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물음을 스스로에 던지게 할 수 있는 윤리적 힘을 지니고 있고, 그 구체화 방안은 무아론이나 연기(緣起), 공(空)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생활세계의 개념으로 재해석하여 내놓는 길이다.
두 번째는 계율을 계율정신에 맞게 재구성하여 사부대중공동체 구성원은 물론 모든 대중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안이다. 《사분율》과 《범망경》 보살계로 상징되는 율장의 방대한 계율 체계는 그 자체로 역사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 유효성 속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해냈지만, 그 안에는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과제와 상황이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조목보다는 우리의 삶과 수행 환경에 맞춰 살려낼 수 있는 계율정신, 즉 열반을 목표점으로 삼아 일상 또는 수행과정에서 스스로의 지향을 지켜내고자 하는 삼감의 마음가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러한 계율정신은 수행자 개인의 내면세계에서 출발하여 사부대중공동체와 일반대중공동체로 확산될 수도 있고, 역으로 일반대중공동체 구성원들 삶의 의미 문제에서 출발하여 수행자의 내면세계로 확산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런 방향으로 불교윤리 논의가 확대된다면 그것은 동시에 실천행을 담보하는 진정한 윤리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계율이 참선이나 경전공부와 같은 삼학의 울타리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세 축은 서로 뗄 수 없는 것들이고, 그중 어느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다른 축들 또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남방불교가 초기불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유지해내고 있는 데는 삶과 수행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버마의 아웅산 수치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명상을 하는 것으로 오랜 감금의 고통을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억압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정신적 무기로 삼고 있다. 청정한 삶은 기본적인 계율 준수에서 시작해서 화두선이나 위빠사나 수행 같은 참선, 그리고 지속적인 경전 공부의 병행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확보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는 계율의 정립과 사회적 확산을 위해서도 반드시 요청된다.


4. 글을 맺으며

우리 사회에서 모든 윤리 논의는 이중적 왜곡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 하나의 맥락은 일종의 도덕적 엄숙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주의의 광포한 확대 속에서 극단화된 무도덕주의이다. 바람직한 윤리 논의는 이 왜곡의 두 고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만 실천의 차원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보장된다.
계율을 중심에 두는 불교윤리 논의 또한 이러한 왜곡의 가능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방대한 율장에 묘사된 계율의 조목 하나도 고칠 수 없다고 강변하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계율의 준수 행위 자체가 수행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수행자 또한 적지 않다. 재가공동체 구성원들도 최소한의 계율인 오계조차 제대로 수계하지 않거나 수계했다고 해도 의식(儀式)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지속시킬 수 없을 만큼 한국불교와 불교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만약 이 위기 상황 속에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그 형체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절박한 문제의식은 한국사회 전반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물질적 풍요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충분히 확인하면서도 다른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인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이혼과 자살률이라는 상징적 지표를 통해 절망의 저점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이자 철학으로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어서 현대를 지배하는 자연주의적 인식론조차 수용이 가능한 패러다임으로 평가받고 있는 불교가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계율 문제부터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계율은 열반에 이르는 수행과정인 삼학(三學)의 핵심기반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계율을 현재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고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삶의 의미 문제와 관련시켜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불교윤리를 정착시킴으로써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와 직면해 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세상이 종교계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는 출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 사이의 연기성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수용을 전제로 하여 서로에게 불교윤리를 권유하고 실천하는 보살의 역할을 자임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계율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자연스럽게 보다 실천적인 방향으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고 계율 준수와 수행과정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상식을 생활세계로 들여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과 도덕교육1, 2》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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