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계율

1. 들어가는 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명상 주제를 항상 잊지 않으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갈등도 비판도 없이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나아간다. 그러나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성스러운 진리와 수행 이외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매 순간 서로의 차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현재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의 상가 공동체[sangha]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율장에는 꼬삼비 비구들이 사소한 계율상의 ‘해석 문제’로 율장의 대가인 스승과 제자들, 경장의 대가인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범계(犯戒)의 성립을 가지고 쟁론하며 반목하기에 이른 사건이 나온다. 결국엔 부처님께서 꼬삼비의 상가 공동체를 버리고 떠났는데 이를 통해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꼬삼비의 신도들이 부처님을 떠나게 한 양쪽 상가에 모두 등을 돌리고 공양을 거부했던 과거 이야기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부처님이란 위대한 스승의 힘에 의해 분열한 두 상가공동체가 다시 서로 화합하여 하나의 화합상가로 돌아왔지만, 지금은 그러한 힘을 발휘할 큰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 분열된 상가들은 분열된 그 상태를 유지하며 각자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 결과 서로 다른 계율을 갖게 되며 우뽀사타(포살)를 함께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승가로 고착되어 버렸다. 또한 이들 각 승가의 성향에 동조하는 재가자들 또한 그렇게 분열되며 자신이 따르는 승가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다른 승가 행태를 비판하고 무시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글을 통해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불교 간에 계율 해석의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공존하게 될 두 불교전통의 만남에서 생기게 될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미리 예방하며 서로의 전통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임을 밝힌다. 그래서 근본 스승인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라는 변할 수 없는 공통점을 바라보며, 서로가 탐진치 번뇌를 줄여나가는 방안을 찾아 하나씩 실천하며 팔정도의 바른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면 한다.

2. 포살(布薩)을 함께할 수 없는 두 불교전통

현재 한국의 불교 상황에서 분명한 사실은 한국불교 종단의 비구와 테라와다불교의 비구가 우뽀사타(포살)에 빠띠목카(비구 계목)를 함께 암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런데 조계종에서 1973년에 현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뿐냐산또 도성 스님을 비롯한 약 20여 명의 비구가 태국의 계를 수지한 일을 두고, 조계종도 테라와다의 계맥이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위나야(계율)로 해석해 보면 그 계맥은 유지되지 못하고 끊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도성 스님을 제외한 다른 스님들이 황색 가사를 벗고 회색 옷으로 갈아입은 이유로 ‘수치스럽다’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테라와다의 계를 포기한 행위로 간주된다. 따라서 위의 비구들은 더 이상 테라와다의 비구가 아니며 단지 단기 출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설사 그 비구들에 대해서 테라와다 계맥을 인정하여 이후 새로운 조계종의 비구에게 계맥이 이어졌다고 보기 위해서는, 테라와다 계를 수지한 5명 이상의 비구 상가가 모여 적절한 방법으로 시마(계단)를 정하고 수계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조계종 비구 수계식 때 정족수도 성립되지 않았고, 수계식에 참여하기 전에 서로 참회하여 범계가 없는 청정함을 선언한 비구 상가로 구성되지도 않았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가사를 벗고 다른 옷을 입는 행위는 툴랏짜야라는 참회와 함께 잘못에 대한 시정 약속을 해야 치유되는 범계를 저지른 것인데 이에 대한 허물이 치유되지 않고 진행한 수계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승가 구성의 성립요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진행된 수계는 어떠한 테라와다 계맥에 따른 효력도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테라와다불교에서 비구니 계맥이 끊어진 원인이기도 하다.

다른 경우로 최근에 한국 불교 종단의 비구들이 다수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비구계를 받아오고 있는데, 이 경우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 비구들이 기존 한국 종단의 비구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는 띳티야 빡깐따까(Titthiya pakkantaka), 즉 환계(還戒)하지 않고 다른 종교 전통으로 간 사람으로서 빠띠목카(비구 계목) 암송 때 참석시켜서는 안 되는 21종류의 사람 중 하나에 해당한다. 즉 테라와다 수계를 받은 비구가 비구계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지 않은 채, 가사를 벗고 다른 종교 전통의 사원에 가서 다른 종교 전통에 따른 옷으로 갈아입은 경우 등이다. 이 행위는 무거운 범계인 툴랏짜야에 해당하는 동시에 띳티야 빡깐따까에 해당한다.

따라서 위 비구가 테라와다 승가의 빠띠목카(비구 계목) 암송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다시 가사로 갈아입고 참회와 함께 앞으로 범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런 참회와 약속을 하지 않은 비구가 계율이 다른 종교 전통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테라와다 가사를 입고 우뽀사타(포살)에 참석한다면 그곳의 모든 다른 비구들은 참회해야 치유되는 범계인 둑까따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테라와다 계율을 존중하는 한국불교의 비구라면 한국에서 회색 옷을 입고 생활하다가 미얀마 등에 갈 때만 가사를 입고 우뽀사타(포살)에 참석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테라와다 비구계와 대승의 비구계 두 가지 다른 계를 모두 수지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대승불교에서는 두 종류의 계를 모두 인정하며 자격증이 2개인 것처럼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엄격하게 계율 적용을 하게 될 경우, 특히 미얀마 파아욱 사원에서라면 그를 더 이상 테라와다 비구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중에 밝혀질 경우 상가에서 추방해야 하는 11가지 경우 중 하나인 띳티야 빡깐따까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테라와다 비구로 간주하지 않으며 다른 전통의 계와 보살 숭배 등 다른 전통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테라와다 비구계를 적법하게 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이 테라와다 승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계율 해석에 따라 추방해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국 종단의 승적을 갖고 있는 비구들이 테라와다불교 국가에 가서 비구계를 받고자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숙고하고 나서 수계할 것을 권한다.

또 다른 경우로 테라와다 비구가 되어 가사를 입고 생활하는 비구로서 한국 종단의 계를 포기한다는 의사표시를 했을 때이다. 그러나 한국 종단에서 지급하는 돈을 지속적으로 받고 그 돈을 사용하고 재산을 소유한다면, 그 행위는 이득을 포기하고 참회해야 하는 닛삭기야 빠찟띠야에 해당된다. 만약 그 비구가 받은 돈을 모두 포기하고 참회하여 청정해지지 않는다면 매일 범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기에 청정한 비구들은 그 비구를 멀리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비구가 한국 종단의 계를 포기한다는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비구계를 받은 후 귀국해서, 가사를 입고 있을 지라도 한국 종단에 따른 이익을 누린다면, 테라와다 비구 승가에서 추방해야 하는 11가지 빠라지까에 상당한 비구인 띳티야 빡깐따까에 해당한다.

반면 테라와다 비구가 대승불교의 사원에 가서 대승불교의 의식에 참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 비구는 테라와다 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가사 또한 벗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전통의 사원에 가서 그들의 법을 듣고 ‘나는 이 법을 따르고 살기가 어렵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다만 대승불교의 전통과 의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함께 자리를 하고 다시 테라와다 승가로 돌아오는 경우라면 허물이 없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테라와다불교의 계율을 버리고 다른 전통의 법을 따른다면 띳티야 빡깐따까에 해당될 수도 있다. 참고로 계율을 엄격하게 따르는 테라와다 비구는 다른 종단의 비구들에게 합장이나 절 같은 공경의 표시를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떤 비구가 간단히 목례나 합장 인사만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비구를 무시해서가 아닌 부처님의 계율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한국의 대승불교는 이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테라와다불교의 포살 의식

대승불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테라와다 국가 내에서도 계율의 해석 문제로 서로의 교단을 인정하지 않거나 계율이 같음에도 우뽀사타(포살) 날 함께 하지 않는 경우도 물론 있다. 또 현재 미얀마 사원에서도 4명 이상의 승가가 구성되었음에도 우뽀사타날 빠띠목카(비구 계목)를 암송하지 않는 곳도 많으며, 혹은 암송하더라도 전부가 아닌 앞부분만 암송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많은 비구들이 중한 범계인 빠라지까와 상가디세사 이외의 계목은 사소한 계이기에 어겨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매일 습관적으로 참회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후불식의 경우 한국처럼 저녁 식사를 하지는 않지만 우유나 특정 과일 등을 피로 회복을 위한 약의 개념으로 확장 해석하여 섭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원이 생겨났다. 돈에 대해서도 대다수 사찰에서, 특히 빠리야띠(경전 공부) 사찰에서는 책을 계속 구해야 하는 등의 이유로 돈을 보시받아 저축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노상 카페 등에서 차와 음식을 돈을 주고 사 먹고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즐기는 출가자(비구 계목이 많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비구가 되지 않고 사미로서 사는 출가자도 상당수 있다.)의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이렇게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도 이미 계행은 많이 무너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미얀마 파아욱 사원의 경우는 계율정신을 되살리고자 모든 부분에서 가장 엄격한 계율 해석을 적용하며 신행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비록 미얀마에서 계율이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미얀마 비구들은 자신이 계율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떳떳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파아욱 비구들의 엄격한 계율 존중은 확실히 인정하여 파아욱 사원에서 공부했다고 말을 하면 법랍이 낮은 비구일지라도 존중을 해준다. 이는 비구들의 말과 행위가 파아욱 사원에서 익힌 습관대로 다른 사원에 가서도 실제 존중받을 수 있게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품위 있고 공손하게 행동하기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또 어떤 비구들은 작은 계들을 자주 어기기에 매일 참회하는 의식을 통해 청정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런 비구들에게 파아욱 사원에서 공부했다고 말하면 청정한 계율을 지닌 비구에게 아빳띠 데사나(참회)를 하고자 참회 요청을 해오기도 한다. 미얀마의 중부 지방의 한 사원에 머문 적이 있는데, 어떤 미얀마 비구가 일부러 파아욱의 비구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원에 찾아와서 참회 의식을 요청하고 참회한 후 떠나기도 했다.

이처럼 미얀마에서 비록 자신은 계율이 청정하지 않더라도 계율에 대한 존중의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테라와다 승가의 청정함을 유지하는 힘일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 스님들이 한국에 와서 몇몇 계율을 어기게 되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개차법의 개념 등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대신 계율 정신에 대한 존중으로 범계에 대해서 참회하며 언젠가는 청정한 수행자로서 청정해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는 미얀마 내에서도 일반 사원에서 불사를 일으키며 일을 하고 돈을 만지게 된 스님들이, 마음 한구석에는 때가 되면 언젠가는 빠띠빠띠(수행)를 실천하며 청정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계율에 청정한 비구들을 멀리하며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하게 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4. 한국불교와는 다른 개차법(開遮法)의 해석

한국에서 5계를 가르칠 때 개차법(開遮法)이라며 큰 계를 지키기 위해 작은 계는 필요에 따라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또 자신이 싫어하는 곤충을 죽이면서 위생이 더 중요하기에 ‘발보리심’이라고 말하며 죽이려는 경우도 있다. 술 한 잔 정도는 정신이 몽롱하게 되지 않기에 조화로운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괜찮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생각한다고 계가 보호된다고 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 역사적 근거로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은 꼬살라국의 왕이 침략했을 때 부처님의 종족에 대한 자긍심과 업과 과보에 대한 확신(삿다, 信)으로 죽임을 당할지언정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자 저항하지 않았다. 그 결과 모두 포로가 된 후에도 자신이 석가족임을 부정했다면 처형당하지 않았을 텐데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에 몰살되었다.

이 사례를 본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처럼 호국불교라 칭하기도 하고 정의의 실현이라 말하며 스님들이 무기를 들고 생명을 죽이는 것은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 종교를 막론하고 재가자들의 칭송을 받는 임진왜란의 승병장들에 대해서도 테라와다 계율로 해석할 경우 전혀 다른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만약 그 승병장들이 가사를 벗고 환속한 후에 의병을 일으켰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들은 위인이 아니라 상가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불교전통을 훼손한 사람으로 폄하될 것이다. 이러한 테라와다의 견해는 외침이 빈번한 한국의 상황에서 테라와다불교가 널리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개차법과 관련하여, 이는 다양한 문화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될 비구들의 계율 해석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 5계에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5계는 하나가 무너지면 혹은 조금이라도 허물이 생기면 전체가 무너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만약 5계 중 하나라도 어기면 개인적으로 테라와다 스님을 찾아뵙거나 법회에 참석하여 5계 전체를 다시 받으며 더욱 계를 굳건하게 하고자 결심하고 다짐하게 하는 것이 테라와다의 전통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는 개인 공양이나 모든 법회에서 먼저 삼귀의와 오계를 요청하고 주는 의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향으로 살을 태우는 연비와 같은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나의 계목이 훼손되면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재가자의 ‘5계’와, 비구의 의무 규정으로서 각각의 계율 항목마다 부과되는 처벌과 치유 방법이 다른 ‘계율’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개차법의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한 스님이 산 속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사냥꾼에 쫓기면서 달려와 스님의 옆을 지나갔다. 곧이어 사냥꾼이 뒤쫓아 와서 스님께 사슴이 도망간 길을 물어본다. 그때 계는 지혜롭게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며 개차법을 들어 생명을 살리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보다 중요하기에 사냥꾼에게 사실과는 다른 길로 갔다고 거짓말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지혜롭게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개차법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임에도 한국 불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계초심학인문〉의 해설을 보면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는 ‘지(持)−어떠한 행위가 계율을 지키는 것인지, 범(犯)−어떠한 행위가 계율을 범하는 것인지, 개(開)−부처님께서 어떠한 계율을 제정하셨는지, 차(遮)−부처님께서 어떠한 계율을 폐지하셨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전반적인 계율에 정통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오후불식과 관련된 계목을 예로 들어 개차(開遮)에 대한 해석을 하면, 차(遮, 막음)는 부처님께서 빠찟띠야 37, 38 계목을 제정하며 비구는 때가 아니면 음식을 먹지 말 것과 음식을 보관하지 말 것을 계율로 정한 것을 말하며, 개(開, 열어줌)는 닛삭기야 빠찟띠야 23 계목을 통해 비구들이 충분한 음식을 먹지 못해 병에 걸려 여의고 창백해지자 5가지 강장약(꿀, 우유제품 등)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비구들이 장기 보관하게 됨에 따라 쥐가 들끓자 다시 차(遮, 막음)로써 7일이라는 제한된 기간 동안 보관하며 먹을 수 있게 계목의 내용을 추가한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테라와다의 계율 해석과 부합한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허물도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지범개차는 계율의 계목마다 무엇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어떤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며,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무엇이며, 허용되는 경우에도 제한을 부가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아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율장에 적용되는 개차법을 5계에 적용한다면 적용 분야가 잘못되었기에, 위 사례처럼 범계 경중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허물이 생긴다. 물론 도망가는 사슴의 사례에서 비구가 어떠한 자비심도 없이 사슴이 간 길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은 분명 지혜롭지 않은 행위이다. 또한 사슴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분명 선한 행위라는 것은 맞다. 만약 그렇게 비구가 사슴을 구한다면 분명 그에 따른 선업의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은 불선한 행위이며 계를 어긴 것이기에 그에 따른 불선한 결과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그 사냥꾼이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사슴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스님의 거짓말로 허탕친 것에 화가 나 스님을 폭행하거나 혹은 마을로 돌아가 스님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비방하며 다닐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신심 없는 사람들에게 비난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며 그 경우 불교 전법에 장애로 작용하게 되는 허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럼 위의 경우 테라와다 비구라면 어떻게 할까? 삼보에 대한 신심과 5계가 확고한 테라와다 비구라면 절대 작은 계목이라 하여 버리지 않고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그 비구는 사냥꾼이 다가오면, 거짓을 말하지 않고 정좌하고 앉아 ‘침묵’ 속에 자비심을 일으키며 수행을 할 것이다. 그런데 사냥꾼이 너무나 무지하여 이러한 ‘성스러운 침묵’ 속에 수행하고 있는 비구에게 계속 말을 걸며 묻는다면 침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럴 때라도 비구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사슴이 간 방향을 말해주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죽일 때 얼마나 많은 고통과 두려움의 마음이 일어나는지와 그에 따라 수없이 일어날 고통과 두려움의 과보를 말하며,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를 실천하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생명을 죽이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자비심과 함께하는 성스러운 침묵의 힘은 매우 강하다. 재가자들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돈스러울 때는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자비심과 함께 선함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알아차리는 바른 사띠(正念)를 일으키며 성스러운 침묵 속에 가만히 안팎의 흐름을 유지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문득 지혜가 일어나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2,500년 전 고대인도 상황과 문화에 맞게 성립된 계목들을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스스로 율장에 대한 지범개차를 숙지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원인은 한역된 율장의 언어 표현이 실제 빨리어에서 설명된 내용과 다르게 번역된 오역과 중역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얀마의 파아욱 사원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비구 227계를 비롯하여 율장의 주석서들에서 허용하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다 따르며 고스란히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에 따라 재가자들도 비구들이 계를 지킬 수 있도록 비구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특히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는 비구의 227계목을 모두 지키는 것이 일상에서 바른 사띠(正念)를 강화시키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되어 오히려 큰 힘으로 번뇌를 차단하며 수행을 돕는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습관이 안 된 행위일 뿐이기에 단지 처음에만 불편할 뿐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수행의 대상이 되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계율을 따름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계율을 수지한 수행자 자신이다.

물론 실제 부득이하게 계를 어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구의 허물이 되어 수행을 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각 계목의 범계에 따른 치유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그래서 사소한 계를 어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계청정을 유지하여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에 매진할 수 있도록 많은 개차법의 사례들을 상세히 나열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하빠데사라는 4가지 대표준에 대한 교시를 통해 현대의 다양한 경우에도 어떤 걸림 없이 적용할 수 있는 방법 또한 마련해 주셨다.

①비구들이여, 내가 반대하지 않은 것이라도 만약 그것이 허용하지 않는 것과 합치하고 허용한 것에 반한다면, 이것은 너희에게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②내가 반대하지 않은 것이라도 만약 그것이 허용한 것과 합치하고 허용하지 않은 것에 반한다면, 이것은 너희에게 허용한 것이다. ③내가 허용하지 않은 것이라도 만약 그것이 허용하지 않은 것과 합치하고 허용한 것에 반한다면, 이것은 너희에게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④내가 허용하지 않은 것이라도 만약 그것이 허용한 것과 합치하고 허용하지 않은 것에 반한다면 이것은 너희에게 허용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율장이 세상의 것을 모두 다룰 수 없음을 아셨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계율을 제정 및 변경하셨으며, 또한 계율을 고착된 빈틈없는 체계로 만들고자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율장에서 언급하지 않는 많은 사건을 판단하기 위한 지표로서 이 대표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만약 어떤 비구가 율장 전체를 숙지하여 지범개차와 범계의 치유 방법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율장을 수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을 주는지, 또한 2,500년 전보다 더욱 강해진 안팎의 탐진치라는 위험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주어 안식을 주는지, 그래서 부처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느끼며 계목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그렇기에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정말 버릴 계목이 하나도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담마−위나야(법과 계율)로 표현된다. 만약 현대의 비구들이 시대가 달라졌다고 위나야(계율)를 경시하고 오직 담마(법)만 수지하여 간다면, 그것은 닙바나(열반)로 향해 노 저어 가는 사람이 스스로 한쪽 팔을 잘라버리고 한쪽 팔로만 용쓰면서 가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나아갈지 충분히 상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비구들이 빨리 위나야(계율)를 숙지하고 지범개차에 능숙하여 계율에 따라 수행해 나갈 수 있다면, 또한 그러한 비구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 재가자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계율 제정의 10가지 목적 모두를 우리 모두의 소중한 보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5. 율장은 금서이고 갈마는 비공개여야 하는가

테라와다불교에서 율장은 오히려 널리 읽히는 권장도서라는 것은 이미 2005년 《불교평론》 25호의 마성 스님의 글을 통해 충분히 잘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 미얀마의 유명한 율장 관련 저자들은 대부분 재가자들이다. 사실 비구 계율은 비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정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재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재가자들의 요구로 정해진 계목들이 다수이다. 그렇기에 재가자들이 기본 계율들을 잘 숙지해야 비구에게 매일 올리는 공양 보시나 개인 면담을 비롯해 법문과 다른 경조사 등의 진행 과정에서 재가자 스스로 어떠한 허물도 생기지 않도록 미리 범계가 될 일을 예방하며 비구들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구족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계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율장은 재가자는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라고 말한다. 그 근거가 된 것은 ‘재가자가 포함된 회중 앞에서 계목을 암송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참회해야 하는 둑까따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내용과, 비구 계목 중 빠찟띠야 4번의 ‘비구가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과 한 줄씩 담마를 암송하면 참회해야 한다.’는 계목을 오해한 것이다. 계율은 제정 당시의 문화와 관습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래서 계율 공부를 위해서는 반드시 주석서를 통해 배경 이야기와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고 또한 테라와다 상가공동체(승가)에서 살면서 실제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스님들은 율장을 한역으로 중역된 것을 통해 공부했고 또한 실제 적용되는 관습을 경험해 보지 못하다 보니 단순히 문자 자체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 계목과 관련하여 ‘재가자가 포함된 회중 및 암송’이란 조건을 단순히 ‘재가자 앞에서’로 오역하게 된 것이다.

또한 빠찟띠야 4번 계목에 대한 숫따위방가(경분별)의 배경 이야기를 보면, 여섯 비구 무리가 불손하고, 믿음이 없고, 조화롭게 살지 않는 재가자들에게 담마를 한 줄씩 따라 독송시킨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래서 《밀린다왕문경》에서 ‘이 수승한 진리가 악인들의 수중에 들어가 경시되고 천시되고 수모당하고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이와 같이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 독송이 일정한 범위에서 한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를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브라민은 그들의 경전인 베다를 소중하게 여겨서 다른 계급이 독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반면 비구들이 담마(법)를 불손한 사람들에게 독송하게 하는 것은 비구들이 자신의 소중한 전통을 수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 신심 있는 재가자들이 비구들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이 계목은 당시의 보편적인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마성 스님의 글에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상가(Sa-ngha, 僧伽) 고유의 갈마법(喝磨法)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자 포살 때 비구 비구니 이외 다른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그 근거를 추측했는데, 이것 역시 테라와다의 계율 해석과는 다른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계율과 관련된 의식을 진행하는 말인 깜마와짜(갈마)는 빨리어로 말하며, 자자나 포살 등은 청정한 화합승가만이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옳다.

그래서 우뽀사타(포살)에 참석한 비구들이 빠띠목카(비구 계목)를 암송하기 위해서는, 우선 참회를 통해 청정함을 선언하고 서로 핫타빠사(약 125cm) 거리 이내로 인접하여 모여 앉은 청정한 비구 회중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청정하지 못한 사람들과 청정한 비구 회중은 핫타빠사(약 125cm)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함을, 또는 청정함을 선언하지 않은 비구는 깜마와짜(갈마)가 시작되면 시마(계단)의 경계 안에 들어오지 말 것을 뜻하는 것이지 완전히 비공개로 진행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재가자들은 우뽀사타(포살)나 수계식을 하는 날에는, 사방에서 자신의 보시 공덕의 더 큰 이익을 얻고자 다른 때 보다 더욱 청정해진 비구들에게 올릴 공양 보시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사찰을 찾는다. 그리고 깜마와짜(갈마)를 시행하고 있는 시마 법당 주변이나 안에 들어와 한쪽 구석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의식이 모두 끝나고 법랍 순으로 나오는 비구들에게 보시물을 하나하나 공양 올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얀마인들의 보시문화와 함께 계행과 관련하여 참 부러웠던 것이 하나 있다. 안거 기간 동안 주중에 포살일(한 달에 4번)이 있는 날이면 전국의 학교가 휴교를 한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오후불식을 비롯한 8계를 지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불교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이와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또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재가신도라면 스스로의 청정함과 당당함을 위하여 적어도 1주일에 하루는 성스러운 날로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날 하루만큼은 5계 또는 8계를 지키며 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러한 계청정의 힘이 있다면 어떤 회중에 가더라도 두려움이 없으며 당당하게 8정도 바른길, 즉 바른 견해로써 바른 생각과 바른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를 실천하며, 자연스럽게 바른 노력을 하게 되어 바른 사띠(正念)와 바른 사마디(正定)의 힘으로 바른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6. 재가자를 타락시키는 비구

앗사지와 뿌납바수라는 여섯 비구 무리를 이끄는 스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끼따기리 마을의 재가자들을 타락시켜 놓았다. 어느 날 한 비구가 까시 국에서 우기를 마치고 세존을 뵙기 위해서 사왓티로 오는 도중에 이 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그는 탁발을 위해 가사와 발우를 수하고 마을에 들어갔다. 그는 알아차리면서 나아가고 물러나며 모든 행동에 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비구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약하고 느려빠지고 점잔빼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그에게 공양을 올리겠는가. 우리의 스승인 앗사지, 뿌납바수와 그 제자들은 고분고분하고 상냥하고 대화를 즐거워한다. 그들은 웃으며 먼저 이렇게 말을 건넨다. ‘오시오, 환영합니다.’ 그들은 점잔빼지 않고 가까이 지내기 쉽다. 그들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이 바른 사띠를 지닌 비구를 무례하게 대하였다. 이를 알게 된 스님들이 이 사정을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 내용은 상가디세사 13번째 꿀라두사까(가족을 타락시키는 자)의 계목이 정해진 배경 이야기 중 일부이다. 율장의 계목들 대다수는 이들 여섯 무리 비구의 행위 때문에 정해진 것이 많다. 그런데 위 이야기를 비롯한 다른 계목이 정해진 배경 이야기를 통해 보면, 여섯 무리 비구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비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낭만파 비구들이라 할 수 있다. 친절하고 상냥하며 재주도 많아 다양한 기예를 갖고 춤과 노래로 재가들을 기쁘게 만들고 남녀 중매 역할도 잘하고 또한 침대에 꽃과 향수를 뿌려 장식하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낭만적이며 재치 만점의 비구들이다. 사실 그들의 행위 모두가 재가자들이 좋아하며 또한 재가자들을 위한 행동이 많다.

그런데 이 여섯 무리 비구들은 계율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숙지하고 있어서 한 번 정해진 계율들을 어기지 않고 다 피해 가면서 재가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많은 계율이 그들 때문에 계속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재가자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비구들이었지만, 계율 해석의 기준에서는 그러한 모든 행위가 재가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테라와다의 계율 해석이다. 따라서 테라와다의 계율에서는 위 이야기 속의 타지에서 온 비구처럼 재가자들과는 항상 거리를 두고, 마을에 갈 때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지 말고 말도 하지 말고 단지 아래만 바라보며 가게 되는 것이며, 법문할 때도 정좌하고 앉아 위엄을 갖고 법문할 것을 요구하고, 재가자들과 어울리는 것 대신 한거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가자들이 계율을 지키는 비구들을 어려워하고 싫어하며 번거롭게 여기면서, 계율을 지키지 않더라도 재가자들을 잘 이해하며 친절한 비구들을 추종하게 된다. 심지어 비구들에게 남자가 되어서 술 정도는 마실 수 있어야 멋이라며 계율을 지키는 비구들을 오히려 훈계하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계율을 지키며 항상 바른 사띠(正念)로써 위엄을 갖추어 행동하고 수행하는 비구들을 소승으로 폄하하고 따돌리게 된다. 그러면서 계율 적용을 자신의 탐진치를 줄이려는 방법이 아닌, 탐진치 속에서 살아가는 재가자들과 어울리기 위한 것으로 재해석하여 재가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축원을 잘 해주는 비구들에게 신도들이 모여드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만약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대승불교를 선호한다면, 테라와다불교의 비구는 소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니 오히려 소승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상가라와 수따》에서 상가라와 바라문은 제사의 공덕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출가 수행자는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부처님께 논쟁을 걸어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출가자가 믿음으로 바른길을 배우고 익혀 수행하며 청정범행을 성취하고 최상의 지혜를 실현한 뒤, 가르침에 따라 뒤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우고 수행한 사람들이 그를 뒤따르며 수행하는 수백 명,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바른 출가 수행자의 공덕과 가르침의 기적이 재가자들을 기쁘게 하는 제사의 공덕과 신통의 기적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신 것을 잘 숙고해야 할 것이다.

7. 범계에 대한 훈계와 참회 그리고 용서

계율 제정의 10가지 목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각 계목은 비구를 구속하고 제약하거나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율을 구속으로, 혹은 범계한 비구에 대한 처벌 규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범계 행위를 결코 일부러 들춰내며 추궁하지 않았다. “범계한 사실이 기억난 비구는 청정해지고자 한다면 범계한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야 하며, 드러내면 편안해질 것이다.”와 같은 가르침에서 보듯이 오로지 비구의 청정과 평안을 위한 것이라는, 그래서 각 계목마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위나야(율장) 공부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범계에 대한 참회가 과거 잘못에 대한 회개의 목적이 아닌, 현재의 청정함과 미래의 수호가 그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테라와다 비구들은 계목을 어긴 것에 참회하는 것을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죄 사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뽀사타(포살) 날에만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예불 전후에 참회하여 스스로의 평안함을 얻는다. 예불 시간이 아니라도 참회할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다른 비구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서로 참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반면 비구 간에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할 때는 매우 제한된 조건이 주어진다. 훈계할 사람이 알아야 할 사항 5가지 사항으로 먼저 스스로 ‘①육체적 행위에서 청정해야 한다. ②언어적 행위에서 청정해야 한다. ③선한 의도에서 해야 한다.(복수심에서 이루어져서 안 된다.) ④담마에 대한 학식이 있어야 한다. ⑤비구, 비구니 계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기본 바탕에서 훈계 전 결심 5가지를 해야 한다. 즉 ‘①나는 적절한 시간에 말하고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말하지 않을 것이다. ②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③나는 온화하게 말하고 거칠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④나는 목적(열반)과 관련해서 말하고 목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⑤나는 좋은 의도로 말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이 다짐해야 한다. 그런 후 상대 비구의 허락을 얻은 다음에 훈계해야 하며, 만약 허락을 얻지 못한다면 훈계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잘못을 행하는 비구가 훈계를 받지 않고자 하는 경우에는 상가공동체(승가)에 고발할 수 있는데 이때에도 또한 제한된 조건이 주어진다. 고발 전 자문해야 하는 5가지 조건은 ‘①적절한 때인가 아닌가 ②실제로 발생한 사실인가 아닌가 ③목적(열반)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④법과 율의 편에선 동료 비구를 얻을 것인가, 아닌가 ⑤고발로 상가에 싸움, 분쟁, 논쟁, 다툼, 분열, 불화, 언쟁, 충돌이 생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점검하여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때 역시 침묵해야 한다.

반면 밖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다음엔 안으로 자질 5가지를 또한 살펴야 한다. ‘①자비심에서 하는 것인가 ②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③연민심에서 하는 것인가 ④범계의 제거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⑤율의 존중에서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안팎으로 모두 어떠한 허물이 없음을 확신할 때라야 훈계 또는 고발할 수 있는 것이 테라와다 계율의 규정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불교에서도 이러한 계율의 가르침에 따른 습관을 갖는다면, 내부 갈등만이 아닌 외부와의 갈등 역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습관은 재가자들 역시 평소 생활에서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비판 등을 할 때 반드시 기억하여 적용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참 부러웠던 일상 참회 의례 중 하나를 더 소개해보면, 안거를 보냈던 한 사원에서 떠나는 날 종무소의 웨야왓사(자원봉사자)가 비구에게 공손히 먼저 삼배를 하고 그동안 생각과 말과 행위로 부주의하여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는 참회 의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참회가 비구들만의 일상의례가 아니라 재가자 역시 서로 참회하는 것이 생활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테라와다불교의 일상 참회 의례를 한국의 사부대중 역시 생활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8. 맺는말: 현세는 말법시대가 아닌 정법시대

한국불교에서는 지금이 후오백세라 하여 부처님의 열반 후, ‘첫 500년은 수행을 통해 궁극의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정법시대이고, 두 번째 500년은 수준이 낮아져 좌선이 깨달음을 대신하게 되며, 세 번째 500년은 학식과 담론이 지배하고, 네 번째 500년은 경전도 죽고 절간과 탑만 덩그러니 남게 되며, 마지막 500년, 즉 후오백세는 사찰의 소유권을 놓고 막가는 싸움이 벌어지는 풍경이 일상화된다.’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테라와다의 정법·말법 시대의 개념과는 다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현대 역시 정법시대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비구 계율을 제정하여 법이 금방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셨고, 비구니 계율을 제정하여 여성이 출가함에 따른 법의 쇠퇴를 미리 차단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마하빠리닙바나수따》에서 수밧다에게 설한 내용을 통해서도 왜 지금이 정법시대인지 알 수 있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팔정도)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서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항상 부처님이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사성제라는 진리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팔정도 바른길 따라가며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곳에는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들이 절대로 텅 비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팔정도에 따라 계정혜를 실천하는 곳에는 정법이 끊어지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의 정법시대에 대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한국불교도 받아들여 말법시대라 한탄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팔정도의 바른길 따라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깜맛사까 / 파아욱 선원에서 율장을 공부한 한국인 테라와다 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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