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계율

1. 머리말

삼학(三學)은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학에 정·혜와 아울러 계가 포함된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계율이며, 지계는 곧 수행이기 때문이다. 계율은 계와 율이 합쳐진 말이다. 계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각각 지켜야 하는 바에 차이는 있으나 승속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자발적인 의미가 강한 반면, 율은 출가자로 이루어진 출가공동체인 승가의 화합을 위한 것인데 잘못한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다. 이러한 율이 규정된 것은 승가의 화합과 질서를 유지하여 출가자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승가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계율은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 한국불교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 계율이 만들어지던 당시와는 다른 시대적 배경, 인도와는 전혀 다른 동아시아의 문화, 또 삼국 나름의 정치·사회·문화적 풍토로 인해 원래의 계율 가운데는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것들도 있었고, 지켜지지 않는 것도 있었으며, 반대로 원래의 계율에는 없으나 새롭게 요구되는 것들도 있었다.
한국불교에서 계율의 전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고, 계율의 토착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불교에서 계율의 큰 틀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계단에서의 수계작법 절차가 정비되고 출가자를 대상으로 한 소승의 《사분율》과 승속을 구분하지 않는 보살계의 설행이 그것이다. 이러한 계율의 정비와 전개는 세속사회 혹은 세속권력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계율이 전래된 이후 한국불교에서 계율의 전개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계율이 정립되는 삼국~통일신라시대, 그리고 선종에서 청규를 본격적으로 설행하는 고려 후기로 논의를 한정하였다. 이를 통해 시대별로 사회와 교단의 관계 속에서 계율의 전개를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다.


2. 고구려와 백제의 계율 수용

불교의 수용은 왕권 중심의 고대국가로 성장해 나가던 삼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불교 수용 양상과 전개에 차이가 있었으나 왕실이 불교공인에 앞장섰고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데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불교의 전래는 경전과 불상의 전래를 수반했고, 불교가 공인됨에 따라 사찰이 창건되고 교단이 만들어졌으며 계율도 전래되었다. 불교수용 시기와 과정의 차이에 따라 삼국에 전래된 계율은 다소의 차이가 있기도 했으나 그것이 수계의식을 비롯한 승가 운영의 기준이 되는 ‘계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정식 승가 구성원이 되기 위한 서약인 수계와 출가자들의 생활을 규정하기 위한 율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의 시행은 결국 공식적인 승가의 출범과 출가의 제도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보냄으로써 불교가 공인되었고, 396년 동진의 승 담시(曇始)가 경율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 즉 고구려에 와서 10여 년간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삼승(三乘)과 귀계(歸戒)를 설했다고 한다. 당시 담시가 전한 계율의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4세기 중국에서의 율장 번역 정황을 통해 그 대강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중국에서는 위(魏) 가평(嘉平) 연간(249~253)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낙양에 와서 〈승기계심(僧衹戒心)〉 부분을 한역했고, 정원 연간(254~255) 담체(曇諦)가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를 번역한 것이 중국에 전래된 최초의 계율로 알려져 있다. 율장의 번역은 404년 구마라집(344~413)의 《십송율》 번역이 처음이기 때문에, 4세기 말 담시를 통해 고구려에서 설행되었던 계율 역시 〈승기계심〉과 〈담무덕갈마〉와 같이 수계를 위한 간단한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불교는 전래 초기에는 중국의 격의불교를 수용하였으나 점차 대승불교의 주요 사상이 전래되어 지론학, 삼론학 등 발달하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576년 의연(義淵)은 승상 왕고덕의 청으로 북제에 가서 법상(495~580)에게 당시 고구려 불교계에서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해 자세히 묻고 돌아왔다. 의연이 법상에게 물었던 것 가운데 계율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당시 고구려에 《지지론(地持論)》이 연구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지론》 즉 《보살지지경》은 《유가사지론》 중 〈보살지〉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담무참의 번역본이다. 《보살지지경》은 대표적인 대승보살계로 삼취정계(三聚淨戒), 사중사십이범사(四重四十二犯事)를 설정하였는데, 5세기 이 경전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범망경》이 출현하였다. 또한 의연은 불교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율의를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고, 법상은 지론종의 종조인 혜광의 제자로 북제 문선제의 계사가 되어 왕과 중신들에게 보살계를 설해주었다고 하는데, 의연이 법상에게서 유가론계의 대승보살계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6세기 고구려에는 유식 계통의 대승보살계가 설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구려 말에는 보덕이 《열반경》을 강설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원효와 의상도 젊은 시절 보덕에게서 《열반경》을 배웠다. 《열반경》은 6~7세기 삼국 모두에서 유행한 대승경전으로 ‘실유불성’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열반경》은 삼국시대 계율뿐만 아니라 이 시기 삼국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경전이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동진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대궐에 모시고 예를 갖추어 경배했고, 이듬해 한산주에 절을 짓고 10명이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385년 10인의 출가는 불교 공인 이듬해 바로 승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에서 계율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겸익(謙益)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소승불교의 계율을 직접 수용했다는 점이다. 겸익은 526년(성왕 4) 인도에서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아비다르마와 오부율을 가지고 귀국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했고, 담욱과 혜인은 이를 주석한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했다. 겸익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오부율은 소승 5부의 율학으로 본격적인 백제 불교학과 계율은 겸익의 귀국에서부터 비롯되었고 할 수 있다. 교단 형성과 계율 확립이 시급한 과제인 상황에서 율학이 먼저 행해진 것은 백제불교가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법왕은 599년 살생금지령을 내리고 이듬해 승려 30명을 도승(度僧)했고, 무왕은 634년 도성 남쪽에 미륵사를 낙성하여 겸익의 활동 이후 백제불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백제불교는 계율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고, 불교계뿐만 아니라 성왕이나 법왕도 계율을 중시하였다. 백제불교가 일본에 전해질 때 일본불교의 계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588년 일본에서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율학을 배우고 돌아갔고, 602년에는 관륵(觀勒)이 일본에 가 태자의 스승이 되어 계법의 중요성을 전하기도 했다.
백제에서는 겸익 이래로 소승의 율학을 중심으로 계율이 전개되는 한편 성왕 대 백제는 중국 양나라와 문물교류가 활발하였다. 양에서는 《열반경집해》가 완성된 이후(509년) 열반학이 성행하고 있었다. 백제는 중국 양과의 교류를 통해 《열반경》 주석서를 수용했고, 이는 백제가 소승의 율학뿐만 아니라 《열반경》을 통해 대승계도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열반경》은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성론과 함께 계율은 중생이 불성을 보게 되는 바탕이라 하여 계율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열반경》에서는 지계를 깨달음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계의 효과를 널리 중생에게 미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식세기혐계(息世譏嫌戒) 등과 같이 범하기 쉬운 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또한 정법을 비방하거나, 사중금이나 오역죄를 저지르거나 불법을 훼방하거나, 삼보가 없다고 한 자들은 일천제가 될 것이라 하였고, 범계잡승(犯戒雜僧)과 우치승(愚痴僧)에 대해 경계하는 등 범계나 정법 파괴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원광의 세속오계와 자장의 ‘정율(定律)’

신라의 불교 공인은 삼국 중 가장 늦은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보다 앞선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서역승이 일선군 모례의 집에 있었다거나 비처왕 때 아도가 시자 세 명과 함께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며 경과 율을 강독했고 왕실에는 불교 승려가 있었음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법흥왕 대 순교를 통해서야 비로소 공인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고구려나 백제가 비교적 순조롭게 공인절차를 밟은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것이다. 기존 6부 귀족이 가지고 있던 족적 기반을 부정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집권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보편적 사상으로서 불교 수용을 왕실이 적극 추진하면서 신라에서는 기존 귀족세력들의 반발이 그만큼 거세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공인한 이후 왕즉불 혹은 전륜성왕임을 자처하며 불교에 의지하여 왕권을 수식하는 ‘불교식 왕명시대’를 맞이하였다. 특히 진골 귀족 출신으로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승려들은 중고기 신라의 발전을 이끌어 나간 중심 세력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원광과 자장은 계율을 통해 중고기 신라사회와 신라불교계를 일신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라의 계율과 관련하여 우선 살펴볼 것은 진흥왕~선덕왕 대에 걸친 일련의 변화이다. 이차돈 순교의 빌미가 되었던 흥륜사가 544년(진흥왕 5) 준공되면서 진흥왕은 일반인의 출가를 허용하였다. 일반인의 출가가 허용되었다는 것은 소박하나마 수계작법이 이루어지고 있었음과 계율 준수를 바탕으로 한 신라 불교교단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551년(진흥왕 12)에는 고구려의 혜량(惠亮)이 신라로 와서 승통이 되어 백고좌회와 팔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팔관회는 인도의 팔계재(八戒齋)에서 기원한 것이다. 재가신도들은 기본적으로 오계를 지키면 되지만 육재일 하루 동안만은 출가자의 계인 팔계를 지켜 몸을 삼가고 출가자의 삶을 체험하며 수행에 정진하던 것이 인도의 팔계재였다.
이 팔계재는 중국에 전래되어 팔관재로 불리며 남북조~당에 걸쳐 크게 유행했는데, 중국에서는 기일에 위령제로 팔관재를 설행하였다. 또한, 미륵신앙에서는 팔계재를 도솔천 왕생을 위한 공덕으로 중시하였으니, 중국 남북조시대 설행된 팔관회는 진흥왕 대의 팔관회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대 황룡사에서 개설된 팔관재는 전사한 장병들을 천도하기 위한 위령제의 성격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미륵신앙이 진흥왕 대 유행했고, 미륵신앙에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팔관재법을 받아 지니는 것을 중시했으므로 재가자의 계율정신을 함양한다는 팔관재 원래의 정신도 여전히 견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평왕 대가 되면 신라 불교계에서 계율은 더욱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진나라에 유학 중이던 지명(智明)이 귀국하자 진평왕은 그의 계행을 존중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지명의 저술 가운데에는 《사분율갈마기(四分律羯磨記)》가 있어 지명 귀국 후 《사분율》에 의한 수계작법이 신라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평왕 대 활동했던 원광은 진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운문산에 머물며 점찰법을 통해 대중교화에 주력하였다. 원광의 점찰법은 점찰을 설행하기 앞서 참회와 보살계 수계를 중시했다. 이것은 개인의 자기반성과 종교적 실천을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왕이 원광으로부터 계를 받고 참회한 후 병이 나았다거나 원광의 중국 유학을 도와준 산신이 훗날 원광에게서 계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원광의 불교에서 수계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한 원광은 자신을 찾아와 종신토록 경계로 삼을 것을 구하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원광의 세속오계는 불교의 계율만이 아니라 충·효·신과 같은 유교 윤리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원광은 귀산과 추항에게 불교에는 보살계인 10계가 있음을 말하면서도 국왕의 신하 된 자로 보살계를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보살계 대신 세속의 계율을 준다고 했다. 여기에서 원광은 불교의 계율을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전통적인 구분법인 비구계와 보살계의 구분이 아니라 불교의 계율과 세속의 계율을 구분했던 것은 원광의 계율관의 특징으로, 이것은 〈걸사표〉를 비롯하여 진평왕 대 말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원광이 작성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당시의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유교적 지식과 한문학에 대해 상당히 높은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원광의 세속오계는 유교의 오륜과 불교의 보살십중계(菩薩十重戒)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당시 사회에 필요한 윤리를 선별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삼국시대 불교사에서 계율의 설행과 관련되어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자장이다. ‘불교치국책’으로 설명되는 중고기 불교를 대표하는 자장의 활동은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의 계율 수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진골 귀족 출신인 자장은 출가 시기가 분명치는 않지만 25세 때 선덕왕의 출사령이 내려지자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 동안 파계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며 거부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선덕왕으로부터 출가를 인정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정식으로 출가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행 끝에 도리천에서 내려온 장부로부터 오계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국중사녀(國中士女)에게 오계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 오계는 재가신도들도 수지하는 계율로 이미 출가한 자장이 다시 오계를 받은 것으로 보아 자장이 출가하던 시기까지도 신라에는 출가 및 수계의식이 완전히 제도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점에서 자장이 입당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계단을 쌓아 출가자에게 계를 주고 승단의 규율을 관장한 것은 출가와 수계의식의 제도화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자장의 계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입당 유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장은 선덕왕의 명으로 출가를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고 한다. 자장이 닦은 고골관은 《열반경》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중고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와 상층불교계에 《열반경》 계통의 경전이 널리 읽혔고, 왕자와 승려들에 대해 정법호지를 강조하는 성격의 대승율이 설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86~643년에 걸친 자장의 입당유학에서 계율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법상(567~645) 및 도선과의 교류를 꼽을 수 있다.
자장은 장안에 도착한 직후 공관사(空觀寺)의 법상에게서 보살계를 받고 사사하였다. 이후 640년 전반기부터 642년 후반기까지 종남산 운제사 인근에서 3년을 머물렀다. 자장이 종남산에 머물던 당시 운제사에는 남산 율종의 종조로 알려진 도선이 머물고 있어 자장은 이곳에서 도선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선은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抄)》 《사분율습비니의초(四分律拾毘尼義鈔)》 《사분율갈마》 등을 저술하여 《사분율》을 중심으로 율학의 체계를 세우고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또한 신라에서도 7세기 초 《사분율》에 대한 관심이 조성되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자장과 도선의 교류는 《사분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643년 선덕왕의 명으로 귀국한 자장은 비상설직인 대국통이 되어 불교교단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통제하였는데, 이때 중심 사찰은 황룡사였다. 자장은 교단을 사미, 사미니, 정학녀, 비구, 비구니의 5부로 조직하고 교단 감찰기구인 강관(綱管)을 두었으며 순사(巡使)를 두어 지방사찰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였다. 또한 자장은 계율을 중시하여 보름마다 계를 설하는 포살을 거행하고 율에 의거하여 참회하게 하였으며 봄과 겨울에 시험을 치러 계율을 지켰는지 여부를 알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자장이 출가교단에 엄격한 지계를 요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당시 자장이 중시한 계율은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분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자장은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한 보살계도 강설하였다. 자장이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7일 밤낮으로 강연하자 자장에게 계를 받으려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열 명 중 아홉이 수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장의 활동을 살펴보면 일반 재가자를 대상으로 하는 보살계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적었고 내용도 《범망경》인지 《지지경》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재가자를 대상으로 〈보살계본〉을 강연하고 수계했던 모습에서 자장은 출가자의 계율은 《사분율》을 중심으로, 재가자의 계율은 보살계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정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교단을 세속에서 분리하여 수도자 집단으로서 청정성을 회복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장이 보살계를 설하기는 했으나 자장에게 있어 근본적인 것은 출가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분율》을 통한 엄정한 계율의 실천과 출가 및 수계의식의 정비, 불교교단의 숙정과 통제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장은 통도사에 계단을 설치하여 출가자에게 수계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덕왕 대 자장의 활동은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후원으로 점차 커져 가던 신라불교 교단을 계율을 통해 정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도선이 자장을 ‘호법보살’이라 칭하면서 자장의 수계를 강조한 점, 《삼국유사》에서 자장의 활동을 ‘정율’이라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계율의 수지와 계율에 근거하여 불교교단을 운영한 자장의 활동을 호법으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4. 의상의 지계정신과 원효의 보살계 설행

중고기 신라 왕실이 불교를 통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였고, 승려들이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과 달리 중대 신라에서는 유교 정치사상이 발전하고 유교 지식인이 등장하였다. 이에 불교의 정치적 역할은 중고기에 비해 축소되었고, 정치적 조언자로서 승려의 역할보다는 출가자 본연의 자세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통일기 불교교단은 삼국통일을 맞이하여 삼국의 불교를 종합정리했다. 또한 현장의 귀국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중국불교의 새로운 경향을 소화하여 신라불교 교학을 체계화할 필요성과,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중고기 불교가 가지고 있던 지배층 중심의 계급 편향성과 경주 중심의 지역적 편중성을 극복하고 불교의 저변을 확대시킬 필요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율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의상으로 대표되는 엄정한 지계와 원효로 상징되는 《범망경》 대승보살계의 성립이다.
의상은 일찍이 원효와 함께 고구려 승려 보덕에게서 《열반경》을 수학하였다. 대승계를 설하는 《열반경》은 엄격한 지계주의를 설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의상이 당나라 유학 중 종남산에서 도선과 교류하며 접하게 된 도선의 계율 실천 정신 역시 의상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이 종남산에 머물며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학하던 당시 도선은 종남산 정업사(淨業寺)에서 계단을 조성하고 계율을 정립했고, 의상은 이 시기 도선과 교류하였다. 《사분율》을 중심으로 계율을 정립한 도선은 삼의일식(三衣一食)을 하고 의자나 상에 앉지 않는 등 철저하게 계율을 지켰는데 의상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이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펼치자 국왕이 그를 공경하고 중히 여겨 토지와 노비를 주려 하였다. 그러자 의상은 “불법은 평등하여 고하가 함께 쓰고 귀천이 함께 지켜나갑니다. 열반경에 팔부정재(八不淨財)가 있으니 어찌 장전(莊田)을 가지며 어찌 노복을 부리겠습니까?”라 하며 거절하였다. 또한 의상은 삼의일발 외에는 어떠한 소유물도 갖지 않았다고 하는데, 엄정한 지계를 실천하는 청정한 수도자의 자세로 당시 교단에 본보기가 되었다. 이러한 의상의 모습은 가죽신을 신은 화려한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니던 신문왕 대의 국로 경흥(憬興)이 거사(혹은 사문)로 변화하여 나타난 문수보살로부터 비판을 받고서야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는 일화와 대비가 되는 것이다. 경흥의 이 이야기는 통일기 신라불교계에서는 엄격한 지계주의와 보살계에서의 계율의 정신주의가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경계와 비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고기 불교교단이 성립되고 계율이 정립된 이래 신라의 불교교단은 《사분율》에 입각하여 운영되었다. 소승불교의 계율인 《사분율》은 출가자가 지켜야 하는 계율로 출가자 개인이 지을 수 있는 잘못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면서 또한 교단을 규율하여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지 않고 원만히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사분율》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보고 계를 지켰는지 범했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행위의 동기보다는 결과에 따라 지계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대승보살계는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지계는 보살의 수행에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범망경》에서는 10중48경계는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 받아 지녀야 하는 계로,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계는 법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심지어 노비라도 수계할 수 있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분율》과는 달리 불상 앞에서 혼자 맹세하고 수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보살의 경우에는 행위 그 자체나 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여 범계의 판단 기준으로 행위의 동기를 중시했고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한 행동을 강조하는 등 지계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입장이다.
《범망경》 〈보살계본〉은 이전에 유통되던 유식학 계통의 보살계본인 《보살지지경》을 바탕으로 5세기 중·후반경 중국에서 성립한 위경(僞經)이나, 성립된 직후부터 보살계 이해와 수행의 주된 경전이 되어 동아시아 불교의 계율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경전이다. 《범망경》이 한국불교계에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이나 한역경전들이 비교적 곧바로 신라에 전래되고 있었고, 진평왕 대 원광이 세속오계를 주면서 불교의 보살계로 10중계가 있다고 하여 《범망경》에서 설하는 10중48경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자장과 함께 귀국한 원승(圓勝)이 《범망경기》를 찬술한 사실 등을 통해 본다면 원효가 출가할 당시 이미 신라불교에서는 보살계로서 《지지경》과 함께 《범망경》도 설행되고 있었거나 적어도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다만, 계율에서는 《사분율》이 아니라 보살계로서 《범망경》을 중시하고, 이것을 통해 적극적으로 불교대중화를 이끌었다는 점, 《범망경》은 보살계를 대표하는 경전이 되었다는 점 등에서 원효의 활동이 주목된다.
원효의 계율관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원효의 기행은 이러한 계율관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사분율》에 입각하여 엄격한 지계주의를 추구하던 당시 불교교단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재가보살의 입장에서 출가자까지 포섭하는 계율을 표방하였고, 그러한 계율관에 적합한 것을 《범망경》에서 찾았다. 원효가 출가자 중심의 《사분율》이 아니라 《범망경》을 중시했던 것은 현존하는 원효의 계율 관련 저술이 《사분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범망경》과 《영락경》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원효는 소승계를 《범망경》에 포섭한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와 범망계와 유가계를 종합한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를 지어 형식주의적인 소승계율을 지양하고 정신주의적인 보살계를 강조하였고, 수행자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강조하였다.
원효를 계기로 신라 중대 불교교단에서는 《사분율》보다는 범망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승장(勝莊)의 《범망경술기》, 의적(義寂)의 《보살계본소》, 태현의 《범망경고적기》 등 《범망경》에 대한 유식학자들의 주석서가 찬술되었고, 원효와는 다른 해석도 제시되는 등 《범망경》 보살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지면서도 결과보다는 마음가짐을 중시하는 적극적인 계율관은 여전히 유지하였다. 한편, 《사분율》도 출가자의 계율로서 계속 중시되어 《범망경》 주석서와 해석이 활발한 가운데도 《사분율》에 대한 주석도 계속 저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나말여초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선승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도 구족계를 받은 뒤 《사분율》을 천양했다고 하여 《사분율》은 출가자의 계율로서 여전히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살계의 성행 속에서도 《사분율》을 중시하는 모습은 나말여초 승려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나말여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승려들의 비문에는 구족계를 받은 이후 계율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계주(戒珠)가 빛났다거나 ‘부낭불루(浮囊不漏)’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은 표현을 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율장에 의하면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고 나면 화상 즉 스승으로부터 율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어 있는데, 나말여초 승려 비문에서 보이는 이러한 내용은 당시 수계 이후 율을 배워 실천하는 학습의 시기를 출가자의 생애에서 중시했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승려 비문에서 나타나는 지율, 지계의 강조는 고려 전기 이후 비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다.


5. 고려시대 관단수계와 보살계의 성행

고려시대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계율 정립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승려 비문에서도 구족계 수계 이후 지계에 철저한 기간을 강조하는 것은 나말여초에 한정되어 있다. 고려 전기는 구족계 수계 사실만 기록하였고, 오히려 승과의 합격, 승계 등이 자세히 정리되는 편이다. 이것은 아마도 고려시대 승정(僧政)을 통해 국가가 불교교단을 관리하면서 승적이 있는 정식 출가승이 되기 위해서는 구족계 수지가 필수적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구족계 수지 이후의 교육이나 관리가 고대에 비해서는 제도화되어 교단 내에서는 일상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시대 계율에서 주목되는 것으로 출가자에 대한 관단수계(官壇受戒)의 제도화와 보살계의 성행을 꼽을 수 있다. 자장이 출가자에 대한 수계의식을 설행하기 위한 계단을 통도사에 세우고 《사분율》을 중심으로 계율을 정비한 이래 구족계는 출가 체발한 사원이 아닌 계단이 있는 특정 사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는 전국적으로 관단을 두고 그곳에서 경과 율에 대한 시험을 봐야 한다는 출가 규정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불교를 후원하는 한편으로 승정을 통해 수계 즉 출가 단계부터 국가가 승가를 관리하였다. 사원의 경제활동이나 승려의 복식에 대해 국가가 통제를 가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범죄에 대해서도 국가가 직접 속법으로 치죄하였다. 4바라이죄에 해당하는 경우는 계율에 의해서 승단에서 축출되었을 것인데, 이와 함께 속법에 의한 강제 환속이 진행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는 승려가 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4바라이죄는 아니나 계율을 위반하는 행위 즉, 음주, 사치한 복식, 사원에서 양조(釀造)와 파를 재배해서 판매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이에 대한 국가의 금령이 누차 내려졌다. 승려의 죄의 종류에 따라 귀향 보내 환속시켰고, 경중에 따라 사면이 불가능한 경우−향호(鄕戶)에 영구히 편입되어 다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도 있었다. 관리가 받는 형벌인 이러한 귀향형과 충상호형(充常戶刑)에 승려가 대상이 되었던 것과 같은 승려에 대한 율령은 우대의 의미도 지닌 것이기도 했으나, 세속권력과의 관계에서 계율에 입각한 승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가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계속된 계율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나말여초 계단 수계와 관련된 기록에서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 대각국사 의천 당시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연구하는 육종(六宗)을 언급한 가운데 계율종이 있고, 1132년(인종 10) 선봉사에 세운 대각국사비에서 고려불교의 4대업 중 하나로 궤범업(軌範業) 즉 율업을 언급한 것, 율업수좌(律業首座)에게 내린 고려 후기의 관고(官誥), 여말선초 기록에 등장하는 남산종(南山宗) 등은 모두 고려시대 불교교단에 계율을 전공으로 하는 업(혹은 종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고려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재가신도들의 보살계 수계가 성행하였다. 국왕의 보살계 수계는 신라시대부터의 전통으로 보이는데 태조가 스스로를 보살계 제자라고 한 이래로 국왕의 보살계 수계는 공민왕 대까지 항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의 보살계 수계는 늦어도 덕종 때부터는 대부분 궁궐 내에서 6월 15일에 설행되었고, 즉위 원년에 수계하는 경우가 많아 국왕 즉위 의례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위 기간 여러 차례 수계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왕 보살계 수계를 설하는 대표적인 경전은 《범망경》으로 재가신자가 국왕이나 관리가 될 경우 보살계를 받아야 함을 설하고 있다. 신라 중대 이래의 《범망경》 보살계의 유행은 고려시대 국왕이나 관료들이 보살계를 받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살계를 받은 국왕의 통치는 보살의 교화활동으로서 권위를 갖게 되고 이와 함께 국왕은 보살로서 계율을 준수하고 보살의 자비행을 이행하는 자비로운 존재로 이러한 보살이 다스리는 땅은 불국토로 신성시될 수 있었다.
고려에서 국왕의 보살계 수계와 출가자의 관단수계와 승정은 불교교단이 계율을 통해 세속권력과 서로 깊이 관련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가자들의 수계는 고려불교에서 크게 성행하여 《범망경》 보살계 외에도 충숙왕 대 고려를 방문했던 지공(指空)의 무생계(無生戒)가 주목된다. 인도 출신으로 전하는 지공은 원 태정제의 어향사로 고려에 와 술과 고기를 끊을 것을 강조한 금욕적인 계율을 제시하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설법을 했는데, 지공에게 무생계를 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한 생전에 수계를 하는 사례도 있으나 고려시대 묘지명을 살펴보면 임종을 앞두고 출가수계를 하기도 했고, 청신계제자, 청신계녀라는 표현이 사료에서 확인되는 등 고려시대에는 재가자의 수계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 선종의 수용과 청규의 설행(設行)

신라 하대 선종의 수용은 고대불교를 마감하고 중세불교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선종은 중국에서 성립된 뒤 당대(唐代) 백장회해(720~814)가 청규를 제정하면서 선종은 독립된 교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선승들은 율원에 머물렀는데, 선원과 율원의 수행방법과 규범의 차이로 인해 선종만의 별도 규범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청규는 《사분율》에 입각한 소승계와 《범망경》이나 유가계 경전과 관련된 대승보살계를 기본으로 하여 선종사원에서의 의식이나 규범을 정한 것으로, 청규 역시 계율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청규는 선원에서 생활하는 수행자들의 일상생활규범이자 수행규범이었으며, 또한 선종 사찰의 운영규범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인도에서 계율이 정해지던 시대와는 시대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중국불교의 산물인 중국 선종의 청규가 인도 이래의 계율과 동일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자급자족적인 사원경제를 강조하는 보청법(普請法)의 제정이었다. 보청에 의해 직접 농사를 짓게 될 경우 율장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참벌초목(斬伐草木)에 해당될 수 있으나 청규의 보청법은 출가자에게 수행으로서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송·원 대를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청규가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고려시대 불교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1103년 종색 선사의 《선원청규》와 원 순제의 명으로 1336년 간행된 《칙수백장청규》를 꼽을 수 있다.
신라 하대 당나라 유학 중 선을 수용한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선종이 급속도로 전파되어 나말여초 이른바 구산선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전하는 자료에서는 고려 전기까지도 고려 선종의 청규서 간행이나 청규의 도입 혹은 청규의 실행과 관련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대장경에 종색 선사의 《선원청규》가 전하고 있고,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를 개창하고 간행한 《계초심학인문》을 통해 볼 때 고려 후기에는 고려 선종에서 청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05년(희종 원년) 지눌이 저술한 《계초심학인문》은 결사의 구체적인 생활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수선사 청규라고 할 수 있다. 《정혜결사문》이 결사의 취지와 근본정신을 담은 것이라면 《계초심학인문》은 결사의 구체적인 생활규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눌의 청규는 계율과 법에 의지하여 출가인으로서 기본자세를 견지하고 대중이 화합하는 가운데 정혜쌍수를 닦아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결사에 참여한 혹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찬술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계 및 십계의 수지와 사중 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불과 참회, 생활예법 등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선원의 의례를 중요하게 다루는 중국 선종 청규와 달리 지눌의 수선사 청규는 정혜쌍수의 수행에 집중된 것이 특징이다.
고려불교에서 청규가 국가적으로 주목받는 시기는 공민왕 대이다. 공민왕 대는 원 간섭기 이래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하는 개혁의 시대였고, 여기에는 불교교단에 대한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사원이 소유한 전민(田民)의 문제, 승정의 혼란, 승려들의 질적 하락 등이 불교교단의 문제로 대두되었고 불교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공양왕 대 본격적인 배불론이 대두되기 이전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는 고려적 질서 안에서의 불교개혁론으로, 불교계의 현실적 모순을 시정하고 불교의 참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대 고려불교 내부에서는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청규를 시행하여 기풍을 일신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청규 실천을 통한 불교개혁은 국가의 의지도 반영된 것이었다. 공민왕의 후원 아래 왕사인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이 실제 교단 및 선찰(禪刹) 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칙수백장청규》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는 사원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공민왕의 개혁정치 및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다.
1356년(공민왕 5) 왕사에 취임한 보우는 두 차례에 걸쳐 불교교단의 숙정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당시 불교교단에 대한 비판과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보우는 구선선문의 통합을 통한 선종교단의 개혁과 함께 선문 내에서 백장청규를 엄격하게 시행함으로써 불교교단 내부도 개혁하려 하였다. 그리고 선문 내에서 백장청규를 엄정하게 시행할 담당자로서의 주지의 역할에 주목하여 주지 선정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강조했고, 승려들에게는 출가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공민왕의 명령으로 《칙수백장청규》가 간행된 것은 이 시기의 일로 추정된다.
한편, 나옹혜근은 1371년(공민왕 20) 왕사가 된 뒤 왕명으로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공민왕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회암사 중수를 시작했는데, 청규에 규정된 선찰의 의식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와 청규의 관련성은 혜근이 중수한 회암사 배치가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독특한 가람 배치를 보여주는 이유가 된다. 혜근은 회암사를 중수하면서 송 대 이래 중국 선찰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따랐고, 청규에 규정된 동서직임과 관련된 건물이 회암사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적어도 회암사에서의 혜근 문도들의 생활과 수행의 준거가 청규에 의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혜근이 따른 청규 역시 《칙수백장청규》였다.
공민왕 대 사찰 내의 규율을 정비하고 계율을 지킬 것과 청규의 실천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백운경한(白雲景閑)에게서도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공민왕 대 청규의 실천을 강조한 보우, 혜근, 경한 모두 원 강남 임제종 승려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고, 귀국 이후 청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한은 같은 암자에 머물던 법형제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자 당시 승려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과거 위대한 선사들이 총림에서 함께 지내며 각기 한 가지씩 책임을 맡았던 일화를 언급하면서 조사들의 수행 가풍을 강조하였다. 또, 자신의 문하에서 수행하던 사미들이 수행을 게을리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다툼으로 암자 내의 화합을 깨자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한 가지씩 임무를 맡아 열심히 수행하라 격려하였다. 이처럼 경한 역시 승단의 분열과 수행을 게을리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을 당시 교단의 병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폐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청규에 의한 수행가풍 확립과 계율엄수 및 화합을 강조하였다. 또 경한은 신광사 주지 교체를 청하며 공민왕에게 올린 글에서 나이가 젊으면서도 도가 있는 사람으로 주지를 임명하여 청규를 크게 진작시키고 조도(祖道)를 빛나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말 불교교단에서는 승가의 순수성 즉 승려들의 수행과 화합이라는 관점에서 당시 교단의 병폐를 진단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결책은 출가수행자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청규를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청규의 실천을 이끌어갈 주체로 총림을 구성하는 수행대중의 역할보다 청규를 올바로 실천하여 사찰 운영을 바로잡고 수행자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책임자로서 주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칙수백장청규》에서 주지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청규는 원래 선원의 자율적인 운영을 위해 제정된 것이었으나 《칙수백장청규》는 간행뿐만 아니라 배포와 시행에 국가가 개입했다는 점이 주목되며 국가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말 선승들이 선종을 개혁하기 위해, 그리고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이 당시 원에서 설행되고 있던 《칙수백장청규》의 시행을 택한 것은 선원수행의 기본이 되는 청규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보우와 혜근 모두 왕사가 된 이후 청규를 시행했던 것은 교단 개혁에 대한 국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공민왕이 선종을 중심으로 불교를 개혁하려고 하면서 청규를 중시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주목된다. 공민왕의 후원 아래 왕사에 의해 실행되고자 했던 《칙수백장청규》가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고 사원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관련이 있었던 점은 공민왕의 개혁정치 및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 대 청규에 바탕하여 불교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시도는 급작스런 공민왕의 죽음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칙수백장청규》가 지닌 국가주의적 경향 때문에 교단이 세속권력에 예속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는 것, 교종까지 아우르는 불교교단 전체에 대한 개혁방안이 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고려 말 불교에 대한 비판에 대한 교단 스스로의 노력이었고, 공민왕대 개혁정치에서 이루고자 했던 불교개혁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우와 혜근을 중심으로 한 청규의 시행은 의미를 갖는다.


7. 맺음말

삼국시대 불교의 공인과는 별도로 공식적인 승가의 출가 제도화는 계율의 시행과 관계된 것이었다. 《열반경》 계통의 대승계가 성행하는 가운데, 불교를 수용하여 고대국가로 급성장하던 신라에서는 원광의 세속오계와 같은 독특한 계율관이 제시되기도 했는데, 이는 계율이 신라사회에 토착화되는 과정이었다. 자장의 활동은 계율을 통해 신라불교 교단을 정비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자장이 출가자의 계율인 《사분율》과 재가자의 계율(보살계본)을 구분하고, 출가자에 대해 엄격한 지계를 요구한 것은 수도자 집단으로서의 청정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통일기 원효는 《범망경》 보살계를 통해 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시하고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했는데, 이러한 계율관은 파계행을 통해서라도 중생제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원효의 불교대중화 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이처럼 통일기를 전후하여 《사분율》과 보살계라는 계율의 양대 흐름이 수립되었고, 이 흐름은 고려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다만 고려는 국가가 불교를 후원하면서도 승정을 통해 불교교단을 통제했는데, 출가를 비롯하여 승가의 계율과 관련된 요소들을 국가가 관리하였다. 그리고 재가자의 보살계 수계가 성행하여 국왕이 보살계를 받는 것이 항례화되었다. 한편 한국불교에 선종의 전래와 함께 청규가 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선사 결사에서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이 설행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고려 후기에는 청규가 실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 대 원 강남 지역을 다녀온 승려들과 공민왕은 《칙수백장청규》의 실천을 통해 불교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계율은 승려와 불교도의 일상생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요구, 불교와 해당 사회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종의 생명체와도 같다. 이러한 모습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계율이 중국에 전래된 이후의 전개, 인도에는 없는 청규의 등장, 한국불교에서 계율을 수용하는 과정과 전개 등에서 잘 나타난다.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으나 조선시대 임란 직후 승군의 활동으로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승군과 승장의 활약은 조선 후기 불교 존립의 바탕이 되었으나 승단 일각에서는 “승려들이 종군하여 출가의 뜻을 잊고 계율을 실천하지 않아 장차 선의 기풍이 멈추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현실에 맞춰 승가는 새롭게 작법(作法)을 정리하기도 했으며 근대와 해방 이후 경허 선사나 방한암 선사 등이 청규, 규례, 규약 등을 새롭게 제정하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적 차이에 따라 계율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유연성은 전혀 다른 문화권인 인도에서 성립된 불교가 오늘날까지도 세계종교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이다. 또한, 비록 계율이 수정되거나 변용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계율의 기본정신을 잃지 않는 일, 계율이 제정된 근본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계율의 실천과 계율정신의 제고는 불교가 불교다울 수 있는 길이고, 승가와 불교도가 건강하고 청정한 일상과 수행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기에 한국불교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계율을 정비하거나 계율의 정신주의에 대한 강조, 계율의 적극적 실천이 강조되어 온 것이다. ■



강호선 /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주요 논저로 〈고려말 나옹혜근 연구〉 〈고려말 선승의 입원유학과 원 청규의 수용〉 등의 논문과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전통의 흐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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