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계율

서언

불교의 가르침은 고상하고 심오하다. 존재에 대한 통찰과 분석을 통해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 불교교리가 그러하고, 절대적 존재에 대한 강제된 믿음이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2,600년의 역사 속에서 출·재가를 포함한 모든 불교도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적 세계관과 존재에 대한 통찰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수행이라고 하는 전문적인 노력이 주로 출가자들에게 부여되긴 했으나,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 또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한편, 재가불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바른 신행생활을 하고 승가를 후원하면서 공덕을 쌓으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러했던 불교가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새로운 불교시대가 열리면서 출·재가의 역할 설정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출가와 재가가 각각 수행과 후원으로 방향이 명확하게 나누어지던 것이 점점 ‘자비실천’을 중심으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다. 즉 기존의 초기불교가 강조해오던 존재의 통찰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의 현실적 삶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는 불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의 출현에는 거론해야 할 많은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이 거슬리는 원인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출가승단이 번쇄한 존재론적 불교 해석에 골몰하고 우물 안 논쟁을 계속하면서 학문불교로 나아갔다는 점일 것이다. 일반대중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불교를 표방하며 모두가 필요로 하는 내용을 충족해 주는 불교로 발전하기를 원했지만, 출가자들은 속세의 범주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그들만이 특별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는 불교의 큰 흐름이 존재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불교의 현실적 적용과 실천을 앞세워 새로운 불교로 정립하고자 시도했던 불교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불교도의 마음가짐과 일상생활을 컨트롤하는 계가 중시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계율 ‘대승계’이다. 본고에서는 바로 그 대승계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대승계가 성립되기까지

승가의 최초 분열은 인도사회의 사회경제상을 배경으로 한다. 화폐 사용에 관한 이 논쟁으로 인해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승가의 율 조항은 그 유연성을 잃게 되었다. 오히려 앞으로 율장에서 더 이상의 예외조항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1차 결집 당시의 뜻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승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화합하지 못하였고 분열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출가자들은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을 따라 파를 나누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근본분열’이라고 하는데, 승가는 크게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상좌부 계통과 율 조항의 유연성을 인정하는 대중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 100여 년 사이에 더 많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교학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불교사는 그를 가리켜 ‘지말분열’이라 하고,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던 시대를 ‘부파불교시대’라고 부른다.

알려진 바대로 부파가 나누어지게 된 발단은 화폐 수용으로 인한 율의 적법성 여부 때문이다. 즉, 승가가 요구하는 올바른 행동규칙을 옛것 그대로 준수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측면의 공동체 규정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파불교의 각 승단은 계율적 해석에 대한 입장으로 인해 더욱 형식화되었고, 교리적 해석이나 수행의 문제에서도 학문적 연구나 해석에 몰두하는 양상을 띰으로써 끝없는 갈등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도불교 상황에서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무상, 무아, 연기로 대표하는 불교의 존재관을 보다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도 부파불교식의 분석적 해석으로 도달하는 결론이 아니라, 즉각적 통찰로 존재성을 곧 연기성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로 상징되는 반야불교(般若佛敎)이다. 더욱이 이러한 반야 지혜를 바탕으로 각종 사회적인 실천을 하도록 적극 강조했으며, 그러한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켜 보살(Bodhisattva)이라 불렀다. 바야흐로 비구 스님이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살이 주인공이 되는 불교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수행과 실천을 함께하는 불교가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는 출가승단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던 불교를 일반대중으로 확대한 것으로 출·재가 모두를 위한 불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출가자보다는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일반인을 위한 대승불교로 변모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불교는 모든 인간과 중생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중시하는데, 언젠가부터 출가승단을 위한 특수한 공부 방법과 수행만 강조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점차 일반대중과는 거리를 둔 자기들만의 울타리가 생겨났다. 울타리에 갇힌 출가자만을 위한 불교를 무너뜨리고 일반대중과 함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불교를 만들어가자는 요구가 대승불교 성립 당시 자연스레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도들은 불교를 더 이상 승가라는 은밀한 영역에 가두어두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반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과 더불어 진리를 나눌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고자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관대한 불교를 원했고, 그러한 불교를 만들어가자는 주장을 환영했다. 이때가 BC 150년에서 AD 100년 사이였다.

대승계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출현으로 불교는 그 해석과 실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것이 계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이었다. 특히 계율 문제는 대승불교의 본질적이고도 전반적인 실천체계로 확대되면서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열쇠이다.

본래 율이란 출가승단의 규율 문제로 시작됐다. 그 율에 대한 해석 차이로 승단이 분열되고 다양한 부파불교로까지 분열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가승단 내부의 문제이지 신도들이나 일반대중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율장이란 계율과 승단 운영에 필요한 각종 규범들로 구성된 것으로, 출가승단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문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서 출가승단의 중심 문제로만 머물러 있던 계율이 일반대중의 윤리적 실천규범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대승적 계율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계율이라는 것이 출가승단의 규범이라는 성격을 넘어 보편적 윤리문제로 나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 이래로 재가신도들에게 제시되고 권유된 각종 자비의 실천이 대승적 계율관의 정립에 유입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이 점은 대승불교라는 것이 일반인을 위한 불교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재가신도들을 위해 시(施, 보시), 계(戒, 계율), 천(天, 생천)에 대한 가르침이 강조되었다. 출가수행자와 어려운 이웃에게 보시를 베풀어야 하며 절제 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천상의 행복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특히 출가자에 대한 공양뿐만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 재가신도의 주요 덕목임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경전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 이래의 자비실천은 아소까왕 시대에는 어려운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을 만들어서 빈민구제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초기불교 시대부터 시작된 재가자들의 이러한 자비실천은 그 후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로 새롭게 정립되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으로 고스란히 옮겨와서 보살들이 행해야 할 대승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형태가 최초에 체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초기대승경전 중에서도 성립연도가 매우 빠르다고 하는 《반야경》이다. 《반야경》에서는 대승보살의 실천덕목으로서 육바라밀을 강조한다. 대승불교 성립 이전의 수행법이 ‘8정도’로 대표된다면, 대승불교의 수행법은 ‘6바라밀’을 강조한다. 이 육바라밀 가운데 계를 가리키는 항목인 지계바라밀이 초기 대승불교도가 중시했던 계율이다. 그리고 그 지계바라밀은 곧 십선도(十善道)를 말한다고 경전은 설한다.

‘십선도’란 선악의 결과를 불러오는 인간의 주된 행위를 육체적인 행위의 측면에서 세 가지, 언어로 표현되는 것으로부터 네 가지, 마음가짐의 문제로부터 세 가지로 나누어 총 열 가지 일상생활 덕목을 규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꾸밈말, 험담, 이간질, 탐욕, 성냄, 그릇된 견해’를 말하는데, 이러한 행위를 보살은 스스로도 하지 않고, 동시에 타인에게도 행하지 않도록 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보살들은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와 남의 벽을 허물고자 했다.

초기의 대승불교도들은 이러한 열 가지 선한 행위의 실천을 통해 참다운 자비윤리의 이치를 밝히고, 그 윤리적 근거로써 이타적 삶을 행동양식으로 강조했다. 이를 보살들이 행해야 할 계, 십선계라 불렀다. 반야부 계통의 십선계의 내용과는 별도로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던 《화엄경(華嚴經)》에는 삼종정계(三種淨戒)라는 세 가지 유형의 대승계가 제시되고 있다. 이 삼종정계는 그 후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 보다 체계화된 중기 대승경론에서 삼취정계(三聚淨戒)라는 이름으로도 표현되고 있으며, 대승계를 대표하는 계율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삼취정계는 통상 삼정계로 약칭하여 불리는데, 대승계가 체계적으로 완성되어 제시된 것이라 하겠다. 삼정계는 요약하면 ‘율의계(律儀戒), 선법계(善法戒), 중생계(衆生戒)’로 설명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율의계란 기존 출가승단의 율장을 포함해서 재가신도들이 수지했던 5계, 8계, 10계 등을 망라하고 있다. 즉 대승계라 하더라도 기존승단의 율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승계의 일부분으로 포함하여 재가신도들이 수지하는 계와 수평적이고 병렬적인 차원으로 이해했다.

두 번째의 선법계는 기존의 율의계의 측면을 좀 더 확대한 계율 세계라 할 수 있다. 선법계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삼업(三業)에 의해 선을 쌓는 모든 행위를 계율이라 정의한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절을 하고,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법회에 참석하여 법문을 들으며, 참회를 위해 포살을 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경을 독송하거나 혹은 참선이나 명상을 하는 등 자신의 선업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이 바로 선법계에 포함된다.

이러한 선법계의 등장은 불교윤리가 규칙들의 체계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을 확연히 바꿔주었다. 자신의 선업(善業)을 위하여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소승율과 대승계 사이에 충돌할 수 있는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앞의 율의계가 엄격한 고상함을 추구했다면, 선법계는 인과(因果)라고 하는 보편적 법칙에 근거한 자발적 노력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생계는 ‘다른 중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실천’을 뜻한다. 이러한 실천을 ‘구속력을 가지는 보살의 계’로써 정의하는 것은 대승계의 이름으로 대승불교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취지이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목적 아래 제시된 중생계는, 대승불교 흥기 이래 줄곧 실천적 보살정신으로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 특히 내가 갖게 될 이익이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판단을 완전히 부정하고, 나의 이익이 남의 이익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

즉, 대승불교도라면 모든 행위의 가치판단을 ‘그것이 과연 중생을 위한 일인가’에 둔다.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의무로서 행할 일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 하는 모든 판단이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다른 중생을 돕는 행위인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이익 대신 나에게서 영향받을 모든 사람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고통이나 불행에 빠진 다른 중생을 돕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이다. 따라서 자비의 마음으로 행하는 갖가지 보살행(바라밀)을 중생계라고 말하는 것이니, 중생계야말로 대승계의 꽃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꽃핀 대승계

대승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인도에서 일반대중을 위해 형성되었고, 분석적 해석을 기본으로 하는 부파불교 각 승단의 번쇄한 이론불교를 탈피하여 반야지혜를 앞세운 자비의 불교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승불교는 정작 중국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일반대중에까지 확산되었다.

중국인들이 대승불교에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대승불교 특유의 세계관 때문이었다. 삼황오제의 소박한 중화주의적 신화의 세계관에 살았던 중국인들은 대승불교의 각종 문헌을 접함으로써 생명이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와 드넓은 우주관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삼라만상을 물질, 정신, 개념 등으로 분류하여 그것들의 상관관계와 변화성을 설명하는 유식(唯識) 관련 문헌이나 《화엄경》의 중중무진한 연기(緣起) 세계와의 만남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존재와 세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해내는 안목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세계관은 중국인의 의식지평을 크게 격상시킴으로써 중국의 유학(儒學)과 노장사상에까지 영향을 주어 그들을 변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어쩌면 출가자와 중국의 지식인 세계에 한해서 끼친 영향일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비정신을 앞세워 일반 민중들에게 다가간 대승계의 사회 윤리적 가르침이야말로 중국사회를 밑바탕에서부터 변화시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승불교는 중국의 존재관과 세계관을 크게 일깨우기도 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승계를 앞세운 자비의 윤리관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중국은 상고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경쟁과 실용, 그리고 가족과 사회에 대한 관리적 필요에 입각한 윤리관이 일찍부터 생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승계에서 말하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도와준다는 보편적 가치로서 자비정신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인도의 대승불교는 거대한 스케일과 정교한 이론으로 중국인을 사로잡았고, 자비정신을 내세운 대승계는 중국인의 가슴속에 새로운 윤리관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 피어난 대승계는 두 가지 측면의 자비행으로 강조되었다. 첫째는 생명존중 사상에 입각한 불살생, 둘째는 타인을 돕는 적극적인 구제 행위였다. 다른 생명을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계는 출가승단의 율장의 계목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초기의 불살생계는 백골관, 부정관을 닦던 수행자가 자살에 이르는 경우들이 생기자 자살을 금하는 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타인에 대한 살인을 금하는 것으로 정립되었고, 마침내 일반적인 살생을 금하는 계율로까지 점차 확대되었다.

그런데 불살생계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능가경》 《능엄경》 《열반경》 《범망경》 등 대승경전의 유포로 인해 불교도들이 불살생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보살은 마땅히 모든 고기를 부모의 피와 살로 생각하고, 그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고기 중에는 생명 아닌 것이 없으니 죽이지 말아야 한다.”라는 《능가경》 구절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승경전의 구절에 감화된 중국인들은 살인은 물론이고,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살생을 금하는 것이 올바른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출가자와 불교 신자는 육식을 철저하게 금하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인들도 육식을 삼가는 날을 정하여 불살생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회적 풍토를 마련했다.

오늘날까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나이 든 어른들이 뜨거운 물을 마당이나 하수구에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이러한 생명존중의 자비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렇듯 불살생계의 적극적 실천은 중국에서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범망경》의 유포로 일반사회에 널리 퍼져갔다.

《범망경》은 대승을 지향하며 보살도를 수행하는 이들이 받아 지니는 계율로 10중계(十重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를 설한다. 10중계만 보더라도 대승계의 실천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범망경》에서 말하는 보살계는 십중계의 제일계로 불살생을 꼽았다. 대승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생명을 대함에서 자애심과 아낌없는 마음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고통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을 강조하는 《범망경》은 사람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과 개인적인 만족, 그리고 훗날 반드시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면서 점점 더 깊이 민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영향은 동북아시아 불교 윤리사상의 흐름을 주도할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범망경》은 수·당 시대부터 보살계 수계법회가 활발하게 개최됨으로써 매우 존중되었다. 보살계가 불교도들의 수계법회라는 종교의식으로 유포됨에 따라 중국인의 생활 속에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왕족들이나 고위 관료들까지 보살계 수계의식에 동참하기도 했다. 당·송 시대가 되면 불교신도들은 단순히 살생과 식육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음에 처한 생명을 직접 찾아서 살려내는 ‘방생’까지도 적극 권장하며 행했다. 그리고 불살생 정신의 자비 윤리는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로 퍼져 나가 사회 일반의 윤리관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불교, 대승계 정신 살아 있나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소한 생명존중이라는 자비정신을 구현하려는 대승불교 본연의 취지는 잊지 않은 듯하다. 불살생이라는 일차적 행위뿐만 아니라, 식육을 금하는 채식생활과 자발적인 방생의 노력 등으로 일단은 거론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여기에도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반박의 여지가 있겠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본다면 한국불교 속에는 적어도 대승불교 정신이 살아 있다고 하겠다.

한국불교는 대승계 수계법회를 통해 생명존중의 자비사상으로 널리 일반에 확산되었고, 인도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었던 율의계의 성격을 넘어 방생의식과 참회의식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으나, 불교가 성행하던 시절에는 과거 많은 사찰에서 사회구호활동이 진행되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사찰과 연계하여 사회복지시설을 설치 운용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찰과 연계하여 운영한 제위보(濟危寶)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이 모두 질병을 치료하거나 고아를 돌보고 배고픈 이들을 먹여주는 사회구호시설들이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금은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지만, 조선 세종조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시행하는 빈민구제와 의료사업 대부분을 사찰에서 담당하였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대다수 구호활동이 불교의 대승계 정신, 즉 자비실천의 일환으로 펼쳐지다 보니 일반대중의 마음에 중생을 보살피는 대승계 정신이 사회적 윤리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선불교의 영향으로 계율 준수를 폄하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으며, 반야불교에 깊은 영향을 받아 탄생한 중국의 선불교를 고스란히 전수하고 있기도 하다. 육조혜능 선사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 不思惡). 이럴 때 그대의 본모습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는 현실에 사로잡혀 생성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기존 가치관을 벗어나게 하는 선불교 특유의 가르침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한국불교에도 전해지는데, 고려 후기에 중국에서 온 지공 스님이 그 주역이다. 지공 스님에 의해 전국에 유포된 무생계와 《무생계경》에도 “이것이 최상승의 무생계(無生戒)이다. 선도 짓지 말고, 악도 짓지 말라.”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무생계의 내용도 결국 ‘온갖 선행을 자주적으로 실천하지만, 궁극에는 선악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대승계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계의 이러한 측면은 한국불교에서 현실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게 나타난 사례도 많이 있다. 일부 선사와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잘못 이해한 불교도들이 선악 관념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소위 ‘무애행(無碍行, 걸림 없는 행위)’이라 하여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하며, 음주식육 등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승단 내부의 질책과 사회적 비난을 초래한 적도 많다.

한편,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금강경》에는 “머물지 않으면서 마음을 내어 행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모든 행위를 ‘공(空)·가(假)·중(中)’으로 보는 관점을 바탕으로 하며,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그러한 마음을 낸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관을 바탕으로 행하는 자비실천을 《반야경》과 《대지도론》에서는 ‘환상과 같은 자비[如幻慈悲]’라 하여 자비행조차도 ‘매이지 않는 능동적인 선행’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설령 대승계의 입장에서 선행을 하고 악행을 그치더라도 그 ‘선’과 ‘악’에 원천적으로 매이지 않고 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 선과 악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지만, 실은 이러한 태도가 현대 윤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즉 우리 사회가 ‘선이다, 악이다’ 하고 규정하는 것은 상황윤리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각종 가치관은 시대와 상황, 위치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변화한다.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악행을 그친다’는 대승계의 자세는 어쩌면 가장 현대적이고도 합리적일지 모른다. 또한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최선의 입장을 도출해 내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금강경》을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삼는다는 것은 선과 악에 구속받지 않으면서도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스님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에 대승계 정신이 확고하게 살아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대승계 정신이 불교계는 물론 일반사회의 행위 문제, 선악의 문제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대승계, 현대윤리와 어떻게 만날까

대승계는 동아시아인들에게 자비의 윤리관으로 자리 잡으며 근대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이 본격화되는 19세기 중반부터 불교적 윤리관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서구의 문물과 제도가 물밀 듯이 동양을 덮쳤기 때문이다. 서양의 문물과 제도는 자연과학, 사회과학적 성취를 기반으로 했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은 산업시대, 기술정보시대, 첨단과학시대를 열었으며, 이성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법, 정치, 사회, 경제 등의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고, 민주화와 자본주의 경제시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이후 세계는 서구적 가치관과 문화, 제도를 수용하면서 21세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현대화이다.

현대사회에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윤리관인 대승계의 자비는 현대사회의 각종 윤리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대승계의 내용이 현대 사회문제에 적용하기에는 단순 소박한 종교적 이론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체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사회의 윤리적 문제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윤리적 문제는 그야말로 개인과 사회, 국가의 제반 사항에 연관되지 않은 점이 없다. 개인의 생활과 각종 선택은 매 순간 윤리적 판단과 선택을 필요로 하며, 사회와 국가의 정책 수립과 집행 또한 그러하다. 특히 자유, 평등, 분배, 정의 문제 등은 전통적으로 정치학, 법학, 경제학 등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오면서부터 윤리학의 기본 문제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윤리학은 현대사회에서 종교를 대체하여 모든 학문과 이론의 근본이 되고 있다. 이 외에도 의학, 유전공학, 생물학, 환경학 등의 발전은 의료생명 문제, 동물권의 문제, 생태환경의 문제가 현대윤리학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 윤리 영역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과거 동아시아 윤리관을 대표했던 대승계는 과연 어떤 설명할 수 있으며,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답을 밝히기 위해 과거의 대승계는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대승계를 현대에 적용시키려면 먼저 현대사회를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를 만들어왔으며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승불교 정신을 공감하는 일반대중과 이 시대의 대승보살이 될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불교는 그동안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는다(離苦得樂)’를 대표적 슬로건으로 내걸고 이천 년 넘게 설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법은 공허한 철학적 동어반복에 가깝다. 과거 농경시대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사람의 심성에 직관적으로 다가서는 가르침이 효과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구체적인 교훈이 되지 못한다.

무엇을 선이라 하고, 어떤 것을 악이라 하는지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진보당과 보수당이 하나의 정책을 놓고, 양쪽 다 선한 동기에서 전혀 반대되는 입장을 내세울 때, 어떤 쪽 정책을 선하다 할 것인가? 정책 내용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데 사람마다 집단마다 처지가 다를 수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선악을 판단할 것인가? 이런 점은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선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있는 기준은 없다. 그 동기와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고려하면 선악의 문제는 가변적이고 상황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불교가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는다(離苦得樂)’는 교훈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종교적이고도 원론적인 수준에서 이천 년 가까이 머물러 있을 때, 도덕철학가이자 법 개혁가인 18세기의 벤담은 이고득락 이론을 사회학적으로 발전시켜 공리주의(Utilitarianism) 이론으로 만들었다.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된다. 자본주의 발달과 동시에 대두된 공리주의는 현대윤리의 이론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대다수 국가에서 입법과 정책입안 과정에서 공리주의는 기본원리로 작동되고 있다.

왜 ‘이고득락’의 가르침이 동양에서는 종교적 교훈에 그쳤으며, 유사한 개념에서 출발한 서양의 ‘공리주의’는 근현대를 거치며 사회·정치적 윤리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벤담은 불교의 ‘이고득락’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은 단순한 ‘이고득락’이라는 교훈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구체적인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보면 대승계를 말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대승계 사상이 이렇게 이론에만 그치고 현실감이 없다는 것은 불교인들이 자비를 말하면서도 정작 구체적인 현실문제에는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도 2000년 이후가 되면서 윤리적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불교인들은 이에 대해 소홀하게 생각했다. 생명 문제와 관련된 모든 논쟁과 토론에서 정작 생사(生死)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이해도 없어 보였다. 예를 들면, 의료적 필요에서 시작한 유전공학의 발달은 바이오산업이 국가 간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줄기세포의 연구도 본격화되었다. 오늘날 줄기세포와 관련된 연구는 생명윤리와 관련한 것으로 의학자, 유전공학자, 윤리학자, 종교인들과 국가의 생명 관련 위원회에서 많은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가톨릭은 초기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일은 인간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라 하여 강하게 반대하고, 성체줄기라는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계는 안일하게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면서 가톨릭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초기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은 《화엄경》에서 10바라밀로 확대되었다. 기존의 여섯 가지 바라밀행에다 ‘방편, 원(願), 역(力), 지(智)’라는 네 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것이다. 결국 추가된 네 가지 바라밀은 기존의 육바라밀이 구체적인 현실문제에 연결되지 않는 원론적인 행위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가미한 것이다. 모든 현실 존재들이 무상, 무아라는 연기적 이해를 기본으로 하되, 그들의 역사성과 다양한 현실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智)바라밀’이다. 이러한 지바라밀은 개인과 사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인 ‘원(願)바라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인 ‘방편바라밀’, 이를 현실화시키는 강력한 추동력인 ‘역(力)바라밀’과 결합하여 현실 속에서 유용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대승계도 이론상으로는 분명히 개인적 윤리를 넘어서는 사회윤리를 지향하고 있다.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나 현실에서는 종교적 이론으로 그칠 뿐, 실천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승계가 현대사회의 윤리관으로 새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대승계의 정신을 생명윤리는 물론, 현대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각오로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대승계의 정신에 관한 현대적 연구’이다. 즉, 자비와 관련된 논의는 경전 등 불교문헌에 많은 담론이 펼쳐져 있지만, 길어야 서기 5세기면 끝난다. 그 후로 천오백 년 넘게 자비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잠자고 있었고, 오직 반복적으로 주석하는 일에 머물렀을 뿐 시대마다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대승계의 현대화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은 현대윤리의 쟁점이 ‘선(善)과 정의(正義), 공정(公正) 등의 가치와 기준이 어떻게 마련될 수 있으며, 그 동기와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생명윤리, 선과 정의 문제를 다룰 때 현대적 윤리관으로 정립된 자비정신으로 설명할 때가 왔으면 좋겠다. 종교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내용을 바로 대승계가 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맺음말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종교의 실천적 부분을 논하는 것은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윤리적 부분을 거론할 때면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처럼 민망하고 난처하다. 그럼에도 곪아 터진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을 살려 누구에게나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이며, 그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종교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요소들을 다시금 점검하고 질서를 잡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율의계, 선법계, 중생계의 세 종류로 대표되는 대승계는 지난 세월 동안 대승경전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꺼내어 활용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때는 대승계가 동아시아 전체를 통섭하는 윤리관으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서양문명이 세계를 주도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어느새 불교적 윤리관은 낡고 해묵은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공리주의가 곧 대승계의 자비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대승계의 정신은 훌륭하다. 그럼에도 대승계는 알게 모르게 케케묵은 경전 속의 옛이야기가 되고 서양의 공리주의는 가장 뛰어난 정치 및 윤리 개념이 되었으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짐작건대 이는 불교계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고, 나아가 각 분야별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에도 현대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에 구체적으로 대응할만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스님들만의 역량으로는 부족하며, 현장에서 직접 적용시킬 만한 이 시대의 분야별 전문가들이 대승보살로서 나서는 수밖에 없다. 갖가지 윤리적 딜레마로 대변되는 생명윤리 문제가 그렇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 또한 그러하다.

이 모든 것에 이 시대 대승보살의 자비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선과 정의 문제에서 대승계의 정신에 입각하여 해결해나갈 수만 있다면, 불교가 현대사회의 흐름과 분위기에 좌지우지되는 종교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우리 사회를 공정한 사회로 이끌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한국불교계는 불교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지 몰라 몸부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들이 그럴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종교가 사회적 위협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승계를 논하는 것은 대승계가 단순히 개인의 습관이나 인격의 향상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불자가 대승보살이 되어 사회변혁을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


원영스님 / 조계종 교수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일본 하나조노대학 박사(대승계와 남산율종). 주요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등이 있으며, 역서로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 《일일시수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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