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2013년 2월 21일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

우리는 여기 사바세계에 살고 있다. 사바세계를 등지고 살 수 없다. 사바세계는 현실적 상황이다. 이 현실적 상황을 어떻게 불교적으로 善向하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의 세계가 불교적으로 轉廻하여 불교 그것으로 歸一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이것이 世諦佛敎가 지향하는 길이다.

至高한 이상을 向進하는 것이 불교인의 길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至高至純을 희구하다가 중간에 머물게 되면 오히려 목적 성취에 허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제불교는 사바의 현실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수행하고, 청정한 인격체가 되어 세간에 살고 있는 사람을 世諦人으로 환원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은 초기경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八正道이며, 우리는 이를 재차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응부경』에 의하면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설하시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은 피할 바이니라. 무엇을 두 가지 극단이라 하는가. 첫째는 모든 욕망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니 이는 저속하고 야비하여 범부적인 것이요,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스스로 苦行에 열중하는 것이니 이것은 고통으로서 성스러운 것이 아니며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에 의하지 아니하고 中道를 證知하였다. 이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寂靜, 了知, 正覺, 涅槃에 이르는 것을 돕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저 여래가 증지하고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 요지, 정각, 열반에 이르는 것을 돕는 중도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道라 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으로 열반에 이름을 돕는 중도라 하느니라.” (상응부경 6, 남전율대품수계 1)

8정도란 위에서 나온 바와 같이 실천수행의 德目을 이르는 것으로 八正道支, 八正道分, 八聖道支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苦樂의 양 극단을 배제한 中道에 입각하여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 8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八正道

1. 正見 : 바르게 본다는 말이다. 중생들은 이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고 하며 서로 반목질시하고 또 그에 따라 그 나름대로의 그릇된 견해로 행동함으로써 生死에 윤회하는 苦海를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괴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고 정말로 생사고해를 떠나고자 할진 대는 우선 우주 인생의 진리를 진리 그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정견이라 함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2. 正思惟 : 바르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바르게 안 바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함이 바르지 않으면 행동이 그릇된 것은 뻔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思量分別함을 정사유라고 한다.

3. 正語 : 바르게 말을 한다는 뜻이다. 마음속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함에 말과 몸으로써 하는데 몸으로써 행위보다 말로써의 행위가 앞서므로 생각한 바가 다르게 말을 하거나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거나 하여서는 아니 되며 바른 말, 좋은 말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4. 正業 : 바른 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이는 身業을 가리키는 말이다.

5. 正命 : 바르게 생활한다는 말로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행동을 합쳐서 우리 생활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6. 正精進 : 바르게 노력한다는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正命의 생활을 이르는 것이다.

7. 正念 : 바르게 一心으로 전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다른 곳에 쏟지 아니하고 오로지 일심으로 바른 것만을 잊지 않고 행함을 말한다.

8. 正定 : 정념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조금도 마음에 동요 없이 완전히 안정된 一心三昧를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8정도의 정의를 살펴보았다. 이 8정도가 현실세계에 어떻게 수용되어야 할 것인가를 해석하여 보는 것도 세제불교로 지향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Ⅱ. 팔정도의 現實的 受容

일간 신문 등에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곧 법당에 향을 사루는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거대한 불상조각이나 회색 옷을 입은 스님들을 먼저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 친밀하게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외적인 구경거리 외에는 이 불교가 우리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과연 그것 뿐 일까? 신문에 난 사진 몇 장이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싸한 잡지 기사 몇 줄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보여 주지는 못하며, 단지 외부적인 것만을 싣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겉으로 보이는 불교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참다운 불교는 무엇인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서양적 의미의 종교[신과 인간과의 관계 등]로서 간주하여, 종교니, 종교가 아니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마음을 계발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사찰의 전통적인 모습과 윤리적 기능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종교로서의 특성들을 표면적으로는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一神敎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에 의하여 우주가 운행되고 있지, 어떤 창조자인 神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길을 가리키는 스승이지 신이 아니다. 믿음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을 신에게의 절대적 복종이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나 자신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서양적인 의미의 종교(religion)가 아니다.

또한 불교는 부처님에 의해 제시된 가르침을 스스로의 확신에 의해서 믿도록 한다. 불교 신자들은 어떤 말씀이 부처님께서 얘기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도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것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때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그 敎團에 귀의하지만, 만약 理性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모든 사물이 이성으로써 증명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지성의 범위를 초월하고 있고, 더욱 고도의 능력개발에 의해서 만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 허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엽적인 것들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또한 마음을 훈련하는 데에 기반을 둔 삶의 한 방법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의 하나는 ‘절대’ 즉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고통을 뿌리째 뽑아 없애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활동은 즉흥적이든 장기적이든 간에 행복을 성취하는 데로 향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부정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불충분이나 불만족의 형태를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불만족은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행복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 활동의 출발점인 ‘불만족’은 또한 불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네 가지 근본 가르침[四聖諦]’의 공식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불만족[苦]과 그 원인[集]), 불만족의 해결[滅]과 그에 이르는 방법[道]이다.


1. 네 가지 근본 가르침[四聖諦]

가. 불만[苦]은 自我的인 삶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서 ‘불만족’ 또는 ‘고통’이라고 하는 말의 본래 의미는 아픔, 슬픔, 불쾌 등 뿐 만 아니라, 만족스럽지 못한 모든 것, 즉 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에서 가벼운 피곤함, 권태, 실망까지의 전부를 말한다.
가끔 이 말은 ‘불만족’이나 ‘불충분’으로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이 뜻이 더 정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고통’과 ‘불만족 ‧ 불충분’ 양쪽 다 쓰이기도 한다.

원본을 번역할 때 어떤 경우에는 ‘生은 고통이다. 병듦은 고통이다. 늙음은 고통이다. 즐거움은 고통이다’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즐거움은 불만족하다’라고 다시 번역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고, 그 반대적인 것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보건대 즐거움은 ‘불만족’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불만이나 고통은 ‘自我에 의한 삶(이기적인 삶)인 한은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자아적인 삶”이란 말은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이 가르침은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영혼이라고 생각되는 자아란 그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의 중심적인 핵심은 변하지 않는 영혼이 아니라, 단 1초 동안이라도 전혀 똑같지 않은 힘(energy)이 늘 변화하는 생명의 흐름(Life-Current)이다.

그래서 영원한 영혼이라고 생각되는 이 자아는 착각이고, 궁극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이 자아라는 착각 속에서만이 고통이 있게 된다. 이 자아착각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때,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해 있는 ‘절대’에 이른다. 이 안온한 경지인 ‘절대’에서는 고통은 저절로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자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설사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고통은 잠재적으로 그 안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근본 가르침[苦]’이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아에 의한 삶이거나 자아라는 착각이 남아 있는 동안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나. 불만의 근원은 갈망이다.

어떤 사람이 미끄러운 복도에서 넘어져 타박상을 입고 고통을 받는다면, 그 고통의 원인을 미끄러운 마루 탓으로 돌린다. 물론 직접적인 의미에 있어서 마루가 미끄러운 탓도 있지만, 타박상을 입은 원인이 갈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두 번째 진리’는 개별적인 상황이나 직접적인 원인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흐름을 결합시키는 통합된 힘이 자아 중심적 갈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생명의 흐름-이 자아착각-은 그 자체 속에 고통에 대한 조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끄러운 마루는 고통을 느끼게 한 단순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고통이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제거 하므로서 고통을 치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자연법칙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에서는 그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때려 부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다음의 세 번째 진리이다.

다. 해탈은 갈망을 없앰으로써 얻어진다.

생명의 흐름 즉 우리가 자아라고 하는 존재의 흐름으로 된 힘을 결합시키는 것은 자아중심적 갈망이다. 그리고 불만이나 고통이 있게 되는 것도 오로지 자기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에 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것을 때려 부숨으로써 고통의 근본 원인 또한 부숴질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자아를 없애 버리는 데에 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아를 깨뜨리는 것이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러한 오해는 사라지고 만다. 그 착각이 없어졌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때문에 착각을 깨뜨려 부순다는 것은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상은 자아착각으로 뒤덮여 있는 한 찾아낼 수 없다.

그런데 착각이 없어졌을 때 드러나는 이 실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극적인 실상이란 ‘절대’적 나지도 않고, 시작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잡다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매우 부적당하고 정확하지 못하나마 그것을 존재의 실질적인 언어로서 그것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높은 희열일 뿐더러 일상적인 존재 양태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질적인 묘사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절대’는 ‘그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말로서만이 -어느 정도까지는-암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절대’의 성취는 모든 불교도가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표인데, 불만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라. 해탈에 이르는 길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
그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올바른 이해(정견) :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
②올바른 사유(정사유) : 육욕․악의․잔인으로부터 속박 없는 자유
③올바른 말(정어) : 거짓․꾸밈․이간․악담하지 않는 말
④올바른 행위(정업) : 살생․도둑질․간음 등을 하지 않는 것
⑤올바른 생계 수단(정명) : 의식하고, 살아있는 존재에 해를 주지 않는 직업
⑥올바른 노력(정정진) : 나쁜 마음을 없애려는 노력
⑦올바른 주의력(정념) : 주의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능력의 완성
⑧올바른 집중(정정) :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실상인 ‘절대’를 볼 수 있는 마음의 경지를 개발하는 것

Ⅲ. 팔정도의 再吟味

여기 이 여덟 가지 길(팔정도)에는 神과 인간과의 관계 같은 그런 종교적인 성격의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일종의 도덕적 심리학에 가깝다. 그러나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중시하고 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왔다.
불교의 실천에 있어서 몇 가지 외부적인 모습들은 환경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변화되는데, 그 실천의 본질적인 것과 변치 않는 특성은 대개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과 양극단을 벗어난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이 八正道는 여덟 가지 단계로서 말하기 쉬운데 차례대로 실행해 가는 독립된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각각은 다른 것들과 함께 실천되어지는 것이어서, 계속해서 여덟 가지 단계가 아닌 하나의 길에 여덟 개의 평행선 같이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길인 올바른 이해[正見]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본래의 의미이다. 적어도 자기 기만이나 회피함이 없이 그렇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 올바른 이해란 존재의 성격에 대한 지적인 이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의 첫 번째로 둘 만큼 중시된다. 그러나 팔정도의 끝에 가면, 이 단순한 지적 이해는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한 절대에 대한 직관적으로 꿰뚫는 통찰력에 대신하게 된다.

두 번째인 올바른 사유 또는 목적[正思惟]이란 현명하고 공평한 판단을 어지럽게 하는 재난의 잠정적 요소들, 즉 육욕․악의․잔인함 등으로부터 지적인 능력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다.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계 수단[正命]등은 모두 팔정도의 도덕적 면인데, 이들 기능은 마음이 오염되는 것을 통제하고 불행한 사태가 발생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오염은 도덕적인 것만으로는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고, 팔정도의 다른 것들을 지원 받아야 오염된 마음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다.

다음의 올바른 노력[正精進]에서는 실천적 심리학 분야에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의 올바른 노력이란 노력의 의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의 여섯 번째는 자기 훈련 즉, 마음 상태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들을 막고 이들을 극복하기 위한, 또 정신적인 진전을 가져오게 하는 것들을 북돋우고 개발하기 위한 의지의 훈련이다.

팔정도의 일곱 번째는 또한 일종의 실천적 심리학이다. 이것을 올바른 주의력[正念]이라고 하는데, 주의력의 일반적 기능에 대한 가능한 한 모든 것의 계발이다. 주의력의 계발-한편으로는 주시력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시력을 강하게 하는-에 의해서 마음은 결국 외견상의 세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實相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올바른 주의력의 본래 기능은 자아가 비실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계속적으로 주시하는 평상시 기능을 발전시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도중 難題와 스트레스를 당했을 때 마음이 이에 잘 대처하는 데에도 있다.

불교에 있어서 주의력이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항상 똑바로 알아차리고 있도록,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이 이기심이나 감정적 편견, 또는 자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주시하는 기능을 말한다.

올바른 주의력은 매일의 우리들 생활에서 많이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올바른 주의력은 일상생활의 동기(motive)가 되는 날카로운 주시력과 명확한 이해를 가져오는 데에 적용될 수 있는데, 동기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팔정도의 마지막 올바른 집중[正定]은 더 높은 마음의 경지계발-마음의 일상적 능력을 초월한 경지-을 말하는데, 이 더 높은 마음의 경지는 자유로운 통찰력을 성취하기 위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정화하고, 또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궁극적 성취에서 ‘절대’는 얻어진다. 이 주의력의 직관적 경지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형태를 초월하여 ‘무한’하며, 모든 상대적인 존재를 초월하여 ‘절대’인 지혜이다. 그때에는 자아에 대한 착각은 갈망, 고통과 함께 초월되어 없어져 버린다.

이 꿰뚫는 통찰력은 모든 불교도가 실천하는 궁극적인 목적인데, 이것으로써 삶의 참다운 성질을 곧바로 통찰하게 된다.

‘절대’가 자아의 소멸이라면, 이 통찰력은 단순한 비존재나 無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소멸은 단지 착각의 소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에 대해서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를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나 생각조차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오직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 그 끝까지 실천하는 것뿐이다.

앞으로 세제불교의 실천원리가 부처님 교설에서 여러 차원에서 검토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청정불토로 현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을 세척하지 아니하고 청정한 것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혼돈 · 부조리 · 모순을 정법의 세계로 만들어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진리 속에서 世諦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을 부지런히 밝혀내어 불교가 현실의 불교시대를 역사를 창의적으로 정화하는 世諦佛敎로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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