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일
(한반도 선진화재단 이사장)
1: 향후 바람직한 정치발전의 방향은 무엇인가? 

정치발전의 문제를 논할 때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정치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제도의 문제](예컨대 정당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 등)를 다루는 것이다. 오늘은 전자(前者)에 국한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2012년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큰 질적 변화를 보였던 정치도약의 한 해였다. 1948년 건국 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소위 근대화 혁명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정치사에는 두 가지 풀어야 할 유산---정치발전을 가로 막는 유산-- 이 있었다. 하나는 산업화시대를 지배하였던 [권위주의적 우파정치]의 유산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시대를 지배했던 [운동권적 좌파정치]의 유산이었다.

산업화시대를 지배하였던 권위주의적 우파 보수정치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독선과 독점과 독식의 정치였다.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중요특징의 하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득권에 안주하는 정치--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정치였다. 이들은 산업화라는 국가비전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고 산업화를 이룰 국가정책과 국가전략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은 큰 장점이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에 스스로를 개조하고 쇄신해 나가는 보수개혁정신이 너무 약했다. 보수적 가치인 [자유와 공동체]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도 끝임 없이 자기개혁을 하는 것이 참다운 보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가치보수가 아니라 이익보수의 면이 강했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파적 제도를 보수주의자들이 자기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얻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가치보수가 적은지 모른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파적 제도를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정에서 거의 공짜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화 시대의 운동권적 좌파 진보정치도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분열과 대립과 갈등의 정치였고 따라서 미움의 정치였다. 다른 하나는 국가정책 내지 국가전략 부재의 정치였다. 오로지 구호로서의 민주화는 있었으나 어떤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군사독재타도의 깃발을 있었으나 타도 후 어떠한 나라를 만들 것인지 즉 민주화시대 국가경영비전과 전략에 대한 준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국민들을 민주 對 반(反)민주, 서울 對 지방, 대졸자 對 고졸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끝임 없이 분열하고 대립시켜, 서로 갈등하게 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는 전략전술에만 몰두하였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보면 1960-70년대에는 운동의 주류가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1980-9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국내에서 북을 추종하는 자생적 주체사상파가 등장함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의 헤게모니가 자유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인민 민주주의 내지 프로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으로 넘어 갔다. 그래서 진보좌파정치에는 반(反)체제적 성격이 강화되고 운동권적 분열과 증오의 정치가 고착화 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진보좌파운동에서는 소위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리버럴(liberal)--미국식 리버럴 내지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social democrat)--들이 설 땅이 점점 없게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수적으로는 물론 합리적 진보가 절대다수이지만 목소리는 항상 급진적 좌파가 압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번 2012의 대선에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질적 변화가 보이고 있다.

첫째는 운동권 정치의 종식이다.

더 이상 운동권정치로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진보좌파의 과제는 어떻게 참된 진보, 즉 리버럴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헌법과 역사를 존중하는 [합리진보]를, 어떻게 참된 진보의 가치인 [평등과 약자보호]를 정책화할 수 있는 [정책진보]를 만들 것인가 가 될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 정책적 진보를 만들기 위하여 가장 급한 과제의 하나는 어떻게 從北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극복하는가 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정리하는 지적 용기가 있어야, 우리나라의 진보좌파의 운동이 합리적 진보로 다시 태어 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집권의 길도 열리 것이다.

둘째는 기존보수의 실패이다.

선거에서는 보수우파가 이겼지만 사실은 진 싸움이다. 대한민국역사의 주류를 자처 하는 보수우파가 운동권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종북과의 관계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진보좌파에게 겨우 3% 정도를 이겼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크게 진 싸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앞으로 철저한 보수혁신의 노력이 시대적 과제가 될 것이다. [독점적 이익보수]가 아니라 [통합적 가치보수]로, 따뜻한 포용적 가치보수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리고 이를 위하여 보수당의 조직과 체질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여의도 정치에서 나와 당원과 국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이번 정권의 성공도 다음 정권의 재창출도 어려울 것이다.

셋째, 정치와 정치인의 內功 (content)가 중요해지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정치에든 [구호](선전 선동)와 [이미지]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국민들은 좋은 정치를 원하지만 일상에 바쁜 국민들은 항상 구호나 이미지를 보고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정책준비나 인격수양 등 내공(內功)을 쌓기보다는 듣기 좋은 구호나 그럴듯한 이미지만 만드는데 치중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아직도 그러한 경향이 대세이다.

그러나 최근에 오면서 국민들의 수준과 관심이 구호와 이미지에서 내공(content와 substance)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SNS가 정보의 확산 속도를 빠르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거품--이미지와 구호만 그럴듯한---을 빠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공이 없는 거품의 붕괴를 빠르게 하기도 한다.

이상의 3가지 변화를 보면서 앞으로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혹은 제3의 새로운 세력이든--우리나라 정치에서 승자가 되려면 다음의 3가지 덕목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합리성과 정직성이다---주장과 정책 내용이 합리적이고 정직해야 한다. 시대에 안 맞는 주장이나 국민을 속이는 주장은 국민이 빠르게 알아본다. 그래서 앞으로는 헛된 구호와 이미지보다 내용(정책과 인품)에 근거하여 국민지지를 받도록 노력해야지 그러하지 못하면 오래 안간다. 예컨대 [성장없는 복지확대] 혹은 [안보없는 평화논의]는 국민의 장기적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성철스님이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는데(不欺 自心), 솔직히 우리정치에 자기를 속이는 것을 능사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본래 국민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기부터 잘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포용성과 통합성이다---이제 더 이상 국민을 분열시키는데 골몰하거나 기득권의 독식에만 연연하여서는 대한민국을 끌고 살 수 없다. 한마디로 독선적 배타적이면 안 된다. 소통과 나눔과 국민동참이 필수이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로서는 더 이상 성공하는 정치를 만들지 못한다. 국민통합이 필수적이고 진정한 국민통합은 국가관 역사관 등 가치통합의 노력에서 시작되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세계성과 자주성이다----이제는 국제적 안목과 경륜을 가진 global 리더가 나와야 국가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自立과 自肯, 自主와 自强의 정신을 확실히 지켜 나가는 정치세력과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특히 한국 같은 중견국가(middle power)의 경우 더욱 그러하고, 앞으로 이웃 4강을 다루면서 한반도 통일문제를 풀어 나가야 하니 더 더욱 그러하다. 이미 닫힌 민족주의나 사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는 국가경영에 성공할 수 없는 시대이다.

결론적으로 앞으로는 [합리적이고 포용적이며 세계적인 지도자와 정직하고 통합적이며 자주적인 정치세력]이어야 대한민국을 성공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하여야 21세기 대한민국의 꿈인 [선진과 통일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는 정치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1) 원융성--불이(不二)의 사상

원융과 불이를 주장하는 불교는 분명 대한민국의 정치의 국민분열과 갈등을 줄여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 지역으로 계층으로 세대로 우리 정치는 양극화되어 있고 이를 줄여 나가는데 불교 사상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하는 것은 북의 수령독재주의와 남의 자유민주주의는 양립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양자는 결코 원융이 될 수 없고 그래서 불이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 불가의 일각에 사고의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잘못이다. 북한체제와 남한체제는 원융할 수 없기에 문익환 목사 등이 주장하는 중간체제론--남과 북의 체제의 장점을 융합하여 새로운 중도적인 체제를 만들자--의 주장은 큰 잘못이다

원융성이나 불이사상의 적용은 대한민국의 헌법가치를 존중을 존중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긍정하는 안에서 가능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의 헌법과 조선공산당의 규약 간에는 불이와 원융이 가능하지 않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가지는 [자유와 평등, 공동체와 약자보호,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시각의 차이, 강조점의 차이 등은 원융의 눈으로 보는 것이 옳고 그것이 正見이다. 좌의 가치와 우의 가치를 원융적으로 보아야 소위 양변의 고집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는 진정한 대중도(大中道)가 나온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대 중도는 단순한 중간이 아니다. 처해진 장소와 시간에 맞게--즉 시의(時宜)에 맞게-- 옳은 것 즉 천하의 공의(公義)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대 중도이다.

본래 자기의 시각만 고집하거나 절대시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가 각자 자기를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가 자기주장을 확실하고 정직하게 하면서도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하여, 오히려 서로의 견해차이를 잘 활용하여 더 [큰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그러한 큰 시각을 가져야 그 것이 대원융이고 대중도이며, 그러할 때 비로소 포용과 통합의 원리가 나오게 된다.

(2) 연기성(緣起性)--상호의존성

불교의 가르침은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이념 간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줄여 나가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노동자와 사용자간, 환경과 발전간,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 등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불교의 연기적 철학과 가르침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나의 존재가 남의 존재와 연기적으로 상생상의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 자기를 독존적 존재로 고집할 수 없고 결국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통하여 함께 발전하는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좀 더 겸손하게 상호의존성을 수용하게 되고, 나의 이익과 발전만 아니라 상대의 이익과 발전을 함께 고려하면서 공존공영의 길을 찾아 나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모든 분열과 대립과 갈등은 줄어들게 된다.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주장하는 정책내용도 자기뿐 아니라 상대의 이익과 발전도 함께 감안한 보다 훌륭한 내용이 나오게 된다. 이타(利他)가 자리(自利)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한 마디로 세계화의 시대이다. 21세기는 세상이 더욱 연기적으로 조직되어 가는, 상호의존성이 더욱 더 높아지는 시대이다. 따라서 연기적 세계관을 가진 국민들은, 세계화시대 걸 맞는--보다 잘 작동하고 효과적인--- 정책, 문화 등을 만들 수 있어서, 세계화시대 더 잘 발전하고 성공하는 국가를 만들 수 있다.

(3) 보살의 세계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추구는 개인적 욕심(권력욕)이나 사적 혹은 집단적 恨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욕심이나 한이 아니고 원(願)---보살의 원--에 기초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지도자는 나올 수는 없을까? 이것이 이 시대의 하나의 화두이다. 사리(私利)가 아니라 대의(大義)내지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정치지도자는 나올 수 없는가? 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원력이 사욕보다 강력하고 집요할 수는 없는가?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여야 진정한 보살일 터인데 과연 가능할까? 그러한 권력을 추구하는 원력보살이 나올 수 있는가? 왜 아닌가?

부처님 가르침 속에는 분명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했는데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보살이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보살이 분명 있다면 그 중 일부는 당연 정치지도자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1970년 초 경기도 광주 민란 (民亂)이 있었을 때, 성철스님께서 참선방을 광주 천막촌으로 옮기셨으면 어떠했을까?)

(4) 정치과 종교의 관계

정교분리(政敎分離)가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주장일 뿐이다. 최선이나 차선은 아니다. 정치를 종교에 이용하거나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중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종교인이 중생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를 외면할 수 있는가? 동시에 국민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정치인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력을 주는 종교의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올바른 종교인이고 정치인인가? 아니다.

종교인도 정치 대하여 발언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최소한 종교지도자의 교육(종교의 질의 유지)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여야 한다. 환언하면 종교인들도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해야 하고 정치인들도 올바른 종교정책--특히 성직자교육정책--을 세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문제는 행위자가 사심(邪心/ 私心)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종교인이 정치에 발언해도 사심으로 하면 종교인의 행동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지도자교육에 정치가 관여해도 개인이나 특정단체의 이익을 위하여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종교정책이 아니다. 그러면 사심여부를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 국민이 깨여 있다면 언론이 깨여 있다면 종단이 깨여 있다면 구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면, 아직 우리의 종교와 정치가 거기까지 성숙되어 있지 않다면,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통일의 시대와 불교

한반도에 통일의 기회가 가까이 오고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점차 북한은 중국화(中國化)되고 동북아에서는 신 냉전(new cold war)이 시작되고 한반도는 영구분단의 계곡으로 추락할 것이다. 우리는 선진도 통일도 모두 실패하게 된다.

통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통일]이다. 이미 주장한대로 남과 북의 정치체제나 경제체제에 중간은 없다. 즉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또 시장경제와 통제경제 사이에 중간은 없다. 그러나 남과 북의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전통 등 비정치 비경제분야에서는 융합과 통합의 여지가 클 뿐 아니라 반드시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남과 북의 통일과정에서 우리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자기를 절대시 하지 않는 불이와 융합의 사고, 그리고 상대의 이익과 발전을 소중히 하는 연기적 사고 등이 민족통합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역사를 보면 남과 북의 분단, 6.25 전쟁 등으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통일과정에서 이들의 아픔과 한(恨)을 대대적으로 해원(解寃)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이 일에 앞 장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이원론에 기초한 서양종교보다,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를 주장하는 불교가 해원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불교가 지금부터 이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3: 맺는 말 : 방일(放逸)의 병(病)

이 시대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싶을 것이다. “불자들이여 [마음개조(종교)]하면서 그 원력으로 [세계개조(정치)]를 하라”고 . 그리고 같은 이야기이나 “[세계개조]하면서 그 원력으로 [마음개조]하라”고 가르치시고 싶으실 것이다. 두 개를 함께 하는 것이 옳다. 종교와 정치는 결코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시고 싶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지향하는 본마음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원리적으로 세법(世法)과 불법(佛法)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와 정치의 올바른 관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를 내세워 정치를 멀리하거나 정치를 내세워 불교를 멀리하는 것은 진리는 아니다. 나는 마음개조를 하니 세계개조는 나의 관심이 아니라고 하거나 나는 세계개조를 하니 마음개조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불법이 아니라고 본다. 올바른 불교는 육조혜능스님 주장하듯이 불이지교(不二之敎)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우리 불자들이 마음개조도 세계개조도 모두 소홀히 하는데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방일(放逸)의 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에 대한 책무와 시대와 역사에 대한 책무의 방기(放棄)가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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