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이도흠
한양대 교수
1. 머리말

출가라 함은 세간을 떠난 것을 이르는 것인데, 상당수의 스님이 온라인상으로는 세간에 얽매여 있다. 휴대전화나 스마트폰, 인터넷을 통해 속인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세간사를 접하며, 그중 일부는 세간에서도 금지한 범계 행위를 하기도 한다. 반면에, 예전처럼 이 집 저 집을 다니지 않고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단번에 수백만 명의 중생들을 팔로워나 페친으로 확보하여 교화하고 제도하기도 한다. 팔만대장경을 손톱만 한 유에스비 안에 담을 수 있고, 언제든 인터넷을 통해 읽고 검색할 수 있다. 경전의 말씀들을 인터넷에 올리면 수많은 네티즌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하이퍼텍스트를 생성할 수 있고, 법당에서 디지털 장치를 통해 경전에 나오는 장면을 재현할 수도 있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다. 과도기라 양자가 뒤섞여 있지만, 디지털 사회는 아날로그 시대와 전혀 다른 논리체계와 패러다임으로 움직인다. 이는 새로운 사회문화의 지평을 열고 있으며, 이 속에서 인간 또한 ‘매트릭스적 실존’이라 할 만큼 전연 별개의 사고와 실천을 하고 있다. 이처럼 아날로그사회와 디지털 사회는 명백하게 다른 사회이기에 이 맥락 안에서 불교도 다른 위상과 의미를 갖는다. 이런 디지털 사회를 맞아 불교 또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재해석은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하나는 다른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디지털 사회를 불교 교리를 이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교교리를 변화한 사회에 맞게 교조적인 틀을 넘어 재해석하되,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디지털 사회에 대해 다양한 입장에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디지털 사회의 가장 큰 특성인 가상성,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거나 전도된 재현의 위기론, 아날로그형 인간과 대립적인 사이버 세계의 인간 유형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가상성과 이환수환(以幻修幻)

디지털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상성이다. 가상의 세계는 디지털 사회에 와서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컴퓨터가 만들어준 화면에서 가상으로 악당들을 싸워 물리치고 스포츠 경기를 하고 세계 곳곳은 물론 우주를 여행하며 더 나아가 제국을 건설하기도 한다. www.secondlife.com으로 들어가면 가상의 나를 만들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고, 취미활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이곳에 몇몇 나라는 대사관을 두었으며 삼성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기업은 지점을 설치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가상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며 현실과 경계를 무너트리는 데 있다. 산업화시대에 가상은 현실과 대립되는 영역에 있었지만, 디지털 사회에 와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과연 어느 것이 가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CNN을 통해 중계된 미국의 이라크 전쟁 장면을 보고 대중은 상당 부분에서 과연 어느 것이 컴퓨터그래픽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매트릭스〉는 영화나 컴퓨터만이 아니라 그중 상당 부분이 현실에 나타난다. 가상섹스, 가상여행은 이미 상용화 단계이다. 가상이 현실과 자리를 바꾸고 있다.

한 소년이 자신의 동생을 여러 차례 칼로 난자하여 죽였다. 이성을 충분히 되찾을 시점인 보름 이상의 기간이 지난 후 그 사건을 담당한 기자가 동생을 죽인 데 대한죄책감이 없는지 물었다. 게임 중독자였던 그는 악마를 죽인 것인데 왜 죄책감을 갖느냐고 반문을 하였다고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디지털 사회에 와서 대다수 사람이 그 소년처럼 조금씩은 가상과 현실을 착각한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 가상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불교는 가상성의 이런 모순에 대해 어떤 빛을 던질 것인가. 불교에서 이와 통하는 개념이 환(幻)일 듯한데, 이에 대하여 《원각경(圓覺經)》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남자야, 일체중생들의 갖가지 幻化가 모두 여래의 圓覺妙心에서 나온 것이니, 마치 허공의 꽃이 허공을 따라 존재하는 것과 같다. 幻인 허공의 꽃은 없어지더라도 허공의 본성은 무너지지 않으니, 중생의 환이라 할 마음도 다시 환에 의하여 없어질 것이나, 모든 환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本覺의 마음만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환에 의하여 본각을 말할지라도 그 이름은 환이며, 만일 본각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오히려 환을 여의지 못한 것이며, 본각이 없다고 말할지라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환이 없어져야 움직이지 않는 경지라고 부를 수 있느니라.

선남자야, 일체의 보살과 말법 세계 중생들은 온갖 허깨비인 허망한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이니, 멀리 여의려는 마음을 굳게 잡아 지니어서 환과 같은 마음도 멀리 여의어야 하며, 환을 멀리 여의겠다는 생각은 물론 멀리 여의었다는 그 생각까지도 멀리 여의어서 더 이상 멀리 여읠 것이 없게 되면, 곧 모든 환은 없어지느니라. 비유를 하면 마치 나무에 나무로 구멍을 뚫고 두 나무를 비벼서 불이 일어나면 나무는 없어지고 재는 날아가고 연기 또한 사라지는 것처럼, 환으로써 환을 닦는 것도 그와 같아서 모든 환은 비록 다 없어지더라도 아주 없어지는 것[斷滅]에 들어가지는 않느니라.” 
 
가상의 세계에서 남북통일을 수천 번 했더라도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幻)을 여의지 못하면 본각(本覺)이 없듯, 가상성을 떠나지 않으면 현실은 없다. 불교에서 바라보면 이 세계와 존재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생각과 표현 또한 환(幻)이다.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이 없이 서로 인과관계로 얽혀 있어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조건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에 공(空)이다. 존재는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모인 집합체에 지나지 않기에 실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찰나에 스쳐 지나는 것이고 우리 의식이 빚어 놓은 것이기에 모든 대상은 허상이며 아(我)도 유(有)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저 풀과 돌과 산과 하늘이 모두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를 가상이라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 또한 가상이다. 이 세계는 환이 끝없이 겹을 이루고 주름이 잡힌 것이다. 이 세계의 모방인 가상의 세계는 환(幻)의 환(幻)이기에 더욱 거짓이다. 그러니, 이것이 거짓임을 알고 이에서 벗어나야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먼지만 지우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우리는 모두 본각을 가지고 있기에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실제에 다다른다.

어떻게 그리할 것인가. 《원각경》은 그 구체적인 방법 또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환수환(以幻修幻)이다. 거짓이지만 가상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디지털 사회에 와서 이는 현실의 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확히 말하여 가상과 현실이 서로 연기적 관계에 있다. 가상이 조건이 되어 현실이 이루어지고, 현실이 조건이 되어 가상이 만들어진다. 깨달음과 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가상이라는 생각이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고, 깨달음은 가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을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다. 곧 환을 방편으로 하여 환을 없애는 수행을 닦아야 한다.

가상과 현실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탈현대인의 실존의 두 양식이다. 가상과 현실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씨와 열매처럼 현실을 씨로 하여 가상을 만들고, 가상을 통하여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니 둘도 아니다. 가상은 현실이 없이 존재하지 못하니 공하고, 현실 또한 가상이 없이 존재하지 못하니 공이다.

하지만 씨가 죽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 가상이 있어서 가상을 가상이라 인식하고 버릴 때 현실을 인식한다. 열매가 과육을 썩히면 씨를 내듯, 현실이 있어서 현실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에서 벗어날 때 가상을 구성한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통하여 현실의 모순을 읽고 현실의 변혁을 실천하듯, 가상을 통하여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며, 이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의 한계와 모순을 읽는다. 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느끼는 이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듯, 현실에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구체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느낌으로써 가상을 꿈꾼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을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 관계로 놓고 이환수환의 방편을 취하면, 가상을 통하여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고, 현실을 통하여 가상을 초월적으로 꿈꾸는 일이 가능하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현실 안에 가상이 스며들어 있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은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하다. 이 모순과 갈등을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 불교는 많은 한계를 갖는다. 이에 대해서는 서양의 이론이 더 적절하다. 대신 현실과 가상을 실체론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보는 점은 연기론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이에 현실의 모순은 서양 이론을 빌려 해석함과 아울러  현실과 가상을 불일불이의 연기의 관계로 놓고 해석하는 것을 종합하는 것이 앞으로 과제다.

3. 재현의 위기론과 대승기신론

아날로그 사회에서 현실이란 ‘지금 여기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일과 사물’ ‘실제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원본에 해당하는 무엇’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사건이란 인간 주체가 ‘지금 여기에서’ 세계와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대응하는 양상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때문에 인간은 오감을 통하여 사건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분명하게 현존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들이 사건을 일으키면서 현실을 구성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존재들이 일으키는 사건은 늘 원본이었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여 원본인 현실을 객관적으로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현하였고, 이 재현된 복사본에는 원본의 현실, 더 정확히 말하여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와 양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에서는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론을 편다. 디지털 사회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음은 물론, 현실 자체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진행하고 있는 학술대회는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인간들이 구체적 행위를 통하여 벌이고 있는 원본의 사건인가. 필자는 작년의 학술대회를 원본으로 하여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였다. 작년의 학술대회 또한 재작년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을 뿐 재현의 반복이다. 발표문을 쓰고 읽으며 붓다, 용수, 마명, 원효 등을 떠올리고 그 사상을 글로 표현한다.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며 정의, 평화, 복지, 생명 등의 가치를 지향하며 그 가치에 부합하도록 글을 쓴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여기’에 겹쳐진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생존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실은 재현이 되먹임[feedback]하는 장이다. “물질적으로 생존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재현이 작용하고 있다.” 현실이란 과거와 미래의 재현이자 복사본이다.

우리는 지금 만해축전 학술대회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다. 얼핏 보면 이는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다. 흔히 현실이 있고 해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단지 한두 시간만 지나면 “그 학술대회가 괜찮았다, 혹은 별것이 아니었다.” 등의 해석만 남는다. 현실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현존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모든 현실에 해당된다.

현실이란 있는 듯 없다. 우리는 가상과 환상이 추상적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반면에 현실은 구체적이고 존재하는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 발표문을 읽는 이 순간도 이미 ‘스쳐 지나가 버린 사건’에 불과하다. 아무리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거나 수많은 사람이 공유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흘러가 버린 냇물이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반복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냇가로 가 저 물이 바로 어제 내가 마셨던 그 물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필자조차도 내 글과 말을 통해 현실을 반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진정한 현실이란 있지만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현실은 텍스트를 통해 재현되고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현실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은 사라지고 해석만이 남는다.

실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식틀, 범주, 또는 참조체계에 따라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틀, 범주, 참조체계는 철학자가 만들어놓은 흐르는 물 위에 선 굳건한 개념의 건축물, 또는 권력이 만들어놓은 허상이다. 현실은 인간이 자신의 형식으로 질서를 부여하고 주관적으로 해석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 와서 재현과 해석이 현실을 구성하는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아날로그 시대에서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고 그 사랑을 재현한 소설과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광고와 영화 속에 묘사된 사랑을 현존하는 남녀가 재현하여 현실을 구성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광고나 영화 속의 사랑을 흉내 낸다. 현실을 모방하여 예술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텍스트를 모방하여 현실이 만들어진다. 기업, 스포츠 경기, 군대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는 전략과 전술을 수정한다. 정치의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선거가 행해지기 전에 여론조사를 한 후, 이에 따라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자를 교체한다. 재현과 해석이 현실을 구성하면서 가상성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졌다. 컴퓨터로 합성된 판타지만이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굳건히 믿는 이 현실 또한 가상의 것을 모방하고 재현한 가상이다.

모본이 원본을 대체한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라고 말한다. 하이트 맥주는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지하수를 광고에 사용하여 맥주시장의 판도를 재편할 정도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지하수가 실제 지하수보다 더 차고 달고 시원하고 맛있는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를, 모본이 원본을, 가상이 현실을,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다. 원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모본(模本)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와서 현실의 세 가지 의미−‘지금 여기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일과 사물’ ‘실제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원본에 해당하는 무엇’−는 모두 전복되고 있다. 새로운 사유들은 지금에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 있으며 현재 또한 과거와 미래의 재현에 불과함을, 실제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라 생각한 것은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원본이라 여긴 것이 실은 모본임을 밝힌다.
사면이 거울인 방에 촛불을 가져다 놓으면 무한대의 촛불이 만들어진다. 모든 거울들이 거울 속의 촛불들을 무한히 반사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을 반사하기에 거울이고 동시에 다른 무엇에 의해 반사되기에 상(像)이다. 우주에 있는 일체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포섭하고 있기에 서로 반사경인 동시에 영상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은−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는− 다른 모든 사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반영해내며 어떤 특정 사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라기보다는 대상의 상이나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성에 대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때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모든 존재 일체를 부정하는 필경공(畢竟空)의 인식이 깨달음의 바탕이다.

촛불이 무한대로 비추는 방안에 수정공을 가져다 놓으면 그 수정공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비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가 한 티끌 속에 있는 한 원자에 압축되어 있고 우주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상동성을 갖기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연구하여 우주의 비밀을 해명하려 한다. 전자가속기를 통해 힉스입자 등 원자 안의 작은 미립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면 우주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고 허블 망원경 등을 통해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면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도 한 걸음 진전된다. 하나의 세포를 채취해 배양하면 한 사람의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듯, 세포가 인간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이다. 망망한 우주가 곧 하나의 원자이고 하나의 원자가 곧 망망한 우주이다. 의상의 말대로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일체와 관련지을 때 하나이다. 하나에 열이 있고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하나에 일체가 담겨 있으니 하나가 전체이다. 국화꽃 한 송이에서 무상(無常)을 읽고 연기의 법을 깨닫듯 하나에서 전체를 보니 하나가 곧 전체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무한한 조화가 연기 아닌 것이 없으니 전체가 곧 하나이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의 구슬 속에 담겨 있으니 일체가 하나이다.

현실이란 근원적으로 허상이고 집착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은 ‘나와 내가 무한한 연관 속에 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연기의 사유로 보면 나는 타인인 동시에 나이며, 주체는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다. 현실은 허상이지만 연기를 드러내는 것은 실상(實相)이다.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연기를 드러내면 그 텍스트는 현실에 담긴 진리를 비춰준다. 연기론에 따라 현실을 ‘지금 여기에서 존재들이 현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을 위해 세계와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연기(緣起)를 깨달아 화해하면서 사건을 만드는 장(場)’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렇게 현실을 정의할 때, 재현을 전적으로 부정하여 재현의 위기를 운운할 필요는 없다. 언어가 궁극적 진리를 드러내지 못하지만, 인언견언(因言遣言), 곧 의어(義語)를 통해 진리의 한 자락을 드러내는 방편은 될 수 있다. 재현의 위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실미도〉가 1970년대와 21세기, 신문 보도와 영화, 기간병과 훈련병들과 우리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당시 신문과 보고서에서 은폐하였던 현실에 담긴 진실을 드러내듯, 재현은 현실에 절대 다다르지는 못하지만 모든 현실이 다 허상이라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지금 여기에서’ 이것과 저것의 연기 됨을 드러낼 때 현실 속의 진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존재’한다. 그것을 일러 ‘구체적 현실’이라 명명한다.

현실과 해석, 진리의 관계를 대승기신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입의분(立義分)〉에서 마명(馬鳴)은 일심(一心)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고 진여문에 체대(體大), 생멸문에 용대(用大)와 상대(相大)를 두어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원효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의 실체를 체, 상, 용으로 나누되 일심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다. 원효의 말대로 “대승의 뜻이 이 세 가지에서 지나침이 없기 때문에 일심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체는 마명이 말한 대로 증감은 물론 늘 변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는, 모든 불변을 여읜 것이다. ‘상용(相用)’이라 말한 것은 두 가지의 뜻이 함유되어 있다. 여래장 중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의 상(相)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상대(相大)의 뜻이며, 또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용대(用大)의 뜻이다. 둘째는 진여가 일으킨 염상(染相)을 상(相)이라 이름하고 진여가 일으킨 정용(淨用)을 용(用)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상용 각각의 관계이다. 원효는 체상용을 범주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쟁의 논법으로 삼자의 관계를 설정한다.

만약 상주(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體)라 하고,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무상(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심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뭄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

세계는 원래 하나이나 생멸문에서는 상(常)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궁극적인 것과 무상(無常)하여 이루어지고 찰나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가 진여(眞如)의 모습인 체(體)이며, 후자는 나고 사라지는 상(相)과 용(用)이다. 체(體)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실체를 나타낸다. 따라서 체는 상과 달리 사물이 드러내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체로 깨달은 것이다. 반면에 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경험적이고 세속적이다. 경험되고 드러나 나고 멸하는 것을 세계의 상(相)이라 한 것이다. 상은 체가 드러나 나고 사라지는 바다. 인간이 경험에 의하여 사물을 드러나는 그대로 보는 경지이다.

또 세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고 기능을 한다. 인간으로 보면 실천이, 진정한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자비와 덕을 베푸는 것이 용(用)이다. 따라서 용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다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고 기능을 한 것이며, 사물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운동한 것이다. 원효는 세계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보이는 것을 다시 세계의 현상 그대로 보이는 것과 작용하여 드러내는 것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체상용의 원리는 서양철학처럼 대립적이지 않다. 체상용이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나, 모두 일심(一心)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해 “마음의 나고 사라짐은 무명(無明)에 의지하여 이루어지고, 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본질적 깨달음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두 개의 본체(本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화합(和合)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승기신론의 이 원리를 재현의 위기론에 적용하여 보자. 인간의 참[體1]는 영원히 알 수 없으나 이를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한 자락 엿보는 것처럼, 참은 짓[用]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몇몇 원숭이가 직립을 하고 손을 쓰면서 손이 발달하고 뇌가 점점 커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새를 갖는 것처럼 짓은 품[相]을 만든다. 뇌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진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와 다른, 인간의 특질을 드러내는 것처럼 품이 참을 담는다. 이처럼 체는 용을 통하여 드러나고 용은 상을 만들며 상은 체를 담으며 이 체는 또 다시 용을 낳는다.

이처럼 현실[참, 體1]은 알 수 없고 다다를 수도 없지만, 인간의 상징적 상호작용 행위[用]를 통해 일부 드러난다. 이는 텍스트[相]를 만든다. 이 텍스트가 몸을 품고 있기에 읽는 주체들은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텍스트에 담긴 현실[몸, 體2]을 읽는다. ‘몸의 현실’이 일상의 차원에서 감지하는 현실이라 할 것이다. 물론 실재 현실인 참의 현실[體1]과 텍스트를 통해 재구한 몸의 현실[體1]은 동일하지 않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실재계가 현실이라면 인간의 사회적 상징 행위가 상징계이고 상상계가 텍스트이다. 인간은 영원히 실재 현실에 이를 수 없다. 현실은 있지만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몸의 현실에서 연기와 일심(一心)을 발견하고 그로 돌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실재 현실의 한 자락을 엿볼 수는 있다.

진정한 텍스트를 통하면 우리는 현실에 점점 접근해 간다. 모더니즘은 현실을 애써 회피하고 텍스트와 감각의 혁신에만 주력하였고 리얼리즘은 텍스트를 통하여 현실을 객관적이면서도 올바르게 재현할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을 알 수도 다다를 수도 없는 것으로 해체해버렸다. 이제 ‘지금 여기에서’ 몸의 현실 재현을 통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연기되지 않고 갈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비판하고 부정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현실 너머에 있는, 언어로는 드러낼 수 없는 일심(一心)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인식하고 그를 지배하는 신화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으며, 연기의 구조를 갈등의 구조로 바꾸려는 세력에 저항하면서 역사의 진보를 이룩할 수 있으며,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현실 너머의 실재 현실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      

4. 사이버 세계의 인간관과 화쟁론

아날로그 시대의 가장 큰 모순 가운데 하나는 동일성에 갇힌 인간이 타자를 구분하고 더 나아가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유색인, 이민족, 빨갱이, 장애인’ 등으로 타자를 구성하고 자신을 ‘백인, 우리 민족, 우파, 정상인’으로 간주하고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타자를 자신의 일과 의례와 놀이에서 배제하고 때로는 폭력을 가하면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강화하였다. 인류의 문명과 교양이 가장 발달한 20세기에 전쟁과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자원, 이데올로기의 대립, 집단의 이해관계도 작용했지만, 그 심층에 바로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이버공간은 동일성을 해체한다. 50대의 교수가 인터넷상에서 아바타를 만들어 20대 청년이 되어 10대 여인과 싸이질이나 채팅을 할 수 있고, 40대의 열혈 중년이 되어 SNS를 활발하게 할 수 있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모든 것을 둘로 가르던 이분법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내가 타인 속의 나와 대화하고 타인이 내 속의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곳이다. 내가 합성하여 만든 비서가 내 문서를 작성해 주고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듯 현실이 바로 환상으로 변하고, 환상인가 하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이미지를 통하여 느끼고 생각하기에 상징계를 깨고 상상계를 지향한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나가기에 모든 경계, 영토, 권위, 제도는 무너진다. 익명의 네티즌끼리 소통하면서 인종, 계급, 성, 사회적 위상, 학력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인간형과 디지털 시대의 인간형은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

<표 1> 아날로그형 인간과 디지털형 인간의 비교

 

아날로그형 인간 집단과
조직
명령과
위계질서
자기 지키기
동일성 지향
성곽 욕구추구 부정의
 언명
농경민형
디지털형 인간 개인과
자아
게릴라 위계의 해체  초원 욕망추구
긍정적
 언명
유목민형/리좀형

아날로그형 인간이 집단과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개인과 자아의 즐거움과 충족감에 몰두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명령과 위계질서를 따르고 복종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위계를 깨고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활동하기를 좋아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동일성에 포획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신념으로 뭉친 지사처럼 이에 부합하게 행동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다중인격을 형성하거나 타자에 맞추어 그때그때 자신을 형성한다. 아날로그형 성곽을 쌓는 농경민처럼 경계의 안과 밖, 나와 남, 우리와 타자, 문화와 야만을 구분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초월을 떠도는 유목민처럼 그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본능이 요구하는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욕망을 꿈꾼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하지 마라’라는 부정적 언명을 좋아하고 그에 대한 죄와 벌로 인하여 이에 복종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긍정적 언명을 좋아하고 자신이 재미있거나 좋아서 이를 수행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농경민처럼 다양한 범주로 영토와 경계를 만들고 이에 얽매여 이 울타리 안에서 생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경계를 허물고 유목민으로 떠돌고자 한다. 그는 땅속줄기(rhizome)처럼 역동적이고 이종성(異種性)을 추구하고, 무한한 연결망을 가지며, 권위와 서열 등 모든 위계를 해체하고, 안과 밖의 구분이 없이 무수한 출구를 지향하며 파열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디지털형 인간형을 설명할 수 있는 불교의 논리가 불교의 연기론이다. 그중에서도 화쟁의 변동어이론(辨同於異論)이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別도 없는 것이다……

서양의 실체론으로 보면 주체는 확고한 동일성을 갖지만, 연기론으로 보면 이는 허상이다. 우리가 타인을 10년 만에 만나 얼굴을 보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침에 만난 이를 저녁에 만난다면 달라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수만 개의 세포가 변하였기에 두 얼굴은 차이를 갖는다.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기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아주 미세하여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지만, 내 호흡에 영향을 받아 내 앞의 대기의 미생물이 달라지고 그리 변한 대기가 나와 내 주변의 사람의 몸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 달라진 몸은 다른 숨을 내뿜고 그 숨은 다시 대기의 미생물에 변화를 준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 조건이 되고 상호작용할 뿐만 아니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dynamic)인 상호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원인이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된다. 육체만이 아니다. 타자의 의식, 말, 행동과 몸짓, 댓글과 리트윗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를 형성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렇듯 찰나의 순간에도 타자는 내 안에 늘 들어오고 있고 그 역도 언제나 진행 중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다.

이렇듯 우주 삼라만상이 무상하고 연기의 관계를 맺고 있어,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조건을 형성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보지 못하고 고정성에 집착하면, 원인에서 결과로 단선적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하면, 존재는 자신을 주체로 착각하고 동일성을 형성한다. 동일성에 집착한 자아는 다른 존재마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고정된 자아와 다른 형상(eidos) 및 속성을 가진 존재, 동일성의 영토로 환원되지 않는 자, 진동을 받는 자, 원인에 의해 생성된 결과, 영향력에 의해 바뀌는 자, 인식 및 판단의 대상, 개조되는 세계를 타자로 설정한다. 동일성이 형성되는 순간 세계는 동일성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뉘고,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미며, 타자로 간주한 것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의 변동어이론을 재해석하여 눈부처의 차이를 디지털 사회에서 대안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할 수 있다.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그 형상이 부처의 모습과 닮은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이는 내 모습 속에 숨어 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나보다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친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눈부처는 타인 안의 부처이자 내 안의 부처이다.

눈부처의 상생, 곧 역동적인 상생은 개념적이고 당위적인 상생과 다르다. 눈부처의 상생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가 대화를 하여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 감성에 의해 차이를 긍정하고 몸으로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들뢰즈(G. Deleuze)가 ‘개념적 차이’와 달리 ‘차이 그 자체’를 내세우고 이는 동일성에 절대 포섭되지 않고 감성에 의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고 했는데 이와 유사하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찾아내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이자 상생이다. 이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과 갈등,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그 타자가 자신의 원수든, 이민족이든, 이교도든 그를 부처로 만들어 내가 부처가 되는 사유다.

하지만 가유(假有)로서 주체는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며,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저항하며, 지향성을 따라 실천하는 중심이기도 하다. 주체 없이 세계의 모순을 읽는 것도, 부조리한 세계에 대응하여 더 나은 세계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앞으로, 필자가 주장한 눈부처−주체처럼, 인식과 해석과 실천의 주체와 연기적이고 타자성(alteritry)을 갖는 주체를 종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5. 맺음말

디지털 사회는 아날로그와 전혀 다른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교리야 변할 수 없지만, 그 사회문화적 맥락에 있는 인간의 삶이 급속도로 변화하기에 그에 맞게 해석은 변해야 한다. 불교는 바로 그것을 허용하는, 역동적이면서도 해체를 지향하는 사상이기에 디지털 사회에서 더욱 밝고 환한 빛을 비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소통의 면에서 보면, 아날로그 시대가 일방향 소통인 것과 달리 디지털 사회는 쌍방향 소통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경전의 문구나 이를 나름대로 해석한 텍스트를 인터넷, 페이스북, 트위터 등에 올리면 찰나의 순간에 이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퍼지고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를 다시 가공, 포장, 재해석, 패러디하여 하이퍼텍스트를 생산하여 퍼트리고 리트윗한다. 개개의 한 사람이 중심인 노드를 형성하여 퍼져나가기에 이는 구슬 하나하나가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고 구슬끼리 서로 비추어 무한대의 삼라만상이 프락탈(fractal)을 형성하는 인드라망 구조와 흡사하다. 진리는 바로 그 사이에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혹자는 이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300여 만 년 동안 짐승과 다름없이 살다가 수십만 년 전에서야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에 적응하기 위하여 몸속에서 중요한 진화를 하였다. 그것은 바로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다.

이를 통해 인간은 타인을 모방하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다. 한마디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원천은 거울신경세포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우리가 무수한 쌍방향 소통 속에서 거울뉴런을 한껏 활용하여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댓글과 리트윗에 집중하고, 그에 담긴 아픔에 공감하면서 연대한다면, 더 나아가 그에서 환희심을 느낀다면, 우리는 좀 더 건전하고 정의로운 디지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환희심으로 충만할 것이다. ■

 

이도흠 /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편찬 연구위원, 민주화를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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