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박병기
교원대 교수
1. ‘일상 속의 실존’이라는 화두

우리 일상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일의 반복과 그 반복에 수반되는 지루함이라는 느낌, 그 느낌마저도 다시 일상화되어 희미해지는 과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어떤 사회에 주인으로 머물고 있는지, 여행자로 머물고 있는지에 따라 그 지루함의 강도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지만, 여행자조차도 곧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피해 갈 도리는 없다.

우리 일상은 다른 한편, 먹고사는 문제의 숭고함이라는 맥락 속에 위치한다. 생명을 타고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존재자는 없고, 각 존재자의 일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중심축으로 삼아 전개된다. 인간 존재자의 경우도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자연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이른바 도시문명 속의 인간은 그 문제를 ‘돈’이라는 간접적 매개체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일상을 주로 돈과의 연관성 속에서 지내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뿐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숭고하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경우보다는 온종일 사냥을 나갔다가 겨우 먹잇감 하나를 물고 돌아와서 입을 쩍쩍 벌리는 새끼들에게 조심스럽게 넘겨주는 어미 독수리의 일상 속에서 더 선명하게 입증된다. 자신의 배고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 입 속에 모든 먹이를 기꺼이 넣어주는 어미새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 새끼 입의 거친 놀림과 겹치면서 숭고함의 본래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인간의 경우는 얼마나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언어와 이성(logos), 정의(올바름)의 문제를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으로 규정짓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치열한 노력은 이미 이성과 언어의 영역에서 상당 부분 무너지는 중이다. 그나마 짐승들의 집단과 인간의 집단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규정해줄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강조한 정의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소크라테스와 대화했던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인간 사회의 정의는 대체로 강자의 이익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사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짓밟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권력을 쟁취한 전두환이라는 인간 존재자가 여전히 큰소리를 치면서 자신이 내세웠던 정의가 곧 강자의 이익임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주는 중이다.

인간 존재자의 가치론적 위상은 짐승의 그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짐승들의 경우 자신의 생존 본능에 충실하면서 먹을 만큼의 사냥과 채집을 하고 자신이 위협받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는 경우도 드물다. 성욕의 경우도 대체로 발정기가 정해져 있어서 생식을 위한 성행위를 정해진 기간 안에서만 한다. 물론 이러한 짐승들의 삶에 어떤 가치론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공감 능력만을 고려할 경우 짐승들에게 가치의 영역이 온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주장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 안에 갇힐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특히 도시문명권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현재의 우리를 일상의 차원에서 짐승의 그것과 차별화시켜줄 수 있는 지점 또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주목해볼 만한 지점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위상이다. 최근 인간 이외에도 도구를 비교적 정교하게 사용하는 동물들이 있음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어느 공원에 사는 새는 자신에게 던져주는 빵조각을 바로 먹지 않고 연못에 던져놓은 후에 물고기가 그것을 먹으러 오면 잡아먹는다는 사실이 밝혀질 정도로 도구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도시문명권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이라는 첨단 도구들이 주어져 있고, 이런 도구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동물들은 아직까지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지점이 도시문명권의 인간들이 자연을 몰아내면서 이루어낸 고유성의 표식이라고 말한다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쩐지 그 틈새로 쓸쓸함이 스며들어 온다.

실존(實存, existence/existenz)은 생존(生存)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생존에 한편으로 몰입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 생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유한성 같은 실존적 계기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존은 생존과 차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지닌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이 생존의 바탕 위에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존과 생존의 온전한 구분 또는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연과의 인위적 거리를 불가피하게 확보해야만 하는 도시문명권, 특히 모든 것을 상품화함으로써 그 자연에 대해서마저도 가격을 매기는 데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자본주의 문명권의 도시인은 ‘돈’으로 상징되는 생존의 수단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존의 차원을 유지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가끔씩 예고 없이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고독감 속에서 의미의 문제와 마주해야 하는 실존적 위기 속에 방치되어 있다.

생존과 의미의 문제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연결망이 주어져 있고, 그 연결망이 어느새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 있는 행운을 맞고 있는 중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경우에도 그런 행운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을 확보하고 있고, 그 결과로 전철 안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낄낄거리는 ‘이상한 모습을 지닌 외계인’이 되어버렸다. 인터넷망으로 연결되는 가상공간은 이미 그 가상(假想)의 범위를 훌쩍 넘어섰고, 자신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필수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존의 차원까지 포위하면서 오랜 시간 삶의 의미 구성의 주요 요소였던 현실공간 속의 인간관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독특하고 고유한 실존적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류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도 마주한 적이 없는 이 상황은 이전의 실존철학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대상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새로운 대안이 될 만한 패러다임이 등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이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존의 문제는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틈새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주제이고, 그 대안의 마련도 쉽게 미룰 수 없는 실천적 과제로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는 철학적 패러다임은 하이데거적인 새로운 존재론이거나 지젝(S. Jijek)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정도이다. 그 대안들이 갖는 효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수용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다른 한계에 대해서도 동시에 유념하면서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본주의적 도시 문명권에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교와 유교, 도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적 전통의 가치체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그 대안으로 자연스럽게 불교와 유교, 도교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불교와 도교의 사유구조에 더 많은 기대를 갖게 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불교와 도교가 유교에 비해 탈형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더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논의는 그중에서도 불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도교나 유교의 경우에도 그 나름의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논자 자신의 관심사라는 점과 불교의 인간관과 사회관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재해석의 가능성에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의 실존에 대한 불교적 인식

1) 실존에 대한 불교적 인식의 가능성

실존은 ‘실제로 존재함’을 토대로 삼아 펼쳐지는 개인의 체험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정의에서 ‘실재(實在)’는 대체로 각 개개인이 몸과 마음, 혹은 정신으로 느끼는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가리킨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기제는 대체로 몸이지만, 이 몸이 마음 혹은 정신과 맺는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마음 또한 중요한 기제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몸의 체험이 뇌를 통해 마음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실존의 느낌 혹은 경험은 주로 마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실존주의’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서양철학의 한 조류는 키르케고르와 니체, 사르트르, 카뮈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정착되어 세계대전 전후의 정신적 충격에 대한 해석과 대응의 사상적 배경으로 일정 부분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에게도 6^25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수입되어 한동안 유행하다가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는 보다 전문화된 서양철학적 조류의 수입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구체화된 실존철학은 이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철학사의 한 장을 이루는 정도의 위상만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목했던 철학적 주제로서의 실존 자체의 의미가 약화된 것은 아니다. 철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특정 철학적 주제의 위상 또한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지만, 최소한 그 철학이 우리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고자 하는 물음과 세계관의 정립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실존이라는 주제는 늘 살아 있어야 하는 철학의 핵심 주제일 수밖에 없다.

실존은 인간이 처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각 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오늘 한반도 남쪽에서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도 당연히 각각의 실존적 상황에 있어서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극단적인 회의로 절망감에 빠져 있을 수 있고, 그 주변의 가까운 사람은 매우 적극적이고 밝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겠지만,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자살을 앞둔 중학생 아들의 실존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일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각 개인의 실존은 기본적으로는 각 개인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불교적 관계관, 즉 연기성(緣起性)의 원리와 상당한 정도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고, 인간의 경우에도 그 연기성에 온전히 종속되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불교적 현실 인식은 우선 그러한 고립된 실존의 가능성 자체에 회의를 갖는다. 고립된 실존이 실체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이러한 연기론적 관점은 그러나 고립된 실존의 상황 속에 있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의 세계까지 온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자신과 맺어진 현실적인 관계망들이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그런 느낌들을 모두 허구적인 것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런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연기적 관계망이 허구적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각 개인의 생존이 기본적으로는 각 개인의 몫으로 돌려지는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그런 가능성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닌 실체적 진실로 느껴질 수 있고, 우리는 그들의 호소를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실체적 내용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줘야 할 의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의 고립감을 심화시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조장하거나 최소한 방조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실존은 관계망의 소실 또는 고립감의 극대화라는 배경 속에서 우리에게 그 관계망에 대한 처절한 갈망이거나 고립감 극복을 위한 몸부림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 해소의 출발점이지만, 단순히 연기성의 원리를 원론적으로 강조할 경우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러한 적극적 인식이 연기성의 원리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견뎌야 하는 인간들의 실존이 여전한 연기성의 원리 속에서 이루어짐에도 그 실존적 개인들의 체험 공간에서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지’이다.

2) 자본주의적 실존의 맹목성과 연기성(緣起性)

자본주의적 실존은 생존의 간접적 추구와 일상성으로 구체화된다. 생존의 간접적 추구는 먹고사는 문제가 돈으로 상징되는 간접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고, 일상성은 그렇게 돈으로 매개되는 일의 일상화와 의미 발견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돈을 버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한 공간의 확대가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는 중이기도 하다. 산골에서 비교적 자족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삶에도 돈으로 매개되는 국면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포함되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일상의 목표는 이제 하루하루의 노동을 감내하면서 다가올 휴일의 여유를 기다리거나 일 년에 한두 번 주어지는 휴가와 여행에 대한 기대로 현재를 유보해가며 돈을 버는 일이 되었다. 그 돈이 은행의 계좌에 새겨지는 숫자의 형태로 전환되었고, 인터넷망의 발달에 따라 그 숫자의 실체성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이러한 ‘은행 잔고를 늘려가는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 작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조차도 전문 철학자들보다는 에세이를 쓰는 소설가나 수필가의 몫이어서 저널리즘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실존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삶의 의미 문제에 대한 맹목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돈을 버는 일의 중요성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 전환된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돈을 벌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물론 운이 좋아서 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경우나 계획한 사업이 예상외로 번창해서 큰돈을 번 경우에는 일정 기간 돈 버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전혀 돈을 벌지 않고도 평생 누군가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 사람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무언가 하나가 빠진 삶이라고 보는 시선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일은 그 자체로 숭고함의 영역을 지닌다. 모든 생명에게 살아 있음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숭고한 목표이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는 것은 온전한 완결성을 지니는 미적 완성도, 즉 아름다움을 지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생명의 차원은 해결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人間, human)의 차원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서 생긴다. 자신이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도 행복감을 느끼는 특정 사람들을 상정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것조차 한시적인 일일 뿐 삶의 전 과정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런 생존의 연속에 불편함을 느끼는 존재이다. 이 명제는 삶의 과정을 고통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고타마 붓다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상징한다. 고타마의 고통(苦, dukkha)이 육체의 고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일상적 생존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불편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붓다의 고는 일상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본능적 자각과 그 자각에서 비롯되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열망의 간접적 표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생로병사와 같은 괴로움의 일차적인 양상을 설명한 후에 다시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야 하는 고통과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등 괴로움의 구체적인 양상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고성제(苦聖諦)를 말하고 있다. 그런 후에 그런 괴로움의 근원을 갈애(渴愛, tanghā)라고 규정하면서 이 갈애는 “이 세상 무엇이든지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에서 일어나 자리 잡는다.”라고 설파한다(디가 니까야 22). 이 갈애가 인간으로 하여금 윤회의 굴레로 이끌고, 갈애에 충실할수록 더 큰 고통이 우리 삶을 이끌게 된다.

윤회의 굴레는 현재적 감각으로 실존적 어둠의 터널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감각적 쾌락과 그 쾌락을 매개체로 삼는 다양한 관계들은 우리의 하루를 채워가는 구성요소들이지만, 그것이 지혜의 밝음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더 근원적인 고통의 세계로 이어지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지옥과 같은 윤회의 굴레 속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 현대문명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상인들의 삶의 양상에 대한 붓다의 성찰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일상의 맹목성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 맹목성의 현재는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고 그 끝은 삶의 의미 상실과 엄연하게 닥쳐오는 죽음에 대한 무방비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맹목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고타마는 그 길을 여덟 가지로 제시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일상에 대한 성찰과 깨침일 것이다. 그 성찰의 과정에서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일차적 현상은 당연히 우리 일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성에 대한 자각이고, 이 연기성에 대한 자각은 ‘형성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공(空)의 진리에 대한 깨침을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도 제기한 것처럼 이러한 자각과 깨침의 과정이 자본주의적 일상의 굴레에 침잠해 있는 우리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생긴다.

3. 디지털 문명의 실존 양상과 불교적 깨달음의 가능성

1) 가상공간, 가상현실, 가상적 실존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연기성에 대한 성찰과 깨침을 방해하는 외적 상황 요소는 특히 인터넷이 매개하는 가상현실과 가상공간이 일상화된 디지털 문명권에서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말 가상(假想)은 ‘virtual’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본래 ‘논리적 또는 결과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개념 역시 논리적으로나 결과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로 정의될 수 있고, 가상공간 혹은 사이버공간(또는 사이버스페이스)은 주로 컴퓨터를 매개로 삼아 이러한 가상현실을 펼쳐내는 가상적 공간이면서도 실제적인 경험의 세계를 제공하는 공간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김선희(2004)는 이러한 가상공간을 ‘컴퓨터의 매개로 생성되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컴퓨터를 통해 세계적으로 상호 연결됨으로써 형성되는 의사소통의 새로운 공간’이라는 광의로 정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공간과 가상현실이 모두 ‘컴퓨터를 매개로 삼아’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전의 가상공간이나 가상현실이 상상이나 꿈속에서 펼쳐지는 자연스러운 그것이었다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것들은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계를 매개로 해서 등장했고, 그중에서도 한 컴퓨터와 다른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그 사용자들 사이의 가상적 관계망이 확산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가상 개념의 변화는 실존의 문제에도 새로운 관점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상공간과 가상현실을 자신의 삶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들의 실존은 그럼 어떤 양상으로 변화했거나 변화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어서 철학자들의 답변보다는 영화 제작자들의 ‘가상적’ 답변이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런 대표적인 영화로 우리는 〈매트릭스〉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매트릭스〉를 보면서 우리는 액션과 특수효과에 감탄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도 혹시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기독교 영화인가, 아니면 불교 영화인가? 과연 숟가락은 없는 것일까?   
   
현대 영화의 한 장르로 이른바 공상과학 영화가 자리 잡았고, 〈매트릭스〉도 어쩌면 그런 유의 영화 중 하나로 치부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았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단지 그것이 먼 미래의 공상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이거나 조만간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될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존재함을 감각적 경험을 통해 자각하는데, 이 영화는 이 감각적 경험이 매트릭스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간섭 결과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커다란 통 속에 담긴 뇌에 불과하고 그저 전자 신호를 통해 가상의 삶을 체험하는 존재자들에 불과할 수 있다는 가설이 매트릭스가 던지는 존재론적 물음의 핵심이다.

우리 실존의 가벼움은 이른바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휴대전화 기기가 확산되면서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스마트폰은 한편으로 손바닥 안에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매개체를 올려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근사한(smart)’ 기계이지만, 한번 그 기계와 접속하기 시작하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의 상당 부분을 할애할 수밖에 없는 강한 중독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화기의 혁명적 전환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이미 휴대전화의 보편화로 사적 공간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고 있는 시점에, 훨씬 더 강력한 중독성을 지닌 스마트폰이 보급됨으로써 정보의 과잉과 그에 따른 판단력의 약화, 급속한 망각의 일상화 등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서 일반화되는 중이다.

내가 이 자리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는 오랜 시간 자신의 허벅지 등을 꼬집어보는 방법을 택해 왔다. 꼬집어서 고통이 느껴지면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곧 사실 그 자체이고 그렇지 않으면 꿈속의 일이거나 신기루 같은 환상 속의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데 우리는 오랜 시간 동의해 왔다. 그런데 컴퓨터가 매개하는 가상공간과 가상현실이 우리의 현실공간과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런 방법들이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다시 말해서 실존의 영역에 가상실존의 영역이 구분되기 어려울 정도로 덧붙여지면서 내가 지금 서 있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가 점차 모호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실존은 단지 느낌 또는 체험의 차원에서 확인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우리의 느낌을 포함하는 모든 몸의 경험세계가 뇌세포와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뇌과학의 가설들이 ‘마음은 곧 뇌다.’라는 명제와 연계되면서 뇌세포에 대한 자극과 반응의 기제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가설이 다양한 경험적 근거들에 의해 확인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실제의 실존과 가상의 실존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 꼭 그런 구분이 꼭 필요한 것인지와 같은 새로운 물음과 직면하고 있다.

2) 몸 없는 실존의 경험, 또는 공성(空性)에 대한 깨달음의 가능성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린 우리의 실존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철학적 전통은 그리 많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기반한 다양한 철학적 담론들을 그 신화적 사유의 포용성에 기대 다시 되살려볼 수 있고 하이데거(M. Heidegger) 같은 현대적 실존주의자의 존재론을 그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정교한 분석에 기대 되살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컴퓨터와 인터넷이 매개하는 가상적 실존이 일반화된 우리의 실존 상황을 얼마나 제대로 분석해낼 수 있는 틀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그들 철학과의 일정한 거리 속에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를 불교영화로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어윈(W. Irwin) 같은 철학자는 주인공 네오와 소크라테스를 대비시키면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네오는 거짓 현실에 취해 있는 인류를 구하고자 하고 소크라테스 역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아테네 사람들을 구해서 참된 진리의 세계, 즉 이데아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유비이다. 네오의 임무에 초점을 맞출 경우 이러한 유비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중요한 지향점 하나를 정확하게 잡고 있다는 긍정적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영화의 초점이 단지 여기에 맞춰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 보아야 하는 철학적 화두는 매트릭스가 보내는 전자신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하는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그렇게 전개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해명이다. 이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네오의 의무감을 먼저 내세우는 일은 오랜 시간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플라톤적 강박관념, 즉 좁은 의미의 목적론에 갇히는 한계를 드러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실존적 상황을 해명하는 데 불교철학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너무 쉽게 찾아져서는 안 된다. 불교가 디지털 문명과 친화성을 가진 종교라는 점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하고, 특히 그것이 불교철학이라는 담론체계 안에서 더 많은 장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의 불교계가 보여주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과의 교착 상태까지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수많은 전통들이 습합되면서 불교의 자연주의화, 또는 자연화된 불교(Buddhism naturalized)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도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좀 더 개관적이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상적 실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불교적 틀이 전제로 하는 불교가 구체적으로 어떤 불교인지를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참선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경전 공부도 제대로 하지 많으면서 계율마저도 자의적으로 해석해 적용하면서 자신들이 불교적 삶을 살고 있다거나 불교를 상징한다고 착각하는 한국불교계의 일부 지도자들에게서 불교는 또 하나의 초라한 치장에 불과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사한 상황에 처해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지눌의 불교를 불러낼 필요성을 느낀다. 지눌이 자신의 시대를 말법시대로 상정하지는 않았지만, 불교계가 불교를 왜곡하고 정권과 유착하여 타락할 대로 타락한 시대라는 점에서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나 지눌은 스무 살 안팎 젊은 시절부터 조사의 세계에 몸을 던져 선원을 두루 다니면서 부처님과 조사가 중생을 위해 자비로 내린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연의 고리를 쉬고 텅 빈 마음으로 깊이 계합하여 밖에서 바쁘게 구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맑히기를 허공과 같이 해야 한다.’와 같은 가르침이다.

지눌에게 불교의 요점은 모든 인연의 고리를 쉬게 하면서 텅 빈 마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찾아가야 하는 다르마의 여정이었다. 이런 사실을 경시하면서 밖으로만 구하고자 한다면 결국 더 멀리 사라질 수밖에 없고, 그런 삶은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윤회하는 가련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불교관에서 우리는 ‘텅 빈 마음[虛心]’과 ‘내면으로의 시선 복귀’라는 두 측면에 주목해볼 수 있다. 불교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의 지속적인 시선 돌리기이고, 그 과정의 깨달음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열반인 셈이다. 이런 불교관은 자연주의와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모든 현상을 물리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주의의 본령이고, 그 물리적 법칙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구체화된다. 불교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통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물리주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원인들의 물리적 특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이때의 자연주의는 좁은 의미의 물리주의에 그치지 않고 소흥렬의 정의와 같이 진리뿐만 아니라 지혜를 함께 중시하면서 정서와 마음의 논리까지 포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유의하면서 심리철학자 플래나간(O. Flanagan)은 다양한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연화된 불교를 주창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자연화된 불교란 초자연적인 전제를 배제하면서 인과법칙과 과학적 설명틀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전제 속에서 삶의 의미 문제 같은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지혜를 찾아가는 불교이다. 플래나간의 이런 시도는 물론 몇 가지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그런 불교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불교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그가 생각하는 불교 역시 미국적 전통과 접합된 ‘미국불교’의 한 유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현실 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불교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으로는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꼭 ‘자연화된 불교’만 고집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불교 안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신화적 요소와 비유는 우리의 가상적 실존을 규명해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자연주의적 요소에 주목하면서도 그 자연주의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경계심을 토대로 깔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상적 실존에 대한 불교적 해명을 시도해볼 차례이다. 불교의 존재론은 불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내포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이 해명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존재론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불교 존재론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연기성(緣起性)과 공성(空性)의 자각이라는 깨침의 가능성을 주된 골격으로 삼는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른 존재자들과의 상호의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연기성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핵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이러한 연기성의 다른 표현이자 철학으로서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공성에 대한 자각은 깨침 혹은 깨달음이라는 통로와 연결되면서 우리의 실존에 희망의 틈새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틈새는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게 본다면 연기성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는 개념틀이면서 동시에 공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인간의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로 작동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컴퓨터가 매개하는 가상적 실존은 연기성에 대한 자각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돈이라는 간접적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생존의 상황 속에서 자신과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있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소멸되어 가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인들에게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 인터넷망을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과 함께 연기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상적 실존은 한편으로 현실공간 속에서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실존감(實存感)을 약화시키지만, 다른 한편 그 실존감 자체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피부를 꼬집어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존감은 사실 몸의 한 부분에 의존하는 협소한 그것에 자신의 삶을 한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면서 매트릭스적 전자신호에 의해 확인되는 가상적 실존감이 우리 일상 속에 들어옴으로써 실존의 영역 자체가 확대되는 긍정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상적 실존감은 타자와의 관계망을 실존의 핵심 요소로 설정하는 불교적 존재론은 물론 그 안에서 삶의 의미 차원을 새롭게 펼쳐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인간관에서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이다.

불교의 인간론을 한마디로 규정짓는 일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그런 위험성을 무릅쓰고 규정해 본다면, 타자와의 의존성이라는 연기성에 기반한 무아론(無我論)과 깨침의 가능성이라는 불성(佛性)의 내재화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존재론과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는 이러한 인간론은 가상적 실존의 본질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유효성을 보여줄 수 있다. 우선 가상적 실존은 실존의 연계망을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연기성을 좀 더 수월하게 깨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가상적 실존을 확인하는 실존감은 몸으로부터의 거리를 일정 부분 전제하게 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실제적 존재감을 얼마나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존감을 실제적 존재감에 제한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인터넷망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접속하면서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이어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아직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현실 속에서 얼마나 구체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 ‘몸 없는 실존’ 또는 ‘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실존’의 경험이 연기성과 공성을 깨칠 수 있는 불교적 깨달음의 가능성을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그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 차원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연대감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의문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논의하고자 할 때 우리는 나와 타자가 이어져 있다는 불이적 관점(不二的 觀點)과 함께 그것에 근거한 자비(慈悲)의 실천이라는 실천적 요소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런데 가상적 실존의 경험이 이러한 두 가지 요소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터넷망을 전제로 하는 접속감이 불교적 관점의 연기성에 대한 자각을 훼손하면서 타자에 대한 극단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은 가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폭력에 더 많이 부각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가 부각되는 이유는 몸과 얼굴을 일정하게 감출 수 있는 익명성과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경우 한순간에 접속을 끊을 수 있는 신속한 관계 단절 가능성 등이 가상공간에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상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하는 네티즌십(netizenship)이 가상공간의 확대 속도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시민교육적 차원의 결여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가상적 실존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일정 부분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상공간과 가상현실, 그리고 가상적 실존의 확대는 레비나스적 타자성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면서 우리에게 연기성과 공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4. 실존의 새로운 지평 모색의 과제

우리의 실존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몸의 감촉에 기반한 구체적인 실존감을 바탕으로 삼아 오랜 시간 펼쳐왔던 우리의 삶에, 몸 없는 경험 또는 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자극과 그 느낌으로서 가상적 실존감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점차 우리는 매트리스적 실존의 가능성 영역으로 옮겨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 옮겨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컴퓨터와 인터넷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은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가 아닌 강제적 이주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무의미한 접속에 이미 많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당하고 있는 우리의 실존은 그런 점에서 연기적 관계망에 대한 자각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깨달음의 가능성에서 상당 부분 멀어질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그런 위험성을 직시함으로써 연기성과 공성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깨달음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긍정적 시야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나와 접속하고 있는 지구별의 타자와 공유하는 연대감이나, 지구 저편 아마존의 훼손 영상을 내 앞마당의 일처럼 생생하게 전송받을 수 있는 가능성 등이 그러한 희망의 구체적인 근거들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여전히 몸으로부터의 거리감으로 인해서 스쳐 지나가거나 꿈속의 그것처럼 희미하게 다가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익명성을 과장되게 인식하게 하여 관계망을 훼손하는 기제로 작동한 가능성 또한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에 충분히 유념하면서 우리가 실존의 디지털적 상황을 직시할 수 있다면, 타자와의 긴밀한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우리 실존의 위약성과 함께 그 연기성과 공성의 자각을 통한 삶의 의미 구현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실존은 새로운 지평을 맞고 있는 셈이고, 불교는 우선 철학으로서의 속성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그 지평을 여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하는 점은 자본주의 문명과의 접속에서 심각한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한국불교계가 그 질기고 복잡한 무명(無明)의 터널을 건너 불교철학적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때 그런 기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전주교대 교수 역임.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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