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
1.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바야흐로 스마트폰의 시대이다. 스마트폰은 기존의 인터넷 세상을 다시 한 차원 다르게 진화시키고 있다. 기존의 인터넷 사용과 스마트폰 사용의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정보전달의 즉각성이 더욱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사용자 제작 콘텐츠(UCC)’의 생산과 유통에서 그 속도와 편의성이 절대적으로 증대된 결과이다. 동일한 네트워크라고 하더라도, 그 네트워크에의 접근성에서 기존의 컴퓨터를 사용한 인터넷 접속이 제공하는 접근성과 스마트폰을 사용한 접근성은 전혀 다른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정되어 있는 플랫폼과 이동의 편의성이 극대화된 플랫폼의 차이, 특정 형식의 가공작업을 요구했던 컴퓨팅과는 달리 스마트폰은 최대한 특정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모바일(mobile)’이라는 기기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요구되었던 휴대성과 함께, 인터넷의 진전된 쌍방향성을 동시에 확보하였다는 것이, 기존의 휴대전화 및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이처럼 초기 인터넷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혹은 디지털이라는 불리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진전은 결정적으로 정보화 기술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곧 정보화 기술과 소비자의 요구가 접점을 이루어 창출한 사회라는 점에 이른바 디지털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고 할 것이다. 생산자 혹은 공급자의 의지 못지않게 소비자 혹은 수요자의 요구가 반영되어 형성된 사회라는 점 또한 디지털 사회와 이전 사회의 형성 구조에 있어서 전혀 다른 점이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사회에서는 정보의 사회적 중요성이 강조되며, 무형의 정보 및 지식이 유형의 물질이나 에너지보다 중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보처리와 관련된 기술의 발전과 정보의 가치 창조가 중시되며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지구촌(global village)화, 인공위성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초종족주의(supertri-balization), 탈대량화, 탈규격화, 탈동시화, 탈중앙집권화, 탈에너지, 서비스, 정보산업의 우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주체의 텍스트 형성에 대한 참여도 높아지는 것이 이 사회의 특성이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SNS에서 노드에 따라 한 사람의 트위터가 하루 만에 수십만, 수백만 명에게 메시지를 전달해낸다. 한 개인 한 개인이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과거보다 훨씬 신속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이 바로 디지털 미디어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의사소통의 핵심 수단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기존의 특정 조직이나 소통 통로를 경유하지 않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사회 동역학에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게 된다.

이처럼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유지와 변화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사회 안에서 개인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 역시 바꿔 놓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태이다. 디지털 정보기술이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고 또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갈 것이라 기대되는 사회 그것이 디지털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주어진 핵심은 인터넷에 있다. 인터넷은 개방적이고 극도로 단순하고 중립적으로 설계되었다. 초기 인터넷 창설자들은 소위 개방형 구조, 쉽게 말하면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형식의 인터넷을 만들어냈다. 개방적이란 인터넷이 거의 모든 종류의 네트워크와 컴퓨터에 연결될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것이고, 단순하다는 것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이든 까다로운 절차 없이 접속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며, 중립적이라는 것은 응용프로그램에 중립적이어서 이메일이나 웹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이 용이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 혁명의 출발점을 제공한 인터넷 설계자들의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쌍방향성이다. 근대 이전 사회와 근현대 사회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결정 혹은 전달 구조가 상하수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가 시민에게, 고용주가 피고용인들에게,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지식인이 대중에게 같은 단일 방향성의 구조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에게 일방적인 소통을 강요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그 의사결정 혹은 의사소통의 단일 방향성을 크게 완화시켰고, 또 부분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새로운 의사소통 구조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 및 의사결정 과정의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고 또 전제하게 된다는 점이다.

곧 의사소통의 새로운 수단으로서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성취하는 새로운 도구로서 디지털 정보기술이 주어진다는 전제하에서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 형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회로 옮아가고 있는 것인가? 디지털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은 점진적이긴 하지만 ‘그렇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그러한 것일까? 답변에 대한 긍정의 유무는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기술에 의한 의사소통의 쌍방향성과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것은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본 원고의 주제이며, 그러한 논점을 추궁하는 데 있어서 화엄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원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화엄이 지향하는 세계상(世界相)

여기에서는 먼저 화엄이 지향하는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화엄에서 말하는 의사소통 방식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른바 디지털 유토피아는 얼핏 화엄에서 말하는 무진연기세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화엄무진연기세계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화장장엄세계(華藏莊嚴世界)이자 십현문(十玄門)의 세계이며, 일즉다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상즉상입 세계이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로 말해지는 세계이다. 화장장엄세계는 “비로자나 여래가 지난 옛적 세계바다 미진수 겁 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낱낱 겁 가운데서 세계바다 미진수의 큰 서원을 청정하게 닦아서 장엄한 것”이다.

곧 비로자나불의 본원력과 보살공덕행으로 가득 찬 화장장엄세계이며, 이 화장장엄세계는 그대로 우리가 사는 중생세간(衆生世間)과 오버랩되어 있다. 화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셋으로 구분하는데,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기세간(器世間) 그리고 중생세간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기세간이라면, 그 기세간에 살고 있는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가 중생세간이며, 깨달음 곧 불보살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가 지정각세간이다. 화장장엄세계나 상즉상입의 세계, 사사무애법계로 설명되는 세계는 이 중에 지정각세간을 의미한다. 이 지정각세간에서 말해지는 세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일즉다다즉일 그리고 사(事)와 사(事)의 무애(無碍)로 말해지는 쌍방향 소통의 온전성이다.

또 하나 화엄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평등무차별성(平等無差別性)이다. 세계를 이루는 하나하나가,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가 온전한 가치를 스스로 완성하고 있어서 그 사회의 성립에 참여함에 있어서 더하고 덜함이 없다는 것이다. 흔히 주반구족(主伴具足) 주반무애(主伴無碍)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 혹은 디지털 사회는 온전한 쌍방향 소통을 달성하는 사회인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즉각적인 쌍방향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기기의 발전이 그 가능성을 이전보다 훨씬 높여 놓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현실사회에서 쌍방향 소통의 정도를 대폭 강화시킨 결과를 낳고 있다. 쌍방향 소통의 빈도와 질을 높여 놓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여전히 그것이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남는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쌍방향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것은 중생이 어떻게 지정각세간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화엄의 문제와도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아래에서 화엄이 주장하는 온전한 세계 곧 화엄법계연기의 패러다임이 실현되는 세계를 특히 소통의 문제에 초점을 두어서 살펴본다.

(1) 이때 법혜(法慧)보살께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보살의 무량방편삼매(無量方便三昧)에 들어가시었다.

(2) 삼매의 힘을 말미암아 시방의 각각 일천 부처님 세계의 티끌과 같은 수만큼 많은 세계 밖에 일천 부처님 세계의 티끌과 같은 수만큼의 부처님이 계시는데, 모두 이름이 법혜 부처님이었다. 그 법혜(法慧) 부처님들께서 법혜보살 앞에 두루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3)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능히 이 보살의 무량방편삼매에 들었구나. 선남자여, 시방의 각각 일천 부처님 세계의 티끌과 같은 수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가 위신력으로 그대에게 가피하시니, 이것은 비로자나 여래의 본원력(本願力)과 위신력(威神力)과 그대가 닦은 선근의 힘 때문에 이 삼매에 들어가서 그대로 하여금 설법하게 하시는 것이로다.”
 
〈십주품(十住品)〉 곧 보살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집에서 열 가지로 머무르는 모양을 설명하는 첫 번째 단락이다.

(1)은 이 품을 설하는 주인공인 법혜(法慧)보살이 들어가는 삼매이다. 그 삼매의 이름은 ‘한량없는 방편의 삼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한량없는가, 보살이 중생을 이끌어 부처님 세계로 인도하는 방편이 가지가지라서 한량없다는 것이다. 방편의 종류가 한량이 없다는 것은, 구제의 대상으로 삼는 중생의 종류에 한량없다는 것이며, 다시 그 각각의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의 종류에도 한량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량없는 숫자의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의 삼매에 들어갔다는 것이 첫 번째 장면의 요지가 된다.

(2)는 그러한 삼매에 들어갔을 때, 그 삼매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나는 작용의 힘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이 장면은 보살의 ‘한량없는 방편의 삼매’의 인연을 따라서 한량없는 숫자의 ‘법혜’불이 ‘법혜’보살 앞에 출현하신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리고 이때 무량방편삼매에 들어간 보살의 이름(명호)과 그 보살 앞에 출현하시는 한량없는 부처의 이름은 동일한 ‘법혜’이다. 여기에서 ‘이름이 같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같은 서원을 가지고 있고, 같은 종류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이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3)은 그렇게 동일한 ‘법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량없는 부처가 ‘법혜’보살 앞에 나타나서 가피하시는데, 그 이유는 비로자나불이 ‘본래 세운 서원의 힘’과 ‘위신력’과 법혜보살이 닦은 선근(善根)의 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비로자나불이란 법신의 부처 그 자체이다.

법신의 부처란 가르침 그 자체의 본질이며, 일체중생이 도달해야 할 지향점이자 일체중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바탕으로서 부처님이라는 의미이다. ‘왜 사는가’가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이자, 바탕이며, 도달해야 할 삶의 목표점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비로자나 법신의 부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단 그러한 삶은 개인으로서보다는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함께 성취해야만 도달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화엄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법혜’라는 보살이 ‘한량없는 방편의 삼매’에 들어갔는데, 그 삼매를 원인으로 해서 ‘법혜’라는 한량없는 부처가 등장하여 가피를 하는 것이다.

 이때 삼매는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과의 공명과 공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떤 하나의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그 원력에 공감하는 일체의 부처가 나서서 ‘가피’ 곧 힘을 더해 주어서 성취를 돕는다는 것이다. 개인이 실천하고자 하는 바와 사회가 실천하고자 하는 바가 공감을 이룰 때, 다시 말하면 소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단 그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그 공감과 소통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힘을 발휘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자의 ‘선근력(善根力)’이 그것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일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힘, 그것이 바로 선근력이다. 그리고 그 ‘선근의 힘’을 개인이 발휘할 때 개인과 사회는 소통하고 공감하는데, 그 소통과 공감의 경지를 바로 ‘삼매(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과 공감에 의해서 개인과 사회가 개인과 개인이 하나의 좋은 목표를 이루어나가도록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바로 ‘가피’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삼매와 가피의 성취는 비로자나 법신불의 본원력에 의해 성취된 세계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 세계상이란 다름 아닌 하나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하나가 되는 공감과 소통의 세계이며, 그러한 공감과 소통은 일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가 온전한 가치로서 인정되고 온전한 가치를 발휘하는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관점에 의한 동체대비력이 실현될 때만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정각세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생은 그러하지 못한데, 중생의 삶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나와 남의 구별(차별),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별(차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차별이라는 기본적 관점에서 중생세간이 경험되는 것이기에, 중생 간의 소통은 이기적인 소통을 지향하게 되고,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의 출발점이 ‘선근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서 화엄은 끊임없이 중생에게 일체의 무차별성과 그에 바탕한 동체(同體)의 관점을 체득하도록 요구하고 설득한다.

3. 디지털 세계와 현실의 괴리, 그리고 주체의 한계

초기 인터넷 창설자들이 구상했던 개방형 구조에의 지향은 최근의 웹2.0 담론으로 이어진다.

웹2.0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참여, 개방, 공유이다. 웹2.0 담론의 특징은, 첫째 ‘플랫폼으로서의 웹’을 강조하여 웹 서비스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정보를 재구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곧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웹에 접속하는 모든 사용자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짐으로써, 웹에 접속하는 모든 사용자가 정보의 생산과 유통 및 가공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UCC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둘째, 웹2.0은 집단이 참여하는 지식을 강조한다.

곧 소수 전문가에 의해 형성되고 제공되는 지식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들의 정보가 공유됨으로써 지식의 내용과 질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웹2.0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의 법칙을 무산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웹상에서는 일반 시장과는 달리 꼬리에 해당하는 나머지의 일반 상품들이 매출 증가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한다고 한다. 곧 일반적인 사회구조에서 20%의 주도 계층이 80%의 사회적 동인을 이끌어내었다면, 웹2.0의 사회적 네트워크에서는 일반의 비주도 계층에 의한 사회적 동인의 제공이 대폭 증가한다는 것이 웹2.0의 특징이다.

이러한 웹2.0의 발달은 사회 구조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데, 그 변화의 특징적인 양상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웹2.0의 발달은 우선 시민의 정치참여를 용이하게 했기 때문에 시민이 새로운 형태의 자발적인 결사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표시할 기회를 증가시켰다. 곧 인터넷으로 무장한 시민이 이제 통치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참여적 행위자로서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웹2.0은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에도 변화를 이끌어냈는데, 소비자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게 된 것이다. 곧 웹2.0의 발달로 소비자는 이전 산업사회에서와는 달리 제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직접적으로 생산자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서 생산에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역할까지도 수행하게 되었다. 이른바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프로슈머(prosumer)의 등장이다. 곧 전반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에 있어 소비자(수요자)의 역할과 권리를 확대시키는 변화가, 웹2.0 곧 정보기술의 발전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셋째, 또한 웹2.0은 시민과 시민의 관계 역시 변화시키고 있는데, UCC의 제작과 즉각적인 유통은 새로운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가상공간을 이용한 항시적이고 쌍방향적으로 소통하는 사회를 형성시키고 있다.

웹2.0 기술에 의한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여러 장점에 기초한 것이다.

우선 인터넷 혹은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은 집단행동에 드는 개인적 비용과 사회적 비용의 전반적인 감소에서 기인한다. 현실공간에서의 집단행동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사회에 있어서도 실질비용과 기회비용의 막대한 투자를 요구한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인터넷 공간은 그러한 비용의 절대적인 절감을 초래했다. 둘째, 인터넷은 무엇보다도 공간적인 제약을 초월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 간의 의사소통을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정보기술이 정보 전달의 양과 속도의 측면에 있어서 훨씬 더 우월한 수단을 제공한 것이다. 셋째,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은 사회 내의 개인과 조직들 간에 다양한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질적 변화를 초래했다. 넷째,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은 정보의 검색과 편집 및 저장을 용이하게 하여 정보유통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인터넷에 기반한 디지털 정보기술은 개인과 사회의 삶에 있어서 형식과 질, 속도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인터넷에 기반한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장점의 핵심은 ‘의사소통 방식의 변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정보기술이 발전함으로써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 간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비용의 장벽과 시간 및 공간의 제약이 현저히 낮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비용 장벽과 시간 및 공간 제약의 해소가 디지털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점이 사회구조의 새로운 변혁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하는 원천으로 작용하였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디지털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반드시 장밋빛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 못한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선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러한 전망들이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이라는 도구의 발전에만 의거한 전망이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로 인간들은 다양한 도구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사회는 큰 폭의 변화를 겪었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이 의사소통의 방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차원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는 의사소통의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디지털 유토피아론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변화는 획기적인 도구에 의하기도 하지만,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용자(User)의 변화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정보기술이 가져온 의사소통의 즉각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즉각성이란 비용적, 시간적, 공간적 제약의 극복을 의미한다. 이 즉각성이 유효성을 지니려면, 그 의사소통에 진정성과 온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많은 경우, 디지털 정보기술이 가져온 의사소통의 즉각성은 진정성과 온전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원인 중의 하나는 기존 사회의 체제로부터 오는 한계이다. 기존 사회가 디지털 정보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정보기술에 이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애초의 디지털 정보기술자들 곧 인터넷 초기 설계자들이 구상했던 대로 사회가 변화해갈 것이라는 전망이 첫 번째의 긍정적인 전망이라면, 기존의 기성 권력과 사회제도가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정보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존의 사회구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도 있다.

아쉽게도 필자의 전망은 후자가 더 우세하다. 공급자와 기성 사회구조에 의한 디지털 정보기술의 활용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인은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정보기술 사용자의 문제이다. 디지털 정보기술이 제공하는 즉각성을 권리와 의무로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익명성을 활용한 혹은 즉각성을 활용한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숱한 희생자를 너무도 쉽게 양산해내는 것은 기존의 의사소통이 제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사용자들의 무책임이 빚어내는 결과는 간혹(?) 끔찍스러울 정도이다.

필자로서는 부정적 전망이 점점 더 우세해지고 있는 기본적인 원인을 이상의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기술이 초래한 다양한 장밋빛 전망을 그대로 장밋빛 현실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4. 참여와 참여의지, 공감과 공감의 현실화

다시 화엄으로 돌아가자. 《화엄경》이 지향하는 장밋빛 전망이 바로 화엄세계이다. 그것은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서 이루어져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에 동참할 것이냐 아니냐는 개인과 사회에 달려 있다. 곧 화엄에서 말하는 비용적,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진정성과 온전성에 의한 소통은 개인의 주체적 자각과 그것에 대한 사회의 동참[사회적 자각]에 의해 획득된다. 따라서 화엄이 지향하는 지정각세간이라는 세계상, 곧 일체(一切)라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 간의 진정성과 온전성에 바탕한 즉각성의 관계라는 네트워크는 참여자[一]의 주체적 자각을 전제로 한다.

디지털 정보기술에 바탕한 웹2.0의 세계를 화엄의 세계상과 비교해보면, 비용과 시간 및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도구가 우리 현실사회 구성원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새로운 도구 하나만으로도 대단히 넓은 범위의 개인적, 사회적 변화가 예상되고 또 이미 변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새로운 도구가 초래하는 개인과 사회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단 그 변화가 긍정적일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일 것인가의 문제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User)의 문제라는 점이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인터넷 혹은 웹2.0은, 도구가 기본적으로 가치중립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초기의 설계자들이 의사소통에 있어서 개방적 구조를 지향했던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에, 향후 사회의 변화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강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기술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낼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이 설계자의 의도대로 긍정적인 전망을 현실화시킬 수 있으려면, 그것의 사용자에게도 새로움이 요구된다. 필자는 그 사용자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참여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참여의지란 것은 무엇인가?

웹2.0의 단순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정보, 지식, 요구의 생산이 어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결과를 보일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제 이전 사회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사용자가 훨씬 더 능동적으로 생산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와 지식, 요구에 반응하는 생산자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여전히 이전 사회에서 습관화된 소비자로서의 행동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사용되는 ‘웹서핑(web surfing)’은 디지털 시대 소비자들의 그러한 행동패턴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 네트워크가 현실과 온전히 부합되는 것도 아니다. 가상현실과 현실이 어느 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는가 하는 것도 역시 디지털 정보기술이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이끌 것인가의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가상현실과 현실과의 거리를 멀리 떼놓으면 떼놓을수록 가상현실은 현실과는 별개인, 현실사회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개의 공간, 별개의 네트워크로 수용되게 된다. 이 경우 사용자는 그저 소비자이자 수요자일 뿐이며, 네트워크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서 기능하게 될 뿐이다. 네트워크상에서 벌어지는 익명성을 무기로 한 다양한 부정적 결과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부정적 전망들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참여의지이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수단을 사용할 때 오는 다양한 변화와 가능성들을 고민하고 긍정적으로 사용하려는 의지를 참여의지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참여의지를 갖춘 자를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디지털 정보기술에 기반한 웹2.0의 긍정적인 결과들을 이끌어낸 주체들은 대부분 참여자로서 자신의 참여의지를 디지털 패러다임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들 참여자에 의한 참여의지가 얼마나 제대로 된 긍정적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역시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감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는 공감을 얻어내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도구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공감에의 노력은 훨씬 빨리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공감이 새로운 기술적 패러다임에 걸맞은 결과를 얻으려면, 진정성과 온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변함 없는 조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감을 현실화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화엄에서 말하는 이상적 세계상 곧 법계연기론의 세계상은 적어도 중생의 경험 범주에서는 현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정보기술이 구현하고 지향하는 세계상 역시 디지털 정보기술이라고 하는 수단에 의해서 저절로 주어지는 현실은 아니다.

화엄법계연기론은 성취될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할 세계상을 말한다. 화엄은 그 세계상이 당위인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설득한다. 설명과 설득을 통해서만이 미혹한 현실에 있는 중생의 자각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자각해야만 그 당위의 현실에 ‘공감하고 소통[三昧]’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공감과 소통으로부터 공감의 사회적 확산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정보기술은 중생 현실에 있어서 공감과 소통의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공감과 소통을 확장하는 긍정적 요소를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참여자의 참여의지에 달려 있다. 그 참여자의 참여의지가 발현되어 공감과 공감의 확산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디지털 정보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구현해내야 할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의 지향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화엄과 다르지 않다. 참여자의 선근력(善根力)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성과 온전성을 바탕으로 공감하려는 의지 가 바로 선근력이며, 디지털 정보기술이라는 새로운 의사소통 도구가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서 고민되어야 한다. ■

 

석길암 /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 주요 논저에 〈금강삼매경과 삼계교〉 〈화엄의 상즉상입설, 그 의미와 구조〉 등의 논문과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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