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부파불전과 대승불전들에서는 인간의 윤회과정을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인 4유(四有)로 설명하고 있다.

4유 중의 ‘有’는 부파불전인 《구사론》에서 ‘업(業, karma)’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이 태어나고(생유), 살아가고(본유), 죽고(사유), 그리고 죽어서 태어날 때까지(중유)의 과정들이 모두 스스로 행한 과거의 업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이다. 이와 같이 업에 의한 윤회 과정 중에서 생유인 태어남에 대해서 대승불교의 유가행파 불전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소아 5~6세의 근기를 갖추고 있는 중유(혹은 중음신)가 중유에서 벗어날 때(7일, 49일 등)가 되고, 전생의 업에 의해 가정(빈, 부)과 성(남성, 여성) 등이 결정되고, 그리고 천안(天眼)의 눈으로서 내생의 인연(전생의 아버지, 어머니, 혹은 전생의 부모)을 찾는다. 그런 다음 3가지 조건으로서 삼처현전(三處現前)인 어머니의 건강 상태^시기가 알맞고, 부모의 성행위가 있고, 중유가 갖추어지면 중유는 부모의 다른 부분은 보지 않고 남녀(즉 아버지, 어머니)의 근문(根門, 성기)만 보고 입태한다.

입태한 중유는 내생의 부모가 탐애(貪愛, 사랑)에 의해 각자 한 방울씩의 짙은 정혈(정자, 난자)을 내어 합해진 한 덩이 속에 들어가게 된다. 중유가 들어가므로 인하여 전생의 업 종자가 이숙(異熟)되어 한 생명의 인간이 탄생되게 된다. 이후 태아는 어머니의 몸 안에서 270여 일(현대의학은 280여 일)의 성장 기간을 지나 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중유의 업이 원인[因]이 되어 내생의 부모를 찾아서 입태하게 되면 부모가 조건[緣]이 되어 한 생명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고, 그리고 모태 안에서 성장하여 출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로 칭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태안에서 성장하여 10개월 후 출생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유산과 인공유산(=인공임신중절수술)의 두 가지 유형에 의해 어머니의 태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유산과 인공유산이 되더라도 《유가사지론》에서는 업 종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생유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낙태의 행위인 인공유산은 《각해일륜》(용성 저)에서와 같이 전생에 부모와 악업의 인연 때문에 이루어지고, 그리고 내생에 악업의 인연으로 또한 이어진다고 설하고 있다.

불교의 출^재가의 어느 계율에서든 맨 먼저 ‘불살생계’를 설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경^율^론 삼장들에서도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오분율》에서는 “만약 비구로서 사람이나, 사람과 비슷한 것(似人)을 스스로 죽이거나, 칼과 약을 주어서 죽이거나, 남에게 시켜서 죽이거나, 스스로 자살하거나, 죽음을 부추기거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인연으로, 그가 죽게 되면, 이 비구는 바라이죄를 얻게 되어 함께 살지 못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살생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인이 1,100만이 되고, 불교의 정서와 문화 속에 살고 있는 한국에서의 낙태는 선행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1위로 매년 150~200만 명이 인공유산되고 있다. 대략 20초에 1명씩 새 생명이 태아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있다. 그동안 불교계를 대표하는 불교계의 각 종단들, 스님들, 불교학자들, 그리고 불자들은 수많은 태아의 낙태에 대해서 얼마만큼 사려 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형법 제27장, 제269조와 제270조에서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고, 1973년 5월에 발효된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움직임에 있어서 이웃 종교인 가톨릭에서는 ‘생명 31’ 운동, 개신교에서는 ‘범기독교 생명연대’가 출범하여 낙태에 관한 ‘기독교 생명윤리선언’을, 그리고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는 ‘생명선언문’을 각각 제창하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낙태는 살태(殺胎)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사회의 외침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침묵만 하고 있었다. 오직 대한불교조계종에서 2004년에 ‘불교생명윤리위원회’가 발족되어 약 4년여간 활동하여 학술세미나를 열고 자료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위원회마저 지금은 해체되었다. 현재는 낙태금지에 관심 있는 일부 스님들만 현장에서 불교계를 대신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람들은 낙태에 대해서 반대론, 찬성론, 절충론 등으로 제각각의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낙태 당한 영혼은 현재는 어떠한 표현을 못 하지만, 미래의 가족과 사회에 수많은 언어와 행위로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아로 머물다가 낙태되어 현 생명을 잃었지만 업 종자는 다른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날 수 있고, 그리고 낙태될 때 태아의 몸은 찢겨 분리되었지만 영혼까지 해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수태되는 순간부터이다. 태아는 어머니와 독립된 인간존재이고, 그리고 그의 생명은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체는 임산부, 혹은 부모의 것, 즉,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태아는 수태되는 순간부터 성장하는 단계와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권리와 의무가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존중되어야 한다.

불교의 사상과 철학은 훌륭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훌륭한 사상과 가르침을 한국의 불교계는 사회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 즉, 불교계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에 동체대비 사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와 멀어지고 있고, 신뢰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현재 청소년의 성문화가 급속도로 개방되고 있고, 그리고 인터넷 등에 의한 성에 관련된 정보가 난립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년마다 기혼여성보다 미혼여성의 낙태율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연령층도 낮아지고 있다. 낙태금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대안들은 그동안 이미 몇몇 종교단체와 관련 위원회 등에서 제시되었다.

이제 불교계의 각 종단과 승가는 사회가 바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한 생명의 존재와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여실하고 여법하게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안을 준비하여 보살의 모습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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