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런던 하계올림픽 경기 실황을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에 푹푹 찌는 염천의 더위는 더욱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런데도 아침 일찍 숲속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건 해와 달과 바람과 물 그리고 별빛이 종합적으로 연출하는 교향시 같은 숲의 치유 효과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구기터널 입구에서 각황사로 올라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명상의 숲길이다.

언제나 이 길을 걸으면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 같고, 심호흡으로 들이마신 맑은 공기에 가슴앓이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청설모들이 나무타기 재주를 부리고, 사람들의 작은 욕심이 앗아간 도토리와 산열매를 돌려 달라는 듯 다람쥐들이 연신 오물거리며 입놀림을 반복한다. 찌든 속 때라도 씻어낼 요량으로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바가지 삼아 물을 떠 눈을 씻고 마시며 걸어 본다.

코끼리 형상의 바위를 지나면 쭉쭉 뻗은 굴참나무 숲속의 흙길이다. 맨발로 걸어도 좋은 이 흙길은 생태계의 또 다른 인식을 가져다준다. 한 숟가락의 흙 속에도 1억 5천 마리의 미생물이 있다 하니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 같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렌즈를 통해 보면, 한 숟가락의 흙속의 존재들도 그 나름의 존엄성을 지닌 경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잔흔처럼 남아 있는 일상의 매연과 매캐함을 토하느라 큰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단아한 모습의 조그만 암자가 나타난다. 탄월 스님이 쓴 ‘삼매정수선원’이란 현판을 단 ‘각황사’이다. 그 현판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삼매가 없고, 삼매가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는 가르침을 일러준다. 법당 앞의 늠름한 자태의 홍송들은 작년에 원적에 든 조실 스님을 비롯한 대중 스님들의 잘 살아가는 모습을 닮은 듯하다. 조실 스님은 근대 대강백 명봉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으셨고 직지사 강주를 지내셨던 의룡 큰스님이고, 문도의 대표는 현재 십수 년 동안 강동사암연합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 덕천 스님이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소냐가 부처님께 참문하였다. 부처님께서 소냐의 고민을 아시고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탔다는 그에게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떠하더냐?”고 묻자 그는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떠하더냐?”라는 물음에 “그때도 역시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지도 않고 너무 팽팽하게 하지 않게 잘 조율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라고 소냐는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그렇다. 마치 거문고의 줄처럼 너의 공부도 그와 같아야 한다. 정진할 때 너무 조급하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풀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러니 조급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소냐는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여기의 가르침은 모든 면에서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없는 중도의 세계를 강조한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이 곡식과 과일의 속살을 잘 익히고 있는 반면, 글로벌 경기 위축으로 인한 팍팍한 삶, 살인과 성폭행 등 불안한 뉴스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올레길도 함부로 걸을 수 없으며, 어린아이들도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토록 아픈 상처를 입은 그들과 가족들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위로하고 보듬어야 할까? 양자를 치유하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될 수 있다.

우선 함께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네모진 시멘트 공간에서 지내도록 하기보다는 넉넉한 자연의 품 안에 안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과 숲속을 함께 걸으며 자연의 원음을 듣고, 들뜨고 아픈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이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들꽃과 나뭇가지를 보거나 만져보게 하고 혹은 다람쥐를 지켜보면서 교감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편안해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지혜의 보고인 숲에는 그 나름의 향기가 독특하다. 사실, 귀를 기울이면 노송의 솔향과 청렬(淸冽)한 물소리, 바람 소리, 세월이 가는 소리를 느끼고 들을 수 있다. 숲에서 얻는 성찰은 ‘밖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에 반하는 다시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평소에 보던 숲의 단조로운 모습이 아니라 생생하게 깨어 있는 마음치유의 숲이라고 인식되는 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숲이 삼림욕의 청정해역이고 치유의 병원이라면, 나무는 의사요 꽃은 간호사이며 새들을 비롯한 뭇 야생 동식물은 합창단원일 것이다. 이들이 들려주는 무정설법은 ‘금빛 바람(金風)’으로 내 안의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다.

“명상에서 지혜가 생기고, 명상이 없으면 지혜도 사라진다.”라는 구절은 명상을 통한 지혜의 증장을 강조한 말이다. 때문에 갈 길 몰라 헤매는 사람들을 자연의 품으로 오게 하여 조급함보다는 느림의 미학을 배우게 하고, 사색을 통한 마음의 눈을 뜨게 하며, 잘 조율된 거문고라야 소리가 잘 나듯 중도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보듬게 해야 한다.

 숲속을 걸으며 사유하고 명상을 하는 데에는 유한한 인간의 현실을 훌쩍 뛰어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맑고 푸른 소리가 담겨 있기다. 그래서 오늘도 잡아함의 “진리를 깨달아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은 잠을 자도 깨어 있는 사람이고,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눈을 떴으나 자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새기면서 이 사색의 숲속 길을 걷는다. 그 끝자락에는 ‘깨달음의 황제(부처님)’께서 상주하시어 청량한 법우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